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 * *
매서운 추위가 특징이라고 해도 좋을 북쪽 땅의 댈린 왕국.
그 수도 피오라는 늘, 북쪽의 상징과도 같은 푸른색으로 가득했다.
북쪽의 숲은 여름에도 초록 잎이 아닌, 푸른 잎으로 뒤덮인다.
지엘은 이걸 북쪽의 추운 날씨의 영향이라고 했지만, 이 땅에 사는 이들은 이를 겨울 정령 때문이라고 여긴다 들었다. 그중에는 북쪽 땅에 심판의 용이 터를 잡아서 그런 거라고 믿는 이들도 있는 듯했다.
여름철에 수확한 푸른 나뭇잎을 작은 유리병에 물과 함께 담아 파는 것은 피오라의 상징이었다.
북쪽 숲 깊은 곳에 있는 호수 바닥에는 옅게 빛나는 돌이 있었는데, 그것을 주워다 나뭇잎과 함께 병에 담은 것이었다.
돌과 나뭇잎이 은은하게 빛나니, 귀족들은 그것을 방에 놓고 은은한 푸른빛을 즐겼다.
피오라는 겨울에 파는 간식거리도 꽤 유명했기에 다른 나라의 귀족들도 겨울이 되면 한 번씩 방문하여 먹기도 했다.
방문할 수 없다면, 하녀를 시켜 사 오게 하기도 했다.
“우와 줄이 엄청나게 기네요.”
눈꽃 모양으로 블루베리잼이 들어간 머핀은 특히나 유명했다. 블루베리잼과 더불어 크림치즈가 들어가 맛의 풍미를 더 했다.
작은 가게 앞에 사람들이 일렬로 줄을 선 것을 본 히아젤키는 아쉬운 얼굴로 중얼거렸다.
먹어보고 싶었지만, 저 긴 줄을 기다릴 시간이 없었다.
저거 하나 먹자고 도시 구경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드시고 싶으세요?”
“아니에요. 전 그냥 도시 구경이 더 좋을 것 같아요.”
생긋 웃는 그녀의 말에 유리는 광기 어린 웃음을 지으며 돈주머니를 꺼냈다.
“제가 지금 당장 가서…….”
“유리! 우, 우리 저쪽으로 가 봐요!”
당장이라도 가게로 돌진할 기세인 유리를 이끈 히아젤키는 다급히 그곳을 벗어났다.
두 사람은 비교적 사람이 없는 가게에서 따뜻하게 데운 우유를 마시고는 거리를 걸었다.
몸이 절로 떨리게 만드는 추위에도 활기찬 사람들을 보는 것이 좋아서 히아젤키는 마냥 웃었다.
카엘과 리헨이 함께였다면 더 좋았겠지만.
‘그래도 언제까지고 계속 옆에 붙어 있을 수는 없으니까.’
히아젤키는 아쉬움을 뒤로하고 고개를 돌렸다.
“다음은 어디로 갈까요?”
유리의 물음에 히아젤키는 잠시 고민했다.
두 사람은 거리 한복판에서 조금 물러나 좁은 골목 앞에 섰다.
“유리, 우리 저…….”
저 앞을 가리키며 웃던 그녀는 말을 끝맺지 못하고 표정을 굳혔다.
그녀보다 더 골목 안쪽에 있던 유리의 뒤로 검은 기운이 일렁이는 것이 보였다.
“아가씨?”
히아젤키의 표정이 굳어지자, 유리는 의아하게 그녀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제 뒤의 검은 기운을 발견하고는 화들짝 놀라 무심결에 뒷걸음질 쳤다.
“유리, 뒤로 물러나요.”
“아가씨…….”
유리는 불안해했지만, 히아젤키는 차분히 주머니에서 지엘에게 받은 단도를 꺼냈다.
달칵, 세공된 날개를 누르니 작은 소음과 함께 틈이 생겼다.
망설임 없이 검집에서 단도를 꺼내든 히아젤키는 무표정한 얼굴로 검은 기운을 응시했다.
‘이제 다시는 안 져.’
확고한 다짐이었다.
“아가씨, 주인님께 연락을…….”
“그럴 필요 없어요.”
걱정하는 유리에게 그녀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는 앞으로 나아가려 땅을 디뎠다.
“이제는 제가 이기거든요.”
탓, 빠르게 도약한 히아젤키는 단번에 단도로 검은 기운을 베어냈다.
칼날이 스치고 지나가자, 붉은빛이 검은 기운을 쫓았다.
