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무슨 일이 있거든 곧장 내게 알리거라.”
산호색 머리칼에 내려앉은 붉은색과 검은색이 섞인 새를 힐끔 본 히아젤키는 환하게 웃었다.
“네, 파파.”
“조심히 다녀오거라.”
“다녀오겠습니다.”
그 인사를 입에 담자 히아젤키는 새삼 감동했다. 어디를 가든, 이곳으로 돌아오겠구나 싶어서.
“잘 부탁한다.”
“예, 주인님.”
짧은 인사를 끝으로 카엘은 두 사람을 피오라로 보냈다.
불만이 가득한 것이 분명한데도 꾹 눌러 참은 카엘은 천천히 돌아섰다.
“차를 내올까요?”
그런 그의 눈치를 살피는 집사에게 카엘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 * *
피오라는 북쪽 땅의 일부를 차지하고 있는 댈린 왕국의 수도였다.
대체적으로 서늘한 북쪽 땅에 자리를 잡은 왕국인 만큼, 이 땅에만 나는 것들을 제품으로 만들어 무역이 활발해진 나라였다.
카엘의 도움으로 전령새를 통해 메딜에게 미리 연통을 넣었던 유리는 피오라에 도착한 직후 약속장소로 향했다.
겨울이 제일 아름다운 북쪽 땅에 있는 도시답게, 눈꽃과 눈사람 모양의 장식들이 많았다.
그중에는 얼음으로 세공된 것도 있어, 히아젤키는 금세 시선을 빼앗겼다.
“정말 예쁜 도시네요.”
두리번거리며 중얼거리는 히아젤키의 등을 떠밀며 유리가 재촉했다.
“네, 네. 구경은 나중에요. 일단 메딜부터 만나야죠.”
“네, 유리.”
생긋 웃은 히아젤키는 아쉬운 시선으로 거리를 훑으며 걸음을 서둘렀다.
“그동안 잘 지내셨나요?”
과연 이름 날리는 디자이너답게 메딜은 여전히 매력적이었다.
피오라에 머무는 동안 마련한 메딜의 작업실에 도착한 유리와 히아젤키는 조금 진이 빠진 듯 보였다.
게다가 히아젤키의 머리 위에 붙은 듯이 앉아있는 전령새도 신기했다.
꼼짝도 않는 새를 빤히 응시하던 메딜이 이내 어깨를 으쓱이며 물었다.
“무슨 일이 있었나요?”
의아한 얼굴로 묻는 메딜에게 유리사 상기된 얼굴로 설명했다.
“남성분들이 하도 쫓아와서요. 우리 아가씨 미모가 대단한 줄은 알았지만.”
은근슬쩍 자랑하는 말투에 메딜이 작게 웃었다.
“자, 자. 어서 안으로 들어오세요. 차를 내드릴게요.”
폭신한 소파에 편히 앉자, 그제야 한시름 놓았다.
이제껏 이런 적이 없어서 히아젤키는 당황스러웠다.
외출을 자주 했던 건 아니지만 그래도 성을 벗어났던 적은 꽤 있었는데, 이제껏 이랬던 적이 없었다.
어느 집 자제냐, 차를 대접하고 싶다, 식사를 대접하고 싶다, 잠시만 시간을 내어달라.
그 수많은 말들을 피해 히아젤키는 걸음을 더욱 서둘러야 했다.
지금까지는 카엘과 지엘, 리헨이 곁에 있었기에 피해갔던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런 걸 알 리가 없는 히아젤키는 당황스러울 뿐이었다.
메딜은 작업실에 함께 있던 직원 한 명에게 차를 부탁하고는, 저는 종이 뭉치와 노트를 들고 왔다.
“아가씨께서 이번 생일에 성년이 되신다면서요?”
“네. 어떻게 아셨어요?”
“지금까지 없던 제일 아름다운 드레스를 만들어달라고 하던걸요.”
메딜은 소파 앞에 놓인 티테이블에 종이 뭉치와 노트를 펼쳐 놓았다.
“그런 말을 했어요?”
“그럼요. 뭐, 아가씨의 특별한 날이라면 저도 꼭 제일 아름다운 드레스로 만들고 싶으니까요.”
메딜은 펼쳐 놓은 종이 뭉치 중에서 몇 장을 골라 히아젤키와 유리에게 내밀었다.
