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6
#076화 용오름 (3)
공중에 뜰 줄은 몰랐기에 유소라의 입에선 망연자실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외골격을 감싼 갑각엔 따개비가 다닥다닥 붙어 있었으며, 그 안에서는 수천 개의 촉수가 꿈틀거렸다. 머리라고 생각한 것도 촉수가 뭉쳐서 생긴 구덩이에 불과했다.
전체적인 모양새는 거북이에 가까웠으나, 귀여운 얼굴과 짧은 사지 대신 촉수가 넘실거린다는 게 차이점이라면 차이점일까.
유소라가 헤비 랜스를 들려고 하자 한태민이 고개를 저었다.
“싸우려는 게 아니야.”
“그게 무슨 소리죠?”
용오름 속에서 그동안의 연전을 살펴보았을 것이다. 둘러싸였다는 걸 알았으니 무대를 옮겨야겠다는 생각이 먼저 들 터. 놈이 선택한 건 반격이 아니라 도주일 게 뻔했다.
아니나 다를까, 날아오른 놈은 두 사람을 보지도 않고 저 멀리 솟구쳤다.
뒤이어, 꾸역꾸역 올라오는 괴물들의 모습이 보였다.
용오름이 없어졌으니 폭발적인 전진은 못 하겠지만, 해치워야 할 상대라는 건 변하지 않았다.
“뒤를 부탁해도 되겠나?”
초대형 괴물, 네안의 뒤를 따라 달리면서 내뱉는다.
네안을 도맡아야 할 이도 필요했고, 균열 홍수를 막아야 하는 이도 필요했다.
유소라도 잔뼈가 굵은 헌터였다. 한태민이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단박에 이해한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여기에 있는 괴물들은 제가 맡겠습니다. 한태민 헌터는 저 녀석의 뒤를 쫓으시길.”
“그러면 허리에 힘을 줘라. 가까운 곳에 던져줄 테니까.”
그렇게 유소라를 고속정에 내던진 한태민은 박차를 가했다.
겨우 말 몇 마디 주고받았을 뿐인데 네안은 벌써 저만치 더 나아간 상태였다.
근처에 있는 구축함 위에서 뛰어올라 안테나를 밟고 도약했다.
장장 수백 미터에 이르는 활강.
꼬리 부분을 향해 검부잿불을 내려찍은 한태민은 가까스로 부산행 비행기에 올라탈 수 있었다.
“윽.”
멀리에서 봤을 땐 느끼지 못했지만, 직접 타보니 알 수 있었다.
네안의 비행은 거칠고 빨랐다. 30미터라는 거체가 스스로 날아올랐다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아마도 배출구에서 나오는 물줄기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강하리라.
아니나 다를까, 뒤따라오던 고속정과 초계함이 물대포를 맞고 허망하게 침몰했다.
따개비를 잡고 일어선 한태민은 클라이머처럼 네안의 등을 타고 올라갔다. 더 멀리 가기 전에 추락시켜야 했다. 해안가, 혹은 그와 인접한 장소가 적절할 터.
해운대가 눈앞에 보이자 한태민은 주저하지 않고, 검부잿불을 들어 등에 꽂아 넣었다. 이내, 커다란 폭발이 일어났다.
구우아아아!
비명 소리와 함께 물줄기가 끊겼다.
쾅, 30미터나 되는 거체가 해변가에 떨어지자 지축이 흔들리는 듯한 충격이 장내를 강타했다.
굴러떨어진 한태민은 검부잿불을 지면에 꽂아 후폭풍을 상쇄시켰다.
해안선을 지키던 헌터들은 갑작스러운 전개에 우왕좌왕했다. 난데없이 초대형 괴물이 나타난 것이다.
애당초 그들은 2군에 불과했다. 억척같이 저항해도 가시적인 성과를 얻는 건 불가능할 터.
다행히 넋을 놓고 있는 건 일부였는지 대표로 보이는 헌터가 금세 나타났다.
“저는 오버로드 길드의 마스터, 한태민이라고 합니다.”
“아, 소문은 익히 들었습니다.”
들었다면 서론은 빼도 될 터.
“일단, 여러분은 시민들을 먼저 대피시키기 바랍니다. 교전은 그다음입니다.”
“하지만 저희들의 목적은…….”
“제 이름을 대세요. 긴급 상황입니다. 상황 파악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명령은 들을 필요 없습니다.”
“한태민 헌터는 어떻게 하실 겁니까?”
“이곳은…….”
네안이 꿈틀거리자 한태민이 검부잿불을 들었다.
설왕설래하며 지체할 시간은 없었다. 일분일초가 아까웠다.
“제가 맡겠습니다.”
순간, 네안이 스프린터처럼 빠르게 치고 들어왔다. 해변이 깊숙이 들어갈 정도로 강렬하게 발을 굴리는 게 눈에 들어왔다.
거체가 들이박히는 순간, 힘을 옆으로 흘린 한태민이 소리쳤다.
