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는 EX급 헌터다-59화 (59/291)

# 59

#059화 전우 (2)

“그 결과가 이곳이야.”

입구에 서서 고갯짓하는 그녀의 등 뒤로 헌터 박물관이 펼쳐져 있었다. 한국에서 일어난 사건과 사고를 기록하며, 그를 통해 희생된 헌터들을 기리는 곳.

이쯤 되니 이지아가 무엇을 말하고 싶은 건지 모를 수가 없었다.

“이곳에서 장기석에 대한 흔적을 찾을 수 있다는 건가요?”

“그래, 그러니 잔소리하지 말고 따라오기나 해. 이쪽은 주말까지 반납하고 온 거니까.”

이지아의 눈 밑엔 피로가 짙게 깔려 있었다.

“또 무슨 일이 있나 보죠?”

“확실한 건 아니야.”

확실한 건 아니지만 피곤한 일이라. 조금 궁금하긴 했지만 한태민은 그러려니 했다. 헌터 제압 부대에서 일어나는 일까지 물어보는 건 오지랖일 테니까.

따라오라는 듯 검지를 까닥인 이지아가 거리를 걷는다. 하나의 단지로 구성된 헌터 박물관은 볼거리가 넘쳐나는 편이었다. 건물마다 테마가 있고, 거리마다 주제가 있었다. 차라리 엑스포나 놀이동산에 더 가까운 분위기였다.

“생각했던 거랑 많이 다르네요.”

“헌터라는 이름은 어디에서든 돈이 되니까.”

이지아가 선택한 곳은 균열 홍수에 대한 사건을 기록한 건물이었다.

홀의 중앙엔 하늘을 찌를 듯이 높이 치솟은 위령비가 세워져 있었다.

“여기엔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터진 SS급 균열 홍수, 불지옥에 참전했던 헌터들의 이름이 빠짐없이 적혀 있어.”

“그렇게 보이네요.”

매끈하게 깎인 대리석의 겉면엔 세월이 흘러도 결코 사라지지 않을 이름들이 새겨져 있었다. 위령비를 매만진 한태민이 쓱 고개를 올렸다. 이내, 익숙한 이름이 보였다.

기진수.

기시우의 할아버지이자 마력 단련법을 익혔다고 예상되는 인물. 불지옥에서 생을 마감했다고 했으니 여기에 적혀 있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내가 찾은 장기석은 저기에 있어.”

이지아가 가리키는 곳으로 시선을 돌린 한태민은 얼마 지나지 않아 장기석이라는 이름을 발견할 수 있었다.

스마트폰을 꺼낸 이지아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이 사람은 12년 전에 실종 처리되었고, 시간이 흘러 사망이 확정되었어. 이미 고인이 되었다는 거지. 모두가 불지옥 안에서 죽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어. 뭐, 여기에 있는 이들이 다 그렇겠지만.”

“자세히 듣고 싶은데요?”

“그때, 당시의 장기석은 열아홉 살. 하지만 나이가 무색하게 A급 헌터까지 된 슈퍼 루키였어. 협회의 기록에 따르면 생전에 구사했던 전투 스타일도 제법이었다고 해. 마력을…….”

“……포탄처럼 발사하고, 신속한 기동으로 상대방의 눈을 현혹하는 히트 앤 런 방식을 고수했을 테니까요. 거리를 조절하는 방식이 일품이었을 테죠.”

“그래, 맞아.”

케디아의 특징과 정확하게 일치했다. 장기석은 케디아의 가명이 맞을 터. 하지만 어째서 불지옥에 있었던 걸까.

‘다른 먹잇감도 없었을 텐데.’

순간, 방금 보았던 기진수의 이름이 눈에 밟혔다. 우연이라고 하기엔 너무나도 공교로운 일이었다.

‘설마, 기진수도?’

한태민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기진수가 케디아에게 당했다고 가정하면 불지옥을 막을 사람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불지옥을 막은 후였다고 해도 상황은 비슷했다. SS급 균열 홍수를 막을 정도로 강한 헌터가 케디아에게 당했을 리 없었다. 레이샤르를 익혔다고 가정하면 더더욱.

그때, 상념을 깨듯이 이지아가 물었다.

“마치 장기석을 직접 본 것처럼 말하는 데, 혹시 만난 적이 있는 거야?”

날카로운 질문에 한태민이 뒤로 물러나자 이지아의 눈이 커졌다.

“설마 죽인 거야?”

“글쎄요.”

한태민의 입에서 나온 건 애매한 대답이 전부였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반쯤 인정한다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헌터를 상대하는 이지아가 그 미묘한 변화를 감지하지 못할 리 없었다.

