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이름만이라도……. 알려 주세요…….”
어깨까지 축 늘어뜨린 모습에 저도 모르게 따라서 눈썹을 늘어뜨렸다.
척 보기에도 소년은 어려 보였다.
‘리헨 보다도 어릴 것 같아…….’
어린아이를 울리는 것 같아서 기분이 이상했다.
“그게…….”
그것보다도 어딘가 본 적이 있는 듯한 얼굴이어서 히아젤키는 조금 놀라웠다. 분명…… 첫 번째 생에서 보았던 아이.
어른들은 그녀를 향한 뚜렷한 증오를 내비쳤지만, 아이들까지 꼭 그런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간혹, 몇 마디 주고받았던 아이들이 있었다.
그 기억 속의 아이와 꽤 닮아 있었다.
“……히아젤키.”
잠시 망설이던 그녀는 이내 제 이름을 조심스럽게 알려 주었다.
“히아젤키라고 해요.”
“……이름도, 이름도 예뻐요.”
“고마워요.”
생글 웃는 히아젤키를 보며 소년은 동그란 눈을 더욱 크게 떴다.
그리고는 벌벌 떨리는 손으로 그녀의 손을 아주 조심스럽게 붙잡았다.
히아젤키는 그 손을 쉬이 뿌리치지 못했다.
그 당시의 자신에게는 그저 몇 마디 말을 주고받은 것도 너무나 귀했어서.
그렇다고 이 소년의 마음을 받아줄 수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우리 아가씨 인기도 많네요. 아니, 아니. 이건 당연한 일이죠.”
고개까지 끄덕이며 중얼거리는 유리를 도움을 구하는 눈으로 보았다.
하지만 유리도 그녀를 찬양하는 말들을 늘어놓느라 정신이 없어서 소용없었다.
한숨을 내쉰 히아젤키는 손을 빼내는 대신 조심스럽게 말했다.
“미안해요. 그 마음은 고맙지만……. 제가 이해할 수 있는 범위는 아니네요.”
“왜요?”
“그야……. 저는 그쪽을 조금 전에 처음 봤는데, 그런 마음이 어떻게 생기는 거죠?”
“그럼 오래 보면 생기는 건가요?”
소년의 순수한 물음에 히아젤키는 입을 다물었다.
그녀로서도 알 수 없는 부분이었다.
다만, 조금 전에 만난 사람이 자신을 마음에 담았다는 말은 믿기가 어려웠다.
그녀에 대해 아는 것이 전혀 없을 테니 말이다.
이름도 모르고,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는데 그것이 어찌 가능한 것인지 히아젤키로서는 알 수 없었다.
“저기……. 일단, 이 손부터…….”
그녀의 가는 손을 붙든, 부들부들 떨리는 앳된 손. 그리고 그 위로 커다란 손이 하나 더 겹쳐졌다.
“일단 이 손부터 놔줘.”
갑작스럽게 등장한 새로운 인물에 소년은 입까지 벌리고 넋을 놓았다.
백금발이 부드럽게 흘러내려 한층 더 섬세한 분위기를 풍겼다.
유려한 얼굴선을 타고 시선을 옮기면 깨끗한 벽안.
범접할 수 없는 분위기의 그는 소년의 손을 부드럽게 떼어 냈다.
“리헨?”
놀란 얼굴의 히아젤키를 보며 그는 부드럽게 입꼬리를 당겼다.
그녀의 눈이 더욱 커졌다. 입꼬리를 실룩이는 것이 아닌, 아주 옅은 미소였다.
‘……웃었다…….’
함께 지낸 지 꽤 시간이 지났다. 그리고 마침내 처음으로 보는 미소였다.
처음 보는 미소여서 그랬는지, 그녀는 심장이 쿵, 내려앉는 기분을 느꼈다.
소년을 향해 고개를 돌린 리헨은 히아젤키의 어깨를 감싸며 말했다.
“안 돼.”
짧은 한마디였지만, 소년이 넋을 놓고 바라보기에 충분했다.
소년은 마치, 천사가 내려와 그녀와 제 사이를 갈라놓은 듯이 느껴졌다.
그런 착각을 불러일으킬 만한 미모이기는 했다.
빛이 나는 듯한 백금발과 벽안을 마주하던 소년은 고개를 푹 숙였다.
“……이름이라도,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퍽 가련한 목소리였다.
