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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번째 생은 용의 딸로 삽니다-163화 (163/165)

#외전 2화

남부의 항구 도시.

배가 많고 시원한 바람이 부는 곳이라 꽤 괜찮은 여행지였다. 육로를 통해 방문하여 배를 타고 떠나는 이들도 많았고, 배를 타고 방문하는 이들도 많았다.

그래서 그들은 마수 정화 의뢰가 오기 전까지는 느긋하게 그곳에서 머무르기로 했다. 여유를 만끽하며.

항구 도시에 도착하고도 꽤 시간이 지났는데, 계속 있어도 좋을 곳이었다.

“좋은 아침.”

잠에서 깨어난 리헨이 잠긴 목소리로 말하며 히아젤키를 끌어안았다.

고급 숙소에 방을 잡고, 유리와 오윈은 최대한 두 사람의 방을 찾지 않았다. 그들이 먼저 찾을 때만 움직였다.

“응, 좋은 아침.”

히아젤키는 어쩐지 이 잠긴 목소리가 좋았다. 그 누구도 듣지 못할, 저만 들을 수 있는 리헨의 목소리 같아서.

물론 밤 동안 듣는 목소리도 오로지 그녀만을 위한 목소리였지만.

괜스레 전날 밤의 일을 떠올린 히아젤키가 얼굴을 붉히며 이불 속으로 얼굴을 쏙 감췄다.

“왜 그래? 열나?”

그에 리헨이 따라서 이불 속으로 고개를 디밀며 물었다. 정말 아프기라도 할까 걱정스러운 얼굴이라 히아젤키는 하는 수 없이 웃었다.

“그냥, 좋아서.”

그렇게 답하며 리헨의 뺨을 손으로 감싸니, 그가 쪽, 하고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그만 일어날까? 오늘은 배를 타고 나가보기로 했으니까.”

“응.”

두 사람은 느릿하게 침대를 벗어나면서도 서로 웃으며 계속 장난쳤다. 그리고는 유리를 부르고 나서야 그들의 방을 찾아왔다.

방해하지 않으려는 목적인 건지 유리는 먼저 두 사람의 방을 찾지 않으려고 애썼다.

간단한 준비를 마치고 느긋한 아침 식사까지 하고 나서, 그들은 예정대로 뱃놀이를 위해 숙소를 나섰다.

최근 유리는 원하던 대로 마음껏 히아젤키에게 어여쁜 옷들을 입힐 수 있었다.

그리고 정식으로 ‘마수 정화’ 의뢰를 받기로 했으니, 그 일을 하러 갈 때는 메딜이 만들어준 기사복을 입기로 했다.

시원한 느낌의 하늘색 원피스와 굽이 너무 높지 않은 구두, 머리를 느슨히 묶어 늘어뜨리고는 챙이 넓은 모자까지 씌웠다.

“이번 여행, 따라오길 잘했어요. 원 없이 아가씨 치장을 하네요.”

“전 유리가 있어서 든든해요.”

히아젤키는 꾸미는 것에 큰 재능은 없는 것 같아서 배시시 웃었다. 전혀 꾸미지 않아도 그 미모는 감춰지지 않았지만.

그에 유리는 새침한 얼굴로 히아젤키의 등을 떠밀었다.

“어서 가요, 리헨님 기다리실 테니까요.”

“네!”

배를 타는 건 생전 처음이었다. 어딘가 이동을 해도 늘 카엘이나 지엘과 움직이니 하늘을 날아갔다.

가까운 곳에 갈 때도 그렇게 움직였으니, 하물며 바다를 건널 만큼 멀리 갈 때 배를 탔을 리가 없었다.

이전 생들에서도 뱃놀이할 만큼 여유롭지 못했으니 이번이 그녀의 첫 뱃놀이였다.

잔뜩 들뜬 히아젤키를 보며 리헨은 물론, 유리와 오윈까지도 흐뭇해했다.

뱃놀이 전용 배는 바다를 건너 짐을 실어 나르는 배와는 달라서, 선박장도 다른 쪽에 있었다. 커다란 배와 경로가 겹치면 위험하니 아니 떨어뜨려 놓은 것이었다.

“저희는 이쪽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 다녀오세요.”

“정말 같이 안 가려고요?”

재차 묻는 히아젤키에게 유리와 오윈은 고개를 저었다.

두 분이 오붓하게 뱃놀이를 즐기고 오시라며 등을 떠민 탓에, 배에 올라탄 건 노 젓는 이와 히아젤키, 리헨 뿐이었다.

귀족들이나 쓸 법한 뱃놀이용 작은 배라서, 화려하면서도 안락했다.