장기석이 여태까지 살아 있었다는 건 둘째로 치더라도, 역사의 산증인을 베다니. 이지아는 참담한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누나도 알고 있을 텐데요. 저는 아무나 상대하지 않아요.”

“그래도 뒤탈이 있을까 봐 내게 조사를 부탁한 건 사실이잖아.”

“일방적인 적의였어요. 의도도 알 수 없었고, 의미도 알 수 없었죠. 그래서 궁금했어요. 도대체 왜 제게 다가온 건지.”

거짓말투성이였으나 이지아의 의문을 풀기엔 이것만으로도 충분할 터. 그녀의 옆얼굴을 바라본 한태민이 쐐기를 박았다.

“그리고 사망 처리된 사람이 버젓이 거리를 활보한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잘 알 텐데요?”

“그렇다고 해서 무턱대고 처리하는 건 옳지 않아.”

“누나도 알고 있잖아요. 헌터들이 한 번 비뚤어지기 시작하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이지아는 차마 부정할 수 없었다. 어찌 모를 수 있을까. 방근석이라는 악의 화신을 곁에서 본 게 그녀인데.

“교화되지 않는 헌터들도 존재해요. 인도주의적인 관점에서 처리하는 것도 한계가 있어요. 그들이 미치는 영향력은 일반인의 몇 배는 되니까요. 아차, 하는 사이에 수백은 우습죠.”

“그래도…….”

순간, 말문이 탁 막힌다. 범죄자들이 저지른 참상을 너무나도 많이 보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여름휴가라도 얻은 것처럼 청만 교도소 안으로 들어가는 것도.

“누나도 슬슬 눈치챘을 텐데요. 제 행동이 좋은 일이 아니라는 건 알지만, 또 그렇게 나쁜 짓도 아니라는 걸요.”

“궤변이야.”

“그래도 일부분 공감하기에 이 자리에 서 있는 거잖아요? 처음부터 제 행동이 용서받지 못할 짓이라 판단했다면 뒤도 쳐다보지 않고 신고했을 테니까요.”

“그건 네가…….”

“협박해서 그랬다고요? 그런 걸 무서워하는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는데요.”

피식 웃은 한태민이 낮게 읊조렸다.

“누나도 욕심이 난 거죠. 이 관계를 잘만 이용하면 용서받지 못할 녀석들을 아무도 모르게 없앨 수 있을 테니까요.”

“아니, 나는 그럴 생각으로…….”

반사적으로 대답한 말이 점점 줄어든다. 솔직히 그런 생각을 해보지 않은 건 아니었다. 법의 테두리 밖에서 놀다가 위험하다 싶으면 법의 테두리 안으로 들어오는 놈이 한둘이던가.

희희덕거리며 법정을 나서는 이들을 보면 차라리─

“무거운 이야기는 여기까지만 하죠. 온 김에 안이나 둘러보자고요. 저도 이런 곳엔 처음이라 기대가 되니까요.”

이지아의 표정이 굳어지는 걸 본 한태민이 그녀의 손을 잡아당겼다. 상념에서 벗어난 이지아가 미간을 찌푸렸다. 처음부터 끝까지 한태민의 손 안에서 놀아났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던 것이다.

“너…….”

“2층에 상영관이 있다던데. 그곳은 어떤 식이려나.”

한태민은 이미 저 멀리 나간 상황. 이제 와서 따지는 것도 우스운 모양새였기에 이지아는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언젠가 울고 싶을 정도로 괴롭혀 줄 거야.”

***

박물관 안은 선구자들의 발자취가 그대로 느껴졌다. 12년 전에 사용되었던 장비가 복원되어 버젓이 진열되어 있는가 하면, 그날 먹었던 전투식량까지 재현되어 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한태민이 궁금한 건 그때 당시의 헌터들이 어떻게 SS급 균열 홍수를 막았느냐는 것이었다.

‘S급 헌터도 없었으니 힘으로 몰아붙이진 않았을 텐데.’

한태민의 의문을 들은 이지아가 팸플릿을 건네며 입을 열었다.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고 해. 균열 홍수조차 밀어낼 정도로 거대한 폭발이. 그 폭발로 수호자는 치명상을 입고, 핵에도 금이 가 토벌이 쉬워졌다고 해.”

“폭발을 일으킨 사람이 누구죠?”

“그날 살아남았던 헌터들의 증언에 의하면 기진수 헌터라고 하던걸. 궁지에 몰려 어빌리티를 폭주시킨 걸로 확인되고 있어.”

“그래서 기진수 헌터가 제일 먼저 언급되는군요.”

거대한 폭발로 재앙을 마무리. 어디에선가 많이 들어본 레퍼토리였다. 불현듯, 한태민의 발길을 붙잡는 소리가 스피커에서 튀어나왔다.

