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네 번째 생은 용의 딸로 삽니다-96화 (96/165)

#96화

* * *

빛의 신전은 평소보다 한층 고요한 것 같았다.

어쩐지 진이 다 빠진 것 같은 기분이라 샤를은 빨리 쉬고 싶었다.

‘히엘 님께 인사드리고 바로 쉬어야지…….’

온종일 몸을 움직인 것보다 더욱 피로했다.

걸음을 뗄 때마다 발 위에 납덩이가 얹어지는 기분이었다.

똑똑.

“네.”

짧은 허락이 떨어지고 샤를은 안으로 들어섰다.

히엘은 마치 그가 올 것을 알고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찻잔에 차를 따르고 있었다.

김이 피어오르는 것을 보니, 조금 전에 내린 것 같았다.

“앉아요. 따뜻한 차를 준비했거든요.”

‘인사만 드리고 바로 가려고 했는데…….’

하지만 납덩이가 달린 듯 무거웠던 몸이 조금은 가벼워진 것 같았다.

“그럼 실례할게요.”

픽 웃은 샤를은 히엘의 맞은편에 앉았다.

늘 차분하고, 아름답고, 처음 본 날부터 조금도 변하지 않은 히엘.

찻잔을 집어 드는 손짓 하나까지 고귀해 보였다.

“어땠나요? 만나 보니.”

“음…….”

온기가 전해지는 찻잔을 만지작거리기만 하며 샤를은 대답을 고민했다.

“……잘 모르겠어요.”

끝내 튀어나온 건 습관처럼 짓는 미소와 모르겠다는 대답이었다.

아직 샤를 안에서도 제대로 감정이 정리되지 않았으니, 그게 최선의 대답이었다.

물론, 하나 알 수 있는 건 히아젤키와 리헨의 친구가 되어서 다행이라는 거였다. 두 사람이 있어서 정말 다행이라고. 마음이 벅차오를 만큼.

“그럼 질문을 바꾸죠. 샤를, 그들이 밉나요?”

분명 원망한 적은 있었다. 형제들도, 아버지도, 자신도.

하지만…….

샤를은 작게 고개를 저었다.

“밉지 않아요, 히엘 님. 전 이런 성격이고, 미워하는 게 더 힘드니까요.”

“그럼요. 샤를은 평화주의자니까요.”

턱을 괸 히엘이 싱긋 웃었다.

“평화주의자……. 확실히 저한테 딱 맞는 말이네요. 싸울 바에는 양보하는 것이 편하고. 애초에 무언가 맞서 싸워야 할 정도로 갖고 싶다고 생각해 본 적도 없어요.”

“그건 모르는 일이죠, 샤를. 양보할 수 없는 무언가는 생기기 마련이에요.”

샤를은 가만히 찻잔을 응시하다가 다시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전 역시, 싸우는 건 싫어요.”

“네, 저도요.”

“제가 히엘 님을 닮았나 보네요.”

“자식으로 여기고 있어요.”

아무렇지도 않게 돌아온 대답에 샤를은 잠시 놀란 기색이었다.

설마 그런 대답이 돌아올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해서.

이미 너무 울어서 온몸의 수분이 부족할 지경인데도, 눈가가 화끈거렸다.

히엘은 손을 뻗어 샤를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넘겨주었다.

“샤를, 이제 그만…… 스스로를 용서해요.”

“……다시 살아 돌아오지 못해요.”

“순리니까요.”

“아직 어렸는데…….”

“사람인 이상, 반드시 언젠가는 죽어요. 모두 각자의 시간을 살 뿐이에요.”

하지만 샤를은 역시 그렇게 간단히 받아들이지는 못하겠다고 생각했다.

아마 평생에 걸쳐, 자신을 괴롭히겠지.

그건 그 아이가 원하는 일이 아니라는 말을 들어도 결국 달라질 건 없었다.

그래도 늘 이렇게 자책만 하며 지옥을 사는 건 아니니까.

샤를은 천천히 제 머리를 넘기는 히엘의 손을 붙잡았다.

“……전 죽을 때까지, 자책하면서 살겠죠.”

“샤를…….”

“그래도, 히엘 님을 만나서 웃으면서 살 수 있어요. 매 순간 웃기만 할 수는 없겠지만, 매 순간 자책하지는 않을게요.”

