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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옷이 보여-207화 (207/231)

207화 로젤리아 5

스케치북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로젤리아의 모습에 우진은 피식 웃었다. 스케치북에는 밑그림을 그리다 만 스케치만 있었기에 봐도 상관없었다.

“병원에서 쉬라고 해서요.”

“스케치북까지 옆에 놓고 쉰다고요? 저기 컬러드 펜슬도 있는데. 내가 디자인 훔쳐갈 사람으로 보이나요?”

“그런 건 아니고요. 정말 그린 게 없어요.”

로젤리아는 당당한 얼굴로 거짓말하지 말고 보여달라는 듯 말했다. 딜란에게 어떤 사람인지 들은 후 만나서인지, 나이도 많은데 떼쓰는 것처럼 보였다. 우진은 피식 웃고는 스케치북을 넘겨줬다. 로젤리아는 정말로 보여줄 줄은 몰랐는지 살짝 놀란 듯 우진을 봤다. 하지만 궁금한 마음이 컸기에 스케치북을 펼쳤다.

“정말 없네요.”

“하하, 정말 없어요.”

우진은 거짓말을 자연스럽게 하는 스스로가 웃긴지 피식 웃었다.

“그런데 이건 뭘 그리려고 했던 거죠? 구도만 보면 그냥 그림은 아니겠고. 일렬로 세운 거보면 뭘 비교하려는 거였나요? 혹시 쇼?”

“쇼 아니에요. 그냥 그림이에요.”

“키도 제각각. 체형도 다 다르고. 그냥 그림은 아닌 거 같은데요?”

스케치북 같은 장에 여러 체형의 인체가 그려져 있었다. 작년에 혼자만 선물을 받지 못한 매튜의 가족에게 줄 옷을 구성한 스케치였다. 매튜의 가족을 실제로 본 적이 없어서 여러 가지 체형을 그려놓은 것이었다.

“매튜 씨한테 추수감사절 선물로 드릴까 해서 그린 거예요.”

“이렇게 뚱뚱하지 않던데요.”

우진은 웃으며 대략적으로 스케치한 이유를 설명했다. 그러자 로젤리아가 뭔가를 가만히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직원 가족까지 챙기는 건 우리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네요.”

“몇 명 안 되니까 가능한 거예요. 앞으로는 힘들 거 같아요.”

로젤리아는 우진을 가만히 쳐다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진이 이제 가려는 건가 생각하며 자신도 일어나려 할 때였다.

“딜란 역시 직원이죠?”

“네?”

우진은 로젤리아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이해했다. 아니나 다를까, 로젤리아는 포즈까지 취한 모습으로 입을 열었다.

“직원 차별하고 그런 건 없는 거죠? 나도 가족인데.”

우진은 어이없는 얼굴로 로젤리아를 쳐다봤다.

* * *

남편이자 로젤리아의 대표인 마이클에게 예상 판매량과 마케팅 전략에 대해서 들은 로젤리아는 다시 한번 딜란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치마바지만 보여줬다는 걸 알고 난 후엔 아직까지도 자신을 시험하냐는 마음도 들었지만, 그것이 아니었다. 조합으로 변하는 디자인을 직접 보고 나니, 자신이라면 어떻게 할지, 치마바지와 롱 재킷만이 아닌 다른 건 없을지 등등 생각이 이어졌다.

회사에서 보내온 판매 전략만 하더라도 이번을 기회라고 판단하고 있었다. 패션 업계는 기본적으로 경직되는 순간 도태되게 마련이다. 로젤리아는 도태까진 아니지만, 큰 변화 없이 현상 유지 중이었다. 우진의 디자인이 로젤리아 자체를 변화시키는 데 앞장설 거라는 판단이었다.

여러 조합을 내놓음으로써 소비자에게 선택을 하게 만들 생각이었다. 같은 치마바지에 다른 형태의 재킷. 한 벌 판매가 아니라 고객이 원하는 디자인을 직접 고를 수 있도록 하자는 의견이었다. 그렇게 되면 기본이 필요했고, 우진의 디자인이 가장 기본이 될 것이었다. 우진의 치마바지에 어울리는 재킷들이나, 우진의 재킷에 어울리는 하의까지. 거기에 더해서 우진의 디자인이 아닌 제품끼리도 서로 어울리도록 해야 했다.

