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화
하지만 마법 사용을 금한 이 왕궁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마법을 사용했다고 한다면, 그럴 수 있을 만한 존재는 용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국왕은 이마를 짚으며 침음을 흘렸다.
만일 정말 그 ‘용’이라는 존재가 실존하고, 그 초대장이 그 존재와 관련된 이가 보낸 거라면 그는 벨리나를 막아설 수 없었다.
아끼는 아들이 다칠까 염려되어 보호받기를 바라며 용의 이름 아래에 존재하는 신전으로 보내놓고, 초대장은 거절할 수가 없다. 그건 필요할 때만 찾고, 아무것도 내어주지 않겠다는 못된 심보였으니.
깊은 한숨을 내쉬는 아비를 보며 벨리나는 눈썹을 늘어뜨리며 웃었다.
“위험할 일은 없어요. 왕궁까지 데리러 오고, 바래다준다고 한걸요.”
그거라면 그도 조금은 안심할 수 있었다.
국왕은 얕은 한숨을 내쉬며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벨리나의 손을 살포시 붙잡았다.
“……아비가 무엇을 불안해하는지 너도 알겠지…. 미안하구나, 못난 모습만 보여서.”
“아니에요.”
다급히 고개를 저은 왕녀는 최대한으로 예쁘게 웃어 보였다.
부모가 자식을 걱정하는 건 당연하다. 형제를 잃은 아픔도 이렇게나 아픈데, 자식을 잃은 슬픔은 얼마나 더 클까.
무슨 말을 해도 아버지를 안심시킬 수는 없다는 걸 알았다. 그래도, 아주 조금이라도 그 불안을 덜기 위해 벨리나는 웃는 얼굴로 입을 뗐다.
“걱정하지 마세요. 샤를 오라버니도 결혼식에 갈 테니, 돌아오면 재밌는 이야기를 잔뜩 해드릴게요.”
* * *
“얘들아!”
펠컨 제국의, 샤를이 관리하는 보육원 중 한 곳. 히아젤키와 리헨이 몇 번이나 다녀가며, 이런저런 일을 함께 겪었던 아이들.
그 보육원의 원장이 초대장을 손에 들고 다급히 아이들을 찾았다.
“얘들아! 성에서 초대장이 왔어!”
“네?”
“성에서요?”
“무슨 성이요?”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는 수많은 물음표와 함께 아이들이 오도도 달려오자, 원장은 ‘아차차,’ 하고 중얼거리며 제 입술을 가볍게 두드렸다.
“샤를 사제님과 친분이 있으신 히아젤키 님과 리헨 님의 초대장이야.”
“누나랑 형이요?”
놀란 얼굴로 고개를 기울이는 아이들의 모습이 사랑스러웠다. 입매가 흐물흐물 풀어진 원장은 재빨리 초대장을 내밀었다.
“그래! 이것 봐, 결혼하신단다! 다 같이 그분들의 성으로 초대하시겠대!”
결혼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아이들은 무턱대고 환호부터 했다. 어쨌든 히아젤키와 리헨을 만날 수 있다는 뜻이니.
메리는 황홀한 얼굴로 꿈꾸는 듯이 두 손을 모으고 기뻐했다. 로이는 떨떠름한 얼굴이었지만, 미소가 채 감춰지지 않았다.
“결혼식에 초대된 거니까, 우리 다 같이 선물을 준비할까?”
“네! 좋아요!”
들뜬 아이들과 함께 원장은 한참이나 무슨 선물을 준비할지 얘기를 했다.
같은 초대장을 받은 메딜도, 유스턴 가문의 기사들도 기뻐했다. 특히 유스턴의 기사들이 환호하며 기뻐하는 바람에, 유스턴 가문은 잠깐의 소란이 일었었다.
* * *
봄날이 찾아온 성의 정원에 히아젤키는 느긋하게 지엘과 산책을 즐기고 있었다.
날짜가 성큼 다가온 만큼 설렘도 늘어났다. 날씨도 점점 따뜻해지니 마음이 부풀었다.
“아가는 봄을 좋아하지?”
“네! 뭐, 모든 계절을 다 좋아하지만요.”
봄은 꽃이 피어서, 여름은 싱그러운 데다가 리헨의 생일이 있어서. 가을은 알록달록 물드는 나무가 예뻐서, 겨울은 새하얗게 덮이는 세상이 아름다워서.
히아젤키는 모든 계절이 예쁘고 좋았다. 이렇게 멋진 성에서, 너무도 좋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그저 행복했다.
