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화
“음. 리헨의 손에도 잘 어울리겠다.”
“그래. 그럼 이걸로 하자.”
적당한 두께의, 하얗게 반짝이는 보석이 박혀 있는 반지였다.
디자인을 받아든 주웰은 결의를 다진 얼굴이었다. 이 디자인을 토대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의, 최고로 아름다운 반지를 만들어야겠다는 사명감이 넘쳤다.
주웰은 알버트와 몇 마디 주고받더니 편히 쉬다 가시라며 먼저 응접실을 나섰다.
집사의 언질이 있었던 덕인지 다른 직원들도 모두 응접실 밖에서 대기했다.
응접실에 그들만 남게 되니 카엘이 야트막한 한숨을 내쉬었다. 기분이 좋아 보이기는 했지만, 여전히 인간을 마주하는 것을 그다지 마음 편히 여기지는 않았다.
‘디자인을 정했으니 볼일은 끝난 건가?’
편히 쉬다 가라고 했으니, 아마도 외출의 목적은 이미 달성한 것 같았다.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던 히아젤키는 슬쩍슬쩍 응접실 안을 힐끔거렸다.
그 모습에 카엘이 픽 웃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히아, 구경하고 싶으면 밖의 물건들을 구경하고 와도 된다.”
“정말요?”
“그래.”
카엘의 말에 히아젤키는 눈을 빛냈다. 응접실로 들어오기 전에 슬쩍 보았던 진열된 물건들을 제대로 구경해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모든 것을 신기해하고, 구경하며 거리를 걷는 것을 좋아한다는 걸 카엘은 너무 잘 알고 있었다.
히아젤키와 리헨은 곧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꼭 붙잡고 응접실을 나섰다.
굳이 보지 않아도 환하게 웃으며 알콩달콩할 것이 눈에 훤했다.
그래서 카엘은 편안히 소파에 앉은 채로 픽 웃었다.
“주인님, 서운하지는 않으십니까?”
그런 그에게 알버트가 조심스럽게 말을 붙였다.
“무엇이.”
“아가씨께서 결혼하신다니 말입니다. 우습게도 저는 주책맞게 조금 서운하지 뭡니까.”
인자한 표정의 집사를 힐끔 살핀 카엘은 살포시 눈을 감았다.
그런 건 분명 인간의 감정일 터인데, 제 안에 그러한 감정들이 있다는 사실이 이제는 그저 우스웠다.
처음에는 부정했다가, 신기했다가, 받아들이고 나니 감정은 더없이 커졌다.
다시 픽 웃음이 새어 나와, 카엘은 손을 들어 눈가를 덮었다.
“정말 우습지 않나.”
“예?”
“용이 인간과 같은 감정을 느낀다는 것이.”
용이 인간을 딸이라 여기고 이리 아끼는 것이. 그리도 죽여달라 매일 바라던 자신이, 이제는 제발 살려달라는 바람을 품은 것이.
어차피 죽을 수도 없는 몸이거늘 제가 대신 죽어도 좋으니 제발 저 아이가 살길.
조금이라도 오래, 제 곁에 머물기를 바란다.
카엘의 웃음이 어쩐지 서글퍼서 알버트는 입안에 쓴맛이 도는 것 같았다.
“……그것이 꼭 인간의 감정이라 정해진 건 아니지 않을까요.”
잠깐의 정적 끝에 이어진 알버트의 목소리에 카엘이 눈가를 가렸던 손을 내렸다.
“그저, 그저 감정인 것이 아니겠습니까. 인간이든, 용이든, 다른 무엇이든 말입니다.”
지금 카엘이 느끼는 감정이, 꼭 인간만 느끼란 법은 없지 않나. 집사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가만히 그 말을 곱씹던 카엘은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그것도 그렇군.”
인간이기에 느끼는 감정이 아닌, 모든 존재가 느끼는 감정이기에 지금 제 안에 있다고.
감정을 느끼고, 스스로 생각하고, 선택한다. 그게 인간이다.
카엘에게 인간이란 죄지은 이와 죄지을 이, 이렇게 두 부류뿐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 달랐다.
그렇게 어리석은 선택을 하는 인간은 소수일 거라고 생각했다.
지금껏 그가 보아온 죄인의 수를 보면 절대 소수라고 말할 수 없지만, 인구수를 따지면 분명 소수일 거라고.
“알버트.”
“예, 주인님.”
