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4
#174화 탐색 (1)
한태민의 기색을 살핀 진만수가 나지막하게 읊조렸다.
“아무래도 심려를 끼쳐드린 것 같군요.”
“아니다, 네 말이 맞다.”
창밖은 짙게 깔린 어둠을 뿌리치며 형형색색 밝은 빛들이 꺼지고 켜지기를 반복했다. 명멸하는 빛을 멍하니 바라본 태민 역시 조용히 읊조렸다.
“……처음이다. 이렇게 아무것도 하기 싫은 건.”
에레나는 어째서 변심한 걸까?
거기에 합당한 이유가 있는 걸까?
있을 수도 있다. 그럴 수는 없다.
결코 알 수 없는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끝없이 이어졌다.
‘아덴만이라도 살아남으세요!’
오늘 따라 에레나의 목소리가 더욱더 선명하게 들리는 듯했다.
***
‘아덴만이라도 살아남으세요.’
인생에서 가장 후회하는 일이 있다면 바로 그 말을 너무나도 쉽게 내뱉었다는 것이었다. 그 뒤에 이어질 일을 알았다면 그런 멍청한 선택은 하지 않았을 텐데…….
물론, 그때 당시만 해도 에레나는 그게 최고의 선택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오직 아덴만이 여왕을 물리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으니까.
어차피 죽으면 모든 게 끝이라고 생각했기에 내릴 수 있는 판단이기도 했다.
그녀는 죽음이 두렵지 않았다. 이미 많은 종류의 죽음을 목도했기에 어떠한 죽음이 찾아와도 괜찮으리라 판단한 것이다.
하지만 그건 오만이자 오판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애송이가 방만하게 남발한 공수표였을 뿐이었다.
세상엔 죽음보다 더 두렵고, 무서운 것이 저 하늘의 별보다 많았다.
여왕에게 붙잡힌 에레나는 그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여왕은 그녀를 결코 쉽게 죽이지 않았다. 아니, 죽이기는커녕 실험 대상으로 삼았다. 마치 손안에 들어온 쥐새끼를 관찰하는 것처럼.
비윤리적이고, 비인간적인 실험이 개시되었다. 말로 표현하는 것조차 치욕적인 순간도, 떠올리는 것조차 곤욕스러운 상황도 이어졌다.
밑바닥이라고 생각한 순간마저도 밑바닥이 아니었다. 오버로드들의 정점에 군림한 여왕은 자비를 몰랐고, 자애를 버렸다.
처음엔 누군가 자신을 구해줄 거라고 믿었다.
막연한 기대를 가슴에 품고,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본디 에레나는 신실한 신자기에 두 손을 모아 기도하는 거라면 대륙에서도 손에 꼽힐 정도로 능숙했다.
하지만 몇 년이 지나도 바라는 사람은 오지 않았다.
곁에 있는 건 평생 받들어 모신 주신 이데아도 아니고, 줄곧 믿었던 아덴도 아니었다.
일생의 숙적인 여왕이었다. 얄궂은 일이라면 얄궂은 일.
그렇게 변하지 않는 일상이 계속되었다.
세포 단위로 쪼개져 생물이 생물이라고 불리지 못하는 영역까지 들어간 건 예사였다.
집요할 정도로 농밀한 물리적인 관측은 정신적인 관측으로 넘어갔고, 그 뒤에 있는 건 무한한 절망뿐이었다.
한계에 한계를 부추기는 주제만이 가득했다.
도덕관념과 윤리. 감정과 이성.
여왕은 개인이 가지고 있는 은밀한 치부까지 들추며 가십 거리로 삼았다. 가치관이 무너지고, 정신이 뭉개지는 건 당연지사.
그 무엇보다도 고통스러웠던 건 그러한 과정을 제삼자의 입장에서 지켜봐야 했다는 것이다.
극에 달한 육신과 정신의 괴리.
모든 게 하잘것없이 느껴지는 단계에 접어든 에레나는 더 이상 애걸복걸하지 않았다. 한계까지 내몰린 몸은 이미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를 인지하지 못했다.
하지만 여왕은 그런 반응마저도 재미있다는 듯 몰아붙였다.
매일 절망하고, 매번 절규하는 것도 지쳐갈 즈음, 에레나는 알 수 있었다.
자신에게 남아 있는 건 텅 빈 껍데기뿐이라는 걸.
죽어서도 죽지 못하고, 살아서도 그 뒤를 장담하지 못하는 그런 껍데기.
마지막이 그리 멀지 않았다는 걸 직감한 에레나가 오랜 친우를 만난 건 그즈음이었다.
처음엔 환각인 줄 알았다. 그만큼 그의 등장은 놀랍고, 또 난데없었다.
