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는 EX급 헌터다-63화 (63/291)

# 63

#063화 카리나 웨이드 (1)

카리나의 말에 한태민의 눈이 가늘어졌다.

8대 종족의 수도를 지키는 수도방위군과 오버로드들에게 점령된 땅을 되찾기 위해 편성된 개척부대의 존재를 아는 걸 보면 적어도 동일한 시대를 살았던 사람이리라.

솔직히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익시드의 특징인 헤일로는 숨기고 싶다고 해서 숨길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당연히 그 모습이 전파를 타고 나갔을 때부터 짐작하고 있었다. 카리나 같은 이가 등장하리란 걸.

“애당초 오버로드라는 길드명부터 그래. 다른 녀석들의 눈길까지 모두 독차지할 셈이야? 그렇게 죽고 싶어?”

케디아도 이해하지 못했던 오버로드의 의미까지 이해하고 있는 듯했다. 적어도 그의 동료는 아닐 터. 그제야 한태민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 수 있었다.

정말로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있는 이를 찾은 것이다. 기시우처럼 어중간한 연결 고리로 이어진 인연이 아니었다.

“카리나 헌터 같은 사람을 찾기 위해선 어쩔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제가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면 이렇게 마주 보고 대화할 기회도 없었을 테니까요.”

“익시드로도 충분했잖아. 오버로드라는 이름을 쓴 건 과했어.”

“카리나 헌터도 사용하지 않았으니까요?”

“그래, 그건 이런 곳에서 사용할 만한 단어가 아니야. 너는 모르겠지만 이 나라에 있는 헌터 한 명도 알게 모르게 당했어. 몸을 사려야 해.”

순간, 카리나의 얼굴에 그림자가 짙게 깔렸다. 생각보다 알고 있는 게 많은 듯했다.

“기진수 헌터를 말하는 겁니까?”

“어떻게, 그걸……?”

설마 한태민이 그 이름은 거론할 줄 몰랐다는 듯 놀란 카리나가 고개를 들어 올린다. 그 몸짓 하나만으로도 많은 걸 알 수 있었던 한태민은 고개를 끄덕이며 옆자리에 앉았다.

“그렇군요. 그래서 마력 단련법은 익히지 않고, 요체만 응용하고 계신 거군요. 이해했습니다.”

“뭐, 귀찮은 녀석들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으니까. 아무튼, 너도 조심해.”

“아군인지 적군인지 모르는 이에게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요.”

“자격에 대한 문제는 익시드를 익힌 걸로 충분해. 그건 그 시대에 거세게 저항한 녀석들만 가질 수 있는 힘이니까.”

“그 말은 카리나 헌터도 저와 똑같은 곳에서 왔다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될까요?”

“어지간히도 의심이 많은 놈이네. 이렇게까지 말했는데도 감추고 싶어? 이미 알고 있잖아. 너도 나도 대륙 아스란에서 왔다는 걸.”

벤치에 팔을 걸친 카리나가 도발적으로 웃었다. 예상외의 사건이 터진다고 해도 모두 대처할 수 있다는 자신감의 발로일 터. 카리나가 어떠한 헌터인지 조금이나마 깨닫게 된 한태민은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입을 열었다.

“네, 카리나 헌터의 말이 맞습니다.”

“그러게 결국 밝힐 거면서 뜸을 들이긴 왜 들여.”

오랜 친구를 만난 것처럼 재잘재잘 말하던 카리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만난 지 30분도 안 된 사람과 가장 은밀한 비밀을 공유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 것이다.

“아니지, 잠깐만. 뭔데 네 마음대로 이야기를 진행시키고 있는 거야?”

“카리나 헌터가 말해준 것뿐이잖습니까.”

“내가 물었던 말에 대답도 안 했잖아. 그래서 전생에 뭐 하던 놈이었어? 설마 전쟁 때문에 감형받은 녀석은 아니겠지?”

“저는 카리나 헌터의 정체가 더 궁금한걸요.”

“대답은 내가 먼저 했어. 이것도 많이 양보해 준 거야.”

협상은 없다는 듯 카리나가 낮게 으르렁거렸다. 온몸에 힘을 준 건지 금방이라도 뛰어오를 듯한 자세였다.

“굳이 말하자면 저는 어느 곳에도 소속되지 않았습니다. 수도방위군에도, 개척부대에도.”

“끝까지 놀리겠다 이거지. 그런 녀석들은 팔영웅밖에 없어. 네가 그중 한 명이라는 소리도 아니이일……?”

