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파파? 안 자고 뭐 해요?”
눈을 동그랗게 뜬 히아젤키는 도톰한 잠옷을 입고 있었다.
산호색 머리칼이 길게 늘어져 있었다.
이런 편안한 모습마저 카엘의 눈에는 세상 그 누구보다도 예뻤다.
“보다시피.”
술병을 가볍게 흔들어 보이자, 입술을 비죽이며 한숨을 내쉰 그녀는 조심스럽게 방문을 닫았다.
가만히 그의 옆으로 걸어온 히아젤키는 똑같이 창가에 기대어 서서는 카엘을 올려다보았다.
달빛에 비친 그녀의 머리카락은 더욱 신비했다.
얼마나 사랑스러운 아이인가. 신이 사랑해마지않는 마음은 이런 것이 아닐까, 카엘은 생각했다.
“……그거, 맛있어요?”
가만히 카엘을 올려다보던 히아젤키는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며 물었다.
흘러내리는 산호색 머리카락마저 너무나 사랑스럽다.
어찌 사랑하지 않고 배기겠는가.
다시 술병을 흔든 카엘은 짙은 미소를 머금고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한잔하겠느냐?”
숲을 달렸다. 약한 몸으로 태어나, 대부분의 나날을 누워 있기만 했었다.
그 여리고 작은 발로 숲을 달렸다.
폐가 찢어질 것 같고, 바짝 말라버린 목구멍은 타들어 갈 것 같았다.
흙바닥을 굴러다니는 돌멩이나, 부러진 나뭇조각을 밟아 발에는 상처투성이였다.
하지만 신체적 고통보다도, 정신적인 충격이 더 컸다.
가슴 부근이 뻐근하고, 뱃속 깊은 곳부터 물에 잠기듯이 숨이 막혔다.
제 안에서 무언가 부서진 기분이 들었다.
“널 낳아 준 건 나니까. 날 위한 일이라면 뭐든 해야겠지?”
날붙이를 들이밀며 그렇게 말하던 어머니의 얼굴을 선명히 기억한다.
죄책감이나, 슬픔은 없었다.
숲을 달리던 여린 다리는 금세 힘을 잃고 풀썩 쓰러졌다.
지지직. 그 이후가 어땠는지는 빤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불이 꺼지듯 암전되었다.
그 이후에는 목소리들만 들렸다.
앞이 보이지 않는다고 타박하는 목소리, 전생이라니 머리까지 이상하냐고 소리치던 목소리.
그리고 산에서 발을 헛디뎌 굴러떨어졌던 때.
저를 부르던 목소리도.
분명, 걱정 어린 부름이 아니라……. 살아있는지 확인하는 듯한 부름이었다.
“죽었니?”
“헉!”
그 목소리를 끝으로 히아젤키는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학, 하아, 하아…….”
가쁜 숨을 내쉬는 것도 오래가지 않았다.
이제는 이런 악몽도 익숙할 지경이었으니.
“…….”
아무렇지도 않았다. 분명히 아무렇지도 않다.
히아젤키는 조금 전까지 누워 있던 침대를 바라보다가 한숨과 함께 몸을 일으켰다.
정말 아무렇지도 않았다. 악몽 따위.
그래도 곧장 잠드는 것은 내키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의 악몽이 이어져서 또 나올까 봐.
그래서 조금이라도 복도를 걸었다가 다시 잠들곤 했다.
슬리퍼를 신고 천천히 걸음을 뗀 그녀는 조심스럽게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늘 최대한 조심한다고 하는데도, 늘 리헨이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달칵.
“……왜 안 자느냐.”
달빛을 등진 카엘은 어쩐지 처연해 보였다.
그 분위기에 잠시 숨을 멈췄던 히아젤키는 조심스럽게 숨을 내뱉었다.
“파파? 안 자고 뭐 해요?”
“보다시피.”
그는 술병을 가볍게 흔들며 답했다.
그녀는 입술을 비죽이며 살며시 방문을 닫았다.
발소리를 내지 않으려 애쓰며 히아젤키는 카엘의 옆에 섰다.
카엘은 자주 술을 마셨다.
“……그거, 맛있어요?”
가만히 그를 바라보다 물었다.
그러자 카엘은 짙은 미소를 머금었다.
“한잔하겠느냐?”
그러고 보니, 예전에도 악몽으로 한밤중에 깨어났을 때 그가 같은 질문을 한 적이 있었다.
그때를 떠올린 히아젤키가 풉, 하고 웃음을 흘렸다.
“그럼……. 한잔해볼까요?”
그녀의 대답에 카엘이 잠시 멈칫했다.
