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왕녀님이 괜찮으시다면요.”
벨리나는 또다시 히아젤키에게 착 달라붙었다.
그 모습을 리헨이 불만스러운 얼굴로 바라봤지만, 히아젤키가 달래니 얌전히 물러났다.
두 사람은 샤를과 헤어진 그 자리에서 그다지 벗어날 생각이 없는 듯 가만히 서 있었다.
가면을 썼을 때도 주변의 시선을 사로잡았지만, 가면을 쓰지 않으니 더욱 시선을 끌어당겼다.
이토록 아름다운 사람들이 있을까.
벨리나는 히아젤키에게서 묘한 감정을 느꼈다.
지나치게 아름다워서 보고 있으면 가슴 부근이 지끈거렸다.
사람은 지나치게 뛰어난 사람을 보면 질투를 하지 않는다. 다만 존경할 뿐.
상대도 되지 않는다는 걸, 잘 알고 있으니 질투할 마음도 없었다.
애초에 왕녀는 누군가를 질투할 만큼 자존감이 높지도 않아서 그녀를 보며 자신이 더없이 작아져도,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동아줄처럼 꼭 붙잡고 있었다.
그들의 주변으로 사람들이 슬금슬금 모여들며 수군거렸다.
어느 집 자제인 건지, 아니면 제복을 입고 있으니 기사인 건지.
하지만 본 적이 없는 제복이었으니 도대체 어느 기사단 소속인지 알 수가 없었다.
다른 이들과의 거리가 좁혀질수록 벨리나는 안절부절못했다.
“괘, 괜찮으신가요? 눈에 띄는 것 같은데…….”
“네, 괜찮아요.”
히아젤키가 대수롭지 않게 대답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어딜 가든 시선이 따라붙으니 조금 익숙한 것도 있었지만, 리헨이 살기등등한 눈으로 그들을 훑으니 자연적으로 더 이상 거리를 좁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저, 그런데…… 샤를 오라버니와는 친구라고 하셨죠?”
“네, 그래요.”
왕녀는 어딘가 불안한 듯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다가 이내 용기 내어 물었다.
“아, 아까 시온 오라버니가 하신 말씀……. 들으셨죠?”
못 들었다고 대답해주기를 간절히 바라는 눈이었다. 하지만 왕위가 싫어서 도망쳤다는 걸 들었다고 이미 말했으니, 못 들었다는 건 말이 안 됐다.
벨리나의 간절한 시선에도 히아젤키와 리헨은 고개를 끄덕였다.
“들었습니다.”
눈에 띄게 실망한 왕녀는 살짝 고개를 떨어뜨렸다.
잠시간 침묵이 흘러도,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제 동생을 죽게 만든 놈에게’, 라는 말에 대한 설명은 샤를에게 들어야 했다.
샤를의 이야기는 그의 입으로 직접 듣기로 했기 때문에 왕녀에게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하지만 침묵을 견디다 못한 벨리나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샤를 오라버니 탓이 아니었어요.”
히아젤키는 제 옷자락을 꾹 붙든 왕녀의 손을 힐끔 바라봤다.
얼마나 힘을 줬는지 하얗게 질려 있었다.
“딱히 샤를이 그랬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
“하지만 들어야 할 이야기가 있다면, 저희는 샤를에게 듣고 싶습니다. 그러니 무리해서 이야기하려고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선을 긋는 말이었다. 그 이상은 얘기하지 마라, 하고.
벨리나는 입을 꾹 다물고는 고개를 떨어뜨렸다.
어쩐지 마음이 벅찼다. 당연히 궁금해할 거라고 생각했다.
캐묻는 것이 당연할 정도의 말을 들었으니.
하지만 히아젤키와 리헨은 침묵을 유지했고, 이쪽에서 먼저 꺼낸 얘기를 거부했다.
들어야 할 이야기가 있다면 샤를에게 직접 듣겠다고.
제 오라버니는…… 왕국을 떠나 정말 잘 지내고 있구나…… 하고.
그 생각에 안심되어서 저도 모르게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반과 시온이 사제 복장을 한 이를 대동하고 회장에 나타났다.
빛의 신전에서 몇 번 본 적은 있었지만, 그때와는 조금 달랐다.
황금 용이 새겨진 사제복에, 천을 둘러 얼굴도 가렸다.
그래서 확인하기는 어려웠지만 아마도 함께인 그 사제는 샤를일 것이었다.