“어서 가세요. 귀찮게 하지 말고!”
헌터들이 멀어지자 한태민은 검부잿불을 있는 힘껏 휘둘렀다. 지금 필요한 건─
초광화.
초강화와 광화가 섞이자 스태이터스가 급증했다.
영약을 먹고 비정상적으로 성장한 마력이 그 뒤를 보조하자 주변이 후끈 달아올랐다.
촤르르륵.
외골격 사이에서 수천에 달하는 촉수가 쏟아졌지만 한태민은 보지도 않고, 베어 넘겼다. 하나하나가 강철 케이블의 그것처럼 억세고, 질겼지만 검의 달인에게 그러한 특성은 없느니만 못했다.
네안이 허리를 숙여 물대포를 발사했다.
근거리에서 이루어진 포격.
찰나의 순간, 몸을 비튼 한태민이 검면으로 물줄기를 후려쳤다.
팡, 콘크리트도 절단하는 고압력수는 방향을 틀어 근처에 있는 호텔을 둘로 갈라놓았다.
무너지는 건물 사이로 재빠르게 도약한 한태민이 네안의 목덜미를 향해 검부잿불을 휘둘렀다. 어찌나 빠르게 휘두르는 건지 잔상 다음에 섬광이 연이어 터져 나왔다.
구우아아와!
네안의 등껍질 사이로 기다란 관이 하나둘씩 튀어나왔다.
맹렬하게 회전하는가 싶더니, 그 안에서 정체불명의 액체가 분무되었다.
치이익, 치이익.
마치 스프링클러처럼 규칙적으로 쏘아진 액체는 지면에 떨어져 모든 걸 녹였다.
도시 일부분이 폐허가 되는 건 한순간이었다. 불꽃을 일으켜 분무되는 용액을 증발시켰으나 역부족이었다. 부식성 용액은 한태민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까지 날아가 제 할 일을 마쳤다.
“상종 못 할 새끼군.”
거리는 쥐새끼가 파먹은 치즈처럼 흉측한 몰골이었다. 아마 피해자들의 모습도 이것과 별반 다르지 않으리라.
싸우는 와중에도 뒤를 노리는 걸 보면 적어도 생각은 하고 있다는 뜻.
그제야 한태민은 놈이 지능적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생각해 보면 용오름을 이탈한 것부터 심상치 않았다.
유불리를 이해하고 있다는 말이었으니까.
구아아.
30미터까지 자란 거체. 초대형 괴물과 괴수의 사이. 별안간 한태민의 머릿속에 불길한 예상이 스치고 지나갔다.
‘혹시, 진화하기 위해서 무의미한 연전을 이어간 거라면?’
그렇다면 용오름에서 미친 듯이 쏟아져 나온 괴물들도 설명할 수 있었다.
헌터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기 위해 의도적으로 내보냈을 테니까.
“미친.”
탄성이 입 밖으로 튀어나온다. 조금이지만, 부풀어 오르는 게 눈에 보였다.
이해할 수 없는 급성장이었으나 상황이 이렇게 되니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녀석은 지금 진화하고 있다.’
물대포를 맞으며 밀려난 한태민이 돌격하려는 순간 네안의 몸이 벌떡, 하고 뛰어올랐다.
탈피하는 것처럼 두꺼운 갑각을 벗고 일어난 네안은 투명한 속살을 만방에 내보였다. 촉수로 이루어진 덩어리는 젤리처럼 탱글탱글했으며, 꾸밈없이 드러난 내장 기관은 연신 펌프질을 반복했다.
네안이 초대형 괴물에서 괴수가 된 순간, 모든 게 급변했다.
한시라도 빨리 포위망을 형성하고, 괴수를 쓰러뜨릴 준비를 마쳐야 했다.
부산이 즉시 폐쇄되어야 하는 건 더 말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아직도 대피하지 못한 이들이 많았다.
쿵.
한 발자국 내디뎠을 뿐이지만, 대기가 요동쳤다.
괴수만이 지닐 수 있는 존재감. 조금 전과는 다른 위압감이 장내를 잠식했다.
익시드를 일으킨 한태민이 나지막이 읊조렸다.
“너는 나랑 놀아야지?”
괴수는 기본적으로 어빌리티를 지니고 있었다.
이제 막 괴수가 된 네안도 마찬가지일 게 분명했다.
‘물대포? 고압력수? 부식성 용액?’
네안이 진화의 절차를 제대로 밟았다면 그전에 가지고 있던 특성 중 하나가 개화되었을 터.
네안의 대답은 그런 한태민의 추측을 아득히 뛰어넘었다.
탁.
네안이 촉수로 이루어진 손가락을 튕기자 파도가 굽이치며, 격렬하게 솟아올랐다.
지평선 너머에서 시작된 흐름은 부산과 가까워질수록 거대해졌다.
거세게 다가오는 물살은 파도라는 개념 하나로 설명할 수 없었다. 해일. 그래, 해일이었다.
