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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옷이 보여-206화 (206/231)

206화 로젤리아 4

치마바지를 직접 보니 더 평범했다. 바지가 기존 치마바지보다 더 펑퍼짐한 느낌이 조금 특이할 뿐이었다. 만약에 바지가 아니라 치마였다면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치마가 하늘로 날아 올라갈 것처럼 보였다. 이리저리 살펴봤지만, 실제로 보니 약간 특이한 것 말고는 다른 걸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때 매튜가 설명을 끝냈고, 딜란이 곧바로 입을 열었다.

“로젤리아 씨는 어떻게 보셨습니까?”

평소였다면 있는 그대로 말을 했을 텐데, 상대가 딜란이다 보니 생각이 많아졌다. 게다가 저 디자인을 헤슬의 디자이너 데이비드가 만족했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

로젤리아가 명품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다지만, 개인의 평가는 언제나 제프 우드와 데이비드보다 밑이었다. 여성복 전문이라 상대적으로 좁은 시장 때문에 그런 평가를 받는 것이었지만, 로젤리아는 내심 신경이 쓰였다. 데이비드가 본 걸 자신이 못 보고 있다는 게 무척이나 자존심 상했다. 게다가 지금도 딜란이 이상한 미소를 지은 채 자신을 보고 있었다.

“I.J 고유 패턴으로 만든 건가요?”

“아! 그건 아닙니다. 이렇게 펑퍼짐한데 그럴 이유가 없죠.”

“그럼 I.J 특유의 편안함?”

“물론 편안하겠죠, 하하.”

로젤리아 이름으로 판매하게 되면 팔리기는 팔릴 것이었다. 다만 저것만으로는 부족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계약을 하고 차후에 알아보고 싶었지만, 자신의 위치상 그럴 순 없었다. 때문에 로젤리아는 함께 온 비서에게 치마바지를 넘겨줬다.

“입어봐 줄래요?”

잠시 뒤, 비서가 치마바지를 입고 나왔다. 앞에서 보면 치마처럼 보였다. 바지 위에 덧댄 천 덕분에 펑퍼짐한 느낌도 없었고, 그냥 A라인 스커트로 보였다. 그런데 뒤를 돌면 너무 펑퍼짐했다. 안에 넣어 입은 블라우스 때문에 가뜩이나 펑퍼짐한 게 더 도드라졌다. 남방도 아닌 블라우스를 치마바지 밖으로 빼 입는 건 더욱 아니었다.

로젤리아는 계속해서 비서를 살폈다. 그렇게 한참을 살피던 중 그녀는 갑자기 비서가 벗어놓은 코트를 들어 올렸다.

“잠깐 걸쳐볼래요?”

비서가 코트를 걸치려 할 때, 갑자기 딜란의 목소리가 들렸다.

“역시 로젤리아답군요.”

로젤리아는 또 무슨 꿍꿍이인가 싶어 대답 없이 딜란을 봤다. 딜란은 씨익 웃더니 매튜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매튜가 밖으로 나가더니 곧바로 재킷을 들고 왔다.

“사이즈는 안 맞을 테니 느낌만 한번 보시죠.”

딜란이 직접 비서에게 재킷을 입혀줬다. 그러고는 만족스럽다는 얼굴로 로젤리아에게도 보라는 듯 비서를 가리켰다. 로젤리아는 비서의 뒷모습을 가만히 쳐다봤다. 치마바지를 실제로 보니 뭔가 부족해서 함께 팔 수 있는 아이템을 생각했고, 지금과 같은 재킷이 떠올랐다. 그런데 이미 어울리는 재킷이 있었다.

허벅지까지 내려오는 롱 재킷은 치마와 다르게 타이트했다. 치수가 안 맞아서 그럴 수도 있었지만, 저렇게 입혀놓자 재킷 밑으로 보이는 바지가 마치 주름치마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그 주름치마 같은 모습이 밋밋해 보이는 재킷을 커버해 주고 있었다. 딱 봐도 재킷과 치마바지가 한 벌이었다.

로젤리아도 어느 정도 눈치를 챘듯이, 시간만 있었다면 지금 보고 있는 제품과 비슷한 디자인을 내놓았을 것이다. 딜란도 그럴 것을 알고 빠르게 원래 있던 한 벌을 공개한 것일 테고. 딜란의 꿍꿍이를 파헤쳤다는 생각이 들자 웃음이 나왔다.

“원래 한 벌이었군요? 안 그래도 조금 부족하다 싶었죠.”

“하하, 역시 여성복 최고 디자이너로 꼽는 이유가 있군요. 일단 사과 먼저 드리겠습니다.”

