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9
#089화 압도 (2)
“커허억.”
드넓은 광장이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거미줄 모양으로 갈라지며 가라앉았다.
핏물을 토해낸 이반이 두 손에 힘을 주었으나 한번 내려온 무릎은 올라갈 줄 몰랐다.
마치, 천근만근 무거운 쇳덩어리가 위에서 짓누르는 듯했다.
“힘만 세다고 능사가 아니죠.”
중요한 건 집중과 응축.
중구난방으로 쏘아지는 폭력이 위협적일 리 없었다.
안타깝게도 이반은 우직한 전사일지언정 노련한 기사는 아니었다.
“되는대로 지껄이지 마라!”
고함을 지르며 한태민을 내던진 이반이 숨을 내뱉자 장내가 요동쳤다.
인간의 영역을 벗어난 심폐량이 자그마한 돌풍을 일으켰다.
수웅, 두꺼운 팔이 케이블처럼 꼬아지면서 강렬한 충격파를 발생시켰다.
수축과 이완을 반복하는 근육은 그 자체만으로도 커다란 힘이 되었다.
지표조차 들어 올릴 수 있는 거력의 사나이, 이반의 주먹이 한태민을 짓이길 기세로 나아갔다.
이미 등 뒤에 있는 거리는 힘의 폭발을 견디지 못하고 무너져 내리는 중이었다.
그 앞에 선 한태민은─
“하.”
그저 짧게 웃었다.
전부터 생각했지만, 헌터들이 힘을 사용하는 방법은 조악하기 그지없었다.
경험이 생겨 노련하게 운용하는 건 사실이었으나 마력 단련법에 비하면 손색이 있었다.
이반의 신체 능력은 한태민도 인정하는 바였다.
끝을 알 수 없는 괴력과 끊임없는 체력.
장기전으로 가면 괴수도 손쉽게 밀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우라돌격으로 기합을 넣는다고 모든 일이 술술 풀리는 건 아니었다.
‘바로 이렇게.’
공격 범위 안으로 들어가 흐름을 무너뜨리자 이반의 얼굴에 황망함이 깃들었다.
싸움이 이런 식으로 전개될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으리라.
힘만으로 모든 걸 해결했기에 생기는 무지, 한태민은 생각할 틈도 주지 않고 몰아붙였다.
팔꿈치로 주먹을 찍어 누르고, 뒤이어 날아오는 발차기를 무릎으로 걷어찼다.
이반이 발악해도 한태민의 눈엔 전부 다 보였다. 반격하는 족족 되돌려 주었다.
왼쪽 관자놀이에 한 방, 오른쪽 관자놀이에 한 방. 그리고 뒤통수에 한 방.
거인도 결국 인간이었다. 두드리면 열릴 수밖에 없었다.
비틀, 빈틈이 보인 건 정말 한순간이었다.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짧은 찰나. 이반의 품속으로 들어간 한태민은 망설이지 않고 주먹을 꽂아 넣었다.
한 점에 모든 걸 쏟아부은 일격.
순간, 미사일이 터지는 것처럼 강렬한 폭음이 울려 퍼졌다.
주변에 있는 유리창이란 유리창은 전부 깨졌고, 가로수는 뒤로 밀려났으며 대기는 역류했다.
쿠우아앙, 옆구리 안으로 살이 말려들어 가는가 싶더니, 이반의 몸이 고무공처럼 튀어 올랐다. 흡사 물수제비처럼 길거리 위로 통통 치며, 날아간 그는 이름 모를 레스토랑에 처박혔다.
그리고 두 번 다시 나오지 못했다.
항복이나 기권을 읊조릴 틈도 없었다. 처박힌 걸로 끝. 패자에게 변명할 기회는 오지 않았다.
“이걸로 두 명.”
정점에 오른 헌터를 둘이나 쓰러뜨렸음에도 한태민은 느긋했다. 일어날 일이 일어났을 뿐이었다. 이마에 땀 한 방울 흘러내리지 않는 게 그 증거였다.
순간, 무언가가 빠르게 접근했다.
본능적으로 낚아챈 한태민이 두 눈을 흘겼다.
칼날처럼 날카로운 깃털을 지닌 맹금류. 생태계에서 볼 수 있는 품종이 아니었다.
더욱이 마력의 잔향이 코끝을 찔렀다.
“잡스럽네요.”
“하지만 그런 게 내 어빌리티지.”
눈앞에 나타난 상대는 세계 랭킹 5위, 모던 제프만이었다.
고유 명칭은 진화하는 동물원. 원하는 동물에게 원하는 특징을 부여할 수 있는 소환술사였다.
대군을 형성할 수 있다는 점에선 시신을 조종하는 아지즈와 비슷했다. 하지만 시신이 필수 불가결한 아지즈와 다르게 모던에게 필요한 건 약간의 마력이 전부였다.
하지만 이번엔 그 강점을 버리려는 듯, 선언부터 남달랐다.