그들은 천천히 연회장 밖으로 나섰다. 광장 앞에 모인 왕국민들이 내려다보이는 곳으로 갔다.
넓은 테라스 난간 앞에 선 그들을 몇몇이 뒤따라 나와 바라봤다.
“빛의 신전 사제가 오르엔 왕국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서 와주었다. 올 한해도 백성들이 건강히 보내길 바라는 마음뿐이다.”
마도구를 이용한 반의 목소리가 광장에 울려 퍼졌다.
가만히 서 있던 사제는 반이 무언가 속삭이자, 난간 앞으로 가 섰다.
사제를 발견한 사람들의 환호성이 쏟아졌다.
샤를이 천천히 양손을 모으자 그의 손에서 황금색의 빛이 뭉쳐졌다.
빛을 발견하자 순식간에 광장은 조용해졌다.
일찍 해가 지는 시기여서 하늘은 어둑어둑했고, 덕분에 그 빛은 더욱 눈에 띄었다.
샤를은 느릿하게 그 손을 그대로 하늘을 향해 들어 올렸다.
깊게 들이마신 숨을 후 뱉자, 민들레 꽃씨처럼 빛이 한순간에 사방으로 퍼졌다.
살랑거리며 그 빛은 하늘을 가득 메우고는 서서히 아래로 떨어졌다.
어떤 이들은 그 빛을 잡으려 하늘을 향해 손을 뻗었고, 어떤 이들은 눈을 감고 기도했다.
“……오르엔 왕국의 평화를 기원합니다.”
나지막한 그 한마디를 끝으로 샤를은 천천히 난간에서 물러났다.
그곳에서의 일이 끝난 것을 알고 다른 이들은 다시 연회장으로 돌아갔다.
그 뒷모습을 끝까지 지켜보고 있던 것은 히아젤키와 리헨, 그리고 벨리나였다.
샤를은 조금 지친 걸음으로 그들에게 다가갔다.
왕녀를 향해 조심스럽게 뻗어진 손.
그것이 벨리나에게 닿기 전에 시온이 쳐냈다.
“그 꼴로 있는 동안에는 접근하지 마.”
히아젤키와 리헨의 날카로운 시선이 시온을 향했지만, 왕자는 개의치 않았다.
“그러네요. 갈아입고 돌아오겠습니다.”
사제가 왕족과 관련이 있다는 소문이 도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샤를이 먼저 자리를 뜨자, 줄곧 얌전히 있던 리헨이 입을 뗐다.
“고작 그 정도 일이라며 깎아내리면서, 정작 필요할 때는 이용하시는군요.”
차갑게 쏟아지는 시선에 시온은 미간을 찌푸렸다.
“이럴 때라도 쓰여야지. 그렇게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건 저놈일 거다.”
돌아온 대답에 리헨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고는 시온이 자리를 뜰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정말 기분이 좋지 않은 듯 무언가를 참고 있는 듯했다.
“괜찮아?”
그의 안색을 살핀 히아젤키가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기분 나쁜 색이야…….”
그렇게 중얼거린 리헨은 제 눈가를 손으로 덮었다. 보고 싶지 않은 것을 보기라도 한 것처럼.
잠시 그대로 있던 리헨은 다시 눈을 뜨고는 히아젤키의 뺨을 붙잡았다.
그녀의 얼굴을 가까이 끌어당긴 리헨은, 마치 히아젤키만을 시야에 담으려는 듯 응시했다.
시야 가득, 조금도 색이 바래지 않은 꽃잎 같은 머리칼과 꿀을 발라놓은 듯한 눈동자를 채우니 조금 진정이 되는 것 같았다.
히아젤키는 천천히 손을 뻗어 리헨의 눈가를 어루만졌다.
카엘에게 이 눈에 관한 건 들은 적이 있었다.
“기분 나빠?”
리헨의 눈에는 보통 사람들과는 다른 것이 보인다고.
잠시 히아젤키만을 눈에 담던 리헨은 그대로 그녀를 끌어안았다.
“……히아를 봤으니까 이제 괜찮아. 히아는 색이 예쁘니까.”
“무리하지 않아도 되니까.”
가만히 리헨의 등을 토닥이는데, 히아젤키의 옷자락이 쭉 잡아 당겨졌다.
“응?”
“……그, 그만 연회장으로 돌아가셔야…….”