배를 타고 선박장을 벗어나, 큰 배들이 다니는 길을 벗어난 작은 배는 나무가 흐드러진 강가로 진입했다.

햇볕이 따사롭고, 물소리가 들려서 평화로웠다.

“어때?”

“응?”

“첫 뱃놀이.”

조금 장난스러운 리헨의 표정에 히아젤키는 싱긋 웃었다. 그리고는 그의 어깨에 살포시 머리를 기댔다.

“좋아.”

바람도 시원하고 햇볕 때문에 적당히 따뜻하며, 등을 기댄 쿠션도 폭신하고 모든 것이 완벽했다.

‘아빠도 같이 왔으면 좋았을걸.’

그렇게 생각했지만,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리헨과 함께 있는 시간도 너무나 소중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다음에는 카엘도 함께, 셋이서 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모두가 함께인 것도 좋으니까.

느긋하게 풍경을 구경하며 시간을 보내는데, 전령새 두 마리가 배로 날아들었다.

“어, 지엘이랑 히엘이 보냈네.”

각자 색이 다른 전령새들 다리에는 하얀 서신이 묶여 있었다. 그리고 히엘이 보낸 전령새는 작은 꾸러미도 붙들고 있었다.

히아젤키와 리헨이 재빨리 그것들을 받아들자, 새들은 포르르 히아젤키의 어깨에 내려앉아 지친 날개를 쉬었다.

“이건 뭐지?”

히엘이 보낸 작은 꾸러미를 보며 히아젤키가 고개를 기울였다. 리헨은 각각 전령새의 다리에서 풀어낸 서신을 펼쳤다.

“뭐래?”

지엘의 서신을 짧게 훑은 리헨이 그걸 그녀에게 넘겼다.

“지엘 님이 보내신 건 마수가 나타났다는 소식이고, 히엘님 서신은 좀 긴데…….”

꾸러미를 풀으려다 말고 히아젤키는 리헨이 펼친 히엘의 서신을 함께 읽었다.

서신과 같이 보낸 꾸러미는 마법 도구라고 덧붙여 설명이 적혀 있었다.

마수 정화 의뢰가 들어오면 곧장 연락을 취할 수 있도록 만든 물건이라고 하며, 험프리 가, 유스턴 가, 벨리나와 샤를에게도 하나씩 나누어 주었다고 했다.

그리고 그들에게 전한 건 소식을 전하기만 하는 용도로, 음성 전달만 가능한 것이었고, 히아젤키에게 보낸 것은 더 특별하다고.

마법으로 장소 이동까지 가능하게 만들었다고 쓰여 있었다.

‘이거…….’

서신을 확인한 히아젤키가 난감한 얼굴로 작은 꾸러미의 내용물을 확인했다.

작은 상자에 담긴 펜던트. 그것에 히아젤키가 가진 회중시계로 그녀의 힘을 주입하면 장소 이동까지 가능하다고 히엘은 설명했다.

작은 꽃 모양의 펜던트에 그런 기능까지 담았다는 것이 히아젤키는 그저 놀라웠다. 그리고 이걸 마법사들이 알면 뒤로 나자빠질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인간의 기술로서는 만들 엄두도 못 낼 아티펙트였으니.

“어떡할래? 지엘님의 서신을 보면 아직 딱히 의뢰가 들어온 건 아닌 것 같은데.”

리헨은 그녀의 목에 걸린 회중시계에 펜던트를 함께 걸어주며 물었다.

“가 보자.”

히아젤키의 대답은 곧장 돌아왔다.

첫 여행지인 이 남부 항구 도시에서 꽤 오랜 시간을 보냈으니, 이제는 다른 곳으로 움직여도 될 것 같았다.

언제까지고 있어도 좋을 것 같은 곳이었지만.

“다음에 아빠랑 같이 다시 오자.”

“그래.”

히아젤키의 말에 리헨이 미소를 머금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뱃사공에게 다시 선박장으로 돌아가 줄 것을 부탁했다.

“아가씨? 왜 이렇게 금방 돌아오셨어요?”

선박장에서 기다리고 있던 유리가 의아한 얼굴로 두 사람을 맞았다.

“전령새가 와서요.”

히아젤키의 양쪽 어깨에 앉아 움직일 생각들이 없어 보이는 두 마리의 전령새를 보며 유리가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일단, 옷부터 갈아입으시죠.”

유리는 얕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기껏 예쁘게 꾸몄는데, 곧 기사복을 입어야 했다. 물론 메딜이 만들어 준 그 기사복을 입은 히아젤키도 환호할 만큼 멋졌지만.

“곧장 가면 안 되는 거예요?”

“정식으로 마수 정화 의뢰를 받기로 하셨으니, 마수의 일로 움직이실 때는 기사복을 입으셔야죠.”

