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3
#143화 추적 (3)
“…….”
애석하게도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진만수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걷는다는 심정으로 던졌건만, 아무래도 제대로 걸린 듯싶었다.
직접적인 언급을 할 수 없는 걸 보니 제약에 걸린 것이리라.
백 마디 말보다 더 확실한 증언을 들은 한태민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이상의 이야기는 무의미했다.
“그러면 나중에 더 이야기하지.”
***
멸망한, 아니 멸망하고 있는 세계에서 왔기 때문일까?
탈모임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 세계에 뿌리를 내리고 싶어 했다.
그들의 방식은 조심스럽고 은밀했다. 주로 사회적인 위치를 효율적으로 활용해, 몸집을 불렸다.
보리스가 연구한 파라노말 코어나 장화린이 소유했던 달롱을 보면 알 수 있었다.
각 분야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한 둘은 우월한 마력 기반 기술을 토대로 영역을 넓혔다.
아지즈 또한 시리아를 점령해 공포 정치로 자신의 세력을 야금야금 늘리려고 했으니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지금은 모두 분쇄되어 백골이 되었지만 그들에게 조금만 더 시간이 있었다면 결과는 180도 달라졌을 게 틀림없었다.
그들이 가진 세력이 만개했다면 막아내는 것도 힘들었을 테니까.
그런 의미에서 레기온은 그들의 뜻을 모두 이어받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돈 하나로 모든 걸 대변하는 집단.
현대 사회에 만연한 황금만능주의를 체현한 듯한 레기온은 지금도 무서운 속도로 성장하고 있었다.
중국을 중심으로 전 세계에 지부를 설립한 그들은 양지와 음지를 오가며 온갖 의뢰를 받아들였다.
그런 탓인지 접근성도 나쁘지 않았다.
보란 듯 드러난 건 아니었으나, 찾고자 하면 못 찾을 것도 없었다.
흔하지 않지만 드물지도 않게. 레기온은 보일 듯 보이지 않는 그림자나 마찬가지였다.
한국에서도 그들의 방침은 똑같은 듯했다.
터널을 뚫는 도중 공사가 중단된 야산.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구멍 속에 레기온의 한국지부가 있었다. 구태여 찾지 않으면 도달할 수 없는 곳.
“한국에도 저런 터널이 있다는 게 신기하네요. 하긴 저 녀석들은 이런 곳을 찾는데 이골이 났겠죠.”
“정말 할 거야?”
옆에 선 이지아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일의 경중을 생각하면 목숨이 열 개 있어도 모자란지라, 그녀는 장비로 온몸을 두른 상태였다.
건틀렛을 구성하는 쇠붙이가 부딪치며 철그렁거리자 한태민이 고개를 돌렸다.
“그럼요. 활성공탄이 제대로 팔리기 시작했을 때, 들이닥칠 파급력을 생각하면 지금 당장 처리해도 부족해요.”
“파악한 헌터들의 수만 백여 명은 돼. 저 안에서 나타나지 않은 녀석들까지 포함하면 그 이상은 될 테고.”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퍽이나.”
“정말이에요. 여기에서 잃어버리기엔 누나는 아까운 사람이니까요. 밀린다고 생각하면 데려오지도 않았을 거예요.”
“흥, 고양이가 쥐 생각하네. 그런 말을 한다고 감동이나 할 것 같아?”
귓등으로 넘기는 듯한 기세가 역력했다. 그래도 기분이 나쁜 건 아닌지 약간 상기된 표정이었다.
한태민이 거짓을 고한 건 아니었다.
이지아는 그만큼 유능한 인재였다.
헌터 제압 부대를 장악한 그녀가 보여준 행보만 봐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제가 EX급 헌터가 되면서 얻은 게 많았을 건데요. 그래도 누나는 제 대리인이잖아요.”
“크흠.”
“……그러고 보니 벌써 진급 대상이라면서요?”
중령이 된 지 반년도 되지 않았건만, 그새 대령(진)이었다. 과정은 모르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있었다.
“그것도 제 덕일 텐데요.”
“애당초 서로 윈윈하기 위해서 손을 잡은 거잖아. 설마 이런 거 가지고 물고 늘어지는 거야?”
은근히 압박하는 어조에 한태민이 웃었다.
어두운 밤이었지만 못 알아볼 정도는 아니었기에 이지아가 미간을 찌푸렸다.
“왜 웃는 건데?”
“처음 만났을 때와는 달라서요.”
그때는 고지식한 군인, 그 자체였다. 고압적인 태도는 물론이고, 원리 원칙을 우선시하는 모습에 분통이 터질 때도 많았다.
맞받아치지 못한 이지아가 머뭇거리고 있자니, 그 위로 불빛이 지나갔다.
