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3화 변화하는 거리 4
숍으로 돌아온 세운은 우진의 얼굴을 살폈다. 상가에 대해 얘기를 하던 중 우진의 얼굴색이 변했다. 얘기하지는 않았지만, 누군가에게 미안해하는 표정으로 봐서 분명 I.J 때문에 다른 상인들이 피해를 볼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는 것이 보였다.
세운은 우진의 저런 모습이 좋기도 하지만, 걱정도 됐다. 딜란이 있으니 다행이지, 만약 그가 없었다면 계속 이사를 다녔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너무 걱정하지 마. 대표가 그러더라고. 비싼 데는 이유가 있는 거라고. 그만큼 손님이 많아지지 않을까?”
“그럼 다행이죠. 그런데 신설동처럼 그렇게 될까 봐 조금 미안해지네요.”
“거긴 손님이 오는 거리가 아니니까 그렇지.”
우진도 상황이 다르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신경이 쓰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로데오 거리에 있는 건물들이 전부 자신의 건물이 아닌 이상,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저 올라가 볼게요.”
“그래, 그래! 올라가서 아무 생각하지 말고 쉬어. 대표가 뭐 물어보면 나랑 나갔다 왔다고 하지 말고. 아, 맞다. 사무실에 네 물품들 있던데, 가져다줘?”
“뭔데요?”
“몰라. 박스에 일기장이라고 적혀 있던데?”
“나중에 가져갈게요.”
대표에게 시달릴까 봐 걱정하는 세운의 모습에 우진은 가볍게 웃고는 올라갔다. 그때 세운의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딜 다녀왔는데요?”
“어우! 깜짝이야!”
“왜 그래요? 죄지은 사람처럼.”
“죄는 무슨! 갑자기 나오니까 놀라죠.”
등 뒤에서 나타난 딜란은 실실 웃으며 층수가 바뀌는 엘리베이터를 쳐다봤다.
“어딜 다녀왔는데 저런 표정일까? 여기서 나갈 곳은 시계 매장밖에 없는데. 공사도 잘되고 있어서 문제 될 거 없고.”
딜란은 혼잣말을 하며 우진의 표정을 추측했다. 정확히 추측하는 모습에 세운은 얼굴을 찡그렸다. 그래서 한 소리 듣기 전에 먼저 시계 매장에서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그 아줌마 또 왔어요?”
“나도 처음 봤는데, 느낌이 딱 그 아줌마 같더라고요.”
“알아듣게 잘 얘기했는데도 엄청 끈질기네요. 그런데 그건 그거고, 임 디자이너 표정은 왜 저런 건데요? 이해가 안 되네. 우리가 잘못한 것도 아니고 시장경제가 그렇게 흘러가는 건 자연스러운 건데.”
딜란은 자신으로서는 우진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 * *
며칠 뒤. 로데오 거리에 들어온 로젤리아, 제프 우드, 헤슬의 동향을 살피던 매튜의 얼굴은 걱정이 묻어 있었다.
“정말 우리는 인터뷰만으로 괜찮겠습니까?”
“괜찮대도 그러네.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만 하면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Infinity 시리즈의 원조라는 무기가 있잖아요. 계속해서 그 부분만 노출시키면 됩니다. 얼마나 좋아요, 하하. 만약 제프 우드에서 조합하는 옷이 나와도 우리가 원조라는 데는 누구 하나 이상하게 볼 사람이 없죠.”
“그렇긴 해도 세 브랜드가 경쟁하는데 우리만 너무 조용히 있는 것 같아 걱정입니다. 헤슬은 AA항공 팸플릿에도 제품 광고 들어갔습니다.”
“돈도 많네. 아무튼 걱정하지 말고 우리는 인터뷰나 잘하면 돼요. 잘할 것도 없지. 그냥 하던 대로 하면 되니까.”
딜라은 전혀 걱정하지 않는 얼굴로 인터뷰를 생각하다 말고 살짝 얼굴을 찡그렸다.
“우리 임 디자이너는 아직도 주변 상가들 걱정하고 그래요?”
“네. 오늘도 이 앞에 커피숍에서 직원들 커피 주문하고 그랬습니다. 자기라도 많이 팔아줘야 한다면서.”
“하하, 참 대단하네. 아예 월세를 내주지.”
“얼마나 어려운지 알고 있어서 그럴 겁니다. 제가 한국에 와서 처음 사무실을 구할 때도 권리금? 그거 때문에 꽤 고생했습니다.”
“능력 안 되면 떨어져 나가는 건 당연한 거고.”
“그렇게만 볼 게 아닌 게, 한국은 면적이 작아서인지 임대료가 높고 그 때문에 상가들이 밀접한 거리가 망하는 경우가 몇 있었습니다. 선생님은 그 부분까지 걱정하고 있는 겁니다.”