“알겠어요.”

곧장 숙소로 돌아간 그들은 짐을 전부 챙겨 나섰다.

지엘이 말한 곳은 그들이 있는 남부 항구 도시에서 한참이나 떨어진 대륙의 동쪽 땅에 있었다. 그래서 이동하려면 히엘이 알려 준 내용대로 펜던트에 회중시계의 힘을 주입해서 장소 이동을 해야 했다.

인적이 드문 곳으로 들어선 네 사람은 주변을 한 차례 살폈다. 그리고는 히아젤키가 회중시계와 펜던트를 둘 다 쥐고 주문을 외웠다.

* * *

동쪽의 어느 작은 왕국. 올리아 제국의 속국이기도 해서, 다른 곳보다 빠르게 험프리와 유스턴 가문에서 마수 정화 의뢰를 받는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그리고 그 의뢰에 움직이는 것이 용의 딸이라는 사람인 것도.

하지만 아무도 의뢰를 했다는 소식이 없어서 그저 지금까지의 대처대로 마수를 퇴치할 토벌대를 꾸리고 있었다.

지엘의 연락으로 그들이 벌써 마수가 나타난 숲에 들어갔으리라고는 꿈에도 모르고.

히아젤키와 리헨, 거기에 유리와 오윈까지 함께 지엘이 일러준 숲으로 이동했다.

지금까지 특별한 숲들을 꽤 보아온 터라 평범한 숲이 도리어 신선했다.

상쾌한 기분에 숨을 깊게 들이마신 히아젤키가 차분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숲은 이상하리만치 고요했다. 평범한 숲처럼 보였지만, 마수가 출현한 탓에 숲의 동물들이 모두 도망친 것이었다.

“저쪽.”

가만히 숲을 둘러보던 리헨이 어느 한 방향을 가리켰다. 곧은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니 아주 멀리에서 잔뜩 수그리고는 이쪽을 노리는 마수가 보였다.

리헨의 눈에는 스멀스멀 검은 기운이 풍기는 것이 보였다.

마수는 숲에 들어선 인간들인 히아젤키 일행을 발견하더니 곧 땅을 박찼다.

굶주린 야생 짐승이 사냥감을 발견한 것 같은 눈빛이었다.

유리가 곧장 히아젤키의 앞을 버티고 서며, 리헨과 오윈이 달려드는 마수를 검으로 막았다.

챙!

멧돼지가 마수화 한 것인지, 주둥이 옆에 거대한 뿔 두 개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그 거대한 뿔이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검과 부딪쳤다.

“잠깐, 유리! 제가 정화해야 하는데 막아서면 어떡해요!”

“아, 위험하다고 생각돼서 저도 모르게…….”

유리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슬쩍 비켜섰다.

히아젤키가 다가서니 마수는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났다. 그러면서 고개를 흔들어 리헨과 오윈의 검을 떨쳐냈다.

몸집이 생각보다 커서 마수가 날뛰자 세 사람은 거리를 벌려 뒤로 물러나야 했다.

달려들려는 듯 앞발을 구른 마수가 거친 콧김을 내뿜었다. 그리고는 땅을 박참과 동시에 오윈과 리헨이 다시 검을 들어 그 거대한 뿔을 막아냈다.

그 틈에 히아젤키는 제 회중시계를 쥐고 주문을 외웠다.

“디우스!”

* * *

히아젤키 일행이 열심히 마수를 정화하는 사이, 성에 남은 카엘은 멍하니 넋을 놓고 창밖을 바라보다가 이내 방을 나섰다.

히아젤키와 리헨이 여행을 떠난 뒤로 꽤 시간이 지났는데, 역시나 그녀가 없으니 성이 지나치게 조용했다.

평소와 같이 부드러운 분위기였지만, 어딘가 활기를 잃은 느낌이었다. 그래도 히아젤키가 성에 오기 전이나, 잠시 사라졌던 때처럼 어두운 분위기는 아니었다.

조금 더 평화롭고, 안정감이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그리운 건 여전했다.

방을 나선 카엘은 곧장 서재로 향했다. 그리고는 책들을 쭉 훑으며, 리헨 때문에 잔뜩 생긴 서적들을 살폈다.

‘분명, 이 중에…….’

부부에 관한 것들은 제쳐두고, 가족에 관한 것 중 한 권을 뽑아 들었다. 슬쩍 내용을 훑은 그는 곧, 그 옆에 나열된 육아 관련 서적 몇 권을 손에 들었다.

“일단 이것들부터 읽어볼까.”

그렇게 책을 챙긴 카엘은 혹시나 누가 보고 있을까, 주변을 훑고는 서재의 문을 걸어 잠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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