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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EX급 헌터다-138화 (138/291)

# 138

#138화 개변 (1)

악마의 유혹을 쓰다듬으며 슬며시 앞으로 내밀었다.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르는 곽호운은 무슨 짓이냐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정말 네 행동에 한 점의 부끄러움도 없다면 진실로 답해라.”

“어렵지 않지.”

그는 정말 뻔뻔하게 입을 나불거렸다. 그에 한태민이 여유롭게 웃었다.

진실된 본편은 지금부터 시작이었으니까.

“그러면 지금 심정을 듣고 싶군.”

난데없는 물음이었지만, 대답하지 못할 것도 없었다.

곽호운은 이 상황이 마땅찮은 듯 턱을 괴는가 싶더니, 짧게 혀를 차며 입을 열었다.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는 건가. 헌터 주제에 불법 침입까지 한 것도 모자라 감히 일국의 정상인 내게 협박 아닌 협박까지 하고 있는데……?”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걸 깨달았지만 이미 그릇은 엎질러진 뒤였다. 서둘러 입을 막은 곽호운이 해답을 구하듯 한태민을 노려보았다.

폭언을 들었음에도 한태민은 처음과 같이 나른한 태도를 보였다.

“당황할 것도 노여워할 것도 없다. 너는 네 바람대로 진실만을 말하는 마리오네트가 되었으니까.”

순간, 이마에 식은땀이 흘렀다.

일생일대의 위기라는 걸 직감한 곽호운은 평정을 유지하고자 허벅지를 꼬집었다.

“그러면 다시 묻지. 나를 죽이라고 레기온에 살인 청부를 한 사람은 네가 맞나?”

죽어도 부정해야 할 때. 부러져라 어금니를 깨물었으나 이번에도 주인의 의지를 배신한 입은 제멋대로 움직였다.

“……했다면 어떻게 할 건가? 우리나라의 얼굴이라고 할 수 있는 진백지를 데리고 간 것도 모자라, 마력 기반 기술의 정수라고 할 수 있는 수리야까지 독점했는데. 나를 생각했다면 자네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됐네.”

곽호운은 울고 싶을 지경이었다.

가장 깊숙한 곳에 숨겨 두었던 속마음이 봇물 터지듯 터져 나오고 있었다.

“이렇게 된 이상, 어떻게 해서든 자네를 나락으로 빠뜨려주지. 무력만으로 모든 게 결정된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일세. 금력과 권력 또한 그에 버금가는 힘이니까.”

“기세등등하게 말하는 건 좋은데, 여기에서 바로 죽을 거라는 생각은 안 해봤나?”

그 말과 동시에 정신이 번쩍 든다. 지독한 미몽에서 깨어난 곽호운은 본능적으로 무릎을 꿇었다. 방금 전까지 주인을 배신했던 입은 언제 그랬냐는 듯 제자리로 돌아온 상태였다.

“아, 아니. 방금 전에 했던 이야기는 전부 진심이 아닐세. 내가 잠시 정신이 나갔던 거 같네. 제, 제발 한 번만 자비를 베풀어주게. 내 잊지 않겠네.”

“관심 없다. 네가 살인 청부를 했다는 건 변하지 않으니까.”

“내, 내가 죽으면 나라 전체가 혼란에 빠질 걸세. 이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기만과 모략이 판을 치고 죄도 없는 이들이 진창에 빠질걸세. 자네도 그런 걸 바라는 건 아닐 텐데? 조금만 양보하면 서로에게 이득이 되는 길이 있을걸세.”

“그래 봤자, 너희들만의 다툼이다.”

어찌 모를 수 있을까. 전생에서도 수없이 많은 권력자를 베었는데.

물론, 한태민도 사람인지라 처음엔 커다란 후폭풍이 올까 싶어 가슴을 졸였다. 하지만 그건 덧없는 걱정일 뿐이었다.

“생각보다 별일 없을 거다.”

그 말대로였다.

기득권층이 무너지면 천지가 개벽할 것 같지만 막상 일이 터져도 변하는 건 없었다.

특히나 체계와 제도가 정립된 현대 사회에서 머리가 바뀌었다고 해서 시류가 급변하는 건 언어도단이었다. 잠깐 주춤할 수도 있겠지만 사람들이 피부로 느끼는 건 크지 않을 터.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대로 산 사람은 산 사람대로 흘러가게 되어 있었다.

“그래도 그렇게나 나라를 위한다니 어쩔 수 없군. 귀찮지만 내가 조금 더 노력하겠다.”