“에이, 잘 알면서 그런 말을 해요. 이 거리가 망할 거 같아요? 저 세 브랜드가 동시에 빠져나가지 않는 이상 절대 안 망하죠. 뭐, 시민들한테 반감은 살 수 있겠네. 그건 시간이 해결해 줄 거니까. 그리고 피해가 있다고 해도 우리는 적죠. 욕은 지금도 광고 열심히 하는 세 브랜드가 먹을 테니까. 하하,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네.”
딜란은 생각만 해도 기분 좋은지 실실 웃었다. 그때, 매튜에게 로비를 책임지던 준식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Moon 매거진 장 기자 도착했답니다.”
“아, 우리 디자이너 빠?”
“네. 같이 가실 겁니까?”
“가는 게 낫죠. 또 우리 디자이너가 인터뷰 잘 못하면 대신 답변하는 게 좋을 테니. 가죠.”
딜란과 매튜는 로비로 내려왔다. 그러자 카메라를 들고 있는 기자들과 로비 직원들이 나누는 대화가 들렸다.
“로비는 촬영하시면 안 됩니다.”
“그냥 배경 한 번만 찍는다니까요.”
“I.J 규정상 1층 로비는 촬영이 금지되어 있습니다.”
“아니, 한 장만요. 빡빡하게 그러지 마시고. SNS에도 로비 사진 올라오던데.”
대화를 듣던 딜란은 피식 웃으며 장 기자와 그의 일행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하하, 1층 로비는 고객분들의 사생활 보호를 위해서 촬영이 금지되어 있죠.”
“아, 대표님. 안녕하세요. 그냥 손님들 안 나오게 찍으면 안 될까요?”
딜란은 잠시 곤란한 표정을 지었고, 매튜는 그 모습을 보며 고개를 돌려 버렸다. 딱 봐도 연기였다.
“고객분들이 곤란하니까 그건 힘들고. 이러면 안 되는데……. 3층으로 가시죠. 사실 3층 촬영도 안 되는데, 장 기자님이 I.J 기사를 매번 좋게 써주시니까. 가시죠. 제가 안내해 드리죠.”
장 기자와 일행은 서로의 얼굴을 보더니 카메라를 내려놓았다. I.J의 대표라는 사람이 직접 안내를 해준다는 말에 어깨가 으쓱해지는 기분까지 들었다.
딜란의 안내를 받아 우진의 작업실 문 앞에 선 장 기자는 짧은 복도를 보며 감탄했다. 전에 자주 가봤던 신설동 매장이나 청담동 매장과는 확연히 달라진 모습이었다. 너무 고급스러워 보이는 모습에 약간 위축이 될 정도였다.
“들어가시죠, 하하.”
딜란의 안내로 작업실로 들어오자 커다란 응접실이 보였다. 그리고 한쪽에는 통유리로 된 작업실이 있었다. 촬영과 인터뷰를 하며 수많은 작업실을 가봤지만, 이런 공간은 처음이었다. 작업실과 응접실이 함께 있는 공간. 마치 영화에서 성공한 디자이너를 표현하기 위해 과장한 작업실처럼 보였다.
그러다 작업실 안에서 깔끔한 정장을 입고 고뇌에 빠진 듯한 표정의 우진을 발견했다.
“인터뷰 있다고 말했는데도 작업 중이시군요. 하하, 잠시 기다리고 계시면 제가 알리겠습니다.”
“아니, 아니. 괜찮아요. 저 모습 좀 찍을게요.”
장 기자는 동행한 촬영기사에게 우진을 촬영하라고 지시했다. 사진을 찍는 동안 장 기자도 우진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최근 병원에서 인터뷰를 했지만, 역시 우진은 디자인을 하는 모습이 가장 잘 어울렸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을 새삼 실감했다. 고급스러워 보이는 이곳과 우진이 무척이나 잘 어우러졌다.
그때, 동행한 촬영기사가 조용하게 속삭였다.
“오중 씨, 듣던 거랑 좀 다른데요?”
“뭐가요?”
“엄청 예의 바르고 착하다고 들었는데. 표정만 봐서는 잘 모르겠는데요. 그냥 깐깐한 다른 디자이너들처럼 보이는데.”
“얘기 나눠보면 달라요. 제가 괜히 좋아하는 게 아니란 거 아실 거예요, 하하.”
장 기자는 웃으며 우진을 봤다. 지금은 인상을 쓰고 있다고 하나, 대화를 나눠보면 촬영기사도 우진이 어떤 사람이란 걸 알게 될 것이 분명했다.
그때, 우진이 펜을 놓고 기지개를 켜다가 이쪽을 발견했다. 장 기자는 반갑게 웃으며 우진에게 인사를 건넸고, 우진 역시 자신을 반갑게 맞아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자신을 본 우진의 표정은 그다지 밝아 보이지 않았다.
“뭐야, 오중 씨랑 친한 거 맞아요?”
