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9화 로젤리아 7
로젤리아는 곧바로 일어나 미용실 문을 나섰다. 로비에서 봤던 매니저가 서성이는 게 보였다. 옷을 워낙 깔끔하게 입어서 인상적이던 사람이었다.
그때, 매니저가 다가왔다.
“저 혹시 시간 되십니까?”
“음?”
매니저는 미용실 안쪽을 힐끔 보더니 입을 열었다.
“임우진 선생님이 디자인은 다 됐는데 치수가 필요하다고 하셔서요. 시간 되시면 잠시 치수 측정 가능할까요?”
로젤리아는 피식 웃었다. 단지 조카 생각이 나서 한 말이었는데 정말 준비했을 줄은 몰랐다.
“어디로 가면 되죠?”
“2층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가요.”
준식은 왠지 대표에게 들키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에 다시 한 번 문틈을 쳐다봤고, 딜란과 눈이 마주쳐 버렸다. 불안하게 자신을 보며 웃고 있는 모습에 준식은 서둘러 자리를 피했다.
한편 미용실에 남은 딜란은 계약서를 보며 웃고 있었다.
“봄 시즌에 맞춰서 공개하려면 우리하고 일한다는 걸 최대한 빨리 홍보할 테고, 그럼 I.J 이름이 저절로 올라가겠죠. 거기에 맞춰서 가우스 게임까지 홍보 시작하면 돈도 안 들이고 가만히 앉아서 브랜딩이 되는 거죠.”
“한국 속담에 공짜 좋아하면 대머리 된다는 속담 있습니다.”
“하하, 그러면 나 대머리 안 되게 돈 좀 모아놓지 그랬어요. 뭘 하려고 해도 돈이 없으니까 이런 거죠. 하하.”
매튜가 별 반응이 없자 딜란은 재미없다는 듯 시선을 돌렸다. 그러고는 열린 문틈을 봤다. 다들 내려갔는지 조용했다.
“무슨 옷을 만들까?”
매튜는 미간을 움찔거리며 딜란을 봤다. 도대체 어떻게 아는 건지 모르는 게 없었다.
“하하, 매튜 씨 가족분들은 무슨 옷 만들어준다고 그래요?”
“모릅니다. 아직 사진도 안 드렸습니다.”
“역시! 당당해. 약간 서운하잖아요. 나만 모르게 쉬쉬거리니까. 내가 뭐라고 하는 것도 아닌데. 안 그래요?”
“차라리 뭐라고 하는 게 나을 수도 있죠. 그런데 어떻게 아시는 겁니까?”
딜란은 피식 웃었다. 사람이란 참 신기한 게, 혼자만 알고 있으면 지켜지는 비밀을 꼭 다른 사람하고 공유하고 싶어 했다. 자신은 직원들의 개인사까지 알 필요 없었고, 회사에 대한 얘기만 알면 됐다. 그 정도야 로젤리아 계열사를 옮겨 다닌 경험으로 쉽게 해결할 수 있었다.
그는 딱 두 사람만 있으면 됐다. 사무실의 장 노인과, 작업실의 티에리 교수. 티에리 교수야 현재 같이 살고 있기에 문제없었다. 장 노인만 신경 쓰면 됐다. 그래서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회의를 할 때도 일부러 더 칭찬하곤 했다. 덕분에 숍에서 일어나는 일 중에 모르는 일은 없었다. 다만 우진이 로젤리아에게 어떤 옷을 주려는 것까지는 알지 못했다.
“만들기 전에 나한테 먼저 보여주고요. 팔아먹을 수 있으면 팔아먹어야죠, 하하.”
* * *
며칠 뒤. 딜란은 저녁 무렵 퇴근할 시간 즈음 준식을 통해 로젤리아가 왔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계약도 끝냈기에 자신을 만나러 왔다면 모를까, 숍에 올 일이라고는 한 가지뿐이었다. 테일러들을 통해 디자인을 미리 봤지만 그래도 로젤리아가 입은 모습이 궁금했던 그는 2층으로 내려갔다.
작업실에 내려오자마자 거울 앞에서 진한 핑크색 바지에 알록달록한 줄무늬 티셔츠를 입고 서 있는 로젤리아가 보였다. 아무리 봐도 최근 트렌드과 완전 동떨어진 디자인이었다. 유행이 지난 레트로룩이라고 해도 마니아층이 있게 마련인데 저 옷은 딱 1990년대 후반, 2000년대 초반에 유행하던 색감이었다. 아무리 좋게 봐도 절대 팔리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런데 그 옷을 입고 있는 로젤리아를 보면 또 잘 어울렸다. 로젤리아 역시 마음에 드는지 환하게 웃고 있었다.