“숙이세요.”
순간, 주변이 환해졌다. 사각지대에 숨은 한태민이 터널을 바라보았다.
마침, 커다란 화물 차량이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물량을 보니 헌터샵처럼 독자적인 유통망을 확보한 상태인 듯싶었다.
“그러면 들어가죠.”
“네가 움직이면 모두 눈치챌 거야. 기본적인 정보 통제는 하겠지만, 구설수에 오르는 건 피할 수 없어.”
“어차피 수리야를 꺼낼 생각은 하지도 않았어요.”
집채만 한 대검과 모래처럼 흩날리는 불꽃. 이것만큼 인상적인 트레이드마크가 없었다.
공간 주머니를 뒤적거린 한태민은 마테리얼 웨폰을 하나 꺼냈다.
이름은 뇌룡가지. 오버로드 라이트닝을 기반으로 제작한 장창이었다.
어차피 기시우의 손에 떨어질 거였지만 그 전에 시험 삼아 사용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 가져온 일급품이었다.
“창? 다룰 수 있어?”
“못 다룰 것도 없죠.”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한태민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밤은 길었으나 흥청망청 사용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
시작은 우측 초소부터, 사전에 조사한 대로 경계가 허술한 부분부터 점거한다. 던전을 공략하는 것과 다를 게 없었다.
“긴급 상황, 긴급 상황!”
“침입자의 수는 둘이다.”
“절대로 뒤로 보내지 마라.”
벌떼처럼 달려드는 헌터들을 쓸어내며 당당하게 들어간다. 헌터 파견 회사라는 이름답게 하나같이 높은 수준이었다. 물론 그래 봤자 소꿉장난 수준이었다.
“넓기만 하지 길은 비교적 간단한 편이네요.”
길게 뚫린 터널을 중심으로 길이 열려 있었다.
가지를 치는 것처럼 여기저기 뻗은 게 마치 개미굴 같았다.
“방심하지 마. 내가 구한 건 공사가 중단되었을 당시의 설계도니까. 얼마나 더 바뀌었을지 몰라.”
터널을 돌파하던 한태민이 발걸음을 멈춘 건 그때였다.
눈앞에 헌터가 모여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주저하지 않고, 모인 걸 보면 메뉴얼이 잘 짜인 듯했다.
순간, 헌터들 사이로 한 남자가 걸어 나왔다. 잘 갈무리된 기세. 다른 헌터들과는 궤를 달리하는 힘. 적어도 무리의 중심은 되는 듯했다.
“……여기 지부장인가.”
“너는 누구지?”
“여기에서 불법 약물을 취급하고 있다는 소리가 들려서 말이야. 잠깐 들렸어.”
“불법 약물?”
“활성공탄이라고 하는 건데 말이야. 알아, 몰라?”
잠깐 움찔거리는 기색이 보였으나 남자는 금세 태도를 바꿨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지 모르겠지만, 너는 이미 선을 넘었다. 여기가 레기온의 영역이라는 건 모르지 않을 테지?”
“그런 말을 듣고 물러날 거였다면 오지도 않았어.”
“말이 안 통하는 녀석이군.”
남자가 손을 올렸다. 하지만 어빌리티가 발동하기도 전에 쇄도한 한태민이 장창을 내질렀다.
쉬익, 전혀 다른 곳으로 나아가는 창두를 보며 남자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가지고 있는 아이템이 아까울 정도로 미숙한 동작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의 기대를 배반하듯이 장창이 흔들렸다. 마치 처음부터 그걸 노렸다는 듯.
별안간 창두의 궤적이 바뀌었다. 위에서 아래로. 마치 보이지 않는 손이 내리친 듯했다.
아차, 하는 사이에 벌어진 이변. 남자는 손을 뻗어 저지하려고 했으나 그때는 이미 늦었다.
쑤욱, 예리한 창두가 심장을 꿰뚫고 나온 뒤였다.
일순간에 갈린 승패.
“……무기의 끝을 바라보는 건 기본 중의 기본이다.”
[ 새로운 어빌리티가 추가되었습니다 ]
뒤로 쓰러지는 남자를 싸늘하게 쳐다본 한태민이 자세를 바로잡았다.
지부장이 당했다는 걸 인지한 헌터들이 득달같이 달려들었으나, 모두 주검이 되었다.
[ 새로운 어빌리티가 추가되었습니다 ]
[ 새로운 어빌리티가 추가되었습니다 ]
[ 새로운 어빌리티가 추가되었습니다 ]
풍차처럼 돌아가는 장창은 사방에서 날아오는 공격을 당연하다는 듯이 튕겨냈다. 신들린 듯한 공세는 거기에서 끝이 아니었다.