“이건, 처음 아가씨를 뵈었을 당시에 디자인했던 것들입니다. 아가씨께서 성인이 되셨을 무렵을 상상하며 그렸던 것이지요. 그리고 이쪽은 성인식에 입을 드레스를 만들어 달라는 요청을 받고 난 뒤에 디자인한 것들입니다.”
“와아…….”
히아젤키는 메딜이 건넨 종이를 한 장, 한 장 넘기며 살폈다.
어느 것도 그녀에게는 예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다 예뻐요, 메딜.”
“그럼요. 아가씨께서 입으신다면 다 예쁠 겁니다. 아, 그러고 보니 일전에 주문했던 옷들이 완성되어서 오는 길에 가져왔습니다.”
“정말요? 아가씨, 몇 개만 입어보시면 안 될까요?”
디자인이 그려진 종이를 살피던 유리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잔뜩 들뜬 얼굴인 유리 때문에 히아젤키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몇 개만요. 두 개만.”
‘몇 개’라고 했다간 메딜이 가져온 것들 전부를 입어 보아야 함을 알기에 히아젤키는 손가락을 펴 숫자를 정했다.
“잠시만요, 금방 가져올게요.”
기분이 좋아 보이는 메딜이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옷을 가지러 돌아섰다.
“두 개만 입어보셔서 되겠어요? 몇 개 더…….”
“유리. 우리 오늘 안에 다시 돌아가야 하잖아요. 전 피오라를 구경하고 싶어요.”
옷을 입어보는 데에 시간을 너무 많이 빼앗기는 건 싫었다.
작업실까지 오는 길에는 유리가 등을 떠밀어 거리를 제대로 구경하지도 못했으니.
“그것도 그러네요.”
빠르게 수긍한 유리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메딜이 옷들이 걸린 행거를 밀고 이쪽으로 오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유리는 곧장 원피스 종류를 살폈지만, 히아젤키는 먼저 셔츠와 바지 종류를 매만졌다.
그중 단연 눈에 띈 것은 제복처럼 생긴 것이었다.
평소 그녀의 훈련을 위해 제작되던 옷들과는 다른 느낌이 들었다.
그녀가 그것을 붙들고 홀린 듯이 바라보자, 메딜이 뿌듯한 얼굴로 다가왔다.
“이건 제국의 기사단처럼 기사 제복을 새로 디자인해 봤어요. 이건 제가 추가로 드리는 겁니다.”
“정말요?”
“네. 대신 제게 언젠가 아가씨 검술을 꼭 보여주세요.”
히아젤키는 수줍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유리, 전 이거 입어볼래요.”
“그럼 나머지 하나는 이거요!”
히아젤키가 꺼내든 제복과 유리가 꺼낸 원피스를 건네받은 메딜이 그녀를 안내했다.
히아젤키는 유리의 요청대로 먼저 원피스를 입어보았다.
하늘을 연상시키는 옅은 하늘색의 원피스였다. 치맛자락에는 하얀 레이스를 덧대어 고급스러워 보였다.
위쪽은 조금 더 옅은 색이었고 아래로 내려갈수록 색이 짙어지는 것도 인상적이었다.
게다가 지금까지 메딜에게서 받아왔던 것들과는 조금 스타일이 달랐다.
오프숄더로 어깨가 다 드러나는 옷이었다. 게다가 허리를 잡아주는 옷 주름 덕에 한층 더 볼륨감이 돋보였다.
“유, 유리……. 이거…….”
“너무 예뻐요, 아가씨! 이건 아가씨를 위해서 만들어진 옷이 분명해요.”
찬양에 가까운 유리의 말에 히아젤키는 뺨을 붉혔다.
익숙하지 않은 노출이 있는 옷에 그녀는 괜스레 제 어깨를 매만졌다.
“이상하지 않아요?”
“무슨 말씀이세요! 어느 나라 공주님보다도 아름다우세요.”
“유리, 밖에 나가서 그런 말 하면 안 돼요. 물론 아가씨가 그만큼 아름다우신 건 맞지만, 괜히 책잡힐 수도 있으니까요.”
“여긴 믿을 수 있는 사람만 있으니까 얘기하는 거죠.”
두 사람의 대화를 뒤로 한 히아젤키는 재빨리 커튼을 닫았다.
그리고는 어쩐지 부끄러워지는 원피스를 벗어 던졌다.
그녀는 제가 입어보겠다고 말한 제복을 조심스럽게 입었다. 옆에서 시중을 들던 유리는 감탄을 멈추지 못했다.
