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화 테일러들 1
팟사태권을 직접 만나고 온 박 대리는 자신이 겪었던 얘기를 꺼내놓았고, 팟사태권의 정체를 알게 된 가우스는 하루 종일 축제 분위기였다. 홍보팀뿐만이 아니라 제작팀에서도 I.J에서 참여한 거냐고 확인하러 수시로 찾아왔고, ‘일레븐’에 투자한 투자사들에게서까지 연락이 왔다.
지나가는 이벤트로 기획한 공모전이 이런 행운을 불러일으킬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I.J에서 참여한 디자인으로 게임 내 아이템이 나오게 된다면 유저 유입이 늘어날 건 당연해 보였다. 그렇다면 이번 기회를 제대로 이용해야 했다.
직원들이 작성한 보도 자료를 보고 있던 팀장은 직원들에게 일일이 지시했다.
“이렇게까지 쓸 필요는 없지. I.J에 근무하는 테일러라는 말은 빼고 그냥 I.J라고만 넣어. ‘일레븐’의 공모전에 한국의 유명한 숍 I.J가 참여했다. 최고의 유명세를 떨치고 있는 숍답게 메인 캐릭터 ‘소미’에게 입혀놓은 붉은 악마 일러스트는 무척 세련되고 파격적인 디자인이다. 이런 식으로, 오케이?”
“그래도 돼요? I.J에서 고소하고 그러면 어떡해요.”
“뭔 고소를 해. 임우진이 디자인했다고 했어? 안 했잖아. 그 사람들 I.J 소속이라면서. 그냥 I.J라고 했으니까 문제없어. 그리고 거기서 항의하면 그때 수정하면 되니까 내 말대로 해. 제작팀한테 언제 업데이트 가능하냐고 연락해서 거기에 맞춰 준비하고.”
부하 직원은 약간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팀장의 말도 틀린 건 없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 * *
며칠 뒤. I.J 숍은 우진이 없는 동안 계획한 일을 진행하기 위해 평상시보다 더 바쁘게 움직였다. 하지만 일을 하면 할수록 우진의 공백이 느껴졌다.
홈페이지와 SNS에 건강상의 문제로 당분간 예약을 받지 않는다는 알림을 올렸음에도 언제부터 예약을 받는지 문의하는 글이 끝없이 올라왔다. 간혹 몇몇은 우진을 걱정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우진이 아프다는 것에 관심이 없었다. 오로지 자신들이 예약 여부만 궁금해했다. 오래 기다렸다고 화를 내는 사람도 있었고, 이때가 기회다 싶었는지 입어본 적도 없으면서 다시는 이용하지 않는다고 한 사람들까지 나왔다.
기획한 일을 SNS에 올리기 전 반응을 살피던 매튜와 세운은 그런 글들을 보며 씁쓸해했다.
“진짜 사람들하고는. 사람이 아프다는데 어쩜 저렇게 차가워. 자기들 기다릴까 봐 수술도 안 하려고 한 놈한테 못 하는 소리가 없어.”
세운을 통해 어떤 내용인지 알게 된 매튜도 굉장히 씁쓸해했다.
“확 이번 정장 판매 안 할까 보다.”
“실장님이 책임지시면 저도 동의합니다.”
“어? 아니, 그냥 말이 그렇다는 거지.”
“사실 약간 걱정은 됩니다.”
“뭐가 걱정돼?”
“다들 선생님만 찾으시는 거 말입니다. 디자이너가 디자인하고 테일러가 옷 만드는 건 보통 숍 같았으면 아무렇지도 않게 넘어갈 일인데, 그동안 선생님이 너무 열정적으로 하셔서 다들 선생님이 만들길 원합니다. 그런데 선생님이 없다 보니 생각보다 주문이 많지 않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세운도 곰곰이 생각을 하다가 이내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휴, 없으니까 확 느껴지네. 그래도 놀고 있을 순 없잖아. 올리자.”
“지금 올렸습니다.”
파란색 정장 사진과 함께 매장에서 맞춤 판매한다는 내용의 공지를 올렸다. 기존과 다르게 매장 방문에 한하여 주문을 받았고, 한정판도 아니었다. 이런 판매는 I.J에서 처음이었고, 다른 숍에서도 한 적이 없는 형태였다. 같은 디자인을 체형에 맞게 제작해 판매하는 것. 그러다 보니 희소성이 떨어져 가격도 기존보다 낮게 책정했다.
엄청난 팔로워 수답게 글을 올리자마자 댓글이 쉴 새 없이 달렸다. 공지에 올렸던 내용을 또다시 묻는 내용도 있었고, 걱정과 달리 기대된다는 댓글도 있었다. 세운이 그런 글들을 매튜에게 읽어주다가 갑자기 말을 멈췄다.
“뭐야, 이건. 아프다면서 옷도 팔고, 게임 디자인도 하고 그러냐고? 이게 뭔 개소리야.”
“그게 무슨 뜻입니까?”
“몰라, 우진이가 무슨 게임 캐릭터 디자인을 했다고. 그거 애들이 한 거잖아.”
