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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번째 생은 용의 딸로 삽니다-152화 (152/165)

#152화

“그러니까 살아줘요, 아빠.”

죽음을 바란다니, 그건 너무 슬픈 일이다. 다른 선택지를 모두 빼앗고, 얼마나 몰아붙였으면 그리도 간절히 죽음을 바랄까.

그래서 히아젤키는 애타게 말했다. 부디 살아달라고.

물론 카엘은 더 이상 죽음을 바라지 않았으니, 그녀가 이러는 이유를 알지 못했다.

붉은 눈이 희미하게 빛을 머금으니 카엘은 곧 히아젤키가 이러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얕은 한숨을 내쉰 카엘은 매달리는 히아젤키를 부드럽게 품에 안았다.

“걱정 마라, 살 테니. 네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토닥이는 손길에 그녀는 눈물을 쏟으며 더욱 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살아줘요, 아빠…….”

계속해서 같은 말을, 다 쉬어버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래서 카엘은 히아젤키를 가만히 토닥이며 그녀가 진정되기를 기다렸다.

“줄곧 네 곁에서 살아갈 테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더 이상 죽음을 바라지 않는다.”

자신이 이제는 살고자 한다고 몇 번이고 속삭여주며.

한참이나 지나서 진정된 히아젤키는 카엘의 손을 꼭 잡은 채로 천천히 걸음을 뗐다.

사방이 주황빛으로 물들고 구름 위를 걷고 있었는데, 카엘과 만나고 나서부터는 다시 끝도 없는 어둠이었다. 그래도 손에 이 온기가 있다면 아무것도 불안하지 않았다.

오히려 불안해 보이는 건 카엘이었다.

“후…….”

“왜요, 파파?”

주변을 살피던 그가 얕은 한숨을 내쉬니 히아젤키가 물었다. 카엘은 무언가 대답하려다 말고 다시 입을 다물며 눈썹을 치켜올렸다.

“왜 아빠라고 부르지 않지?”

“네?”

“아까는 아빠라고 부르지 않았느냐.”

“그, 그건…….”

거의 무의식중에 나온 호칭이라 의식하고 부르려니 조금 부끄러웠다. 뺨을 붉히며 입술을 오물거리던 그녀는 조그만 목소리로 웅얼거리듯 말했다.

“……아빠.”

“그래.”

한 번 마주하고 불러보니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다시 혀 위에서 ‘아빠’라는 호칭을 굴려 보던 히아젤키는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좋구나.”

“파파라고 부르는 건 싫었어요?”

“그렇지 않다. 네가 부르는 건 무엇이든, 그 의미가 아비라면 다 좋구나.”

카엘은 평소에도 히아젤키에게는 다정했지만, 이번엔 어쩐지 꿀이 크게 한 스푼 더해진 듯한 느낌이었다.

한없이 다정한 눈빛으로 그녀를 내려다보던 카엘은 이내 고개를 돌리며 주변의 어둠을 훑었다.

“그런데 조금 문제가 있구나.”

“어떤 문제요?”

살짝 굳어진 얼굴로 어둠을 살핀 카엘은 더 힘주어 히아젤키의 손을 붙잡았다.

“돌아가기가 힘들겠다.”

“네? 왜요?”

“돌아갈 길을 찾을 수가 없어서.”

* * *

“이렇게 하면, 두 사람의 길잡이가 되어줄 수 있겠군.”

새하얀 문장이 새겨졌다가 금세 사라진 제 손등을 리헨이 잠시 내려다보았다.

그 무無의 공간으로 가는 문은 시엘이 관리하지 않는다고 했다. 하지만 관리하지 않는다고 해서 갈 수 없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리, 리헨 아가 혼자 보내려고? 그래도 되는 거야? 괜찮은 거야?”

리헨을 콘피니움 밖으로 인도하는 시엘을 따라나서며 지엘이 안절부절못하며 물었다.

귀찮다는 듯이 손을 내젓기만 한 시엘은 지엘이 원하는 대답을 주지는 않았다. 그리고 콘피니움 밖으로 리헨을 데리고 나와서는 구름이 펼쳐진 그 앞에 멈춰 섰다.

“두 사람이 만났을지는 모르겠으나, 혹여 두 사람을 발견한다면 길잡이가 되어 함께 돌아오도록 하라.”

“예, 시엘 님.”

“잠깐만, 잠깐만, 이거 진짜 괜찮은 거야? 내가 같이 가야 하는 거 아니야?”