그는 어쩐지 복잡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제 마셔도 되는 나이가 된 것이냐?”
“생일이 지났으니 이제 성인이니까요?”
어깨를 으쓱이며 하는 대답에 카엘의 동공이 요동쳤다.
‘그게 그렇게 되는 건가.’
영 내키지 않는 얼굴이었지만 그래도 창틀에 올려놓았던 잔을 집었다.
제가 먼저 물었으니 이제 와서 안 된다고 할 수도 없었다.
병에 술이 얼마나 남았나 가늠한 카엘은 비어 있는 와인 잔에 술을 조금 따라서 건넸다.
잔을 그녀의 손에 넘기기 직전까지도 그다지 내키지 않는 표정이었다.
“또 악몽을 꾼 것이냐?”
잔을 받아든 히아젤키는 살며시 고개를 끄덕이며 배시시 웃었다.
킁킁, 술 냄새를 맡은 히아젤키는 강렬한 향에 일순 얼굴을 찡그렸다.
그리고는 조심스럽게 잔을 입술에 대고 기울였다.
카엘이 조금 따라준 술을 홀짝인 그녀는 목구멍이 불타는 듯한 느낌에 숨을 훅 들이마셨다.
“으엑…….”
그리고는 곧장 손에 든 잔으로부터 고개를 돌렸다.
그런 히아젤키의 반응이 재미있는 듯 낮게 웃은 카엘이 물었다.
“맛이 없느냐?”
“파파……. 이런 건 왜 마시는 거예요?”
정말 이해할 수 없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걸 모르겠다면 아직 네가 이걸 마실 때가 아니란 뜻이다.”
“쳇.”
히아젤키는 불퉁한 얼굴로 입술을 비죽였지만, 카엘은 조금 안심했다.
‘아직.’
그래, 아직 아니다. 아직 벌써 술을 마실 나이는 아니다.
인간이 정해 놓은 법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카엘이 보기에는 그랬다.
아직 멀었다.
시간이 그렇게까지 빨리 갔을 리가 없다.
“함께 마시기에는 아직 멀었군.”
“금방이에요.”
카엘은 놀리는 듯이 말했지만, 그날이 오지 않길 바랐다.
같이 술을 마시는 날 따위. 그렇게 자라나 떠나가게 되는 모습 따위.
보고 싶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치게 빨리 가는 듯하여 입안이 썼다.
‘……시간이 빨리 간다고 느끼다니.’
그로서는 그것도 낯선 감정이었다.
지나치게 긴 시간을 살아온 탓에 모든 것이 지루하고 느렸는데.
너무 빠르다. 인간의 시간은 한없이 빠르다.
제 곁에 머무를 시간이 턱없이 부족하게 느껴져 카엘은 씁쓸함을 덜어내지 못했다.
시간이 느리게 흘렀으면 좋겠다고……. 그는 생각했다.
5장. 친구가 생긴 너에게
히아젤키의 성인식으로부터 3년.
그 사이, 그들에게는 새로운 습관이 생겼다.
“히아.”
카엘의 부름에 고개를 돌린 그녀는 그의 어깨에 앉아있는 전령새를 발견했다.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알아챈 히아젤키는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
“금방 리헨을 불러올게요.”
카엘에게 전령새가 도착할 때는 대부분 심판을 해야 하는 죄인이 있음을 알릴 때였다.
그리고 리헨이 성인이 되어 진검을 받은 이후로는, 카엘이 성을 비울 때 함께 성을 나서게 되었다.
거의 모든 시간을 성에서만 보내던 히아젤키의 생활은 이제 달라졌다.
도시락을 싸 들고 피크닉을 가기도 했으며, 건국제 등을 구경하러 가기도 했다.
건국제처럼 사람들이 많은 축제에 가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린 편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더 이상 스스로를 나약한 존재로 인식하지 않았다.
사람이 많고 복잡한 축제도 두렵지 않았다.
다시 같은 일이 반복될 일은 없었고, 비슷한 일이 반복된다고 해도 막아낼 자신이 있었다.
“리헨!”
문을 벌컥 열고 나타난 히아젤키의 부름에, 옷을 갈아입던 리헨은 화들짝 놀랐다.
“히아?”
셔츠 앞섬을 후다닥 감추는 리헨을 보며 그녀는 장난스럽게 제 눈을 가렸다.
“파파가 외출할 거래. 가자.”
“아, 응.”
카엘이 죄인 처벌을 위해 성을 비울 때마다, 혹은 별일이 없어도 함께 자주.
그들은 성을 나서 대륙을 둘러보았다.
하루는 숲에, 하루는 호수에, 하루는 작은 마을, 어떤 날은 제국의 도시.