고막을 때리는 비명이 찰나 들렸다가, 이내 검은 기운과 함께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탁. 다시 검집에 단도를 넣은 히아젤키는 그것을 주머니에 쏙 집어넣으며 유리를 향해 돌아섰다.
“이제 갈까요?”
생글 웃으며 묻는 것이 평소와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정말 강해지셨네.’
검술 실력만이 아니다. 마음도 꽤 단단해진 듯 보여 유리는 안심이 되면서도 안쓰러웠다.
“그래요.”
잠시 그녀가 빠져나온 골목을 힐끔거린 유리는, 먼저 걸음을 떼는 히아젤키를 뒤따랐다.
금세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구는 그녀를 보니 유리도 별것 아닌 일처럼 느껴졌다.
“유리, 광장 쪽에는 눈꽃나무가 있나 봐요. 우리 구경 가요.”
“네, 아가씨.”
안내판을 둘러본 그녀는 들뜬 걸음을 광장으로 향했다.
눈꽃나무 아래 선 히아젤키는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누구든 시선을 빼앗기지 않고는 버티지 못할 만큼.
그 미모에 홀린 듯이 다가서는 이들이 메딜의 작업실을 향할 때처럼 많았지만, 이번에는 대부분 말을 걸어오지는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작업실로 향하는 길에 방법을 터득한 유리가 물어뜯을 듯이 노려보았기 때문이었다.
“영애.”
물론 그런 유리의 시선을 신경도 쓰지 않고 말을 거는 이들도 있었지만.
자신을 그렇게 부를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한 히아젤키는 멍하니 눈꽃나무만 올려다보았다.
시선을 끌기 위해 남자의 손이 그녀의 어깨에 닿으려던 찰나, 홱 돌아선 히아젤키가 그 손을 잡아채 꺾었다.
“악!”
“아, 죄송해요.”
남자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는 것을 본 그녀는 서둘러 손을 놓아주었다.
“무슨 일이시죠?”
남자는 잠시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다가 이내 침착함을 가장하며 말했다.
“대단하시군요, 영애. 호신술을 배우신 건가요?”
사람 좋게 웃어 보이는 그를 물끄러미 올려다본 히아젤키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검술을 배웠어요. 그런데……. 왜 영애라고 부르세요?”
“귀한 분 같아 보이셔서요. 실례가 안 된다면, 어느 가문의 영애인지 여쭈어도 될까요?”
“실례가 된다면 안 물으실 건가.”
뚱한 얼굴의 유리가 중얼거린 말에 남자의 표정이 일순 일그러졌다.
그것을 놓치지 않고 포착한 히아젤키는 고개를 기울였다.
“아랫것들에게 너그러우신 모양입니다.”
그녀는 아무런 대답 없이 의아하게 그를 올려다볼 뿐이었다.
그 모습마저 시선을 떼기 어려울 만큼 예뻤다.
남자는 잠시 홀린 듯이 그녀를 바라보다가 가면을 쓰듯 표정을 바꿨다.
“머리 위의 새는 키우시는 건가요? 얌전하네요.”
“키우는 건 아니에요.”
“그래요? 귀여워요.”
히아젤키는 뭐가 귀엽다는 건지 이해할 수 없어서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혹시 시간이 괜찮으시다면 제가 차를 대접해도 될까요?”
“어느 가문인지 대답도 안 했는데 말이죠.”
또다시 유리가 걸고넘어지자, 남자가 이번엔 고개를 돌렸다.
“그럼 네가 답해 보아라. 어느 가문의 사람이냐?”
남자의 시선이 싸늘한 것을 응시한 유리가 코웃음을 쳤다.
“댈린 왕국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고 저희 아가씨께서는 금방 가셔야 합니다.”
“그래서. 어느 가문이냐 물었다.”
남자는 이제 히아젤키에게서 살짝 비켜섰다.
“아랫것에게 너무 너그럽기만 한 것도 보기 좋지는 않습니다. 귀족이라면 귀족답게, 행동할 줄도 아셔야지요.”
남자는 그리 말하며 유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 손이 어깨에 닿자마자, 유리는 남자의 팔꿈치 안쪽을 쳐냈다.
팔이 힘없이 굽혀지며 어깨를 놓친 사이, 물 흐르는 듯이 자연스러운 흐름으로 유리가 남자의 얼굴을 손등으로 가볍게 쳐냈다.
고통보다는 치욕스러움이 느껴질 정도의 강도였다.