민무늬라고 자신을 소개한 그는 새로운 목표를 제시했다. 여왕을 타도하고, 무너진 대륙을 다시 세우자는.
에레나는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아니,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악의 굴레에서 벗어나려면 다른 선택지는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다시 한 번 새로운 삶을 되찾은 그녀는 꿈에서나 그리던 아덴을 만날 수 있었다.
모든 게 다 끝났다는 듯 이름을 바꾸고, 유유자적하는 그를.
행복해 보였다. 수많은 이의 사랑을 받으며 그들을 이끄는 모습을 보니 과거는 모두 잊은 듯했다.
이렇게나 비참하게 추락한 뒤에야 알 수 있었다. 결국, 희생은 희생일 뿐이었다는 걸.
“나, 나는 그런 꼴을……!”
침대에서 벌떡 일어난 에레나가 소리쳤다. 방금 잠에서 깨어났지만 심장은 전력질주라도 한 것처럼 미친 듯 두근거렸다.
핏물이 새어 나올 정도로 강하게 입술을 깨물며 시계를 쳐다보았다.
고작 새벽 4시.
눈을 감았던 시간을 생각하면 10분도 채 지나지 않은 시각이었다.
“흐윽.”
순간, 뼈에 사무치는 고통이 온몸을 강타한다.
환상 통증.
실제로 겪고 있는 게 아님에도 뼛속 깊숙이 새겨진 본능이 불을 지폈다. 여왕의 실험, 그 이후에 얻게 된 후유증은 지금까지도 그녀를 괴롭혔다.
살아 있는 한, 도망칠 수 없는 고통이었다. 육신은 새로운 것이었으나, 정신은 그렇지 못했다.
벗어나려면 하나밖에 없었다. 고통의 근간이 되는 모든 요소를 배제하는 것.
그러려면 여왕도, 이데아도, 한태민도 모두 죽여야 했다.
“간단해서 좋군요.”
거슬리는 건 전부 죽인 뒤, 편안한 마음으로 눈을 감는다. 그것만이 영원한 안식으로 가는 지름길. 에레나는 그 미래가 이뤄지길 바랐다.
***
쿠궁쿠궁, 쿠궁쿠궁.
고속 열차가 정해진 레일을 따라 가속했다. 최고 속도는 시속 300Km 오버. 안에 승객은 한 명도 없었다. 분에 넘치게도 이 고속 열차는 오늘 하루 동안 오버로드 길드의 비품이었다.
“이런 건 못 들었다고?!”
거침없이 달리는 고속 열차 위에 선 기시우가 비명을 질렀다. 다른 길드원이 하나둘씩 빠질 때부터 무언가 석연치 않더니 기어코 일이 터졌다.
시간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 달리는 고속 열차 위에 몸을 싣다니…….
“이런 서커스가 포함된 공략이었다면 진작 포기했다고!”
[ 시우, 집중해. 괴수가 바로 앞이야. ]
고개를 돌리니 유니콘을 타고 달리는 레티나의 모습이 보였다. 비가 주룩주룩 내리고 있는데도 그녀는 곧은 자세로 전방을 주시했다.
“하, 나만 징징이지.”
계속 칭얼거릴 수 없는 일이라, 한숨을 푹 쉰 기시우는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쌍창을 들었다. 영단을 꾸준하게 복용한 몸은 SSS급 헌터에 비견될 정도로 높은 스탯을 지니게 되었다.
괴수를 처리하는 건 이제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조금의 도움과 약간의 운만 있다면 소수 정예로도 처리할 수 있었다.
바로 지금처럼.
터널을 빠져나와 드넓은 평야에 진입하자, 저 멀리 이질적인 거체가 보였다.
느릿하게 이동하는 게 꼭 나무늘보처럼 보이지만, 겉모습만 보고 속단하면 안 됐다.
저렇게 보여도 지원 헬기를 열네 대나 추락시킨 주범이었다. 눈과 입에서 나오는 광선은 30센티미터 합금 강판도 꿰뚫을 수 있는 화력을 지니고 있었다.
쿠궁쿠궁, 쿠궁쿠궁.
고속 열차가 점점 놈과 가까워진다. 놈도 마침 레일 위를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고속 열차와 괴수.
두 대상이 교차하는 순간, 높이 뛰어오른 기시우는 괴수를 향해 달려들었다.
쌍창을 허벅지 안쪽에 쑤셔 넣자 놈이 비명을 지르며 넘어졌다.
절호의 찬스. 기시우는 쌍창을 풍차처럼 돌리며 너른 등판을 질주했다. 정신을 차린 녀석이 급하게 광선을 토해내지만, 헛수고였다.