“거두절미하고 나는 한 놈만 보내지. 여러 소환수가 날뛰는 건 네 말대로 잡스러우니까.”
모던이 검지로 아래를 가리키자 지면이 쑥 가라앉았다.
깊은 땅 꺼짐(Sinkhole) 속에서 나온 건 커다란 괴물이었다. 거대한 뿔과 흉악한 외형. 투박한 꼬리와 날개는 전설 속에 나오는 발록을 연상케 했다.
‘대단한 거라도 나오는가 했더니…….’
덩치만 컸지 이반의 연장선에 있는 녀석이 아닌가. 아니, 멍청하게 주인의 명령을 기다린다는 점에선 그보다 더 못한 불량품이라고 해야 하나.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소환수를 올려다본 한태민이 높이 뛰어올랐다.
그리고 뿔을 잡아 그대로 바닥에 내리꽂았다.
테이크 다운.
한낱 소환수와 밀고 당기며 지지부진한 공방을 이어가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위기를 감지한 소환수가 투레질을 하며 거칠게 뒷걸음질 쳤으나 한태민은 두 발을 바닥에 깊숙이 꽂으며 다음 단계로 넘어갔다. 옆구리 사이에 목을 끼워 넣은 것이다.
처음엔 체격 차이 때문에 밀려나는 듯했다. 하지만 그것도 시간문제일 뿐이었다.
팔이 조금씩 목덜미를 옥죄며 섬뜩한 소리를 내었다.
결과가 나오는 건 한순간이었다.
콰드득, 아름드리나무처럼 굵은 목은 몸통과 분리되었다.
모던이 심사숙고하며 준비한 소환수는 그렇게 쓰러졌다.
오버로드를 도륙하는 기사에게 성장하다 만 소환수라니…….
전생에 이런 전략을 펼치는 장군이 있었다면 바로 참수감이었다.
집채만 한 소환수의 머리를 밟고 일어선 한태민이 오연하게 내려다보았다.
“더 할 겁니까?”
“……아니, 항복하지.”
두 팔을 든 모던이 질린 표정으로 한 걸음 물러났다. 방금 전의 소환수는 괴수를 상대로도 밀리지 않는 괴물이었다.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며 찾은 최고의 소환수를 믿었기에 선뜻 나섰건만, 이게 웬걸. 한태민은 별거 아니라는 듯 목뼈를 고이 꺾어 죽여 버렸다.
“감당할 수 없는 싸움은 나서지 않는 게 상책이니까.”
그래, 인정할 건 인정해야 했다.
한태민이 네 명을 지정한 건 결코 오만에서 비롯된 선택이 아니라는 걸.
“현명한 선택입니다.”
이걸로 세 명. 머릿속으로 수를 헤아린 한태민을 향해 모던이 경고했다.
“하지만 진백지, 그녀는 조심해야 할 거다.”
2년 전에 혜성처럼 등장한 진백지는 여러모로 충격적인 헌터였다. 굳이 따지자면 카리나와 동류라고 할 수 있을까. 세계 랭킹이 낮은 건 경력이 일천하기 때문이었다. 실력은 하등 상관이 없었다.
“누구에게나 까다로운 상대니까.”
나지막이 읊조린 모던이 물러났다. 그때였다.
수우웅,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듯했다. 불현듯 고개를 올리자 구름을 가르며 나아가는 빛줄기가 보였다.
‘……화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빛줄기가 확 꺾였다.
노리는 게 자신이라는 걸 직감한 한태민이 팔을 들었다. 순간, 화살이 번개처럼 내리꽂혔다.
그가각, 아스팔트 도로를 긁으며 밀려난 한태민은 손에 잡힌 화살을 내려다보았다.
매끄러운 광택이 인상적인 흰 화살. 도자기처럼 자태가 고운 게 여간 범상치 않았다.
더욱이 무게는─
쿵.
이루 말할 수 없이 무거웠다.
근거리에서 날아온 게 아니었다. 먼 거리에서 지그시 노린 이만이 쏠 수 있는 필살의 일격이었다. 도심지에 있는 상대를 정확하게 맞출 생각을 하다니……. 놀라울 따름이었다.
‘파티에서 강짜를 부린 값은 한다는 건가.’
한태민은 가장 높은 건물을 타고 올라가 화살이 날아온 방향을 쳐다보았다.
진백지는 라스베이거스에 있지 않았다. 그녀가 있는 곳은 미드 호수였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50킬로미터 바깥에 있는 미드 호수 국립휴양지. 콜로라도강이 구불구불 이어지는 물줄기, 그 끝에 그녀가 있었다.
모던이 경고한 게 이해가 되었다.
진백지가 쏘는 건 탄환이나 포탄이 아니었다. 그보다 더 세련되고, 흉악한 무언가였다.
저 위치를 잡기 위해 그녀가 얼마나 고심했을지 눈에 훤히 보였다.
방금 전에 쏜 화살도 미리 인지하지 못했다면 그대로 즉사했을 터. 괜스레 가슴이 두근거렸다.