그렇게 되면 I.J에서 조건으로 건 마진의 20%도 크게 부담스럽진 않았다. 모든 고객들이 우진의 디자인만 구매한다면 문제지만, 지금까지의 경험상으로는 절대 그럴 리 없었다. 그리고 우진의 디자인보다 더 좋게 만들 수 있다는 자신도 있었다. 물론 디자인을 뽑는 데 꽤 오래 걸리긴 하겠지만, 로젤리아의 디자이너들이라면 가능했다. 마이클과 회사 역시 같은 생각을 했고, 직원을 보낼 테니 계약을 확실히 하길 원했다. 봄 시즌에 판매를시작하려면 지금부터 준비를 해야 한다고 했다.

자신이 아는 딜란이라면 여기까지 생각하고 자신들에게 그런 제안을 해왔을 것이 분명했다. 분명히 로젤리아에 도움이 되는 제안이었다.

“이럴 거면 그냥 돌아오지, 왜 다른 곳에서 저러고 있는 거야.”

호텔 방 창밖을 보며 혼잣말을 뱉은 로젤리아는 말과는 다르게 안쓰러운 얼굴이었다. 우진을 만나보니 딜란에 이곳에 있는 이유를 조금 알 것 같았다. 사진으로도 봤지만, 실제로 보니 훨씬 더 어려 보였다. 유명한 디자이너치고는 너무 어린, 딱 조카 정도의 나이였다.

로젤리아 역시 조카의 꿈이 디자이너란 것을 알고 있었고, 응원하기도 했다. 그런 조카의 사고 소식을 접했을 때, 자신 역시 한동안 힘들었다. 하지만 로젤리아의 이름으로 모인 사람들 때문에 딜란처럼 물러날 수도 없었다. 딜란만큼은 아니더라도 자신도 굉장히 힘든 시기였다. 그 모든 걸 버티고 기다렸는데 로젤리아가 아닌 다른 곳을 갔다는 얘기에, 서운함을 넘어 화까지 났다.

그런데 우진을 만나고 나니 이해됐다. 자신도 조카 생각이 나서 옷까지 만들어달라고 했다. 자신도 이럴 정도이니, 딜란이라면 우진을 통해 조카인 닉을 보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냉정하게 본다면 양측 모두에게 도움이 될 것 같진 않았다. 자신도 모르게 우진에게서 닉의 모습을 찾으려 할 테고, 그건 아무리 딜란이라고 해도 조금은 드러날 것이 분명했다. 그걸 우진이 어떻게 받아들이냐는 문제가 아니었다. 시간이 지나 우진이 닉이 아니라는 현실을 깨닫는 순간이 문제였다. 교수를 하며 위태롭게 버티던 딜란이 또 무너져 버릴 수도 있었다.

그렇게 되면 딜란은 딜란대로 힘들고, 대표인 딜란이 사라져 버린 I.J는 I.J대로 힘들 게 분명했다. 모든 일을 딜란의 지시대로 했을 텐데, 당사자가 빠져 버리면 흔들리는 건 당연했다. 로젤리아 역시 무척이나 힘들었기에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서로 원망하기 전에, 서둘러 딜란을 로젤리아로 데리고 가고 싶었다.

* * *

우진은 공사 현장에 갔다가 병원에 잠시 들른 매튜에게서 로젤리아와 일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대충 들을 수 있었다. 이제는 자신 없이 돌아가는 회사 얘기를 듣는 게 익숙해졌다. 자세히 듣진 못했지만, 자신이 없어도 잘 굴러가는 숍 얘기 덕분에 마음은 상당히 편한 상태였다. 자신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는데 꼭 그렇진 않다는 걸 알고 나니 여유가 생겼다.

지금 우진에겐 숍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보다 매튜의 가족이 더 궁금했다.

“매튜 씨, 혹시 가족분들 사진 있으세요?”

“없습니다. 왜 그러십니까?”

“가족사진도 없어요?”

“선생님은 가족사진 있으십니까?”

그러고 보니 자신의 휴대폰에도 부모님 사진이 한 장도 없었다. 체형이라도 보고 스케치부터 그리려 했는데 수포로 돌아갔다. 깜짝 선물을 준비해 주고 싶었는데 체형을 알려면 아무래도 얘기를 해줘야 할 것 같았다.

“저희 부모님은 괜찮으니 쉬시죠.”

“그냥 있기 그래서 그래요. 제가 그림만 그리고 테일러분들한테 부탁하려고요.”

“지금 테일러분들 바쁩니다.”