“자네도 얘기를 들었나? 히아가, 자신의 힘을 쓰는 것에 망설임이 없어졌다고 하더군.”
알버트는 일전에 그녀가 외출을 다녀온 후, 카엘에게 모든 상황을 보고하던 샤를을 떠올렸다.
히아젤키가 가진 힘에 대한 건 미리 들어 알고 있었다. 솔직히 알버트로서는 그녀가 힘을 쓰는 데에 망설임이 있는 것이 더 이해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이제는 변했다. 히아젤키는 악의를 품음으로써 겪을 고통을 알고 있어도 주저 없이 주문을 외웠다.
“어째서 변했다고 생각하느냐?”
이어진 카엘의 질문에 알버트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짐작 가는 부분이 전혀 없는 건 아니었지만, 쉬이 입에 담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카엘은 애초에 대답을 들을 생각이 없었던 듯, 곧 말을 이었다.
“지옥을 보았기 때문이겠지.”
그는 히아젤키를 구하러 지옥의 문을 넘어간 그날을 떠올렸다. 아무것도 없는 암흑. 그곳이 그가 갈 수 있는 한계였다.
하지만 그녀가 깨부수고 나온 지옥의 저편은 말할 수 없이 처참했다.
“그곳을 안다면, 죄를 짓는 선택을 할 인간은 없을 것이다.”
그 처참한 끝을 알고도 과연 죄를 지을 이가 있을까.
“모르니 그런 어리석은 선택들을 하는 게지.”
신은 인간에게 감정의 자유, 생각의 자유를 주었다. 다만 선택에 대한 책임은 본인이 지는 것.
그리고 그 책임을 지게 하는 것이 카엘의 일.
책임은 어쩌면 때로는 잔혹한 것이 아닌가. 그 잔혹함이 바로 자신일 테니.
카엘은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 천천히 눈을 감았다.
14장. 금기를 어긴 용에게
* * *
“아직인가?”
짜증이 섞인 목소리에 데이비드는 흠칫했다. 손끝이 잘게 떨리는 것을 애써 감추려 손을 꼭 붙들었다.
“아, 아직 그 뒤로 보육원에 찾아오지 않은 듯합니다.”
“준비는 마쳤겠지.”
“물론입니다, 황자 전하.”
니콜라스는 이제 초조함을 내비치기 시작했다. 처음 그녀를 목격한 날 이래 시간이 꽤 지나 있었다.
하루도 그 얼굴이 머릿속에서 사라진 적이 없었고, 당장이라도 끌고 와 눈앞에 두고 싶었다.
막상 눈앞에 두면 도망치고 싶을 것 같은 불길한 예감도 있었다. 모순되는 감정에 속이 울렁거렸다.
그래서 이 울렁거림으로부터 벗어나려면, 하루라도 빨리 눈앞에 데려다 놓고 확인하고 싶었다.
“후…….”
머리를 쓸어올린 니콜라스는 치밀어 오르는 짜증에 인상을 찌푸렸다.
그 얼굴에 데이비드는 다급히 말을 이었다.
“모든 준비는 마쳤으니, 다음번에 보육원을 찾으면 반드시 황자 전하 앞으로 끌고 오겠습니다.”
하지만 니콜라스는 기다릴 수 없을 것 같았다. 조금이라도 빨리 그 여자를 앞에 두고 이 울렁거림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 여자가 나타나면 기별하게. 나도 움직이지.”
그 말에 데이비드는 깊이 고개를 조아렸다.
“예, 황자 전하.”
* * *
어느새 날이 풀려, 봄이 훌쩍 다가와 있었다.
카엘이 인간을 바라보는 인식은 아주 조금 달라졌지만, 죄인을 지겨워하는 건 똑같았다.
“파파.”
전령새를 확인하고 성을 나서려던 카엘을 히아젤키가 불러세웠다.
“혼자 가려고요?”
고개를 기울이며 묻는 모습에 카엘은 그녀와 함께 나서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그래. 이번엔 혼자 간다. 히아, 네가 갈 만한 곳이 아니다.”
“그래요?”
함께 외출하는 것에 기대했었는지, 히아젤키는 애써 실망감을 감추었다. 하지만 카엘의 눈에는 훤히 보여서 그는 손을 뻗어 분홍색 머리칼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조만간 북쪽 숲으로 산책을 가도록 하지. 그곳은 사계절 내내 네가 좋아할 풍경이니까.”
“린도 데려가도 돼요?”
“물론이다.”