그럼 그렇지. 이 모든 게 우위를 점하기 위한 기 싸움이라는 걸 깨달은 곽호운이 활짝 웃었다. 하지만 뒤이어 나온 소리에 그는 털썩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네가 죽은 뒤에도 꾸준히 지켜보지. 그리고 너보다 더 악한 이가 그 자리에 앉았다고 판단되면 주저하지 않고 베겠다.”

비릿하게 웃은 한태민이 수리야를 잡았다.

“어때, 이러면 안심하고 갈 수 있겠지?”

“아, 악마 새…….”

“짓궂은 말은 하지 말고.”

휙, 섬광이 어둠을 가르고 지나갔다.

갈 길을 잃은 머리와 몸통이 동시에 증발했다. 그야말로 찰나의 순간. 곽호운이었던 건 모조리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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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너는 참으로 못된 남자 같구나. 저 녀석의 말대로 잠시 손을 잡아도 나쁠 건 없지 않더냐.”

일련의 과정을 지켜본 리야가 나타나 나지막이 훈수를 뒀으나 한태민은 코웃음을 칠뿐이었다.

“베지 않을 생각이었다면 오지도 않았을 거다.”

자비를 베푼다고 해서 반성할 이였다면 애당초 이런 일은 만들지도 않았을 거다.

예나 지금이나 권력자의 습성은 뻔했다. 골치 아프게 머리싸움을 유도할 바에야 이렇게 뿌리를 뽑는 게 더 나았다.

모든 건 곽호운 스스로가 초래한 결과였다.

“그러면 돌아간다.”

***

폐허가 된 다마스쿠스를 내려다본 밤과 봄이 동시에 한숨을 내뱉었다.

인간사는 새옹지마라. 며칠 전까지만 해도 꿀과 젖이 흐르는 성안에서 극진한 대접을 받았던 것 같은데, 지금은 황무지를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코끝을 아릿하게 스치고 지나가는 흙먼지를 털어낸 밤이 공허하게 입을 열었다.

“또 나가리네.”

“우리, 불행의 아이콘이야?”

“…….”

봄이 묻자 밤이 입을 꾹 다물었다. 현실은 언제나 고달픈 법이었다.

나이도 나이지만 본디 둘이 지닌 능력은 보잘것없었다.

기껏해야 이브를 통해 이 동네 저 동네 돌아다니는 게 전부였다.

솔직히 말해 전령새,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안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변명은 통하지도 않았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그러면…….”

“그러면 제게 오시죠.”

등 뒤에서 들려온 소리에 고개가 돌아갔다.

그곳에 있는 건 정장을 입은 짐승이었다. 그를 본 밤과 봄이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곰!”

“여기에서는 페이라고 불러주십시오. 저도 당신들을 밤과 봄이라고 부를 테니까요.”

고개를 끄덕인 밤이 서둘러 방금 전의 주제를 꺼냈다.

“그나저나 정말로 가도 돼?”

“네, 입이 두 개 더 늘어난다고 어떻게 될 살림도 아니니까요.”

“미리 말해 두는데 우리 둘 다 무능해.”

그에 질세라 봄이 덧붙였다.

“미안하지만 보답할 게 없는 밥벌레야.”

“괜찮습니다. 당신들에게 바라는 건 딱히 없으니까요.“

페이가 어깨를 으쓱이자 밤과 봄이 마주 보며 히죽였다.

“설마 좋은 사람?”

“혹시 예정된 전개?”

“가만히 두면 사고나 치고 다닐 것 같아서 하는 말입니다.”

아무렴 어떠랴.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은 두 마리의 아기새가 춤을 추는 동안, 페이는 까맣게 그을린 다마스쿠스를 내려다보았다.

독수리탈, 아지즈는 국제연합군의 총공세를 견디지 못하고 산화했다.

더할 나위 없이 추한 모양새였으나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이기도 했다.

“역시 여기에 있었나.”

불현듯 고개를 돌리니 얼굴을 가린 남자가 다가왔다.

모임의 중심이자 이 모든 일의 핵심, 민무늬탈이었다.

“민무늬, 당신이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바깥에 나오는 건 싫어하실 텐데요.”

“싫어하는 게 아니라 나올 이유가 없었을 뿐이다.”

“그러면 이곳엔 있다는 겁니까?”

“그래, 잠시 확인할 것이 있다.”

그렇게 고개를 올린 민무늬탈이 침음을 흘렸다.

청명하기 그지없는 하늘은 어딘가 모르게 불길한 기운을 뿌리고 있었다.

시간이 흘러 차원 통로가 닫힌 흔적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지만 그 안에 깃든 힘까지 어디로 간 건 아니었기 때문이다.