“그러지 마시고, 집에 안 가신지도 오래됐잖아요. 작년에는 못 해드렸고요. 매튜 씨만 특별하게 해드리는 것도 아니에요. 로젤리아 씨도 만들어주기로 했거든요. 내년에는 또 한국에 계신 분들만 만들어 드릴 거고! 그렇게 할 거니까 좀 알려주세요.”

그 뒤로도 한참을 거절하던 매튜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아버지는 저랑 비슷합니다. 어머니는 170㎝ 정도 되고 조금 뚱뚱하십니다.”

매튜는 우진의 스케치북을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서 제일 뚱뚱한 사람 정도군요.”

우진이 고개를 끄덕였고, 매튜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듯 말을 이었다.

“형들이 3명에 누나 2명 있습니다.”

“네?”

다른 가족들까지 말하려는 모습에 우진은 오히려 자신이 미안해하며 막아섰다.

“이번엔…… 부모님만 하셔야 할 것 같아요. 추수감사절 얼마 안 남았잖아요.”

“알겠습니다. 그럼 형들에게는 2년 기다리라고 하겠습니다.”

“꼭 그걸 말하실 필요는.”

“농담입니다. 말로 설명하기보다는 사진을 보내달라고 할 테니 괜히 고생하지 마시고 보고 만드시죠. 그리고 아시겠지만, 새로운 디자인은 절대 안 됩니다.”

우진은 매튜를 보며 약간 놀랐다. 매튜에게서 농담이라는 말을 들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거의 2년 만에 처음이었다. 아무것도 아닌 일이지만, 조금 가까워진 것 같은 기분도 들었다. 그 뒤로 매튜는 처음에 사양하던 모습과는 정반대로 가족에 대해서 한참을 대화하고 일어났다.

매튜가 돌아간 뒤 병실에 혼자 남은 우진은 여유롭게 침대에 앉아 스케치북을 펼쳤다. 어머니도 대구 집에 들렀다가 저녁에 다시 오신다고 했으니 그때까지 시간이 많이 남았다. 다만 매튜의 가족사진이 없었기에, 들은 모습대로 밑그림을 그려볼 생각이었다.

한참 동안 펜을 잡고 있던 우진은 대상을 보지도 않고 상상만으로 그린다는 게 힘들다는 걸 새삼 느끼는 중이었다. 딱히 비교 대상도 없어서 우진은 일단 사진이 올 때까지 기다리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우진은 펜을 놓지 않았다. 그렇다고 펜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었다. 스케치북 위에 올린 손은 처음과 그대로였다.

매튜의 가족이야 사진을 보고 만들면 될 것 같은데, 딜란의 가족인 로젤리아가 문제였다. 직업이 디자이너인 데다가 유명한 브랜드의 대표 디자이너에게 옷을 선물로 준다는 게 상당히 부담스러웠다. 왜 스케치북을 보여주고 그런 얘기를 했을까 후회했지만, 이미 늦었다.

왼쪽 눈으로 보이지 않았기에 필요한 정보를 얻고 싶었는데 묻기도 꺼려졌다. 같은 디자이너로서 자신만의 방법을 보여주고 싶지 않은 마음이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고객과의 대화를 통해 옷을 만들었는데 아무런 정보 없이 그 사람만의 옷을 만드는 것도 쉽진 않았다.

한참을 고민하던 우진은 휴대폰을 들어 올렸다. 로젤리아는 유명하니 SNS에서 작은 거 하나라도 건질 생각이었다. 로젤리아 공식 홈페이지도 아닌데 사진이 엄청나게 많았다. 대부분 로젤리아의 제품 사진이었다. 로젤리아 본인의 사진이나 모델들의 사진도 간혹 보이기는 했지만, 사람이 나온 사진이 확실히 적었다.

디자인을 구경하느라 시간이 꽤 오래 걸렸다. 하지만 아직도 얼마나 많이 남았는지 봐도 봐도 끝이 없었다. 그러던 중 꽤 오래된 것처럼 보이는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First? 뭐가 퍼스트지?”

한 20살 정도일 때 사진인 듯했고, 분위기를 보면 가족 여행처럼 보였다. 그 옆에는 굉장히 젊은 딜란까지 있었다. 우진은 딜란을 보며 피식 웃고는 로젤리아를 살폈다. 이때부터 디자인에 관심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20년쯤 전이다 보니 약간 촌스러웠지만 색감 자체는 굉장히 화려했는데 상당히 잘 어울렸다. 게다가 가족과 찍어서인지 다른 사진에서 볼 수 없었던 자연스러운 미소가 보였다. 그 미소를 보던 우진도 사진처럼 씨익 웃었다.

“이게 좋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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