보고 있는 이마저 울 것만 같은 미소였다. 샤를의 눈가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지만, 흐르지는 않았다.

“……그거면 됐어요, 샤를.”

이토록 아픈 미소가 있을까.

그 모순이, 상처를 딛고 애써 짓는 미소가, 히엘에게는 너무도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신을 닮아, 인간을 사랑하는 히엘이었으니.

잠시 그 미소를 감상하던 히엘은 접시에 놓인 작은 쿠키를 들어 샤를의 입에 쏙 집어넣었다.

그에 새침한 얼굴을 하던 샤를은 맛있다며 쿠키를 집어 먹었다.

‘모든 것이 사랑스럽지만, 그래도 역시…….’

히엘은 눈가를 문지르고는 배시시 웃는 샤를을 지그시 바라봤다.

‘아픔이 없는 미소가 가장 좋다.’

10장. 너를 지키기로 맹세한 아이에게

* * *

성으로 돌아온 히아젤키는 어쩐지 피로가 몰려오는 것을 느꼈다.

정신적으로 꽤나 엄청난 하루를 보냈다고 봐도 좋았다.

“괜찮을까…… 샤를.”

잘 준비를 마친 그녀는 리헨과 함께 제 방 소파에 앉아있었다.

“걱정돼?”

“응…….”

“나도.”

히아젤키의 말에 리헨도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찌 걱정을 안 하겠는가.

혼란스럽고, 복잡하고, 그러다 결국엔 자책할 것 같았다.

“왕녀님이 혼자서 다 그 쪽지를 쓴 것처럼 보이게 만든 거……. 확실히 샤를을 움직이게 할 방법이었네.”

“응.”

“그다지 좋게 보이지는 않지만.”

“……다 각자의 방식대로 행동하는 거겠지.”

히아젤키는 가만히 리헨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리헨은 어떻게 생각해?”

“뭘?”

“샤를. 앞으로 그 다른 왕자들이랑 어떻게 지내게 될까.”

“……샤를이 결정하겠지.”

어찌 되든, 그 관계가 순탄하지만은 않을 것이 확실하다.

히아젤키는 가족을 잃었던 적이 없었다.

늘 제가 먼저 죽었기에.

가까운, 마음을 내어준 누군가의 죽음이 없었으니 감히 그 심정을 짐작할 수도 없었다.

“……마음 아프겠다.”

결국에 드는 생각은 그거였다.

얼마나 그 마음이 찢어지고 아플까.

상상만으로도 이렇게 아픈데, 실제로 겪는다면 아마 버티지 못할 것 같았다.

이미 오래전이라고 해도, 샤를이 저리 아파하는 것을 보니.

‘……과거 부모님들은 이렇게 아파하진 않았겠지…….’

잃었을 때 견딜 수 없을 만큼 아픈 건, 그만큼 사랑했을 때의 이야기일 테니까.

“괜찮아.”

단단한 어깨에 기댄 머리를 리헨이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안 아팠으면 좋겠다.”

“응.”

히아젤키는 천천히 눈을 깜박였다.

훈련도 쉬고, 몸을 격렬히 움직인 것도 아닌데 정신적으로 피로했다.

몇 번이나 울어버리는 벨리나와 샤를을 달래느라 이쪽마저 정신이 너덜너덜할 지경이었다.

두 사람의 이야기에 과하게 몰입한 탓에 그녀마저 마음이 아팠다.

물론, 샤를은 소중한 존재이니 그가 아파하는 것을 보는 것은 괴로웠다.

“히아, 피곤할 테니까 그만 눕자.”

“……응. 리헨도 얼른 쉬어.”

리헨은 곧장 히아젤키를 침대에 눕히고는 이불을 꼼꼼히 덮어주었다.

“잠드는 거 보고 갈게.”

“됐어. 리헨도 피곤하잖아.”

“난 괜찮아.”

“안 돼.”

짐짓 엄한 얼굴로 말하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리헨이 작게 웃었다.

“오늘 그 왕자들한테 너무 예쁘게 웃어줘서 말 안 들을 거야.”

심술부리는 듯한 말투에 히아젤키는 웃음이 터졌다.

깊이 가라앉았던 기분이 조금은 나아지는 듯했다.

그녀의 머리를 부드럽게 넘긴 리헨이 천천히 상체를 숙였다.

