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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옷이 보여-186화 (186/231)

186화 공모전 2

테일러들이 퇴근한 뒤에도 숍에 남아 있던 우진은 자리에 남아 매튜, 세운과 대화 중이었다.

“상진이 모자가 잘 팔려서 그런 건가? 잘 있다가 갑자기 왜 디자인을 하고 싶어 하지?”

“원래 재봉하다 보면 내 마음대로 만들고 싶잖아요. 삼촌은 그럴 때 없어요?”

“하하, 몇십 년을 내 마음대로 만들어 팔아봤잖아. 난 내 한계를 알지.”

“삼촌은 그랬는데 테일러들은 시작도 안 해봤잖아요.”

세운은 조금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걱정되는 부분도 있었기에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런데 다들 디자인한다고 헛바람 들면 옷은 누가 만들어?”

“디자이너도 옷 만들잖아요.”

“야, 어떤 디자이너가…… 음…… 네가 있었지. 그럼 애들한테 디자인하는 거 알려주려고?”

“그게 문제예요. 상진이한테 알려줄 때도 그냥 조언 정도가 다였거든요. 그래서 생각해 보니까, 최 실장님처럼 다른 분들도 공모전에 참가하면 제가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더라고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세운은 감이 안 잡히는지 쉽게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리고 자신 대신 대답해 줄 수 있는 매튜를 봤다.

“음, 괜찮은 거 같습니다. 일단 디자이너가 늘어나는 게 가장 좋은 일입니다. 먼 얘기일 수도 있지만, 그렇게만 된다면 인터넷 예약은 선생님이 맡으시고 매장에 찾아오는 일반 고객은 테일러들이 맡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긴 하겠네.”

“그리고 만약 공모전에 참가해서 수상을 하게 된다면 I.J가 역시 실력 있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겁니다. 그래도 혹시 떨어질 수도 있으니 일단은 I.J 소속인 걸 밝히지 않고 참가해야겠죠?”

우진은 고개를 끄덕이다 말고 입을 열었다.

“저도 참가해도 돼요?”

“안 됩니다. 선생님은 얻으시는 것보다 잃는 게 많습니다. 이미 실력 좋기로 유명한데 탈락이라도 했다가는 I.J 전체에 타격이 옵니다. 물론 탈락하실 거란 얘기는 아닙니다.”

공모전을 가볍게 생각하고 말했던 우진은, 만약 떨어졌다가 소문이라도 나면 I.J에 그대로 돌아온다는 생각에 침을 꿀꺽 삼켰다. 괜히 위험한 일을 나서서 할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테일러분들에게 전부 다른 공모전에 참가하라고 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공모전이 그렇게 많아요?”

“아까 선생님이 말씀하신 순태 씨나, 판권 씨 같은 경우는 이제 시작하는 단계라고 하셨으니 그에 어울릴 만한 작은 공모전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다른 공모전들도 제가 한번 알아보겠습니다.”

“아, 매튜 씨 바쁘신데 그냥 각자 알아보라고 하는 게 좋을 거 같아요.”

“잘되면 숍에 도움 되는 일인데 제가 빠질 순 없죠. 대신, 선생님은 테일러분들이 거기에만 신경 쓰지 않게 조율을 해주셔야 합니다.”

우진은 매튜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 계기를 만들어주는 게 딱 정당해 보였다. 나머지는 테일러들 본인들이 선택해야 하는 일이었다.

* * *

다음 날. 점심을 먹고 작업실로 내려온 우진은 테일러들을 불러 모았다. 그러고는 매튜가 미리 준비해 준 서류철 5개를 테일러들에게 나눠줬다.

“최 실장님이 공모전 참가하시려는 건 아시죠? 그래서 혹시 다른 분들 중에도 참가하고 싶으신 분이 있을 거 같아서 준비했어요. 최 실장님은 이미 정하신 거 같아서 따로 준비 안 했고요.”

테일러들은 그제야 서류철을 내려다보더니 서로의 얼굴을 쳐다봤다.

“공모전이 엄청 많은데 대부분 로고나 생필품 막 그런 게 많더라고요. 패션에 관련된 건 몇 개 안 되고요. 일단은 전부 장신구까지 포함해서 패션에 관련된 것만 추린 거니까, 하고 싶으신 분들은 참고하세요.”

테일러들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는지 대답하지 못했다. 어차피 당장 대답을 들으려고 했던 건 아니었기에 우진은 생각할 시간을 주려고 자리를 비켜줬다.

“아, 참고로 공모전 참가하신다고 일에 지장 있으면 안 되는 거 아시죠? 그리고 공모전에 I.J 소속 이런 거 적으시면 안 돼요. 그리고 혹시나 제가 도움 될 수도 있으니까 언제든지 물어보시고요. 대신 업무 시간에는 말고요.”

우진이 자신이 할 말만 하고 가버리자 테일러들은 저마다 생각이 많은 얼굴이 되었다. 그러다가 순태가 작업실을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왜 갑자기 공모전 알려주는 거지? 어제 우리끼리 한 얘기 들었나? 여기 CCTV 있나?”

