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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번째 생은 용의 딸로 삽니다-27화 (27/165)

#27화

“어? 리헨. 일어났어?”

평소 히아젤키는 리헨이 새벽 훈련에 나가 있는 동안 일어나, 훈련을 마치고 돌아올 즈음 방에서 나온다.

그런 그녀가 오늘은 리헨보다도 먼저 방을 나서고 있었다.

“히아? 어디 가?”

평소보다 일찍 일어난 히아젤키는, 옷차림도 평소와 달랐다.

어여쁜 원피스 대신, 움직이기 편한 활동복을 입은 상태였다.

그녀는 어리둥절해하는 리헨에게 다가서서 이마를 짚었다.

“열은 없네. 머리는 안 아파? 이제 괜찮은 거야?”

“응…… 나 멀쩡한데…… 어떻게 된 거야?”

혼란스러워하는 그에게 히아젤키는 차근차근 설명했다.

“미안해, 나 때문에 다쳐서. 어제 히엘이 와서 치료해 주고 갔어. 리헨은 그동안 쌓였던 수면 부족으로 엄청나게 오래 잔 거고.”

“아…….”

리헨은 계단에서 떨어진 건 꿈이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에 머리를 긁적였다.

평소와 달리 어리둥절한 느낌의 리헨은 귀여웠다. 히아젤키는 작게 웃고는 그에게 손을 뻗었다.

“자, 같이 가자.”

“어디 가?”

“어디 가긴, 훈련 가야지.”

“어? 히아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인 그에게 히아젤키는 찡긋 웃어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오늘부터 나도 같이 훈련받기로 했어.”

* * *

리헨보다 한참이나 뒤처진 히아젤키는 당연히 그와는 다른 훈련을 받았다.

기초 체력을 다지는 것부터, 검을 쥐는 법, 한 방향으로 휘두르는 법을 먼저 익히기 시작했다.

카엘은 떨떠름한 얼굴로 간혹 훈련장에 얼굴을 비추기만 하고 별다른 말이 없었다.

‘이래서 리헨이 잠을 잘 잤구나…….’

훈련을 시작한 직후 히아젤키는 깨달았다.

리헨은 그동안 정말 지쳐 쓰러지는 것에 가까운 취침을 취했다는 것을.

평소 움직이지 않던 몸을 움직이니, 온몸의 근육들이 비명을 지르는 것 같았다.

“아우…….”

엉거주춤 걸으며 제 방 침대에 쓰러진 히아젤키는 앓는 소리를 냈다.

‘꼼짝도 하기 싫다…….’

하지만 마음은 든든했다. 이렇게 스스로를 단련하면, 그 저주가 자신을 위협해도 괜찮을 것 같아서.

똑똑.

눈을 스르륵 감던 히아젤키는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다시 눈을 떴다.

“네!”

대답과 동시에 몸을 일으키던 히아젤키는 순간적으로 닥친 근육통에 다시 침대에 엎어졌다.

‘으악…… 못 일어나겠어…….’

울상을 짓는 그녀를 아는지 모르는지, 달칵 문이 열렸다.

“……히아, 근육통 때문에 많이 힘들지?”

리헨의 목소리였다.

“리헨…… 살려줘…….”

그는 저벅저벅 히아젤키에게 다가오더니 상체를 낮춰 누워 있는 그녀와 시선을 맞췄다.

“똑바로 누워봐. 찜질해 줄게.”

“찜질?”

히아젤키는 냉큼 리헨의 말대로 똑바로 누웠다.

무엇이든 그가 먼저 훈련을 시작한 만큼 더 잘 알 테니 군말 없이 따랐다.

리헨은 똑바로 누운 히아젤키의 팔과 다리에 뜨끈하게 데운 수건을 올려놨다.

“으아…… 더워…….”

“그래도 참아. 온찜질이 근육통에는 좋으니까.”

“헤헤…….”

배시시 웃는 히아젤키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리헨은 침대에 걸터앉으려다 근처에서 의자를 끌어와 앉았다.

온찜질을 하니 뜨끈뜨끈하니 온몸이 풀어졌다.

입을 헤- 벌리고 흐물거리는 히아젤키를 가만히 응시하는 리헨의 얼굴은 생각에 잠긴 듯 보였다.

“……히아.”

“웅- 왜?”

온찜질로 근육을 풀어주니 잠이 솔솔 왔다.

뭉개진 히아젤키의 발음에 리헨은 살짝 입술을 물었다 놓았다.

감정을 감추려는 듯이 시선을 이리저리 굴렸다가, 이내 손바닥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왜, 검술을 배우겠다고 했어?”