결혼식을 위해 성의 한쪽을 꾸미고 있어서 그쪽으로는 가까이만 가도 꽃향기가 가득했다.
“아가, 그쪽은 가면 안 돼.”
꽃향기에 이끌려 걸음을 옮기던 히아젤키를 지엘이 재빨리 막아섰다.
“조금만 보면 안 돼요?”
“어차피 결혼식도 금방이니까 조금만 참아. 자, 꽃을 보고 싶으면 저쪽에 피워줄게.”
결혼식을 올릴 성의 연회장과 그쪽 야외 산책로는 히아젤키가 얼씬도 할 수 없었다. 리헨의 출입은 물론, 그녀의 출입까지도 모두가 온몸으로 막았다.
히아젤키는 입술을 비죽이며 새침한 표정을 지었지만, 순순히 지엘을 따라 방향을 틀었다.
“참, 지엘.”
성의 앞쪽에 위치한 정원을 거닐던 히아젤키는 문득 떠오른 듯 지엘을 불렀다.
“응? 왜, 아가?”
“저 부탁 하나 해도 돼요?”
“부탁? 무슨 부탁?”
그녀가 무언가를 부탁하는 건 흔치 않은 일이라 지엘은 의외라는 얼굴로 얌전히 다음 말을 기다렸다.
봄 향기 가득한 정원을 훑은 히아젤키는 씩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결혼식 날에, 초대한 모두를 지엘이 데려와 줄 수 있어요?”
눈을 끔뻑이며 잠시 그 말을 곱씹은 지엘이 대번에 서운한 얼굴로 울먹였다.
“내가……. 이동 수단이 되었어…….”
서러움을 호소하며 지엘이 눈을 가늘게 떴다. 히아젤키가 조금 미안한 듯이 웃으며 올려다보고 있어서 새침한 표정이던 지엘은 금세 씩, 미소를 머금었다.
그리고는 그녀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말했다.
“당연히 들어주지, 누구 부탁인데.”
아마 그들 중, 히아젤키의 부탁을 거절할 수 있는 이는 없을 거라고 지엘은 생각했다.
“고마워요, 지엘.”
이 미소를 보고 있으면, 마치 이곳이 유일한 안식처 같았다. 이 땅에 계속 남아, 인간에게도 섞이지 못하고 그저 살아가야 하는 용들에게 주어진 유일한 마음의 위로.
“아가가 진짜 결혼하는구나…….”
성큼 예정한 날이 다가오며 그녀가 이리 결혼식 얘기를 꺼내니 새삼 실감이 났다.
어쩐지 조금 애달픈 목소리에 히아젤키는 지엘의 팔을 살포시 붙잡았다. 그리고는 수줍은 듯이 작게 웃으며 주변을 살피고는 속삭였다.
“지엘도 제게는 가족이에요. 움……. 삼촌……? 같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중얼거리는 말에 지엘이 웃음을 터트렸다.
“아가, 왜 의문형이야?”
“몰라요?”
웃음은 바람만큼 빠르게 퍼지니 금세 서로의 웃음이 옮아 두 사람은 까르르 장난을 치며 정월을 걸었다.
“뭐가 그렇게 재밌어?”
“아, 리헨!”
그런 두 사람에게 리헨이 다가왔다. 어깨 올라타고 있던 린은 지엘을 발견하고는 폴짝 뛰어내려 삐- 하고 울며 지엘에게 안겼다.
“오, 린도 같이 왔구나.”
린은 기분 좋은 듯이 지엘의 손에 머리를 부비적거렸다. 지엘은 대지의 용이라서 그런지 동물들에게 사랑받는 모양이었다.
‘아빠한테는 저렇게 애교 안 부리는데…….’
카엘에게 하는 건 애교라기 보다는 장난이었다.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히아젤키는 픽 웃으며 리헨에게 다가가 그 큼지막한 손을 붙잡았다.
“훈련 끝났어?”
“응. 훈련 끝나고 서재에서 공부 좀 하고 왔어.”
리헨의 대답에 히아젤키는 웃음이 새어 나올 것 같아서 입술을 꾹 물었다.
그가 지금 말한 공부가 어릴 적처럼 정치나 역사에 관한 공부가 아니라, 결혼생활에 관한 공부였으니.
게다가 유리가 붙잡고 이것저것 설명할 때면, 얼굴을 붉히면서도 열심히 경청했다.