로젤리아는 피식 웃으며 딜란의 말을 기다렸다.

“I.J에 대해서 알아보고 오셨겠죠? 그럼 임우진 디자이너가 병원에 있는 것도 아시죠?”

“네, 얘기해 보세요.”

“그 임우진 디자이너가 오랜 시간 동안 고민한 디자인입니다. 그런 디자인을 아무에게나 넘겨줄 순 없었습니다. 기왕 맡긴다면 어떤 옷인지 제대로 파악하고 알아봐 줬으면 하는 바람에 본의 아니게 실례했습니다. 사실 다른 사람에게도 보여준 적은 있습니다. 하지만, 로젤리아 씨처럼 알아보진 못하더군요.”

로젤리아는 알아보지 못한 사람이 데이비드라고 생각했다. 지금까지 데이비드만 디자인의 진가를 알아본 게 아닐까 생각했는데, 반대로 자신만 알아봤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딜란 때문에 올라와 있던 화가 사그라졌다.

“재킷과 치마바지. 한 벌로 보니까 어떻게 보이십니까?”

“좋네요. 조합이 좋아요. 재킷을 슬림하게 만들어 치마를 잡아준다? 보통 재킷과 치마가 같이 가는 경우가 많은데, 조금 신선하네요. 뭐 재킷을 벗었을 때가 걱정이긴 한데 그건 사소한 문제니까요.”

“그렇죠. 옷이란 게 갖춰 입었을 때 완성되는 거 아니겠습니까? 하하.”

딜란과 로젤리아의 대화가 이어졌다. 매튜는 대화를 하고 있는 딜란을 봤다. 아무리 가족이라고 하나 이 정도까지 예상이 가능한 건가 싶었다. 딜란의 시나리오에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그대로였다.

처음 제안서를 보낸 것부터 이상했다. 정식으로 제안한 것도 아니고 로젤리아 대표의 메일로 직접 보내 버렸다. 게다가 기껏 준비했더니 제안서에서 재킷을 빼버렸다. 그러고는 로젤리아가 직접 한국으로 올 거라고 했는데, 그녀가 정말 와버렸다. 게다가 로젤리아는 딜란의 말 몇 마디로 굉장히 기분 좋은 얼굴을 했다.

딜란은 정식으로 계약해도 가능하겠지만, 최대한 빠른 시간에 최대한 많은 이득을 챙기기 위해서는 로젤리아를 직접 만나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런 계약을 맺기 위해선 자신이 필요하다고 했다. 매튜가 생각에 빠져 있을 때, 로젤리아의 입에서 계약에 대한 말이 들렸다.

“이렇게 되면 완전 OEM이나 다름없어 보이는데. 로젤리아가 공장도 아니고, 조건이 I.J에 너무 유리한 거 같은데요?”

“하하, 유리한 건 아니죠.”

“맞는 거 같은데, 우리만 손해 보는 거 같은데요?”

“아닙니다. 보시면 아시겠지만, 우리는 디자인만 넘길 뿐 일절 상관하지 않아요. 어떻게 판매하든, 얼마에 판매하든 절대로 신경 쓰지 않는다는 조건이죠.”

이것 역시 딜란의 생각이었다. 욕심이 많은 로젤리아라면 맞춤옷이 아니어도 분명히 아제슬보다 비싸게 받을 거라고 했다. 그렇게 되면 브랜딩에 비해 낮은 가격을 올리기가 편해진다. 그리고 만약에 문제가 생겨도 로젤리아가 방패막이 될 거라고 했다.

가족이란 점까지 이용하는 모습이 차가워 보였지만, I.J에 이득이 되다 보니 매튜 역시 딜란의 결정에 찬성했다. 두 사람의 공방전은 한참 계속됐다. 결국 로젤리아는 자신이 대표가 아니라는 핑계로, 로젤리아 본사에서 회의를 통해 알려준다며 마무리 지었다. 매튜는 그 말에 피식 웃었다. 저 말 역시 딜란의 예상대로였다.

계약에 대한 설명을 전부 마친 딜란은 갑자기 다리를 꼬았다.

“이제 끝났네. 로젤리아, 어떻게 한국까지 왔어?”

“뭐죠? 난 아직 안 끝났는데요?”

“하하, 반가운 거 참느라 혼났는데 좀 봐줘. 한국에서 보니까 더 반가운데?”

로젤리아는 너스레를 떠는 딜란을 보며 고개를 저었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매튜 역시 고개를 저었다. 자신에게 말은 안 했지만, 딜란의 저 행동 역시 전부 계산된 것처럼 보였다. 그러다 보니 오히려 로젤리아가 불쌍해 보였다.