움직이기 편안한 것을 최우선으로 두고, 최고급 원단만을 사용해 만든 옷이라고 옆에서 열심히 재잘거렸다.
몸에 착 달라붙는 데 조금도 불편하지 않았다.
하얀 셔츠와 하얀 바지. 그리고 독특한 디자인의 재킷.
갈비뼈 부근까지만 오는 길이의 검붉은 재킷은 금실로 문양이 수놓아져 있었다. 목을 반쯤 가리는 옷깃이 정갈했다.
높게 올라오는 부츠까지 신었다. 아직 허리에 찰 검이 없어서 히아젤키는 조금 허전함을 느꼈다.
거기에 준비된 청록색 망토를 두르고, 늘어뜨렸던 머리를 올려 묶으니 카리스마가 넘쳤다.
“아가씨……. 하나만 하셔야죠. 멋있기까지 하셔.”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유리의 감동 어린 말도 흐릿하게 들렸다.
히아젤키는 거울 속 제 모습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기사.’
제법 기사처럼 보였다.
그것이 퍽 마음에 든 히아젤키는 메딜에게 진심으로 감사했다.
“너무 고마워요, 메딜. 정말……. 정말, 마음에 들어요.”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입니다.”
옷을 다시 갈아입기 전 마지막으로 거울 속 제 모습을 확인한 히아젤키가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
본래 입고 있던 옷으로 다시 갈아입은 히아젤키는 유리가 행거의 다른 옷에 정신이 팔린 사이 메딜에게 다가갔다.
“메딜, 저 부탁 하나만 해도 돼요?”
“네, 얼마든지요.”
메딜의 부드러운 미소를 마주하니 조금 더 용기가 생기는 듯했다.
‘……곤란하다…….’
점점 욕심이 많아지고, 제멋대로 구는 것 같아서 조금 곤란했다.
하지만 그런 자신이 좋기도 했다.
복잡한 얼굴로 웃은 히아젤키는 제가 조금 전 입었던 제복을 매만지며 말했다.
“이 제복……. 하나만 더 만들어 주세요.”
“하나 더요?”
“네. 리헨 사이즈로요.”
“아.”
그제야 그녀의 말뜻을 이해한 듯 메딜이 작게 탄성하고는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네, 준비해 드릴게요.”
“고마워요, 메딜.”
“그럼 아가씨 것도 나중에 리헨 님 것과 같이 보내드리겠습니다. 조금 추가하고 싶은 부분이 생겨서요.”
“네, 알겠어요.”
“자! 이제 드레스 디자인 고르셔야죠?”
시착(試着)을 끝내고 곧장 메딜의 손에 끌려간 히아젤키는 유리와 함께 소파에 앉아 드레스 디자인에 파묻혔다.
히아젤키가 보기에는 다 예쁘기만 해서 그녀는 디자인을 고르는데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여기에 이쪽 디자인에 있는 이 부분을 가져와서…….”
유리와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는 메딜을 지켜보던 히아젤키는 슬쩍 고개를 돌렸다.
“그럼 이런 느낌으로 디자인을 수정해볼게요.”
“메딜은 천재가 틀림없어요.”
눈을 반짝이는 유리를 보며 얌전히 기다리던 히아젤키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저기…….”
“네, 아가씨 뭐 필요한 거라도 있으세요?”
“음……. 얘기 어느 정도 정리됐으면……. 주변 좀 구경하고 와도 돼요?”
드레스 때문에 잔뜩 들떴었던 유리는 그제야 히아젤키가 피오라 도시를 구경하고 싶다고 했던 말을 떠올렸다.
“아, 그렇지! 피오라를 구경하고 싶다고 하셨죠.”
“혼자서 다녀와도 괜찮아요.”
“아니, 그건 안 되죠, 아가씨!”
짐짓 엄한 얼굴을 하는 유리를 보며 메딜이 등을 떠밀었다.
“유리도 같이 다녀와요. 그동안 디자인을 좀 수정해보고 있을 테니까요.”
“그래요? 그럼 사양 않고 다녀올게요.”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유리를 본 히아젤키는 조금 어색하게 웃었다.
재미있게 이야기를 나누던 두 사람을 방해한 것만 같아서 그녀는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빨리 피오라도 빨리 보고 싶었다.
“그럼, 다녀올게요.”
“네, 천천히 다녀오세요.”
히아젤키는 메딜의 배웅을 받으며 유리와 함께 작업실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