어깨를 늘어뜨린 채 터덜터덜 돌아가는 뒷모습을 보며 미안함에 한숨을 내쉴 만큼.
하지만 히아젤키는 이내 소년의 뒷모습에서 시선을 거두고는 홱 고개를 돌렸다.
눈동자에 새기듯, 리헨을 뚫어져라 보던 히아젤키는 작게 웃었다.
그리고는 냉큼 그의 목에 매달렸다. 저도 모르게 몸이 먼저 움직였다.
“어떻게 된 거야? 왜 여기 있어?”
그녀를 부드럽게 안아 주는 리헨은 또 자란 듯이 키도, 덩치도 더 커져 있었다.
수개월 사이 더욱 남자다워졌다.
“성으로 돌아가는 길에 잠시 들른 거야. 스승님이 꼭 사야 할 게 있다고 하셔서.”
리헨을 놓아준 히아젤키는 조금 새침한 얼굴로 말했다.
“금방 오겠다더니.”
여름이 지나고, 겨울이 되도록 소식이 없던 리헨이었다.
그녀는 오래 걸린 것보다, 그동안 소식이 없던 것이 서운했다.
“그래도 겨울 지나기 전에는 왔네.”
“응. 히아의 생일이 있으니까. 그 전에 돌아오려고 힘냈어.”
칭찬해 달라는 듯한 말에 히아젤키는 씩 웃고는 다시 리헨의 품에 달려들었다. 어쩐지 그러고 싶었다. 떨어져 있는 내내, 늘 잡던 손이 너무나도 그리웠다.
“어서 와. 보고 싶었어.”
“나도 보고 싶었어.”
꼭 끌어안은 두 사람을 바라보는 유리의 표정이 묘했다.
‘누가 보면 몇 년은 떨어져 있다가 만난 연인인 줄 알겠네.’
입술을 비죽인 유리는 어깨를 으쓱였다.
리헨까지 합류하여 세 사람은 피오라의 거리를 걸으며 구경했다.
한참 만에 나타난 오윈은 줄이 너무 길어 포기했던 피오라 머핀을 사 왔다.
그녀에게 주려고 산 것이라며.
폴짝폴짝 뛰며 기뻐한 히아젤키는 오윈의 팔에 매달렸다.
물론, 금방 리헨의 손에 의해 떨어졌지만.
“너무 맛있어요.”
감격하는 히아젤키를 보며 오윈은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한입 베어 물면, 새콤달콤한 블루베리와 부드러운 크림치즈가 함께 밀려들었다.
“아가씨께서 좋아하실 것 같아서 사 왔습니다.”
“그 긴 줄을 기다리신 거예요?”
“아……. 뭐, 음……. 조금 기다리기도 하고, 어떤 친절한 분들이 양보해 주기도 해서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았습니다.”
조금 의미심장한 말이었지만, 그녀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나저나, 아가씨께서는 어쩐 일로 피오라에 계십니까?”
“히아, 카엘 님은?”
의아한 얼굴인 두 사람에게 히아젤키는 생긋 웃으며 말했다.
“유리랑 둘이 왔어요.”
“둘이?”
믿기지 않는 듯이 오윈과 리헨이 동시에 물었다.
아직 그녀가 홀로 해코지하는 검은 기운을 상대로 이긴 것을 모르는 두 사람이었다.
“이제 괜찮으니까.”
히아젤키는 부드럽게 웃으며 조곤조곤 리헨이 성을 비운 사이의 일을 알려 주었다.
지엘이 준비해 준 단검과 그것으로 맞서 싸워 그녀가 승리를 거둬낸 것.
훈련장에 틀어박히는 바람에 얼마나 곤란했는지 모른다며 유리가 투덜거리기도 했다.
그렇게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며 네 사람은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늘어난 인원으로 그들은 메딜의 작업실로 돌아갔다.
그곳에서 메딜과 수정된 드레스 디자인을 확인한 유리는 감동 어린 얼굴을 했다.
“최고의 성인식으로 만들어 드릴게요.”
자신 있게 말한 메딜의 옆에서 그녀의 직원이 아쉬운 듯 말했다.
“제국의 성인식 연회에 참석하지 않으신다는 것이 너무 아쉬워요. 완성되면, 지금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아름다우실 텐데.”
“하지만 전 귀족이 아닌걸요?”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하는 히아젤키를 보며 직원은 얌전히 입을 닫았다.