끝말이 점점 흐려진다. 한태민을 쳐다본 카리나의 얼굴에 깃든 건 불신이었다. 혹시, 어쩌면, 설마. 만감이 교차한 건지 표정이 시시각각 변화했다. 마치 머리에 망치라도 맞은 듯한 모양새였다.

이내, 입꼬리가 비뚜름하게 올라갔다.

“그래, 생각해 보니 이상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야. 이 세상에서는 재현할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익시드를 당연하다는 듯이 사용한 것도 모자라, 알 수 없는 친근감까지 든단 말이지.”

한태민의 얼굴을 찬찬히 쳐다본 카리나가 입술을 깨물었다.

“일단 데메무어나 테헤란은 패스. 붉은 모루 아저씨는 아닐 테고. 그렇다고 장난질 좋아하는 크루거라기엔 차분해.”

중얼거리는 소리가 빠르게 지나간다. 혼란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다 나왔네요.”

그 말에 카리나가 숨 쉬는 것도 잊은 채 어깨를 잘게 떨었다. 한 박자 늦었지만 한태민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 건지 눈치챘기 때문이다.

“아, 덴?”

“오랜만입니다, 쿠슈슈 누님.”

카리나와 눈을 마주친 한태민이 살며시 웃었다. 시간이 흘러 모습이 바뀌었어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마지막까지 함께 싸운 전우를 그리 쉽게 잊을 리 없었다.

하지만 카리나는 아직까지도 믿기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연신 갸웃거렸다.

“아덴이라고? 내가 알고 있는 아덴? 자신이 인간족의 마지막 희망이라고 떠벌리고 다녔던 그 꼬맹이?”

“네.”

“내 자장가를 듣지 않으면 잘 수 없었던 그 꼬맹이가 너라고? 정말?”

“어렸을 적에 한 번 들려준 걸 가지고 아직까지도 물고 늘어지는 걸 보니 누님이 틀림없네요.”

카리나가 가까이 다가가 한태민의 뺨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정말…… 아덴이야?”

“이 말이라면 누님도 기억하고 있겠죠. 역시 송충이는 솔잎만 먹고 살아야 해. 아덴, 너도…….”

한태민이 둘밖에 알지 못하는 유언을 꺼내자 카리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의 품 안으로 뛰어들었다. 의심할 여지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어깨가 촉촉하게 젖자 한태민은 쓰게 웃으며 그녀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울어요?”

“그러면 이 상황에서 어떻게 안 울 수가 있어. 그리고 너도 너야. 맞다면 맞다고 미리 말하면 얼마나 좋아. 꼭 이렇게 애태워야 속이 풀려?”

“애매한 상황이었으니까요. 뭐, 누님 같다는 생각은 했습니다. 팔영웅 중에서 가장 품위 없이 말하는 건 크루거 형 다음으로 누님이 최고였으니까요.”

“너…….”

화를 내려고 고개를 들었으나 차마 입을 열 수 없었다. 한태민의 얼굴을 보자마자 모든 감정이 눈 녹듯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자그마치 27년째였다. 항상 망망대해에 떨어진 듯한 기분이었다. 익숙하지만 익숙하지 않은 얼굴. 낯선 사회. 생경한 환경. 전생의 기억이 너무나도 강렬했기에 그 잔재를 떨어뜨리는 건 불가능했다.

기진수가 그렇게 사라지고 다시는 전생의 인연을 찾을 수 없다고 생각했건만. 그건 또 아닌 듯싶었다.

“그래도 의외네요. 누님이라면 헌터가 아니라 정원사나 요리사가 될 줄 알았는데요.”

“각성했으니까 말이야. 부모님도 바라는 일이었고. 솔직히 전생에 비하면 별것도 아닌 일이잖아?”

“현실적인 답변이라서 더 설득력이 있네요.”

카리나의 등을 살며시 쓰다듬은 한태민이 주제를 돌렸다.

“그러고 보니 스승님이 돌아가신 건 어떻게 알게 되었나요? 전부터 연락을 했었나요?”

“여기에서도 알고 지낸 건 아니야. 간신히 연락이 닿았다고 생각한 순간, 그런 일을 당하셨으니까. 서로에 대해 파악한 건 며칠도 되지 않아.”

“그래서 흉흉한 녀석들이 활보한다는 걸 알게 되었군요.”