“네놈이 같이 갈 수는 없다. 괜한 일을 늘릴 생각 말고 얌전히 있어라.”

달달 떨며 시엘의 옷자락을 움켜쥔 지엘이 불안한 얼굴로 리헨을 바라보았다.

잡아당겨지는 옷자락이 귀찮은 듯이 시엘이 미간을 찌푸리며 떨쳐내려 했지만, 지엘은 더 달라붙었다.

그를 떨쳐내는 것에 실패한 시엘은 얕은 한숨과 함께 손을 뻗었다.

“무無의 공간은 인간의 마음을 해치지. 조심하는 게 좋을 거다.”

“뭐라고? 그럼 더더욱 혼자 보내면 위험하잖아!”

“그렇다고 네가 들어가는 건 안 된다. 그건 일이 더 복잡해지니까.”

시엘이 손을 뻗은 방향에서 구름이 솟아오르더니 문이 생겨났다.

울상을 지으며 발을 동동 구르는 지엘을 돌아본 리헨은 옅게 웃으며 문 앞에 섰다.

“그 안에 들어간 건 네 선택이니, 결과가 어찌 되어도 받아들여야 할 게다.”

“예, 시엘 님.”

“야! 너 자꾸 무섭게 그런 말 할래? 리헨, 무사히 둘을 데리고 돌아와야 한다? 응? 꼭 돌아와야 해?”

어미를 잃은 아이처럼 리헨의 옷자락을 붙들려는 지엘의 손을 시엘이 찰싹 쳐냈다.

지엘이 훌쩍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작게 웃은 리헨이 구름으로 된 폭신한 문손잡이를 향해 손을 뻗었다.

“조심해야 해, 알았지? 무슨 생각이 들어도 아가랑 카엘 녀석 데리고 돌아올 생각만 해.”

지엘이 울먹거리며 하는 말에 리헨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꼭 함께 돌아오겠습니다.”

천천히 문을 열고, 리헨이 걸음을 떼니 시엘이 나지막이 말했다.

“조심해라.”

그 목소리에 안으로 들어서며 리헨이 슬쩍 뒤를 돌아봤다.

걱정 가득한 지엘의 옆에 선 시엘도 조금 긴장한 듯한 얼굴이었다.

“다녀오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구름문이 닫혔다. 지엘과 시엘의 모습이 사라지고 순식간에 한 치 앞이 안 보일 만큼 어둠이 닥쳤다.

아무것도 보이지도, 들리지도, 느껴지지도 않았다. 끝없이 펼쳐진 어둠에 손끝이 잘게 떨렸다.

한 걸음, 앞으로 내디디는 것조차 엄청난 두려움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이런 곳에 히아젤키와 카엘이 있는 거라고 되새겼다.

“후…….”

눈꺼풀이 파르르 떨려왔다. 긴 한숨을 내쉰 리헨은 눈을 부릅뜨고 어둠 속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아주 오래전의 기억이 덮쳐와서 리헨은 휘청거렸다. 그러면서도 걸음을 멈추지 않고 계속 어둠 속으로 나아갔다.

한 걸음, 한 걸음마다 체력 소모가 엄청난 느낌이었다. 기력이 쭉쭉 빨리고 당장이라고 무릎이 꺾일 것 같았다.

특별한 눈을 가진 탓에 마을 사람들이 기피하고, 홀로 남겨져 보내던 시간. 마을이 불타고 홀로 남겨져, 안간힘을 쓰며 시체를 옮기던 기억. 그리고 사라진 마을 사람 하나를 찾으러 나갔다 돌아오니 모아둔 시체가 다 사라졌을 때의 허무감.

그때의 감정이 선명하게 다시 새겨지는 기분이 들어서 리헨은 손까지 벌벌 떨며 힘겹게 앞으로 나아갔다.

숨을 쉬는 것마저 점점 버거웠지만, 그는 멈춰 서지 않았다. 오로지 히아젤키와 카엘을 찾겠다는 집념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귓가에서는 점점 그날부터 한참이나 리헨을 괴롭혔던 목소리들이 맴돌았다. 마을 사람들이 모두 죽었으니, 너도 굶어 죽어야 한다는.

내딛는 걸음에 차츰 핏물이 고이는 듯했다.

퀭해진 눈으로 고개를 흔든 리헨은 다시 한 치 앞도 분간할 수 없는 어둠을 걸었다.

이곳에서 어떻게 히아젤키와 카엘을 찾아야 할지 앞이 캄캄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시간이 지날수록 정신은 피폐해져 갔다.