두 팔과 한 몸이 된 장창은 쌍절곤처럼 두 팔 사이를 오가는가 하면, 봉처럼 강력하게 직선 운동을 하며 위협적인 둔기가 되었다.
모든 헌터가 진압되는데 걸린 시간은 고작 몇 초.
압도적인 격차를 확인하고 물러서는 이가 여럿 있었지만, 그들 또한 한태민의 눈을 피해가진 못했다.
쿠웅, 벼락처럼 쏘아진 장창이 사이좋게 도망치는 이들의 머리를 꿰뚫었다.
“휘익.”
휘파람을 불자 땅바닥에 꽂힌 뇌룡가지가 스르르 떠올라 한태민의 손에 잡혔다.
“……어, 음. 대, 대단하네.”
순수한 신체 능력만으로 압도한 현장.
싱거운 싸움이 될 거라는 건 알았지만 설마 이 정도일 줄이야. 긴장했던 게 바보 같았다.
툭, 치니 억, 하고 죽었다는 건 바로 이런 걸 말하는 게 아닐까?
기시우가 그렇게나 장창을 잘 다루는 것도 이해가 되었다. 이런 사람의 밑에서 배우는데 무언들 못 할까.
이지아는 머리를 긁적이며 한껏 긴장된 품새를 풀었다.
그런 그녀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한태민은 뇌룡가지를 어깨에 걸치며 입을 열었다.
“활성공탄은 제가 처리할 테니까 누나는 거래 내역을 찾아보세요. 적어도 레기온의 꼬리를 잡을 수 있는 정보는 있어야 할 테니까요.”
“알았어.”
이지아를 보낸 한태민은 그대로 기다란 통로를 내달렸다.
목적지를 찾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화물 차량이 드나들 만 한 길을 따라가니 물류 창고가 보였기 때문이다.
지하 3층까지 뻗어 있는 대규모 공동.
돔구장처럼 넓은 곳이었으나 분류가 잘 되어 있던 탓에 활성공탄은 비교적 쉽게 찾을 수 있었다.
활성공탄을 하나하나 짓뭉갠 한태민이 입을 열었다.
“……리야.”
“무슨 일이지? 내 차례는 없다고 하지 않았더냐.”
빼곰히 얼굴을 드러낸 리야가 고갯짓한다.
“그건 다른 녀석들이 볼까 봐 그런 거다. 그리고 불 지르는데 그런 구분은 필요 없을 텐데?”
“아하, 태우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구나.”
“그래, 마음껏 날뛰어봐라.”
“그 말을 기다렸다!”
리야가 솟구치자 터널 안에 후끈한 열기가 가득 찬다. 모든 게 녹아내렸다. 군데군데 모래가 흩날렸지만 어차피 이 터널도 무너뜨릴 생각이었다.
빠져나가는 도중에, 이지아와 합류한 한태민이 물었다.
“누나, 찾았나요?”
“그래, 네가 날뛰어 준 덕분에 생각보다 많이 건질 수 있었어.”
팔목을 흔들자 스트랩을 따라 USB가 이리저리 흔들린다. 중요한 정보는 모두 그 안에 들어있을 터.
“그러면 빨리 나가죠. 얼마 지나지 않아 무너질 거예요.”
이지아와 함께 터널을 나서는 순간, 산덩이가 무너져 내렸다.
쿠우웅, 다리가 저릿거릴 정도로 큰 진동이 땅을 울린다.
재빨리 언덕 위로 올라가 아래를 내려다본다. 하지만 살아남은 생존자는 없었다.
“이걸로 이번 일도 수월하게 풀렸군요.”
“…….”
기묘한 침묵에 고개를 돌리니 어딘가 모르게 침중한 기색의 이지아가 보였다.
“마음에 걸리는 일이라도 있습니까?”
“……자료를 옮기는 도중에 살인 청부 명단을 봤어.”
“그야 그런 녀석들이니까요. 생각보다 많았어도 감내해야…….”
“그런 게 신경 쓰이는 게 아니야.”
고개를 저은 이지아가 어깨를 잘게 떨었다.
있을 수 없는 이름을 보았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인정하고 싶지 않은 현실이 거기에 있었다.
“명단에 누가 들어 있었는데요?”
“……랄프 에머슨.”
“아.”
그 이름을 들은 한태민이 조용히 머리를 쓸어 넘겼다. 랄프 에머슨. 그는 SS급 헌터이자 모든 협회장의 위에 군림하는 협회 총장이었다.
한 나라의 지부를 담당하는 게 아니라 모든 협회를 총괄하는 정점.
어찌 보면 세계 랭킹 1위인 케인보다 더 중요한 인물이었다.
그런 이가 살인 청부 대상이라니.
“폭풍이 불겠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