온몸에 돋아난 은색 비늘이 외부의 충격을 바깥으로 돌렸기 때문이다.
기시우가 공격대에서 맡는 역할은 탱커.
오버로드 길드 내에서도 극강의 방어력을 자랑하는 그에게 광선은 시답잖은 필살기 중 하나일 뿐이었다.
“그러면…… 우왁?!”
순간, 빗물에 발이 미끄러졌다. 서둘러 중심을 잡았지만, 괴수가 그 찰나의 순간을 놓칠 리 없었다. 놈은 으르렁거리며 자세를 잡으려고 했다.
공수가 역전되는 듯했으나, 유니콘을 타고 날아오른 레티나가 할버드를 휘두르며 모든 논란을 종식시켰다.
“재해단천.”
버들가지처럼 꺾인 창대가 비명을 지르며 괴수의 정수리를 깨부쉈다.
쿵, 거체가 볼품없이 쓰러지자 기시우는 탄성을 터뜨렸다.
한 번에 모든 힘을 쏟아붓는 절기는 그가 갖지 못한 어빌리티 중 하나였다.
은연중에 흘러나오는 부러움을 억누르며 입을 연다.
“……절반은 내가 해치운 거야.”
“인정.”
“너무 쉽게 인정하는 게 아니야?”
“어차피 시우의 돈은 내 돈이기도 하니까.”
“그러십니까…….”
기시우는 장비에 묻은 흙탕물을 털어내며 길드 하우스로 귀환했다.
베르미미를 토벌한 지 겨우 한 달 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 그리 많은 게 변하지 않았을 것 같지만, 세상은 생각 외로 빠르게 변했다.
지금 텔레비전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 ……또 새로운 SSS급 헌터가 탄생했습니다. 헌터 조합, 이데아가 출범하면서 헌터의 수준이 전체적으로 향상된 덕분인데요. 상향평준화된 시점에서 SSS급 헌터가 나온 걸 보면 그들의 수준이 능히 짐작되지 않나요? ]
이집트, 중국, 영국에 이어 벌써 열세 번째 SSS급 헌터의 등장이었다.
헌터계는 급속도로 변화하고 있었다. 이례적인 호황이라 할 수 있었다. 정말 한순간도 방심할 수 없었다. 어제의 후배가 오늘의 선배가 될 수 있었다.
한태민이 노하우를 아낌없이 푼 덕분에 여기저기에서 기린아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나고 있었다. 이 기세라면 머지않아 열네 번째 SSS급 헌터도 나타나리라.
[ ……열세 번째 SSS급 헌터인 차예리 헌터를 소개합니다. ]
1년도 되지 않아 정점에 오른 천재 중의 천재, 차예리가 화면에 나오자 기시우의 눈썹이 절로 꺾였다.
미묘한 변화였지만 항상 붙어 다니는 레티나가 그걸 몰라볼 리 없었다.
“친구가 잘나가는 것이 불만?”
“그건 아니야.”
단언할 수 있었다. 애당초 차예리의 재능은 독보적이었다.
공간을 잘게 잘라 새롭게 구성하는 건 물론이고, 공간과 공간 사이를 이동하는 재주마저 깨닫지 않았던가.
그런 헌터에게 SSS이란 등급이 가지 않는 게 도리어 더 이상했다. 저 자리에 오르는 건 당연했다. 늦느냐, 빠르냐의 차이만 있을 뿐.
“……그냥 나만 제자리에 있는 것 같아서.”
상대적 박탈감이라고 했던가? 동기가 저렇게 나오는데 비교가 되지 않을 리 없었다.
물론, 객관적으로 보면 느린 속도는 아니었다. SS도 낮은 등급은 아니었으니까.
단지 탱커라는 역할 자체가 밋밋하기 그지없었다. 다른 헌터가 없다면 단독으로 무얼 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
단단한 몸이 아니면 마땅히 내세울 것도 없었다.
가만히 기시우를 쳐다본 레티나가 배시시 웃었다.
“불만 맞네.”
“아니야.”
“괜찮아. 나도 이겼는걸? 시우라면 더 굉장해질 수 있어. 내가 믿고 있어. 조바심내지 마.”
레티나가 조심스럽게 머리카락을 쓰다듬자 기시우는 어쩔 줄 몰라 하며 어깨를 웅크렸다.
“……그런 걸까?”
“당연하지.”
“어째서 너는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거야? 역시 내가 고용주라서?”
“아니, 시우가 고용주가 아니더라도 믿을 수 있어.”
“그럼, 역시…….”
“뿔과 꼬리가 있으니까!”
망설이지 않고 단언하자 기시우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칠 수밖에 없었다.
“내 감동 물어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