다른 이라면 몰라도 민무늬탈은 그 미묘한 차이를 알 수 있었다.

“……어쩌면 착각하고 있었던 걸지도 모르겠군.”

아덴 다이론드, 아니 한태민.

그만 무시하면 폭풍을 피해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건만, 아무래도 아닌 듯싶었다.

눈길을 주지 않으려고 해도 어떤 식으로든 파고들어 가슴에 깊은 상흔을 남기고 사라졌다.

나비탈, 사자탈, 용탈, 독수리탈. 당한 이만해도 벌써 넷.

아마 가만히 두면 앞으로도 엇갈릴 수 있었다.

아차, 하는 사이에 꼬리를 밟힐지도 모르는 일. 지금이라도 틀어막아야 했다.

“페이, 정식으로 의뢰를 넣겠다.”

그와 동시에 페이가 무릎을 꿇었다.

그는 민무늬탈이 직접 가르친 강자였다. 다른 헌터들과 궤를 달리하는 건 물론이고, 탈모임에서도 적수가 없었다.

“전력을 다해 한태민을 배제해라.”

“알겠습니다.”

***

길드 하우스에서 자그마한 뒤풀이가 벌어졌다. 경사도 아니고 무려 겹경사였다.

기시우, 차예리, 휜. 여태까지 제자리걸음만 했던 세 사람이 SS급 헌터가 된 건 예사였다.

오버로드 길드에 녹아든 헌터들 또한 제 몫을 톡톡히 해냈다. 합병이 유의미했다는 걸 몸소 보여준 것이다.

이번 작전을 통해 오버로드 길드의 등급은 SSS로 상향 조정되었다.

전 세계에서도 몇 없는 최상위 길드에 진입했으니 실력과 명성이 뒤따라오는 건 당연했다.

한태민이 잔을 들어 올리자 모두가 집중했다.

“모두 수고가 많았다. 쉽지 않은 작전이었을 텐데, 이렇게 다시 보니 감회가 새롭군. 차린 건 없지만 모두 즐겨주었으면 한다. 힘들었던 일은 모두 잊어라. 노력한 만큼 대가가 돌아갈 테니까.”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조촐한 파티가 시작되었다.

냉막한 얼굴로 툴툴거리던 휜도 오늘만큼은 한결 밝은 미소로 다른 이들을 맞이했다.

기시우는 한껏 고조된 기분을 표현하듯 큼지막한 꼬리를 연신 흔들었다.

구석에서 즐거워하는 길드원들의 모습을 이리저리 보고 있자니, 유소라가 가까이 다가왔다.

“마스터.”

“무슨 일이지?”

“제가 묻고 싶은 말입니다. 어제는 도대체 어디에 계셨던 겁니까? 말도 없이 갑자기 사라져서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십니까?”

곽호운의 얼굴을 떠올린 한태민이 쓰게 웃었다. 길드 하우스는 평온하지만, 중국은 지금 벌집을 쑤셔놓은 것처럼 난리도 아니었다. 국가 주석이 하루아침에 사라진 것이다.

“할 일이 있어서 미리 나간 것뿐이다. 카리나 헌터에게도 미리 말했을 텐데?”

잘 말했다는 듯, 옆구리에 팔을 걸친 유소라가 검지를 까닥였다.

“그게 문제입니다. 어째서 같은 길드인 저희는 알지 못하고 외부인인 카리나 헌터만 알고 있는 겁니까?”

“그야…….”

“더구나 마스터가 무슨 일 때문에 빠진 건지 카리나 헌터는 알고 있는 듯했습니다.”

“잔소리가 늘었군.”

“그런 식으로 주제를 흐려도 소용없습니다.”

유소라의 추궁에 한태민이 어깨를 으쓱였다.

“알려져서 좋을 건 없으니까. 그리고 내게도 사생활은 있을 텐데?”

“공항을 뛰쳐나갈 만큼 중요한 일이라는 건가요?”

중간에 끼어든 진백지가 여유롭게 웃었다.

“후후, 거기까지 하는 게 좋을 거야, 소라. 그만큼 은밀한 비밀이라는 거니까. 집요하게 묻는다고 말해줄 리 없잖아?”

“백지 언니는 알고 있는 겁니까?”

“당연히.”

다 알고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사생활이라고 말했는데도 모르겠어?”

“설마…….”

고개를 돌린 진백지가 한태민을 쳐다보았다.

“어릴 땐, 방황도 하고 그러는 거죠. 몰래몰래 이런 여자도 만나고, 저런 여자도 만나는 건 부끄러운 게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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