“응?”

“……내가…… 지켜주겠다고 했었잖아…….”

눈을 감았던 히아젤키는 반짝 눈을 떴다.

리헨은 어쩐지 서운해하는 듯한 표정으로 이쪽을 응시하다, 그녀가 눈을 뜨니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안 지켜줄 거야?”

“……지켜줄 거야.”

“그런데 왜?”

“내가…… 지켜주는 거면, 히아가 검술을 배울 필요는 없잖아.”

히아젤키는 팔과 다리에 올려놓은 수건을 치울 생각이 없는 듯 꼼짝 않고 고개만 돌렸다.

“넌 만약에, 네가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에 내가 다치면 어떨 것 같아?”

“…….”

“……나, 이번 생은 오래 살고 싶어.”

작게 덧붙여진 그녀의 중얼거림에 리헨은 고개를 기울였다.

“응?”

“아니야. 그리고 나, 네가 나 때문에 다치는 것도 싫어…….”

“난 히아가 힘든 훈련을 받는 게 싫어…….”

두 아이는 서로 입술을 비죽이며 울상을 지었다.

마치 서로 양보할 수 없는 부분인 듯, 똑같은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방안엔 잠시 침묵이 맴돌았다.

먼저 그 고요를 깨트린 건 히아젤키였다.

“리헨.”

“응?”

“내가 강해지는 게 싫어?”

“……아니.”

그녀의 물음에 잠시 고민하던 리헨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강해지기까지 그 힘든 과정을 네가 겪는 게 싫어.”

“그래도 난 강해지고 싶어.”

“…….”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 건 싫어. 나, 이번에는 고집부릴래.”

리헨은 속상한 듯이 시선을 떨어뜨린 채 아무런 말이 없었다.

찬성하고 싶지는 않지만, 반박할 말이 없는 듯했다.

그녀가 강해지는 것이 싫은 게 아니라, 거기까지 도달하는 힘든 과정이 싫은 것이었다. 하고 싶다니 말리고 싶지 않다가도, 다치거나 아플 것을 생각하면 뜯어말리고 싶었다.

“아, 좋다. 힘들면 이렇게 네가 찜질해 주면 되잖아. 그럼 나 괜찮아.”

“……정말?”

“응. 찜질하니까 좋아.”

배시시 웃는 히아젤키를 보니 리헨의 입매가 실룩거렸다.

그의 표정이 풀어진 것을 확인한 히아젤키는 다시 눈을 감았다.

몸을 혹사한 탓에 졸음이 쏟아지는 것이 느껴졌다.

히아젤키는 확신을 가지고 싶었다.

‘……이 행복이 오래 지속되도록.’

고된 훈련을 받는 것도, 그것을 못마땅하게 살피는 카엘도, 걱정하는 리헨도. 모든 것이 만족스러웠다. 이토록 삶이 즐거웠던 적이 없었다.

“여름 축제…… 기대된다.”

곧 카엘이 허락했던 도시의 여름 축제 날짜가 다가온다.

“……그러게.”

작게 수긍한 리헨은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금세 식어버린 수건을 치우며 다시 데워오겠다며 방을 나서는 뒷모습을 끝으로, 버텨내지 못하고 잠이 들었다.

* * *

여름 축제가 제일 화려하기로 소문난, 바이에른.

카엘은 이왕 허락한 것이니 보여줄 것이라면 가장 좋은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래서 그들은 여름 축제를 보낼 장소로 바이에른을 골랐다.

사람들이 몰릴 테니 미리 가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히아젤키의 우려에도 카엘은 축제 당일이 되기까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걱정으로 안절부절못했지만, 당일이 되니 그 이유를 알 수가 있었다.

‘용님이었지, 그러고 보니까…….’

누가 축제에 갈 것이냐고 묻는 카엘에게 대부분의 하녀들과 하인들은 고개를 저었다.

그래서 결국 바이에른까지 오게 된 것은 리헨과 오윈, 유리와 알버트 뿐이었다.

카엘의 손을 붙든 히아젤키는 더없이 즐거워 보였지만, 카엘은 굉장히 심기가 불편해 보였기에 다들 동행하기를 꺼린 탓이다.

물론 리사는 함께하고 싶어 했지만 집사가 동행하니 하녀장까지 성을 비울 수는 없었다.

히아젤키는 거대한 검은 용이 된 카엘의 등에 타는 걸까, 내심 기대했었다.

물론 마법으로 이동한 것도 그것과 비슷할 정도로 신기한 경험이었지만.