“……우리는 모두를 비추는 빛이니, 나아가는 길에 그림자는 없다!”

“저건 뭐죠?”

“보면 알잖아. 살아남은 헌터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그때의 상황을 재현한 다큐멘터리야.”

물론, 퀄리티는 조악했다. 여느 박물관에서 볼 수 있는 참고 영상처럼 사실을 전달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아니, 그거 말고요. 저 구호요. 저렇게 특이한 건 처음 들어봐서요.”

설명문을 읽은 이지아가 대답했다.

“기진수 헌터가 제안했다고 하던데?”

“하.”

순간, 헛웃음이 터져 나온다. 그 구호는 팔영웅이 애용했던 구호였다.

유치하지만 그렇기에 가슴에 와 닿았던 구호.

어쩌면. 혹시나. 설마. 가슴 한쪽에 묻어둔 의구심이 한 걸음씩 다가와 현실이 되었다.

기진수가 익혔으리라 예상되는 마력 단련법, 레이샤르는 고룡족의 비전이었다. 더구나 불지옥에서 일어난 대폭발은 영구기관이 폭주했을 때 생기는 현상과 비슷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니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모든 게 한 사람을 가리키고 있었다.

‘스승님.’

아무래도 이 세계엔 선객이 왔다 간 듯했다.

***

한태민의 지도 아래 성장한 기시우는 A급 던전도 곧잘 들어가는 딜러형 탱커가 되어 자신의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쌍격의 묘리에 이어 새로운 어빌리티, 회심까지 얻어 A급 헌터를 코앞에 두고 있으니, 길드의 복이라 할 수 있었다. 더구나 레이샤르를 익혔기 때문인지 무기를 다루는 품새도 제법이었다. 상위 헌터의 태가 났다.

그래, 태만.

“하아.”

“왜 그래요, 형?”

팝콘을 두 손 가득 든 기시우가 그 사이에 있는 빨대를 쪽쪽 빨아 콜라를 쭉쭉 마셨다. 아마도 길드 하우스에 있는 상영실에 가는 걸 테지.

“이런 게…….”

존경했던 스승이 남기고 간 마지막 흔적이라니. 머리를 박박 긁으며 현실을 부정하고 싶지만 변하는 건 없었다.

물론, 기시우의 재능이나 성품이 나쁜 건 아니었다. 오히려 우수한 편에 속했다. 스승인 레이븐, 아니 기진수의 자질을 그대로 물려받은 게 눈에 보였다. 그러니 납득이 가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꾸준히 단련하면 대성할 그릇이 보였으니까.

“너는 레이샤르에 대해서 어디까지 알고 있지?”

“레이샤르요? 형이 알고 있는 게 전부가 아닐까 싶은데요.”

“할아버지에게 들은 건?”

“워낙 어렸을 때라 기억에 남는 건 없어요. 그런데 갑자기 그건 왜요? 막히는 부분이라도 있나요?”

있을 리 없었다. 애당초 레이샤르는 익시드보다 먼저 익힌 마력 단련법이었으니까. 단지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졌을 뿐이었다.

“레이샤르는 본디 굴강한 육신을 얻기 위해 만들어진 마력 단련법이다.”

“그, 그래요?”

소매를 걷은 한태민이 정신을 집중하자 피부가 단단하게 굳으며 은색 비늘이 돋아났다. 이내, 파충류의 그것처럼 켜켜이 쌓이자 기시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우, 우와. 어, 어떻게 한 거예요?”

어떻게 한 게 아니라 레이샤르는 원래 이런 마력 단련법이었다.

한태민이 선을 보이지 않은 건 레이샤르를 운용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모든 게 달라졌다. 기시우가 스승의 손자라는 게 밝혀진 이상, 어영부영 가르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너를 제대로 가르칠 셈이다.”

“농담도 참. 지금까지는 허투루 가르쳤다는 말이 되잖아요.”

기시우가 웃기다는 듯 손을 저었다.

지금도 충분히 살인적인 훈련 일정이라 할 수 있었다. 하루의 반은 땀을 흘리며 지냈다. 이 이상 더 어떻게 늘린단 말인가. 하지만 그런 기시우의 생각을 비웃듯이 한태민은 차갑게 말을 이었다.

“그러면 심화 과정이라고 해두지. 미리 말해두지만 여태까지 했던 것처럼 미적지근하게 하진 않을 거다. 난 널 개같이 굴릴 생각이니까.”

그래, 사람 하나 만들겠다고 시작한 일이었다. 더 나아가 기사 하나 만드는 게 대수겠는가.

그제야 농담이 아니라는 걸 깨달은 기시우가 사색이 되었다.

“아, 악마.”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