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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번째 생은 용의 딸로 삽니다-132화 (132/165)

#132화

화들짝 놀라 뒤돌아본 히아젤키와 유리는 무덤덤한 얼굴로 자신들 뒤에 선 카엘을 발견했다.

경악한 유리는 제 입을 틀어막았고, 히아젤키는 고개를 기울였다.

“파파? 여긴 어떻게…….”

“산책 중이었다.”

그렇게 대답하며 카엘은 앞에 선 귀족 영애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인생 중 가장 위압감을 느꼈던 순간을 꼽으라면, 아마 그들은 망설임 없이 지금을 떠올렸을 것이다.

살면서 본 적도 없는 커다란 벽에 가로막힌 기분이었다. 사방이 그 벽으로 가득 차, 답답한 공간에 갇힌 듯한 갑갑함.

짓누르는 듯한 존재감에 위압감을 느꼈다.

선명한 붉은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치자, 마치 숨기고 싶은 모든 것이 까발려지는 기분이었다.

호흡마저 버거워질 정도의 위압감에 시선을 피하고 싶은데도, 그 붉은 눈동자에서 눈을 돌릴 수 없었다.

“어차피 다 같은 인간이다.”

짧게 한마디를 던진 카엘이 시선을 돌리자, 영애들은 그제야 참았던 숨을 토해냈다.

온몸을 사시나무 떨듯 떠는 그들을 힐끔거린 유리는 곧 그들에게서 등을 돌렸다.

“마중 나가겠다던 이는 찾았나?”

“아.”

잠시 제온의 존재를 잊고 있던 히아젤키는 살짝 고개를 저었다.

“아직이요.”

“그런가.”

히아젤키는 도르륵 눈을 굴려 주변을 살폈다.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이 많았다.

인간이 많은 곳은 용들이 그다지 달가워하지 않으니, 카엘이 산책할 만한 환경은 아니었다.

히아젤키는 카엘을 올려다보다 슬쩍,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아직도 제 뒤에 선 영애들을 힐끔거렸다.

그러자 그녀의 시선을 따라 다시 그들에게 시선을 던진 카엘이 날이 선 목소리로 물었다.

“안 가고 뭐 하지?”

당장 눈앞에서 꺼지지 않으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는 말로 들렸다. 흠칫한 호위가 제 아가씨들의 앞을 가로막았지만, 그런다고 달라지는 건 없었다.

“가, 가요.”

“빨리.”

다급히 호위를 잡아당기며 그 영애들은 금세 자리를 떴다.

앞으로는 감히 유리가 모시는 주인을 그저 그런 귀족 취급하지 못할 것이다. 황족보다도 더 대단하다고 조금의 흔들림 없이 말하던 유리를 떠올린 그들은 두려움에 고개를 떨궜다.

그 앞에 서니 자신들이 한낱 인간으로 느껴졌다.

그들이 조급하게 멀어지는 걸 힐끔거린 유리는 ‘흥’ 하고 코웃음 쳤다.

감히 이 대륙의 전설로 불리는 용을 욕보이다니, 유리가 보기에는 목숨을 거두어달라고 애원하는 꼴이었다.

“그래서, 찾는다던 그 기사는 어디 있지?”

“아, 그게…….”

말끝을 흐리며 유리와 히아젤키는 다시 주변을 살폈다.

“가게가 분명, 이 근처의…….”

위치가 적힌 쪽지와 근처 건물을 번갈아 바라보던 그들의 앞에, 곧 포장된 커다란 상자를 든 제온이 나타났다.

제온은 질린 얼굴로 품에 안은 상자를 내려다보다가 히아젤키 일행을 발견하고는 재빨리 다가왔다.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이제 괜찮으신 겁니까? 유스턴 가문을 방문하셨던 겁니까? 그런데 이곳에는 왜…….”

제온은 놀란 얼굴로 다가서 쉴새 없이 질문을 쏟아 냈다.

“그만!”

그 질문을 끊어낸 유리는 질린 얼굴로 제온을 바라보다 얕은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하나씩 물어보는 게 좋을 것 같네요.”

“아.”

“그게 가지러 왔다는 선물인가요?”

유리의 물음에 제온은 손에 든 상자를 내려다보고는, 이번에는 그가 질린 얼굴을 했다.

“전 반대했습니다.”

“왜 그러세요? 무슨 선물이길래…….”

“지금 이곳에서는 열지 않으시는 걸 추천합니다.”

비장한 제온의 말에 손을 뻗던 유리가 멈칫했다.

“이, 일단 돌아가죠.”

당황스러움을 채 감추지 못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거리 한가운데 계속 서 있을 이유도 없었으니.