처음 시작은 카엘의 외출이 조금은 덜 기분 나쁘기를 바라서였다.
외출을 나서는 그의 표정이 너무나 좋지 않아서.
따라나서서 그가 일을 보는 동안은 근처를 구경하다가, 일을 마치면 함께 밖에서 시간을 보내다 돌아오자고.
그래서 카엘의 외출에는 나쁜 일만 있는 게 아니라, 좋은 일도 있도록.
그렇게 시작된 것이 이제는 습관처럼 함께 성을 나서게 되었다.
귀 끝까지 붉게 물들인 채로 뒤돌아선 리헨을 보며 히아젤키는 배시시 웃었다.
“그럼 먼저 내려가 있을 테니까 얼른 와!”
“응…….”
살포시 문을 닫으며 그녀는 참지 못하고 키득거렸다.
‘귀여워.’
가벼운 셔츠 차림에 검을 멘 히아젤키가 성 입구에 다다르자, 기다리던 리사가 한숨을 폭 내쉬었다.
“아가씨!”
아니나 다를까, 리사의 염려대로 그녀는 검만 챙기고 겉옷을 챙기지 않았다.
“아직 날이 찹니다.”
때마침 히아젤키의 겉옷을 챙겨온 유리가 재빨리 그녀의 어깨에 옷을 걸쳤다.
“아가씨, 아직 초봄이라 추워요.”
“앗, 고마워요.”
히아젤키는 생긋 웃으며 머리를 올려 묶었다.
원피스나 드레스를 자주 입지 않는 것에 대해 여전히 서운해하는 유리였지만, 최근에는 나름대로 타협한 듯 보였다.
머리를 하나로 올려 묶고, 셔츠에 딱 붙는 바지. 어깨에 걸치는 메딜의 손을 거친 고고한 분위기를 풍기는 재킷.
금실로 수놓아진 하얀 검벨트에, 하얀 검.
정식으로 어느 나라에도 소속되지 않았으니 기사라고 부르기도 애매했다.
기사가 되기 위한 절차를 아무것도 밟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러니 기사보다는 검사가 더욱 어울리는 표현이었지만, 특유의 고고한 분위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여기사를 연상시켰다.
그런 그녀를 보는 것에 재미를 들렸기 때문이다.
성을 나설 준비를 마친 히아젤키를 보며 유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메딜에게서 받은 제복은 고이 모셔둔 채 자주 입지는 않았다.
물론 그렇게 격식 차릴 이유도 마땅히 없었다.
게다가 너무 고급지고, 카엘의 힘으로 이것저것 마법이 더해져서 히아젤키가 부담스러워한 탓도 있었다.
그런 걸 입고 거리를 걷는다면, 지나치게 눈에 띄기도 하고 말이다.
그렇지 않아도 눈에 띄는 미모이니 걸친 옷까지 화려할 필요는 없었다.
아니, 가능하면 눈에 띄지 않는 편이 좋았다.
“가지.”
빠르게 계단을 내려오는 리헨을 발견한 카엘이 먼저 걸음을 뗐다.
“다녀올게요.”
리사와 유리의 배웅을 받으며 그들은 성을 나섰다.
그리고 알버트는 그들과 함께였다.
종종 집사가 동행하는 일도 있었기에 이는 익숙한 일이었다.
그들은 용으로 변한 카엘의 등에 올라타 한없이 동쪽으로 향했다.
어느 정도 날아간다 싶더니, 그는 목적지에서 적당히 가까운 도시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한적한 들판에 내려온 카엘은 마법을 사용해 도시의 좁은 골목으로 이동했다.
“여긴 어디예요?”
골목 밖을 힐끔거리며 히아젤키가 물었다.
심판을 앞둔 카엘은 그다지 말이 없었다.
이는 늘 있는 일이었고, 당연하다는 듯이 알버트가 대답했다.
“동쪽에 있는 루소스 왕국입니다.”
“그렇군요.”
대륙의 지리 공부에서 이름이 언급된 적이 있는 곳이었다.
“적당히 주변을 둘러보고 있어라. 다녀오마.”
“네, 다녀오세요.”
카엘은 차례대로 히아젤키의 머리를 쓰다듬고 리헨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그리고는 곧 알버트와 함께 사라졌다.
죄인이 있는 곳으로 향하는 카엘의 표정은 좋지 못했다.
그는 여전히 심판을 거북해한다.
‘이해는 하지만.’
심판하는 것을 본 적이 있는 히아젤키로서는 십분 공감했다.
그녀였어도 싫었을 것 같다. 게다가 그 일을 계속해야 한다니.
“그럼 갈까?”
“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