“와아!”

온 도시를 장식한 화려한 건물들을 보며 히아젤키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한쪽에는 카엘, 다른 손에는 리헨의 손을 붙든 상태였다. 히아젤키는 지난 생들을 통틀어서도 이렇게 화려한 곳을 본 적이 없었다.

건물 여기저기에 알록달록한 장식들이 매달려 있었고, 사람들도 활기가 넘쳤다.

‘아, 좋다.’

하늘은 맑았고, 날씨도 북쪽 땅을 벗어난 탓에 따뜻했다.

웃음이 가득한 사람들을 보고 있자니, 절로 웃음이 났다. 이토록 모두의 기분이 좋아지는 곳에 온 적이 없었다.

‘다른 세상 같네.’

지난 삶들에서는 정말, 아무것도 경험하지 못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늘 집에 갇혀 있다시피 지내거나, 사람이 없는 산속을 지났던 것이 전부였던 것 같았다.

“히아?”

과거를 떠올리며 잠시 딴생각에 빠졌던 히아젤키는 리헨의 부름에 정신을 차렸다.

“응?”

“왜 그래? 어디 아파? 근육통?”

“히아, 어디 아픈 것이냐? 훈련이 힘들어 검술을 그만두고 싶지는 않고?”

상태를 묻는 척하며 은근슬쩍 다른 것까지 묻는 통에, 히아젤키는 슬쩍 카엘을 흘겨보아야 했다.

“아니! 아니요! 저 엄청 괜찮아요!”

“……그래.”

떨떠름한 얼굴이었지만, 그래도 카엘은 순순히 넘어가 주었다.

그런 그가 우스워, 배시시 웃은 히아젤키는 두 사람의 손을 꼭 붙들고 바이에른의 거리를 걸었다.

꽃을 늘어놓고 팔기도 하고, 장식품을 팔거나 인형도 팔았다.

꽃을 늘어놓은 곳으로 다가선 히아젤키는 물기를 머금은 꽃들을 구경하며 말했다.

“지엘도 함께 왔으면 좋았을 텐데…….”

“필요 없다.”

“왜요, 지엘도 이런 거 좋아할 텐데.”

“그놈이 있으면 피곤해. 없는 게 낫다.”

“난 지엘이 좋은데.”

“……나냐, 그놈이냐.”

유치한 질문에 입을 떡 벌린 히아젤키는 새침한 얼굴로 리헨의 손을 잡아끌었다.

“우리 저쪽으로 가 보자!”

“히아, 대답하고 가라.”

덥석 붙드는 카엘의 손에 그녀는 곤란한 얼굴로 입술을 비죽였다.

계단에서 굴러, 리헨이 다친 이후로 히아젤키의 태도는 미묘하게 변했다.

헤실헤실 웃기만 하고, 포기가 빠르고, 무엇이든 두 번 권하지 않았던 그녀는 이제 슬금슬금 고집도 부리고, 투정도 부릴 줄 알게 되었다.

‘둘 다 좋은데…….’

누구 한 명 콕 집어 고르자니 히아젤키는 매우 곤란했다.

대답이 돌아오지 않으니 카엘의 표정이 점점 찌푸려졌다.

“왜 대답하지 못하지?”

“그야…….”

결국 한숨을 폭 내쉰 히아젤키는 다시 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는 열심히 손짓하기에 카엘이 자세를 낮췄다.

“파파가 좋아요.”

그날 이후로 다시 ‘아빠’ 대신 ‘파파’라고 부르고 있었지만, 카엘은 얌전히 있었다.

언젠가 알아서 부르겠지, 가 그가 내린 결론이었다.

행여 누가 들을까, 카엘의 귓가에 작게 속삭인 히아젤키는 다시 몸을 빙글 돌렸다.

“가자!”

그리고는 부끄러운지 귀 끝을 붉게 물들이며 리헨의 손을 붙잡고 달려나갔다.

그제야 입매가 풀어지며 픽 웃은 카엘은 둘을 따라서 천천히 걸었다.

“왜 그래요, 오윈 님?”

카엘을 뒤따르던 유리가 주변을 살피는 오윈에게 물었다.

“아뇨, 그냥…… 꽤 시선들이 달라붙는 느낌이라서요.”

“역시 그렇죠?”

“괜찮습니다. 문제 될 정도는 아닙니다.”

오윈은 한 차례 주변을 둘러보고는 일행을 따라나섰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들은 카엘은 히아젤키와 리헨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말했다.

“알버트, 주변을 잘 살피도록 해라.”

“예, 주인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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