“마음에 들어?”
로젤리아는 딜란을 힐끔 보더니 어째서인지 환하게 웃었다. 딜란은 그 미소에 오히려 당황했다.
“오빠가 말해줬어?”
“뭐가?”
“참나, 또 아닌 척하네.”
로젤리아의 반응이 색달랐다. 핀잔을 주면서도 웃고 있었다. 딜란은 로젤리아의 반응으로 봐서는 손해 볼 게 없다고 판단해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대신 옷에 대해 물었다.
“마음에 들어?”
로젤리아는 바지를 한번 보더니 약간 부럽다는 얼굴로 말했다.
“괜찮네. 왜 제프 우드하고 헤슬이 같이했는지 알 거 같네.”
“당연한 거 말고. 전체적인 디자인은 어때?”
“그냥 무난하지. 색감으로 그걸 커버한 건 인정해.”
“로젤리아에서 판매해 볼래?”
표정이 변한 로젤리아의 반응으로 보면 자신과 같은 생각처럼 보였다. 딜란은 피식 웃고는 말을 이었다.
“농담한 걸 가지고.”
로젤리아는 그럴 줄 알았다며 피식 웃었고, 딜란은 그 반응이 무척 신선했다. 말하는 거나 느낌으로 봐서는 우진의 디자인과 로젤리아의 반응이 연관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좀처럼 감이 오지 않았다. 그때, 로젤리아가 입을 열었다.
“나 내일 돌아가. 조만간 다시 오니까 그때 봐.”
“직접 홍보하러 가는 거야?”
로젤리아는 홍보한다는 말도 안 했는데 이미 알고 있는 딜란의 말에 흠칫 놀랐다. 하지만 이내 표정 관리를 하며 말했다.
“찔러보지 말지? 일 얘기 할 거면 또 전처럼 격식 갖추고 하든지. 아무튼 나중에 봐.”
로젤리아는 우진이 디자인한 옷을 입고 나갈 생각인지 그대로 코트를 걸쳤다.
“그러고 가려고?”
“옛날 기분 좀 내보려고. 나 간다.”
딜란은 궁금했지만, 웃는 표정으로 숨긴 채 로젤리아를 배웅했다. 로젤리아가 가고 난 뒤 딜란은 이유를 물어볼 생각에 급하게 테일러들을 불렀다. 그런데 다들 표정이 이상했다. 그중 준식이 대표로 질문을 했다.
“돌아가신다는데 식사라도 하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그거 때문에 그래요? 하하.”
딜란은 피식 웃었다. 로젤리아를 오랫동안 못 보게 되면 모를까 곧 다시 보게 될 것이었다. 로젤리아의 반응으로만 봐도 조만간 다시 올 것이 틀림없었다.
“다이어트 중이라서요. 하하, 그건 그렇고 디자인 좀 다시 보죠. 아, 맞다. 우리말로 해야지! 디자인 보여주자!”
범찬은 우진이 준 스케치를 그대로 건넸다. 딜란은 스케치를 보며 한참을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로젤리아의 반응을 이해할 수 없었다.
“도대체 뭘까?”
딜란은 혼잣말을 뱉었고, 그 혼잣말을 들은 범찬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레트로 생각하고 그리신 겁니다.”
“그건 아는데. 로젤리아가 왜 좋아하지?”
“그냥 옛날 생각 나서 그러신 거 아닐까요?”
“옛날 생각?”
범찬은 말보다는 직접 보여주는 게 낫다는 생각으로 로젤리아의 SNS에 들어갔다. 그러고는 우진이 보여줬던 사진을 찾아서 딜란에게 보여줬다.
“음…….”
한참이나 사진을 보던 딜란은 아무런 말 없이 다시 휴대폰을 돌려줬다. 그러고는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사무실로 향했다.
작업실에 남은 테일러들은 딜란의 반응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매일 웃고 있던 사람의 얼굴에 처음으로 당황스러움이 서린 것이다.
“사람 맞네.”
“그러게……. 그런데 왜 저러는 거야?”
“모르지. 퇴근이나 하자.”
궁금하긴 했지만, 고민해 봤자 자신들의 머리로 알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한편 사무실로 올라온 딜란은 범찬이 보여줬던 SNS를 보고 있는 중이었다.
“참 나, 이거 때문이었네.”
사진을 보고 나서야 옛 기억이 떠올랐다. 거의 30년도 더 된 사진이었다.