* * *

우진은 매튜에게서 로젤리아가 I.J에 왔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런데 대화 대부분이 로젤리아가 아닌 딜란에 대한 이야기였다. 가족까지 이용한다느니, 피도 눈물도 없이 그저 돈 버는 기계 같다고 했다. 딜란에 대해서 단단히 오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매튜가 아니라 누가 됐더라도 오해하고도 남을 일이었다.

딜란에게서 로젤리아에 대한 얘기를 들었던 우진으로서는 당연히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느끼기에 그는 동생인 로젤리아도 굉장히 아끼고 있었다. 숍이 정확히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겠지만, 자신이 생각하기에는 아마 로젤리아도 얻는 것이 있을 것 같았다.

우진은 복잡하게 생각하기 싫다는 듯 가볍게 머리를 흔들었다. 어떻게 됐든 왼쪽 눈으로 보고 그린 디자인이 아닌 온전히 자신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었다. 아직 결과가 나오지는 않았지만, 자신의 디자인 때문에 유명한 디자이너가 한국에 왔다는 점만으로도 무척 기뻤다. 그런 생각에 우진이 웃고 있자 옆에 있던 어머니가 같이 웃으며 물었다.

“매튜 그 사람이 무슨 좋은 말 했어?”

“그런 건 아니고요. 아직 확실하진 않아서요.”

말을 이어가려던 우진은 어머니가 아들 자랑에 여기저기 말할 거라는 생각이 들어 입을 다물었다. 확실히 정해지고 나서 말해도 늦지 않았다.

“매튜하고 통화만 하면 웃네.”

“하하, 남들은 재미없다는데 전 재밌어요.”

“엄마는 사실 처음 봤을 때, 조금 그랬어.”

“왜요?”

“엄청 퉁명스럽잖아. 그래도 아들하고 잘 지내서 다행이야. 그러고 보니 벌써 이 년이 다 돼가네. 혼자 지내기 외로울 텐데. 우진이 너도 잘 챙겨줘. 그 사람, 집에는 가?”

바쁘기도 했지만, 가족이 미국에 있다 보니 거의 2년 동안 가족을 못 봤을 것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바쁘더라도 한국에 가족이 있으니 명절 같은 날에 만나곤 하는데, 매튜는 그러지 못했다. 올해 추석은 일이 바빠 아예 신경 쓰지도 못했다. 작년 추석에 직원들 가족 옷을 만들어줬을 때도 매튜만 제외됐다. 우진은 매튜에게 가장 고마워하면서도 가장 신경을 못 쓰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매튜를 생각하던 우진은 가만히 휴대폰 달력을 봤다.

‘추수감사절 얼마 안 남았네.’

* * *

다음 날, 우진은 로젤리아까지 만나게 됐다. 병원에서 배려를 해줘서인지 아니면 환자가 없어서인지 모르지만, 우진 혼자만 병실을 사용하고 있어서 유명한 사람이 방문했음에도 문제는 없었다. 다만 로젤리아와 첫 대면이다 보니 굉장히 어색했다. 딜란과 함께 올 줄 알았건만, 비서와 단둘이 찾아왔다.

할 얘기도 없어서 이제 그만 가줬으면 하는 마음이었는데 로젤리아는 계속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가끔 나오는 말도 자신이 대답하기 어려운 말들뿐이었다.

“디자인이 꽤 괜찮더라고요. 나는 당장에라도 하고 싶은데 회사에서는 아닌가 보더군요. I.J에서 내건 조건이 조금 과해요. 제작부터 마케팅까지 전부 우리가 하고 I.J는 그냥 앉아서 돈 벌겠다는 소리로밖에 안 들리더군요.”

“그건 제가 잘 몰라서요. 딜란 대표나 매튜 실장하고 얘기하는 게 좋을 거예요.”

우진은 딜란이 시킨 대로 대답했다. 우진은 대화를 할수록 딜란의 말대로 행동하는 로젤리아가 조금씩 편해졌고, 웃기기도 했다. 때문에 로젤리아라는 이름은 대단하지만, 그녀 자체는 어렵게 느껴지지 않았다.

“미안해요. 병원에 있는 사람한테.”

“아니에요. 괜찮아요.”

“그것도 병원에서 디자인한 거라고 들었어요.”

고개를 끄덕이던 우진은 속으로 웃었다. 딜란의 말대로 다른 디자인을 궁금해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미 전부 치워놨기에 보여줄 만한 게 없었다. 그때 로젤리아의 시선이 침대 옆에 놓아둔 스케치북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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