“저기 있잖아. 저건 어차피 목소리도 안 들리는데. 그런데 정말 공모전 참가해도 되는 건가?”

“왠지 하면 안 될 거 같지 않아? I.J라고 하지 말라고 그러는 거 보면 ‘어디 할 테면 해봐라’ 그 느낌이던데. 했다가 쫓겨나는 거 아니야?”

“그건 아니지. 선생님이 도와준다고도 했잖아.”

“그런가?”

다들 우진의 의도를 모르는 눈치였다. 그래도 일단은 우진이 준비해 준 서류가 궁금했는지 한 명씩 열어보기 시작했다. 안에는 캐릭터 공모전부터 패션 공모전까지, 엄청 다양한 공모전이 있었다.

“이렇게 정성들여 조사한 거 보면 정말 해도 된다는 거 같은데……?”

“그러게. 정말 해도 되나? 이장호 같았으면 말도 못 꺼냈을 텐데.”

“그러니까. 공모전에 참가해서 상 받으면 대부분 퍼블리싱 가능이 조건일 텐데.”

다들 같은 생각이었는지 고개를 끄덕거렸다. 공모전에 출품해서 상을 받게 되면 I.J와는 상관이 없는 일이 되어버리는데도 자신들을 위해서 이렇게까지 신경 써주는 게 고마웠다. 순태와 판권의 대화를 듣던 다른 테일러들도 같은 마음을 느끼고는 공모전을 담아놓은 서류철을 더 조심히 다뤘다.

그리고 각자의 작업대에서 공모전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이건 상금이 백만 원이네. 무슨 사이버대학 같은 데에서 주최하는 건데 상금이 너무 짠 거 같다.”

“순태야, 우리 팀으로 같이 낼래? 여기는 게임 캐릭터 공모전이야. 상금 백만 원이긴 한데 열 명이나 뽑아. 제출도 그냥 디자인 시안만 내면 되는데.”

“뭔데?”

순태와 판권을 필두로 테일러들은 각자에게 어울리는 공모전을 찾기 시작했다.

* * *

고객과 약속이 저녁에 잡혀, 우진은 사무실에 자리하고 있었다. 우진은 심각한 표정으로 스케치북을 보며 한숨을 뱉었다. 계기를 만들어줬다고 해도 이렇게 빨리 결정할 줄은 몰랐다. 마치 전부터 준비했던 사람들처럼 결정이 빨랐다. 그래서 기대하며 스케치를 봤는데 문제가 심각했다. 이 정도는 자신이 파슨스에 있을 때보다도 못했다.

특히, 순태와 판권. 두 사람은 스케치의 기본도 안 되어 있었다. 인체 비율은 웹툰이라도 그린 것처럼 머리가 크거나 허리가 아예 없거나 대부분 비현실적으로 그려놨고, 디자인 역시 너무 과했다. 남색으로 된 가면부터 빨간 뿔 달린 머리띠, 그리고 옷들은 전부 가죽이었다. 레깅스처럼 딱 붙는 가죽 바지와 가죽 라이더 재킷. 과해도 너무 과했다.

그동안 그림 연습을 안 했냐고 물어보니, 한 게 이 정도였다고 했다. 일단 어느 정도 실력이 되어야 조언을 해주든지 할 텐데, 기본이 너무 없었다. 결국 우진은 자신이 그림을 가르쳐 주는 것보다 다른 방법을 택했다.

“카우 씨, 한 시간씩만 부탁해요.”

“그럼 오후 말고 오전에 알려줍니다? 9시부터 10시까지? 그리고 댕한테 게임 좀 그만하라고 해주세요? 대표님 말은 듣거든요? 산책도 안 하고 하루 종일 휴대폰만 붙잡고 게임만 합니다?”

“하하, 알겠어요.”

댕이 게임에 빠진 덕분에 어렵지 않게 팟사라곤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애니메이션을 이용해서 스케치를 그리게 할 생각이었다. 처음에는 힘들겠지만, 두 사람에게는 오히려 손보다는 컴퓨터를 이용하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

이후 우진은 마저 스케치를 이어봤다. 다른 사람들은 순태, 판권과 다르게 그나마 기본은 잡혀 있는 편이었다. 하지만 어디서 한 번쯤 본 듯한 카피 제품 같은, 흔한 작품들이었다. 유진 같은 경우는 캐릭터 공모전에 참가한다고 하더니 메시지톡에서 많이 본 듯한 이모티콘을 그려놨다.

그나마 테일러 중 범찬이 가장 나았다. 디자이너를 꿈꿨던 만큼 우진이 보기에도 느낌이 좋았다. 조이클럽 공모전에서 노리는 포인트를 제대로 파악한 스케치였다. 대부분 아르바이트로 일하는 사람들이라, 쉽게 갈아입을 수 있도록 디자인한 조끼였다. 조이클럽 로고에 사용된 색인 파란색 바탕에 보라색과 하얀색을 적절히 섞었고, 유니폼인 만큼 너무 튀지도 않고 화려하지도 않게 밸런스를 잘 맞춘 디자인이었다. 다만 유니폼 조끼이다 보니 특별하다는 느낌은 없었다. 기존의 마트 유니폼에서 색만 바꾼 듯한 느낌이었다.