당시에도 자신은 경영을 하고 있었다. 대학 시절 동아리에서 만든 벤처 기업으로, 영화를 주제로 지역 잡지를 제작하는 기업이었다. 관객들의 솔직한 리뷰를 중심으로 잡지를 채웠다. 그것이 자신의 첫 번째 실패이자 마지막 실패였다.
하지만 딜란은 실패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너무 앞서간 생각이라 때가 안 맞았다. 아마 그 당시 SNS가 있었다면 분명 성공할 수 있었을 것이다.
지금 보고 있는 사진이 그때의 것이었다. 사진 속에 보이는 알록달록한 옷. 회사가 망하기 일보 직전일 때 로젤리아가 손을 보태겠다며 나서서 만든 옷이었다. 당시 자신은 결혼한 지 얼마 안 된 상태였고, 아내의 배 속에는 아들 닉이 있었다. 그렇다 보니 로젤리아의 작은 도움도 절실했다.
딜란은 옛 생각을 떠올리며 로젤리아가 입고 있는 옷을 쳐다봤다. 당시 ‘There's Something About Mary’라는 영화가 엄청난 흥행을 거두는 중이었고, 로젤리아는 주인공인 카메론 디아즈가 입은 옷을 직접 제작했다.
아무것도 아닌 자신들이 카메론 디아즈를 직접 섭외할 수 없었기에 로젤리아가 직접 옷을 만들어 입고서 사진까지 찍었다. 그 옆에 있는 자신 역시 남자 주인공을 모티브 삼아 로젤리아가 만들 준 옷이었다. SNS가 있었다면 효과를 볼 수 있었을 터였다. 하지만, 잡지를 통해서만 볼 수 있었고, 게다가 일반인이다 보니 대중들은 별 관심이 없었다. 당연히 얼마 지나지 않아 망했다.
다음에 들어간 곳이 로젤리아였다. 로젤리아는 대학을 졸업하고 작은 옷가게를 준비 중이었고, 자신은 그 작은 곳에 빌붙어 버렸다. 로젤리아의 권유이기는 했지만, 피해를 주고 싶지 않은 마음에 미친 듯이 일에 몰두했고, 점점 커져 지금의 로젤리아를 일궈냈다.
사진을 보자 그때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그때 로젤리아가 아니었다면 지금의 자신도 없었을 것이다. 딜란은 씁쓸한 얼굴을 하고선 사진을 위로 올렸다. 그러다가 로젤리아에서 처음으로 만들었던 옷이 눈에 들어왔다.
민무늬 블라우스. 옷가게를 갓 시작한 자신들은 거래처들의 먹잇감이었다. 원단은 물론이고 공장까지 모두 다 비싸게 제작한 제품이었다. 꽤 잘 팔렸지만, 지금의 I.J처럼 남는 게 없는, 그런 제품이었다. 그런데 그 제품 밑에 ‘Second’라는 글이 적혀 있었다.
분명히 로젤리아의 첫 작품이었는데 글은 ‘Second’였다. 딜란은 다시 사진을 밑으로 내렸다. 그러고는 알록달록한 옷을 입고 있는 사진을 봤다. 그 사진 밑에 ‘First’라는 글이 적혀 있었다.
‘First’까지 확인한 딜란은 스크롤을 올려가며 확인했다. 세 번째, 네 번째, 계속 숫자가 이어졌다. 딜란은 저 숫자가 의미하는 걸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전부 자신과 함께 만들었던 옷들이었다. 물론 중간에 늘어난 다른 디자이너의 제품 사진도 있었지만, 그런 사진에는 아무런 글도 없었다. 그리고 자신이 회사를 그만뒀을 때쯤부터 숫자가 멈춰 있었다.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다. 처음이야 로젤리아가 도와줬다는 사실이 고맙긴 했지만, 자신이 아니었다면 로젤리아가 이 정도까지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었다. 그렇다 보니 자신은 할 만큼 했다는 생각에 아무렇지도 않게 일을 그만뒀다. 아내와 아들을 잃은 이후 정신적으로 너무 힘든 시기였고, 마음속으로는 이 정도면 충분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세상에 혼자 남아 자신만 힘들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딜란은 로젤리아에 대한 미안함 때문에 가슴이 울렁거렸다.
그때, 로젤리아의 SNS에 새로운 글이 올라왔다. 순간 스쳐 지나가는 생각에 딜란은 급하게 글을 클릭했다. 그러자 우진이 만들어준 옷을 입은 로젤리아의 사진이 나왔다. 그리고 그 밑으로 십 년 만에 다시 글이 달렸다.
[Go back to the beginning. First aga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