그의 입술이 살포시 이마에 와닿았다.

기분 좋은 접촉에 히아젤키는 눈을 감았고 돌연 벌컥, 하고 문이 열렸다.

물론 이 성에서 이렇게 문을 벌컥벌컥 열 사람은 한 명뿐이었다.

“……뭐 하는 거냐?”

그 낮은 목소리에 리헨은 천천히 자세를 바로 했다.

히아젤키는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는 손으로 제 이마를 가렸는데, 리헨은 덤덤했다.

“피곤할 것 같아서 그만 자라고 했습니다.”

“그냥 인사처럼 보이지는 않았다만.”

“애정을 담은 인사였으니까요.”

“잠……!”

말리기도 전에 말을 하는 리헨 때문에 히아젤키는 손으로 눈가를 덮었다.

‘차라리 보지 말자…….’

아직 카엘에게 제대로 얘기하기 전이었다.

“……애정을 담은 인사는 내가 더 많이 했다.”

“……그래서 저도 했습니다.”

“허락한 기억은 없다만.”

“그 부분은 히아가 허락하면 되는 것 아닌가요?”

두 사람이 제대로 된 대화를 할 리가 없다는 생각에 히아젤키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파파, 어쩐 일이에요?”

화제를 전환하고자 물은 것인데, 더욱 카엘의 신경을 건드린 모양인지 그가 미간을 좁혔다.

“리헨은 무슨 일이 있어서 이곳에 있었나?”

“네? 아니, 그게…….”

“나는 무슨 일이 있어야 네 방에 오는 건가?”

“파파, 그게 아니라…….”

“…….”

입을 꾹 다문 카엘은 신경질적인 분위기를 풀풀 풍겼다.

톡, 건드리면 쾅! 하고 터질 것만 같은 분위기에 히아젤키는 숨이 막히는 듯했다.

“저…….”

“일단 늦었으니 방으로 돌아가 쉬어라.”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만 같아서 그녀가 막, 말을 꺼내려는데 카엘이 한 발 더 빨랐다.

“카엘 님, 전 히아를…….”

리헨은 조금도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얘기를 꺼내자, 카엘이 손을 들어 제지했다.

“그만. 얘기는 내일 하도록 하지.”

“…….”

세차게 요동치는 동공, 혼란스러움을 감추지 못하는 표정과 이마를 짚은 손.

온몸으로 동요를 표출하는 카엘을 보니 리헨도 더는 말을 꺼낼 수 없었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살짝 고개를 숙인 리헨은 히아젤키와 슬쩍 눈빛을 주고받고는 방을 나섰다.

그의 방은 바로 옆 방이니, 문이 열고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침묵이 맴도는 가운데, 카엘은 여전히 문가에 서 있었다.

“저기, 파파…….”

침묵을 견디다 못한 히아젤키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와 동시에 카엘이 문밖으로 손을 뻗었다. 그러자 잠시 후, 멀리서부터 비명이 점점 가까워졌다.

“으아악!”

복도를 한순간에 날아온 알버트는 카엘의 앞에서 멈춰졌다.

“알버트.”

카엘이 손을 내리자, 그 앞에 내려진 알버트가 비틀거리며 문을 짚었다.

가쁜 숨을 내쉬는 것이, 너무 가냘파 보였다.

“헉, 주, 주인, 님……. 어쩐, 어쩐 일로…….”

식은땀이 흐르고 눈물이 찔끔 맺힌 것을 보니 진정한 공포를 맛본 것 같았다.

“오늘부로 히아의 방문 앞을 지켜라. 아니, 하녀들에게 히아의 잠자리를 지키도록 해.”

“네? 잠깐, 파파!”

“오늘은 리사에게 지키도록 해라.”

그것 때문에 이렇게 요란한 방식으로 자신을 부른 것이냐고 묻고 싶은 눈치였지만, 알버트는 이성을 부여잡았다.

“예, 예……. 주인님.”

“그만 가 봐.”

정말로 단지 그걸 전하려고 이 밤에 갑자기 끌려왔다고 생각하니 알버트는 진짜 눈물이 찔끔 났다.

“히아, 너도 그만 자라.”

“잠깐 기다려요!”

알버트를 보내고, 인사를 건넨 카엘은 히아젤키의 방을 나서려고 했다.

그녀는 재빨리 달려가 카엘을 붙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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