리헨은 지엘의 손에서 마음껏 애교를 부리는 린을 보며 말했다.
“린을 숲에 데려갔다 오는 건 어떠냐고 카엘 님께서 그러셨는데, 히아도 같이 갈래?”
“정말?”
그는 지엘에게도 함께 근처 숲으로 나들이를 가겠냐고 물었고, 지엘은 기꺼이 그렇겠다며 기쁜 듯 웃었다.
그렇게 평화로운 날들을 보내며 그들은, 곧 맞이할 특별한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 * *
따스한 봄날. 꽃이 피고 선선한 바람이 부는 날 히아젤키와 리헨은 결혼식을 올리기로 했다.
메딜은 결혼식 며칠 전부터 성에 머물며 유리와 히아젤키를 꾸미는 일에 상의했다. 그리고는 결혼식 당일 아침, 히아젤키는 일찍부터 유리의 손에 끌려가 꽃잎을 띄운 목욕물에 몸을 담그고, 마사지를 받았다.
유리의 지시대로 다른 하녀들은 리헨을 꾸미는 일에 열중했다.
“그럼, 다녀올게?”
슬쩍 눈치를 살피며 묻는 지엘에게는 알버트가 대신 대답했다.
“다녀오십시오, 지엘 님.”
“그래.”
히아젤키의 배웅을 받지 못하는 것이 조금 서운한 듯했지만, 오늘은 특별한 날이니 지엘은 이해한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고는 성을 나섰다.
먼저 향한 곳은 오르엔 왕궁이었다. 왕녀가 혼자 지엘을 만나면 놀랄 거라며 샤를이 마중을 갔다는 얘기를 들었으니 지엘은 그곳으로 제일 먼저 갔다.
히아젤키가 미리 일러준 대로, 곧장 왕녀 궁으로 들어섰다. 하늘에서 툭 떨어진 지엘을 발견한 시녀 하나는 기겁을 하고 놀라 뒤로 자빠졌다. 소리를 지를 뻔한 것을 입을 틀어막고 주저앉았다.
지엘이 멀뚱멀뚱 시녀를 바라보고 있자니 그 시녀는 곧 마음을 추스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왕녀님을 찾아오신 손님이시죠?”
지엘은 아무런 대답 없이 가만히 그 시녀를 응시했다. 이 궁 안의 어떤 사람과도 말을 섞을 생각은 없었다. 그저 부탁받은 대로 왕녀와 샤를을 데리고 이곳을 벗어날 뿐.
그는 딱히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지만, 시녀는 곧 머리를 조아렸다.
“자, 잠시만 기다리시면 왕녀님을 모셔오겠습니다.”
시녀는 재빨리 걸음을 옮겨 어디론가 사라졌다. 지엘은 멀뚱히 서서 제가 내려선 왕녀 궁을 훑어보았다.
호화롭기보다는 침착하고, 평온한 분위기의 궁이었다. 정원도 제법 공들여 가꾸는 것 같았고.
나쁘지 않은 곳이라는 생각을 하며 잠시 기다리니, 곧 샤를과 왕녀가 나타났다.
“지엘 님,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이는 샤를을 본 지엘은 그제야 무표정하던 얼굴에 미소를 지었다.
“난 아가 부탁으로 온 것뿐이야.”
지엘은 샤를과 왕녀를 데리고 곧장 왕궁을 떠났다.
그다음으로 향한 곳은 펠컨 제국의 보육원이었다.
아이들은 처음 지엘을 만나는지라 주춤주춤하다가 샤를을 발견하고서야 안심했다.
그들을 모두 데리고 하늘로 올라간 지엘은 용으로 변한, 제 등에 모두를 태웠다.
처음엔 하늘에 떠 있는 걸로도 기겁하던 아이들이 용으로 변한 지엘을 보고는 하얗게 질려 파르르 떨었다. 그중에는 마냥 신이 나서 웃는 아이들도 있었지만.
결혼식에 참석한 손님들을 전부 태운 지엘은 마지막으로 올리아 제국의 유스턴 가문으로 향했다.
심판의 용을 모시는 가문이니만큼, 지엘의 등장에 그리 크게 동요하지는 않았다.
기사들은 지엘의 등에 타고 온 사람들을 보고는 기대 가득한 눈으로 지엘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에 슬쩍 눈살을 찌푸린 지엘은 성으로 갈 기사들을 한데 모았다.
지엘은 나무막대로 기사들 주위를 동그랗게 선을 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