다시 마차를 타고 유스턴 저택으로 돌아간 그들은, 훈련장으로 곧장 돌아가지 않고 응접실로 향했다.

제온이 든 상자를 먼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물론, 저택에 도착함과 동시에 리헨에게 그들이 돌아온 사실은 알렸다. 걱정하고 있었을 테니까.

“히아.”

소식을 듣자마자 훈련장에서 달려온 리헨은 곧장 히아젤키를 품에 안았다.

“다녀왔어, 리헨.”

그녀가 무사하다는 것을 품 안에서 확인하려는 듯 리헨은 히아젤키의 허리와 머리를 힘껏 감싸 안았다.

리헨이 어떤 불안을 안고 있었는지 아는 카엘은 말없이 두 사람을 지켜보다 이내 고개를 돌렸다.

“그래서, 그 안엔 뭐가 들었지?”

깔끔하게 포장되어 리본으로 묶인 큰 상자. 제온은 그것을 응접실의 티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전 반대했습니다.”

리헨의 등을 토닥인 히아젤키는 슬쩍 고개를 돌려 그쪽을 바라보았다.

처음 보았을 때는 뾰족뾰족 가시가 난 분위기였는데, 못 본 사이 많이 둥글둥글해진 것 같았다.

“우리도 보자.”

히아젤키가 어깨를 들썩이며 말하니 리헨은 그녀를 품에서 놓아주었다.

그리고는 유리와 카엘이 지켜보는 큰 상자 가까이 다가갔다.

“뭐길래 반대했다고 그래요?”

“…….”

유리가 의아하게 묻자 제온은 슬쩍 고개를 돌려 그 시선을 피했다. 상자를 열 생각이 없는 듯 제온이 물러서니 유리가 대신 그것을 열었다.

상자 안에는 곱게 개어진 한 쌍의 잠옷이 들어 있었다.

“잠옷?”

“그냥 잠옷인데 뭘 자꾸 반대했다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유리가 안에서 잠옷을 꺼내 들었다. 고급 소재로 만들어져 감촉이 좋았다.

‘오, 고급 소재.’ 하고 작게 중얼거리던 유리는 꺼내든 잠옷 아래에 얇은 천이 덮인 걸 발견했다. 유리가 그걸 향해 손을 뻗는 걸 본 제온은 차마 볼 수 없다는 듯 손을 들어 제 눈가를 가렸다.

“이건…….”

같은 디자인의 남성 잠옷과 여성 잠옷. 그리고 그 아래에 또 한 쌍의 잠옷이 있었다.

위에 놓였던 건 평범하게 고급 소재로 만들어진 훌륭한 잠옷이었다. 하지만 그 아래에 감춰져 있던 잠옷은 아무리 보아도 무언가 문제가 있는 듯했다.

“……이건 왜 이렇게 생겼어요?”

지나치게 천이 부족하고 속이 비치는 얇은 소재로 이루어진 잠옷. 그것을 향해 히아젤키가 고개를 기울이며 손을 뻗었다. 그러자 카엘과 리헨이 동시에 그 손을 붙잡아 제지했다.

리헨의 얼굴은 불이라도 붙은 듯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눈을 말똥말똥 뜬 그녀가 의아한 시선으로 다시 그 잠옷을 바라보니, 유리가 다시 상자의 뚜껑을 덮었다.

“……전 진짜 반대했습니다.”

줄곧 눈을 가리고 이 상황을 회피하던 제온이 나지막이 말했다. 상자를 다시 덮고 나서야 눈가를 가렸던 손을 내렸다.

“…….”

카엘은 싸늘히 식은 눈으로 뚜껑이 덮인 상자를 응시했다.

카엘과 리헨, 그리고 유리까지 말없이 그 상자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얕은 한숨을 내쉰 유리는 팔을 걷어붙이고 몸을 풀었다.

“……당장 가서 다 때려눕히고 오겠습니다.”

“허락하지.”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는 유리에게 카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제온은 슬쩍 눈치를 살피다가 서둘러 유리를 따라나섰다.

유리의 뒤를 이어서 들어온 알버트는 티 테이블에 놓인 커다란 상자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다녀오셨습니까, 주인님. 이건…….”

“치워라.”

“예? 아, 예…….”

알버트는 얼결에 대답하면서도 눈치를 살폈다.

히아젤키는 그저 멀뚱멀뚱 서 있었고, 리헨은 금방이라도 터질 듯이 얼굴을 붉히고 있었다. 그리고 카엘은 어째서인지 심기가 불편해 보였다.