리헨의 따가운 시선을 외면한 벨리아는 두 사람이 떨어지자, 다시 히아젤키에게 착 달라붙었다.
리헨은 작게 혀를 차면서도 순순히 왕녀의 말대로 연회장으로 쪽으로 몸을 틀었다.
그녀는 손을 꼭 붙든 리헨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제 옆에 찰싹 달라붙은 벨리나를 힐끔거렸다.
“……있지.”
“응?”
“아까 그 사람은, 리헨의 눈에는 어떤 색으로 보였어?”
히아젤키의 뜬금없는 물음에 리헨은 조금 놀란 듯이 보였다. 잠시 고민하는 듯 입을 꾹 다문 그는 연회장 안으로 들어서고 나서 걸음을 멈췄다. 여전히 안에 있던 이들이 그들을 힐끔거렸지만, 가까이 다가오지는 않았다. 그 벌어진 거리를 힐끔 확인한 리헨은 그제야 입을 열었다.
“……색이 어둡게 물들어 있었어. 조금…… 평소랑은 다른 색이 섞여 있는 것 같았지만.”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뜬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리헨이 천천히 손을 들었다.
그는 살포시 그녀의 눈가를 손으로 덮었다. 그리고는 상체를 기울여 귓가에 속삭였다.
“히아의 색은 늘 선명해. 아름다워.”
부드럽게 웃는 히아젤키는 실로 아름다웠다.
그녀가 제 얼굴을 잡은 리헨의 손을 감쌌다. 그러자 다시 옷자락이 당겨졌다.
“…….”
이번엔 확실히 불만 어린 얼굴의 리헨이 왕녀가 잡은 히아젤키의 옷자락을 떼어냈다.
그리고는 그녀를 제 품에 꼭 안자, 벨리나는 다시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놔주세요.”
이번에는 왕녀도 꽤나 얼굴에 불만을 드러냈다. 하지만 리헨은 벨리나의 요구를 단박에 거절했다.
“싫습니다.”
“여, 여기는 연회장 안이라서 보는 사람도 많아요……! 샤를 오라버니도 곧 돌아오실 거예요.”
“누가 봐도 상관없습니다.”
단호히 돌아온 리헨의 답에 왕녀는 볼을 부풀렸다. 여전히 히아젤키의 옷자락을 놓지 않고 있어서, 가운데서 곤란할 뿐이었다.
“……일단 둘 다 놔 주면…….”
“안 돼.”
‘리헨도 은근히 고집이 있다니까…….’
도대체 무엇에 집착하는 건지 그녀로서는 조금 짐작이 어려웠지만.
“무슨 상황이야, 이거?”
세 사람의 우스꽝스러운 실랑이가 이어지던 중, 사제복을 갈아입고 나타난 샤를이 작게 웃었다.
“구해줘, 샤를.”
“오, 오라버니…….”
세 사람을 유심히 바라본 샤를은 픽 웃으며 벨리나가 붙잡은 히아젤키의 옷자락을 빼냈다.
그리고는 그녀를 끌어안은 리헨을 힐끔거렸다.
“뭐, 이건 됐나.”
그다지 관여할 마음도 들지 않는 듯 샤를은 고개를 홱 돌렸다.
“……리헨, 아무래도 사람들이 너무 쳐다보니까 놔 줘.”
“……응.”
끈덕지게 고집을 부릴 것만 같던 리헨은 히아젤키의 단호한 말에 순순히 물러났다.
“착하다.”
픽 웃은 히아젤키는 가볍게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고개를 살짝 떨어뜨린 리헨은 뺨을 붉게 물들이고는 수줍게 웃었다.
히아젤키는 저도 모르게 확 안아버릴 것 같아서 얼른 빙글 몸을 돌렸다.
“자, 샤를. 그럼 이제 갈까?”
“아…….”
그녀의 말에 샤를과 벨리나는 동시에 작은 탄성을 흘렸다.
서로 눈치를 보는 것이 훤히 드러났다.
히아젤키는 샤를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였다. 그리고는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여기 있으면 어차피 느긋하게 얘기도 못 하잖아?”
“……그건 그렇지만.”
샤를은 어딘가 내키지 않는 얼굴이었다.
물론 샤를이 내키지 않아 해도, 히아젤키는 처음부터 끌고 갈 생각이었으니 개의치 않았다.
그녀가 슬쩍 턱짓하니 리헨이 다시 샤를을 붙잡았다.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