스케치를 모두 본 우진은 범찬을 제외한 테일러들에게는 조언할 거리도 없었기에 고민하지도 않았다. 다만 범찬에게 어떤 식으로 조언을 해야 할지 생각했다. 한참을 고민하던 우진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났다. 매장 가까이에 조이클럽도 있으니 잠깐 보고 와서 말해주는 게 더 나을 거라고 판단했다.

우진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 로비로 내려오자 준식이 다가왔다.

“어디 가세요? 스케줄 아직 많이 남았는데.”

“잠깐 편의점예요.”

“필요하신 거 말씀하시면 제가 사다 드릴게요.”

“그러지 마세요. 혹시 누가 그런 거 시켜요?”

“하하, 아닙니다. 그럼 같이 가시죠.”

준식은 크게 웃으며 우진을 따라붙었다. 우진은 매장을 나가자마자 준식이 따라붙은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다행히 기자들은 없었지만, 최근 하도 TV에 나오다 보니 편의점까지 짧은 거리를 걷는 동안에도 알아보는 사람이 상당했다. 한국 사람은 물론이고 중국인까지 자신을 알아봤다.

렌즈가 아닌 단안경을 착용한 이유도 컸지만, 지금은 단안경을 뺄 수 없었다. 우여곡절 끝에 편의점에 도착한 우진은 일단 캔 커피부터 샀다.

“윤 매니저님도 뭐 드세요.”

“커피 드시러 오신 거예요?”

“그런 건 아니고요.”

우진은 피식 웃고는 캔 커피를 들고 카운터로 향했다. 아르바이트인지 주인인지 알 수는 없지만, 직원으로 보이는 사람은 중년 여성이었다. 여성은 우진을 알아봤는지 바코드를 찍으면서 우진을 힐끔거렸다. 그사이 우진은 천천히 단안경을 올렸다. 혹시나 싶었지만 역시나 유니폼은 보이지 않았다.

“저기 팬이에요. TV보다 훨씬 잘생겼네!”

“아, 감사합니다.”

“사진 한 번만 찍어주시면 안 될까요?”

연예인도 아닌데 팬이라는 소리는 영 적응이 되지 않았다. 그렇지만 대중들의 관심을 먹고사는 건 같았기에 우진은 어색하게 웃으며 수락했다. 그러자 직원은 급하게 유니폼을 벗어 던졌다. 직원과 사진 촬영까지 마친 우진은 곧바로 편의점을 나왔다.

“저기 한 군데 더 가요.”

“편의점이요……?”

“네. 사람들이 알아봐서 그런데, 같이 좀 가주세요.”

준식은 의아해하며 우진을 따라나섰다. 사람이 많은 거리인 만큼 알아보는 사람이 더 많아졌고, 우진은 걸음을 빨리 옮겨 편의점에 도착했다.

“아, 덥다. 거기서 여기 오는데 목마르네요.”

우진은 웃으며 음료수를 꺼내왔고, 준식은 됐다며 사양했다. 이번 편의점의 아르바이트생은 젊은 남자였다. 계산을 하느라 얼굴을 마주하니 당연하다는 듯 자신을 알아봤다. 하지만 아까 편의점의 직원과 다르게 우진을 보며 머뭇거렸다. 저 눈빛을 하도 받아 어떤 눈빛인지 눈치챈 우진은 웃으며 말했다.

“사진 찍어드릴까요?”

“네!”

“그러세요.”

남자는 급하게 나오더니 사진을 찍으려다 말고 아까 중년 여성처럼 조끼를 벗어버렸다. 그 모습을 본 우진은 뭔가 감이 잡힐 것 같았다.

이곳에서 일하는 사람조차 유니폼을 부끄러워하는 것 같았다. 유니폼답게 조이클럽의 로고가 들어간 색으로 만들어진 조끼였다. 범찬의 스케치에서도 봤던 익숙한 색이었다. 그래도 색상 조합만 봐서는 이상하지 않았다.

우진은 일단 알바생과 사진부터 찍은 뒤 다시 조이클럽 유니폼을 쳐다봤다. 그러고는 잠시 생각하더니 뒤에 있던 준식을 돌아봤다.

“윤 매니저님, 오늘 스케줄 저랑 가시죠?”

“네. 저하고 이순태 테일러 배정되어 있습니다.”

“그거 지금 연락해서 최 실장님으로 좀 바꿔주세요. 그리고 죄송한데, 지금 좀 준비해서 와주실 수 있으세요? 제 거는 차에 실었으니까 스캐너만 챙겨 오시면 되거든요.”

“지금요? 7시 예약인데요?”

“알아요. 갈 데가 있거든요. 매장에 같이 가면 저 때문에 오래 걸릴 거 같으니까 이리로 좀 와주세요.”

준식은 궁금한 얼굴로 편의점을 나섰고, 편의점에 남은 우진은 편의점 직원에게 다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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