제국이나 왕국에서는 성인식을 치르는 날이 정해져 있었다. 연초가 되면 그해에 성인이 되는 귀족 가 자제들을 위한 연회가 열렸다.
그런 화려한 연회에 출석하면 관심을 한 몸에 받을 것이라며 유리가 들떠서 얘기한 적은 있었지만, 그다지 관심은 없었다.
사교계에 데뷔할 일도 없고,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게다가 인간사에 깊이 관여할 필요는 없다는 카엘의 말도 있었기에, 황궁 연회에 미련은 없었다.
“그런 곳에 갔다가는 아가씨께서 연회를 제대로 즐기실 틈이나 있겠니?”
메딜이 얼른 웃으며 덧붙였다.
“자, 그럼 디자인도 정해졌으니 이만 성으로 돌아갈까요?”
화제를 돌리고 싶은 메딜의 마음을 알았는지, 유리가 얘기를 꺼냈다.
겨울이라 날이 금방 어두워지는 탓에 이미 하늘은 캄캄했다.
“네, 그만 돌아가요.”
메딜은 기분 좋은 얼굴로 그들을 배웅했다.
드레스 시착을 위해 한 번 더 피오라로 와 달라고 부탁하며.
히아젤키는 카엘이 일러준 대로, 모두에게 자신을 붙잡으라고 했다.
신체 접촉이 있어야 함께 이동된다고 했었으니.
그리고는 그가 채워 준 팔찌를 끊어내니 순식간에 메딜의 작업실에서 성으로 이동했다.
* * *
한차례 눈을 깜박이니, 보이는 풍경이 달라져 있었다.
성 입구 앞에서 초조한 듯이 서성이던 카엘은 그들을 발견하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녀왔습니다, 파파.”
카엘은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했지만, 마음이 바뀐 듯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서 오거라.”
리헨은 차례를 기다리듯이 히아젤키의 뒤에 서 있었다.
그리고는 카엘이 그녀의 머리를 한참이나 쓰다듬은 뒤에야 인사를 건넸다.
“다녀왔습니다, 카엘 님.”
“그래.”
히아젤키의 머리가 다 헝클어지도록 쓰다듬은 것과 대조되게도, 카엘은 리헨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리는 것으로 반가움을 대신했다.
그날 카엘은, 밤이 깊도록 히아젤키를 설득했다.
앞으로는 외출할 때에는 필히 그가 동행해야겠다고.
그녀가 잠자리에 들 준비를 하는 동안을 제외하고 말이다.
카엘은 하루 종일 그녀의 머리에 붙어 있던 전령새를 데려가 잠시 눈을 맞추고 있다가 새를 날려 보냈다.
그러더니 설득이 시작된 것이었다.
잠자리에 들려 침대에 누운 히아젤키의 옆에 의자를 가져다 놓고는 계속해서 말했다.
“아직 성인식을 치르기 전 아니냐, 게다가 딸아이의 경우 성인식을 치른 후에도 한동안 부모의 보호 아래 있는 거라고 들었다.”
“누가 그러는데요?”
“……알버트가.”
침대에 누운 채로 대답하던 히아젤키는 픽 웃어버렸다.
“책에도 그렇게 나와 있었다. 딸아이는 보호해야 마땅하다고. 그러니 이건 내가 유별난 것이 아니야. 그러니 내 말을 들어라.”
카엘은 당연한 사실을 얘기하듯이 그녀를 ‘딸’이라 칭했다.
히아젤키는 그것이 간지러우면서도 마음이 따뜻해져서 가만히 카엘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네가 원하면 세상을 보여주는 것도 좋다. 어차피 내가 성 밖에 일을 보러 갈 때도 있으니, 그때마다 데리고 가는 것도 괜찮다.”
“정말요?”
히아젤키는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
카엘이 성을 비우는 때는 성으로 호송되지 않은 죄인을 찾아가 심판할 때뿐이었다.
그녀가 무엇 때문에 되묻는지를 뒤늦게 알아챈 카엘이 조급하게 덧붙였다.
“아니, 그때마다 근처 도시를 구경해도 되지 않느냐.”
“그건 좋아요.”
오늘 히아젤키는 충분히 좋은 시간을 보냈다.
혼자서도 검은 기운 따위는 아무렇지도 않게 해치웠고, 자유롭게 돌아다녔다.
하지만 자유로운 것과는 별개로 카엘과 리헨도 함께였다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오늘로 충분했어.’
히아젤키는 이미 충분하다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더 이상 고집부리지 않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