장 기자는 조금 당황했다. 그때, 우진이 작업실을 나와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또 뵙네요.”
“아, 네. 어디 불편하신 곳이라도…….”
“아니에요. 그럼 인터뷰 시작할까요?”
“네…….”
우진의 안내로 소파에 앉은 장 기자는 약간 당황스러웠다. 친하지는 않더라도 어느 정도 친분이 있다고 생각했다. 촬영기사에게도 최근 가장 잘나가는 디자이너와 친하다며 자랑까지 했는데, 지금 우진의 모습만 놓고 보면 완전 남이나 다름없었다. 촬영기사 역시 장 기자를 보며 ‘그럼 그렇지’란 얼굴로 피식 웃고는 자신의 일을 시작했다.
인터뷰가 시작되자 장 기자는 준비한 질문을 던졌다. 자신들에게 필요한 내용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I.J 측에서 요구한 질문이었다. 거의 Infinity 시리즈에 대한 얘기가 오갔고, 우진의 대답도 막힘없이 나왔다. 다만 전과는 다르게 딱딱한 분위기로 인터뷰를 진행했다.
“지금 I.J가 있는 목동 로데오 거리가 명품 거리로 탈바꿈하는 중인데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항간에서는 로젤리아나, 헤슬, 제프 우드가 이곳에 자리한 이유가 I.J 때문이라는데 맞나요?”
그 질문에 우진의 얼굴이 약간 씰룩거렸다. 하지만 우진은 잠시 호흡을 가다듬더니 대답을 내놓았다.
“그건 아닐 거예요. 어쩌다 보니 이렇게 자리하게 됐네요.”
딜란이나 매튜가 미리 작성한 답변이란 건 알지만 정말로 틀에 박힌 듯한 답변이었다. 어느덧 준비한 질문이 바닥을 보였다.
“끝으로, 앞으로 어떤 패션이 유행할지 디자이너로서 말씀해 주신다면?”
“앞으로 많은 브랜드에서 Infinity 시리즈가 나올 거라고 예상합니다. 소비자 입장에서는 선택지가 넓어지는 장점이 있지만, 옷을 고를 때 주의하셔야 할 점이 몇 가지 있습니다. 자신한테 어울리는 옷을 찾으려면…….”
장 기자는 표정 없이 준비한 답변만 내놓는 우진을 봤다. 확실히 전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순간 처음에 방으로 들어오면서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생각했던 게 떠올랐다. 우진 역시 자리에 어울리도록 변한 건 아닐까 생각할 때, 우진의 말이 끝났다.
그 뒤로도 준비한 질문이 끝날 때까지 우진의 태도는 변하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며 장 기자는 우진이 확실히 변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과의 친분을 떠나 옷을 입을 고객을 생각하던 우진의 모습이 사라진 것만 같아 상당히 아쉬웠다. 우진과의 만남을 기대했던 탓인지, 지금 우진의 모습이 더 아쉬웠다.
“그럼 여기까지 할까요?”
“수고하셨어요.”
“그럼 저희는 이만 가볼게요. 기사 올라가면 연락드리겠습니다.”
장 기자가 촬영기사에게 일어나라고 손짓할 때, 우진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기 장 기자님.”
“네?”
장 기자는 갑자기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우진을 봤다. 그런데 우진이 고민하는 얼굴을 하더니 딜란을 쳐다봤다. 그에 장 기자도 딜란을 보자, 딜란도 자신을 보는 이유를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때, 우진이 입을 열었다.
“아까 하신 질문 중에 로데오 거리가 명품 거리로 변하고 있다는 질문 있잖아요.”
장 기자는 갑자기 지나간 질문을 다시 꺼내는 우진을 쳐다봤다.
“안 좋다고 하면 거짓말이고요. 사실 좋아요. 그런데 조금 걱정은 돼요.”
“네? 뭐가요?”
“혹시 연남동이나 경리단길 같은 경우처럼 될까 봐요.”
“젠트리피케이션 말씀하시는 건가요?”
“네. 그래서 제가…… 그 부분에 대해서 부탁드릴 말이 있어요.”
우진이 무슨 얘기를 하려는지 알아들은 딜란이 급하게 나섰다. 지금 여기서 할 얘기는 아니었다. 그때, 우진의 입이 먼저 열렸다.
“이 거리가 사람들한테 알려지면서 임대료가 올라갔다고 들었어요. 임대료가 올라간 이유에는 I.J도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그런데…… 혹시 기사 올리실 때, 이 주변 음식점이나 다른 상가들도 같이 올려주시면 안 될까 해서요. 정말 맛있는 집도 있고 괜찮은 가게들도 있거든요. 사람들이 많아지면…… 덜 미안할 거 같아서요.”
우진을 말리려던 딜란은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뱉었고, 그 얘기를 들은 장 기자는 우진이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기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