알버트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티 테이블의 상자를 들고 다시 응접실을 나섰다.

어쩐지 조금 미묘한 공기에 히아젤키는 고개를 기울이며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유스턴의 기사들도 결혼식에 초대하고 싶다고 생각했었는데, 어때요?”

“안 돼.”

“그건 안 되겠구나.”

물론 리헨도 카엘도 동시에 고개를 저었지만.

* * *

“푸하하하!”

유스턴 가문에서 돌아온 직후, 리헨과 카엘은 알버트가 그 괴상한 잠옷이 든 상자를 챙겨온 것을 보고 각자 미묘한 얼굴을 했었다.

그리고 성큼 코앞으로 다가온 히아젤키의 생일에 맞춰 성을 방문한 지엘이 그때의 일을 듣고 박장대소를 하고 있었다.

배를 붙잡고 떼굴떼굴 구르는 모습에 미간을 찌푸린 카엘이 결국 지엘을 걷어찼다.

“아악!”

얻어맞은 곳을 문지르며 몸을 일으킨 지엘은 얼마 참지 못하고 다시 키득거리며 웃었다.

“그래서? 그 잠옷은 어떻게 했어?”

“버렸다.”

“아, 일단은 제 방에…….”

무심코 대답하던 히아젤키는 ‘합’하고 제 입을 틀어막았다.

“무엇이 어쩌고 어째……?”

무시무시한 얼굴로 되묻는 카엘의 시선을, 그녀는 슬쩍 고개를 돌려 피했다.

“그, 그건 그렇고, 지엘, 이번엔 얼마나 머물 예정이에요?”

부자연스러운 얼굴로 화제를 돌리려는 히아젤키를 보며 카엘은 한숨을 내쉬었다.

“글쎄, 아가 생일이랑……. 봄에 있을 결혼식까지 있을까? 그보다 그 잠옷, 나도 구경해도 돼?”

“미친 건가.”

“아니, 그 기사들도 대단하네. 어떻게 그런 걸 준비할 생각을 한 거야? 목숨이 아깝지 않은가 보네. 유스턴 후작은 알고 있고?”

“어찌 되었든, 유리가 그들을 손보지 않았으면 내가 움직였을 것이다.”

카엘은 다시 생각해도 분노가 차오르는지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 모습을 본 히아젤키는 어색하게 웃으며 대신 해명했다.

“그, 그게 떠돌이 상인한테서 결혼하는 연인에게 하면 좋은 선물이라고 들었다나 봐요. 훈련만 하던 사람들이니 그 말을 철석같이 믿었고요.”

“아하, 그렇게 된 거구나.”

“어리석긴.”

여전히 불만히 가득한 카엘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감히 제 아가씨께 그런 잠옷을 들이밀었다며 분노한 유리가 훈련장에 들이닥친 덕에, 기사들은 카엘의 분노를 면할 수 있었다.

나중에 이 소식을 접한 후작의 얼굴이 얼마나 하얗게 질렸었는지는 보지 못했지만, 기사들은 한동안 반성의 의미로 엄청난 양의 훈련을 소화해야 했다고 들었다.

“뭐, 그 얘긴 이쯤하고. 아가, 결혼식 준비는 어찌 되어가고 있어?”

히아젤키는 화제가 다른 것을 옮겨간 것에 안심하며 웃었다.

“제가 하는 일은 없는걸요. 다들 준비로 바쁘지만요. 전 아무것도 하게 해 주질 않아서…….”

“몸은? 어디 아프진 않고?”

“아, 네. 아무렇지도 않아요.”

“훈련도 여전히 열심히 하고?”

“…….”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는 슬쩍 지엘의 시선을 피했다.

전처럼 검술 훈련에 열중하지는 않았다. 조금, 회의감이 들었던 건 사실이었다.

물론 실력을 유지하기 위한 수련은 계속했지만.

히아젤키의 상태가 조금 이상함을 눈치챈 지엘은 카엘에게 시선을 던졌다. 하지만 그는 입을 열 생각 없는 듯 눈을 감았다.

이제 카엘에게는 히아젤키가 먼저였다. 그 무엇보다도.

그녀가 어딘가에 가고 싶다고 한다면 데려갔다. 무언가 하고 싶다면 하게 해 줄 것이다. 그녀가 검술 수련을 전만큼 하지 않는다면, 그것도 괜찮았다.

무사히 제 곁에 머물러 준다면, 카엘은 그걸로도 만족했다.

카엘에게서 시선을 거둔 지엘은 잠시 턱을 매만지며 고민했다. 물론 그 고민은 길지 않았고, 곧 입을 열었다.

“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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