그 뒤로도 비슷한 말들이 보였다.
-원래 게임에 빠지면 헤어날 수 없지. 갓레븐 짱짱!
“이게 뭐야?”
세운은 곧바로 검색창에 일레븐을 검색했다. 그리고 가장 위에 있던 일레븐 홈페이지를 눌렀다. 그러자 찾느라 고생할 필요도 없이 팝업창에 팟사태권의 디자인을 입은 게임 캐릭터가 보였다.
-I.J 붉은 악마 스킨. 기간 한정 특별 할인 110,000원 → 33,000원
“뭐야, 이름도 I.J인데? 매튜 이거 이대로 놔둬도 돼?”
“테일러들도 숍 소속이니까 틀린 건 아니군요. 다른 기사들은 없습니까?”
세운은 창을 닫은 뒤 기사들을 검색했다. 생각보다 기사는 많이 없었지만, 게임 커뮤니티에서는 그 얘기로 이미 시끄러운 상태였다.
-I.J스킨 이거 실화냐?
-인기 투표할 때 나 이거 뽑았음ㅋㅋ
-정말 I.J 디자이너가 공모전에 참가한 거임?
-맞다잖아. 외쳐! 갓겜!
“완전 노린 거 같은데? 사람들이 물어봐도 운영진에서 대답을 안 해준대.”
“그렇군요. 다른 기사들도 좀 보시죠.”
“다 똑같아. 이거 이렇게 내버려 둬도 돼? 애들이 한 건데 우진이가 한 걸로 오해하잖아. 그리고 무슨 문제 생기면 덤터기 쓰는 거 아니야?”
“그전에 해결해야죠. 마침 잘됐네요.”
“뭐하려고?”
“일단 전화부터 해보죠.”
매튜는 팟사라곤에게 가더니 며칠 전 봤던 박 대리라는 사람의 연락처를 받아왔다. 그러고는 세운에게 넘겼다.
“내가?”
“영어 할 줄 알면 바꿔주시면 됩니다.”
“뭐라고 그래?”
“제대로 수정해 달라고 하시면 됩니다. I.J 소속의 팟사태권 팀까지는 허용한다고 하십쇼.”
세운은 해야 할 말을 메모까지 한 뒤 전화를 걸었다.
“이틀 전에 I.J 찾아오신 분 되십니까?”
-네? 누구세요?
“I.J 실장인데요. 기사 때문에 연락드렸습니다. 기사를 좀 정확히 내보내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아, 그거요. 저희도 기사 보고 수정해 달라고 요청했는데 답이 없어요. 빠른 시일 내로 처리하겠습니다.
“아니! 그럼 그 홈페이지에 요상한 여자가 옷 입은 거에 I.J 이름 들어간 건 어떻게 설명할 겁니까?”
-아, 그건 저희 담당이 아니라서요. 번거로우시겠지만, 제작팀이나 고객 담당 부서에 문의해 보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이곳까지 찾아와놓고 책임을 다른 쪽에 넘기는 모습에 세운은 기가 막혀 헛웃음을 뱉었다. 말투는 또 왜 저렇게 친절한지, 세운은 친절한 말투가 듣기 싫다는 걸 처음 느껴봤다. 그 뒤로도 비슷한 대화가 오갔고, 정해진 매뉴얼이라도 있는 듯 같은 답변만 듣고 나서야 통화를 마쳤다.
“이 새끼들 웃긴 놈들이네. 상금도 개코딱지만큼 줄 때부터 알아봤어. 기다려 봐. 제작 부서에 전화해야지.”
“안 하셔도 됩니다.”
“왜? 해야지. 딱 봐도 알고 했다니까?”
“그쪽에서 공개 안 하면 우리가 하면 됩니다.”
“우리가? 하긴 우리가 아니라고 하면 거기서 고치겠지.”
“안 고쳐도 됩니다. 거기서 제대로 홍보했다면 번거로울 필요 없었을 텐데. 뭐 우리도 이용하면 됩니다. 우리 입으로 소문내기보다는 좀 더 큰 곳에서 소문나게 해야겠군요. 잘되면 테일러들 실력도 인정받을 수 있을 것 같네요.”
매튜가 피식 웃자 세운이 궁금한 얼굴로 물었다.
“큰 데? 방송국 같은 데 말하는 거야?”
“선생님이 안 계셔서 그건 아닙니다.
“그럼 신문사 같은데?”
“아닙니다. 저희 돈 쓸 필요 없습니다.”
“그럼?”
“조이클럽이면 꽤 큰 기업 아닙니까? 안 그래도 최 실장님하고 오후에 약속 있습니다.”
매튜의 얘기를 들은 세운은 그제야 이해된다는 듯 크게 웃었다.
“좋은데? 그럼 따로 홍보할 필요도 없겠네!”
* * *
조이클럽의 마케팅팀 정 과장은 계약 담당 부서도 아닌데 갑자기 계약 자리에 함께하게 됐다. 회사에 걸려온 전화 한 통 때문이었다. 갑자기 본사로 오기로 했던 최범찬이 바쁘다는 이유로 약속 장소를 바꿔 버렸다. 다른 경우라면 약속 날짜를 새로 잡았을 텐데 장소가 I.J였다. 그 때문에 계약 담당 부서에서 확인 전화를 시작으로 도움 요청까지 받아 이곳에 함께 자리했다.