옥상에서 뛰어내린 한태민은 그대로 라스베이거스를 벗어나 진백지가 있는 곳을 향해 질주했다.
쿵, 쿵.
뛸 때마다 거대한 질량이 내리꽂혔다. 피하려고 해도 날카로운 궤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졌다. 등허리가 저릿거릴 정도로 빠른 속사를 뚫고 나와 구릉을 뛰어넘은 한태민은 여지없이 날아오는 화살을 손으로 쳐냈다.
흰 화살은 마력으로 구성된 물건이 아니었다. 무서울 정도로 압착된 바윗덩어리였다. 희고 곱게 보이는 건 그만큼 거대한 힘을 받았다는 증거.
사용하는 진백지의 기량이 얼마나 뛰어난지 보여주었다.
‘귀찮군.’
활시위를 당기기 위해 사용한 건 마력일지 모르나 흰 화살이 빠른 속도로 날아오는 건 오롯이 물리법칙에 의한 현상이었다. 말하자면 미사일과 다를 게 없었다.
아마도 마력에 영향을 미치는 익시드의 본질을 본능적으로 깨달은 것이리라.
저 거리에서 견제하면 한태민도 당할 수밖에 없었다.
매서울 정도로 예리한 사격, 터무니없을 정도로 무거운 화살. 그리고 50킬로미터라는 물리적인 거리까지.
가까이 다가가서 응수하는 수밖에 없었다.
“재미있네.”
스물한 발.
흰 화살을 손으로 쳐낸 한태민은 검부잿불을 들었다. 맨손으로는 시간만 허비할 뿐이었다.
[오의 - 한걸음]
순간, 궤적을 따라 콜로라도강이 좌우로 갈라졌다.
폭풍이 된 한태민은 방해하는 건 무엇이든지 자르고, 베었다.
예로부터 검사와 궁수의 싸움은 거리로 결정되었다.
간격 안으로 들어가면 검사의 승리.
간격 밖으로 밀어내면 궁수의 승리.
간단명쾌한 전제 조건이었다.
머리 아프게 생각할 필요도, 가슴 가쁘게 가늠할 필요도 없었다.
미드 호수가 가까워졌기 때문일까. 긴장하고 있는 진백지의 얼굴이 또렷하게 보였다.
풀 한 포기 자라나지 않은 언덕 위에서 화살을 겨냥하고 있었다.
그렇게 서로를 인지한 순간, 피할 수 없는 승부가 시작되었다.
둘 모두 화력은 충분했다. 누구의 일격이 먼저 닿느냐가 관건일 뿐.
언덕 위에서 활시위를 당기는 진백지와 미드 호수 위에서 검부잿불에 힘을 주는 한태민.
두 사람은 상대방의 움직임을 초 단위로 확인하고 검증했다.
소요된 시간은 찰나에 불과했다.
집중력이 한계까지 고조된 순간, 도화선에 불꽃이 튀었다.
진백지가 당겼던 활시위를 놓는 것과 동시에 한태민이 강물을 박차고 나아가며 검부잿불을 휘둘렀다.
일격필살.
일사필중.
검과 화살이 교차하며 커다란 폭음이 터졌다.
순간, 검부잿불의 날이 흰 화살의 촉을 정확하게 둘로 갈랐다.
쾅!
좌우로 나뉜 화살이 미드 호수에 처박히자, 거대한 물줄기가 하늘 높이 치솟았다.
진백지가 다음 화살을 준비하기 위해 땅을 짚었으나 한태민이 한 박자 더 빨랐다.
오의에서 파생된 반동을 추진력으로 삼아 뛰어오른 그는 그녀의 코앞까지 당도한 상태였다.
“……이걸로 마지막.”
숨결이 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검부잿불을 휘둘렀다. 뒤쪽에 있는 동산마저 둘로 쪼갤 정도로 강렬한 일격이 진백지를 향해 쏟아졌다.
찰나에 가려진 승부.
힘없이 쓰러진 진백지를 내려다본 한태민이 침음을 흘렸다. 장비는 산산이 조각나고 뽀얀 속살이 그대로 드러난 상태였다.
반사적으로 몸을 보호한 건지 출혈은 없었으나 검붉은 상흔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숨은 고르게 쉬고 있는 걸 보니 깊은 내상은 없는 듯했다.
어찌 되었든 다행이었다. 물어볼 게 많았다. 어쩌면 탈모임의 꼬리를 잡을 수도 있었다. 설득하는 게 문제였지만 한태민은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죽이겠다면서 전력을 다한 느낌은 아니었으니까.’
처음부터 경고한 것도 그렇고, 끝까지 저항한 걸 보면 그녀도 지금 이 상황이 마음에 드는 건 아닌 듯싶었다. 함께할 수 있다는 확신만 주면 쉽게 입을 열 수도 있으리라.
진백지를 안아 든 한태민은 고개를 돌렸다. 얼마나 멀리 온 건지 라스베이거스가 보이지도 않았다. 돌아가려면 시간이 제법 걸릴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