절로 뒷걸음질 친 남자는 견디기 버거운 모욕감에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감히……. 왕국의 귀족인 내게…….”
유리의 손등이 스치고 지나간 제 얼굴을 감싼 남자는 분노를 억누르며 잇새로 중얼거렸다.
유리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아, 왕국이어도 제국의 유스턴 가문은 알지 않으십니까? 오늘 일이 불쾌하셨다면 가문으로 연락 주시지요. 대신 그때는 저희 아가씨께 접근하신 것도 주인님께 알릴 것입니다.”
“유스턴……?”
남자는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 히아젤키를 돌아보았다.
그는 그녀가 유스턴 가문의 영애라고 오해하는 듯했다.
하지만 그 오해를 굳이 정정해줄 마음은 없었기에 두 사람 다 입을 닫았다.
남자는 잠시 머리를 굴리는 듯이 눈동자를 도르륵 굴리다가 이내 서둘러 자리를 떴다.
“정말 웃기지도 않네요.”
멀어지는 남자의 뒷모습을 한심하게 응시한 유리가 말했다.
“근데요, 유리.”
“네, 아가씨.”
“왜 유스턴 가문이라고 얘기하니까 도망가요? 유서 깊은 기사 가문이 아닌가요?”
“맞죠.”
긍정하는 의미로 유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히아젤키의 이해를 돕기 위해 덧붙였다.
“유스턴 가문의 영애에게 뭣 모르고 접근한 게 사교계에 퍼지면 웃음거리가 될 테니까요.”
“그게 웃음거리가 될 일인가요?”
“유스턴 가문은 대대로 강한 자가 아니면 혼인시키지 않으니까요. 아들에게도 강한 여자를, 딸에게도 강한 남자를, 이 가문의 규칙이죠. 그러니 만나고 싶다면, 만나고 싶은 그 상대보다 강하던지 이미 인정받은 강한 자여야만 해요.”
“우와……. 뭔가 멋지네요.”
“귀찮은 규칙 같은 거죠, 뭐.”
눈을 빛내는 히아젤키를 보며 유리는 작게 웃었다.
“한데 유스턴 가문의 자제들은 보통 귀족 가문의 영식 정도가 이길 수 있는 실력이 아니니까요. 그래서 도망친 거죠.”
“아, 그렇군요.”
대련에서 이길 자신도 없고, 가문의 사람에게 인정을 받을 만큼 강하지도 않다.
그런 주제에 유스턴 가문의 자제에게 접근했다는 것이 사교계에 알려지면 웃음거리가 되는 것은 기정사실이었다.
게다가 대련을 청할 용기도 없어서 도망쳤으니 소문이 돈다면 더욱 처참할 것이다.
금세 자신에게 접근했던 남자에게서 관심을 거둔 히아젤키는 다시 눈꽃나무를 올려다보았다.
흐드러지게 핀 하얀 눈꽃나무 아래의 히아젤키는 마치 눈 속에 핀 한 송이의 꽃 같았다.
그녀를 감상하느라 유리는 또다시 다가온 소년을 알아채는 것이 늦어졌다.
“저기…….”
떨리는 목소리에 히아젤키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얼굴을 벌겋게 물들이고 더듬거리며 손까지 벌벌 떠는 것이, 꽤나 긴장한 것 같았다.
정말 뱃속 깊은 곳에서부터 남김없이 용기를 끌어 올린 듯한 모습.
소년을 발견한 유리는 전투력을 상실한 채 조금 안타까운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저, 저, 그……. 너, 너무 아름다, 아름다우, 셔서….”
소년은 숨이 막히는지 잠시 입을 벙긋거리다 이내 길게 숨을 토해냈다.
그는 잠시 숨을 고르느라 온 신경을 집중했다.
그리고는 잔뜩 굳어진 채로 다시 히아젤키를 바라봤다.
“처, 첫눈에……. 반했습니다! 부디, 자, 잠시 시간을, 내어주세요…….”
“네?”
얌전히 소년의 말을 기다린 히아젤키는 눈을 크게 떴다.
곧장 그 얼굴에 번진 것은 곤란함이었다.
어색하게 웃는 것이 빤히 보여, 그녀를 응시하던 소년은 울먹이기까지 했다.
“아, 그게…….”
쉽게 말을 꺼내지 못하는 모습에서 거절의 의미를 읽어낸 소년은 한숨을 내쉬었다.
세상에 한 송이밖에 없는 꽃처럼 아름다운 그녀였다. 가까이에서 말을 걸어본 것만으로도 충분히 벅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