그런데 이곳에 와보니 최범찬은 입을 다물고 있었고, 다른 사람들이 나서서 계약을 살피는 중이었다. 한 사람은 외국인이었고, 한 사람은 모델이라고 의심될 정도로 멋있어 보이는 남자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영어를 잘하는 직원을 데려올 걸 후회 중일 때, 멋있는 남자가 입을 열었다.
“MD님이 이 부분은 수정이 가능한지 물어보시네요.”
“계약 기간이요? 어떻게 말씀이신지.”
“기간을 둬야 한다고 하네요. 계약 한 번으로 인센티브도 없는데 평생을 사용하는 조건은 아니라고 합니다. 5년이면 적당하다고 하시네요.”
“네? 그 부분은 보통 다른 유니폼도 이렇게 하는데……. 유니폼 변경이 그렇게 자주 있는 경우는 아니라서…….”
표준 계약서임에도 계약서를 아주 외울 듯이 살피는 모습에, 뭔가 잘못된 게 있을까 괜히 걱정까지 됐다. 정 과장은 두 사람이 계약서를 살피는 동안 범찬을 봤다. 그런데 정작 계약 당사자인 최범찬은 관심 없다는 듯 미소만 짓고 있었다.
“그런데…… I.J에 디자이너는 한 분으로 알고 있었는데.”
범찬은 변함없이 미소만 지었고, 옆에 있던 남자가 대신 입을 열었다.
“최 실장님은 지금 준비 중이십니다.”
“아! 그렇군요! 그런데 왜 저희 공모전에 참가하셨는지…….”
“배우려고 참가하신 겁니다.”
“배우신다고요?”
“I.J에선 최 실장님뿐만 아니라 다른 직원도 공모전에 참가하고는 합니다. 항상 정장이나 캐쥬얼만 만들다 보면 사고가 좁아질까 하는 걱정에 생각해 낸 겁니다.”
“그럼 다른 공모전에도…….”
“아닙니다. 그럴 시간도 없고요. 처음이죠. 이번에 최 실장님 말고도, 다른 팀도 다른 곳에서 1등을 했더군요. 그것보다 계약금하고 아까 그 부분 말고는 다른 부분은 전부 괜찮다고 하시네요.”
정 과장은 머릿속이 빠르게 돌아갔다. 유명한 우진이라면 더 좋았겠지만, 저 두 사람이 범찬을 깍듯이 대하는 모습이나 공모전에 냈던 디자인을 봐선 이 사람도 머지않아 유명해질 것 같았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I.J에서 아무한테나 저러진 않을 것 같았다. 그러다 보니 이번 계약을 놓쳐서 안 될 것 같았다. 5년으로 계약을 한다고 해도, 보통 그 정도 기간이 지나면 한 번씩 유니폼을 교체해서 사실 크게 문제는 없었다. 단지 사소한 분쟁거리라도 사전에 없애기 위한 항목이었다.
마케팅팀 소속답게 지금 이 상황을 어떻게 홍보하는 게 좋을지 머릿속이 바쁘게 움직였다. 그때, 앞에 있던 남자가 입을 열었다.
“어떻게 하실 건지. 저희가 이번에 새로 준비하고 있는 작업을 최 실장님이 담당하셔서 시간이 많지 않으십니다.”
“아! 최대한 조율해서 빠른 시간 내에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저희가 계약하게 되면 I.J의 디자인이라고 홍보를 해도 되는지……. 아! 물론 된다면 그 부분까지 추가하겠습니다.”
“물론 안 되죠. 최범찬 실장님의 이름을 사용하셔야 합니다. I.J 이름으로 참가하신 게 아니라 개인 이름으로 참가하신 겁니다.”
“그래도 I.J 소속이신데…….”
젊은 남자가 최범찬을 보자 최범찬은 그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디자이너님이 I.J 소속까지는 괜찮다고 하시네요. I.J 소속이신 건 맞으니까 홍보하실 생각이라면 그렇게 하시면 됩니다. 참고로 다른 디자이너분이 당선된 공모전에선 I.J 디자인이라고 홍보를 해서 고소 준비 중입니다.”
정 과장은 약간 아쉽긴 했다. 하지만, 아까도 느꼈듯이 최범찬은 분명 크게 될 사람 같았다. 게다가 I.J라는 이름 하나만으로도 먹고 들어갈 게 뻔했다. 소비자들의 관심은 물론이고, 단가가 싸다 보니 편의점 점주들까지 환영할 것 같았다. 물론 단가를 더 올려서 팔 수도 있지만, 그것보다는 본사와 지점이 서로 상생하는 이미지를 보여준다면 더 많이 영업을 할 수 있었다. 그렇게만 된다면 이런 계약을 따내고 마케팅까지 계획한 자신은 임원까지 노려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제가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찾아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