고개를 끄덕이는 카엘을 보며 히아젤키가 활짝 웃었다.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순순히 보내 주는 것이 어쩐지 조금 서운하다고 느끼며 카엘은 픽 웃었다.
“그래, 다녀오지.”
성을 나서니 정원을 지나 리헨이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그 옆에는 린이 쫄랑대며 따라다니고 있었다.
“아, 카엘 님, 외출하십니까?”
“그래.”
다녀오시라는 인사를 건네는 리헨을 가만히 바라보던 카엘은 슬쩍 린에게 시선을 돌렸다.
새하얀 작은 동물은 그 시선이 제게 향하니 리헨의 다리 뒤로 쏙 숨었다.
“여전히 너를 잘 따르는구나.”
“예.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린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유독 리헨을 잘 따랐다. 그에게 매달려 성까지 몰래 뒤쫓아왔을 정도였으니.
“조만간 북쪽 숲에 다녀올 생각이다. 그 조그만 녀석도 함께 말이다.”
“예, 알겠습니다.”
“그럼 다녀오지.”
조심히 다녀오시라며 고개를 숙이는 리헨에게 카엘은 가볍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리고는 곧 거대한 검은 용이 되어 하늘로 날아갔다.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자니, 린이 삐- 하고 울며 리헨의 다리에 머리를 비비적거렸다.
“그만 들어가자, 린.”
삐-. 대답이라도 하듯 운 린은 다시 쫄랑거리며 리헨과 함께 성으로 돌아갔다.
방으로 돌아가니 히아젤키가 방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히아? 거기서 뭐 해?”
그녀는 등 뒤에 무언가를 감추고 잔뜩 들떠서 리헨의 옆을 쪼르르 걸어오는 린을 향해 몸을 낮췄다.
“린, 내가 뭘 가져왔는지 볼래?”
삐?
작게 울며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는 모습이 지나치게 귀여워서 히아젤키는 재빨리 손에 든 것을 내보였다.
“짠!”
딸랑, 열매 모양의 작은 방울이 긴 줄 끝에 달려 있었다. 방울 소리에 린은 귀를 쫑긋 세웠다.
히아젤키가 그것을 양옆으로 휙휙 흔들자, 딸랑딸랑 방울이 울렸다. 움직이는 방울을 따라 고개를 돌리는 모습이 귀여워서 그녀는 배시시 웃었다.
물론 리헨은 린과 놀고 있는 히아젤키가 귀여워 웃었지만.
히아젤키의 옆에 함께 쭈그리고 앉은 리헨이 물었다.
“린의 새로운 장난감?”
“응! 방울을 좋아하는 것 같아서.”
눈여우의 습성상 열매도 좋아하니 특별히 열매 모양으로 된 장난감으로 골랐다.
기분 좋은 울음소리를 내며 린이 열매 방울을 향해 폴짝폴짝 뛰었다.
그 모습을 미소를 머금은 채로 지켜보던 리헨이 곧 히아젤키를 붙잡아 일으켜 세웠다.
“린이랑 노는 건 좋지만, 방에 들어가서. 복도는 쌀쌀해.”
“이제 날도 많이 풀렸는데.”
“감기라도 걸리면 어떡해.”
“하지만 난 감기에 걸린 적이 없는걸?”
자랑이라도 하듯 가슴을 쭉 펴고 말하는 히아젤키를 리헨이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순식간에 그녀의 뺨에 입을 맞췄다.
쪽, 찰나 입술이 머물고 간 뺨은 금세 붉게 물들었다.
“그래도 걱정되니까 들어가자?”
“……응.”
순순히 리헨을 따라 방으로 들어서는데, 사이좋은 둘을 질투라도 하는 것처럼 린이 히아젤키의 옷자락을 물고 늘어졌다.
“린, 그러면 히아 옷이 망가지잖아.”
리헨이 그런 린을 제지하자, 린은 뻗어오는 그의 손을 살짝 앙, 물고는 홱 고개를 돌렸다. 그러더니 침대 아래로 쏙 숨어버렸다.
“삐졌네.”
“응, 린 삐졌다.”
히아젤키는 아쉬운 얼굴로 침대 앞에서 열매 방울을 흔들었지만, 린은 나오지 않았다.
리헨은 조금 시간이 지나면 다시 나올 거라며 히아젤키를 일으켜 세웠다.
날이 많이 풀려 봄이 다가오니, 둘의 결혼식이 정말 코앞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