“히아…….”

얼마나 입을 다물고 있었던 건지, 목소리가 갈라져서 나왔다. 아주 작은 목소리였지만, 소리 내어 불러보니 조금 머리가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난생처음으로 보았던, 색이 선명한 인간이자 가장 아름다웠던 소녀.

처음 만났던 날, 처음 이름을 불렀던 목소리, 처음 맞잡았던 손의 온기. 활짝 웃으면 어찌나 예쁜지 아무 생각도 하지 못하고 그저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던 자신.

어릴 적의 기억을 하나하나 꺼내 보니, 조금 전까지 버거울 만큼 괴롭히던 괴로웠던 시절의 기억들이 조금씩 희미해지는 것 같았다.

함께 여름 축제에 갔던 일이나, 검술 대회를 보겠다고 올리아 제국을 방문했던 일. 단둘이서 플로렌 산맥으로 소풍 갔던 일과 모두 함께 서쪽의, 리헨이 홀로 살아남았던 땅을 찾아갔던 일도 떠올렸다.

빛의 신전을 구경하고는 그녀에게 제 마음을 또렷이 입에 담아 전했던 일도.

히아젤키의 생일날 정원에서 반지를 건네며 청혼했던 일까지.

괴로움에 일그러졌던 표정은 어느새 옅은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함께 돌아가야 해.’

그러기로 시엘과 약속했다. 지엘도 무사히 돌아오라며 안절부절못했으니 반드시 돌아가야 했다. 하지만 홀로 돌아가는 건 아무런 의미가 없으니 꼭 히아젤키와 카엘도 함께 돌아가야 했다.

“히아, 카엘 님.”

조금 목소리를 높인 리헨은 온몸을 무겁게 짓누르던 압박감이 사라져 조금 편안하게 걸음을 내디뎠다.

“히아! 카엘 님! 어디 계십니까!”

몸이 가벼워지니 걸음은 점점 빨라졌고, 리헨은 어느새 달리고 있었다.

땅이 있는지 알 수도 없는 어둠이라 걸음을 내딛는 것 자체에 엄청난 공포감이 일었는데, 몸이 가벼워지니 망설임 없이 달릴 수 있었다.

“히아!”

다시 크게 히아젤키를 소리쳐 부르자, 멀리서 희미한 빛이 보였다. 그걸 발견한 리헨은 더욱 속도를 높여 달렸다.

“히아! 카엘 님!”

더 크게 두 사람을 부르니 희미했던 빛이 점점 사람 형태로 바뀌었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이 어둠 속에서 혼자 헤맸던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 감각이 무뎌졌지만, 굉장히 오랜만에 히아젤키를 만나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리헨!”

그리운 목소리가 들려서 리헨은 눈가가 뜨거워졌다.

단숨에 두 사람에게로 달려간 리헨이 히아젤키와 카엘에게 달려들었다.

카엘은 조금 의외인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픽 웃으며 리헨의 등을 토닥였다.

“괜찮아? 무사해? 어디 다치진 않았고?”

울먹이는 목소리가 다급히 물었다. 얼마나 걱정했는지, 어떻게 여기까지 오게 된 건지, 얼마나 힘들었을지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파서 히아젤키는 리헨의 팔을 꼭 붙잡았다.

“응, 괜찮아. 아빠도 나도 멀쩡해.”

그 대답에 리헨이 깊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여긴 어찌 온 것이냐? 인간이 쉬이 들어올 수 있는 곳이 아닐 텐데.”

들여보낼 수 있다고 한다면 시엘이겠지만, 리헨이 이곳에 들어오는 것을 허락할 것 같지는 않았다.

“시엘 님께서 문을 열어 주셨습니다.”

“……의외군.”

잠시 턱을 매만지던 카엘은 리헨의 머리를 가볍게 헝클었다.

“네가 고생이 많았겠구나.”

“아닙니다. 히아와 카엘 님께서 더 고생하셨을 겁니다.”

히아젤키의 뺨을 어루만진 리헨은 카엘에게 제 손등을 내보이며 급히 말했다.

“시엘 님께서, 저에게 길잡이가 되어드리라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에 카엘은 못 이기겠다는 듯 픽 웃었다. 그리고는 리헨이 내민 손을 붙잡아 그 손등을 쓸었다.

“빚을 졌군.”

나지막한 중얼거림과 함께, 손등에서 하얀 문장이 빛을 발하더니 곧 일직선으로 뻗어 나갔다.

“이걸 따라 나가면 되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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