“전후 사정은 모르지만 그런 식의 말을 남기셨으니까.”

“사실 여기에도 한 명 더 있어요.”

“여기에도? 잠깐만. 그러면 이미 그 녀석들하고 부딪친 거야?”

“그렇지 않으면 이런 곳에 참석할 리가 없잖아요.”

“아덴…….”

“여기에서는 한태민입니다, 카리나 누님.”

거리감이 느껴지는 말투에 카리나가 중얼거렸다.

“변하지 않았어? 예전엔 조금 더 귀여웠는데 말이야.”

“모든 건 변하기 마련이에요.”

“나보다 다섯 살이나 어리면서 잘난 척은.”

못마땅하다는 듯 볼을 부풀린다. 카리나를 알고 있는 헌터들이 봤다면 두 눈을 비빌 정도로 진귀한 광경이었겠으나 한태민에겐 흔한 투정일 뿐이었다.

카리나를 슬쩍 밀어낸 한태민이 상황을 정리했다.

“일단 거치적거리는 게 많으니까 일이 정리된 후에 차분하게 이야기하는 걸로 하죠.”

한태민이라고 궁금한 게 왜 없겠는가. 하지만 지금은 느긋하게 과거를 곱씹을 때가 아니었다. 귀찮은 꼬리를 잘라 없애야 할 때였다.

“그때까진 공석에서 카리나 헌터라고 부르겠습니다.”

“왜?”

“다른 사람들의 눈엔 처음 만난 헌터 둘일 뿐이니까요. 잠깐 나갔다 온 사이에 사이가 극적으로 변하는 것도 우습잖아요?”

“그러면 친해졌다고 하자. 남녀 사이가 으레 그렇잖아?”

“됐습니다. 한두 번 보고 말 사이도 아닌데요.”

안 그래도 유소라와의 추문이 은연중에 떠돌고 있는 시점이었다. 괜히 기름을 붓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무슨 일이든지 차근차근 진행하는 게 베스트였다.

“이 정도가 적당해요.”

한태민이 제 말만 하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카리나가 다급하게 그 뒤를 따라갔다.

“자, 잠깐. 아덴, 아니 태민아.”

***

크리스털룸에 들어온 한태민은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자리에 앉았다. 극적인 해후에 가슴이 뛰었지만 표정은 평온, 그 자체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MSS 심포지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개회사를 필두로 수많은 축사가 이어졌다. 모두의 이목이 집중된 가운데, 장웬의 발표가 이어졌다. 그가 내건 주제는 마력을 기반으로 한 차세대 무기의 활용 방안이었다.

얼마나 단단히 준비했는지 이쪽 분야에 문외한인 한태민도 장웬의 말은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평상시엔 무심하게 사용한 장비도 저런 식으로 쓰일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는 것도 잠시뿐이었다. 불현듯 유한이 어깨를 두드렸던 것이다.

“한태민 헌터.”

“왜 그러시죠? 다른 일이라도 생겼나요?”

“카리나 헌터가 방금 전부터 한태민 헌터를 쳐다보는 것 같은데요?”

손가락이 한 방향을 가리킨다. 순간, 시선을 느낀 건지 카리나가 재빨리 와인 잔을 들어 표정을 숨겼다. 다른 사람이라면 우아하기 그지없는 몸짓으로 봤을 테지. 하지만 한태민은 그녀가 당황하는 게 훤히 보였다.

한숨이 나오는 건 당연했다.

“착각입니다.”

“그렇겠죠?”

괜한 걱정을 했다는 듯 어깨를 으쓱인 유한이 멋쩍게 웃었다. 한태민의 말대로였다. 두 사람이 나가 있었던 시간은 고작 20분 내외. 무언가를 하기엔 턱없이 모자란 시간이었다.

그렇게 웃고 있는 유한을 쳐다본 한태민의 두 눈이 크게 떠졌다. 그의 등 뒤로 두 아이의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다.

판에 찍은 듯 완벽하게 좌우가 똑같은 두 아이를 보니─

‘자, 잠깐만. 다 말해주겠네. 쌍둥이. 그래, 쌍둥이. 쌍둥이를 쫓아가면 알 수 있을 걸세.’

언젠가 황일찬이 말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때는 우스갯소리로 치부했지만 생각지도 못한 광경을 보니 몸이 절로 움찔거렸다.

순간, 육감이 경종을 울린다. MSS 심포지엄은 어린아이들이 참석할 만한 곳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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