해안가는 물론이고, 근방에 있는 도시 정도는 가볍게 씹어 먹을 수 있을 정도로 드높고, 넓은 격류의 벽.
네안이 일으킨 건 어빌리티가 아니라 자연재해였다.
이건 어찌할 수 없다. 모두가 절망에 잠긴 얼굴로 해일을 쳐다보았다.
고금동서를 막론하고 인간이 자연재해를 뛰어넘은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자연재해란 언제나 참고 감내해야 하는 대상이었다.
멀리 떨어진 한태민도 그러한 사람들의 기색을 읽을 수 있었다.
해변가, 해일을 부르는 괴수, 아직 대피하지 못한 사람들. 모든 게 최악의 요소뿐이었다.
물론─
“이걸로 우위를 점했다고 착각하지 마.”
다른 헌터였을 때, 그렇다는 이야기였다.
한태민이 네안의 능력을 몰랐듯이, 네안 또한 한태민의 능력을 모르고 있었다.
무엇을 할 수 있고,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오의 - 거신 사냥]
검부잿불의 검신이 늘어났다. 오의가 만들어낸 허상은 한태민의 손에 거인의 검을 주었다.
하지만 이건 좋게 봐줘도 우산이었다. 제 한 몸만 챙길 수 있는 그런 우산.
모두를 구하려면 여기에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가야 했다. 다가올 재앙을 밀어내려면 방벽이 필요했다.
한태민은 이미 가지고 있었다. 한계를 돌파하고, 인간은 도달할 수 없는 영역에 도달하기 위해 존재하는 힘을.
[영성 : 187]
[영성 : 7↓ NEW]
순간, 마력이 끓어오른다.
머리 위의 헤일로가 세차게 돌아가며 점점 넓어졌다.
전신을 채우는 충만감에 몸이 부르르 떨린다. 일찍이 기사가 되었을 때, 느꼈던 기분이었다.
검부잿불을 품 안에 끌어들이며 다리에 힘을 준다.
쿠쾅.
진각을 거세게 밟자 아스팔트 도로가 갈라지고, 부서진 호텔이 뒤로 넘어갔다.
눈앞의 모든 게 쓰러지자 시야가 탁 트였다.
퀸 슬레이어가 떨어진 바다는 해일과 폭풍이 잦은 곳이었다.
기사도 목숨을 장담할 수 없었던 장소였으나 한태민은 그곳에서 하나의 해답을 찾았다.
[오의 - 바다 가르기 ]
검부잿불을 들어 가로로 긋는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순간, 검의 궤적을 따라 해일이 갈라졌다. 염마파동이 깃든 검격은 모든 바닷물을 증발시켰다.
두 눈으로도 보기 힘든 전과에 모두의 입이 떡 벌어졌다.
쿠우웅.
습한 안개가 좌중을 뒤덮었으며, 소금 알갱이가 날아올라 코끝을 찡하게 자극했다. 재앙을 호조로 바꾼 한태민은 망설이지 않고 적의 품 안으로 몸을 던졌다.
[오의 – 한 걸음]
음속을 돌파해 강행 돌파했다.
네안이 인지하는 것보다 더 빠르게 접근한 한태민은 검부잿불을 거침없이 놀렸다. 영성으로 얻은 마력이 사라지기 전에 결판을 내야 했다.
네안이 해일을 조종할 수 있다는 게 밝혀진 이상, 모든 건 시간과의 전쟁이었다.
전장이 넓어지면 넓어질수록, 전투가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피해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할 수밖에 없었다.
어느 쪽이 죽든지 최대한 빠르게 끝나야 했다.
“크흑.”
부식성 용액에 닿은 건지 팔이 타오르는 듯했지만 모든 고통을 무시하고, 우격다짐으로 짓밟는다. 검부잿불을 둔기처럼 휘둘러 머리를 깨부수고, 사지를 절단한다.
사방에서 튀어나온 촉수가 끈질기게 검부잿불을 저지했지만 소용없었다.
머리 위에 떠오른 헤일로가 회전하면 할수록 검격의 위력이 증가했다.
쿵, 쿵, 쿵.
바다가 증발하며 생긴 안개 속에서 커다란 굉음이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얼마나 지났을까. 끈끈한 바닷바람이 불어와 안개를 슬그머니 밀어냈다.
이내, 그 안에서 한 사람이 걸어 나왔다.
“후우.”
검부잿불을 어깨에 둘러멘 한태민이 다른 손을 거칠게 잡아당기자 쿵, 하는 소리와 함께 하늘에서 촉수 덩어리가 떨어져 내렸다.
물어볼 것도 없었다. 그것은 한태민의 승리를 알려주는 신호탄이나 다름없었으니까.
괴수의 머리가 굴러떨어졌다는 걸 눈치챈 사람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단독으로 괴수를 사냥할 수 있는 헌터가 한국에도 나타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