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는 EX급 헌터다-210화 (210/291)

# 210

#210화 조사 (1)

쿠쾅, 단번에 거리를 초월한다. 소리의 벽을 두드리며 나아가자 놀란 녀석의 얼굴이 조금 더 선명하게 보였다.

설마 들키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 걸까?

그렇다면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비릿하게 웃으며 녀석의 목을 쥐기 위해 팔을 내밀었다.

손가락이 목덜미에 닿으려는 순간, 이변이 일어났다. 녀석의 윤곽이 흐릿해지는가 싶더니, 이내 땅바닥으로 쑥 꺼진 것이다.

기다렸다는 듯 단단한 콘크리트 벽을 가볍게 통과한 걸 보니 처음부터 이 구도를 노린 것일 터.

강물을 거슬러 오르는 연어처럼 연신 뛰어오르며 벽과 벽 사이를 통과하는 걸 보니 제한 시간이 있는 듯했지만, 이곳은 도심지였다. 몸을 가릴 수 있는 곳은 넘쳐날 정도로 많았다.

길목을 내달리며 무고한 시민들을 방패막이로 삼으니 무작정 공격할 수만도 없었다.

하지만 여기에 달리기 주자가 없는 건 아니었다.

“리야, 나와라. 일할 시간이다.”

“저 앞에서 기분 나쁘게 팔딱거리는 녀석을 잡으라는 소리는 아니겠지?”

“잘 아는군, 서둘러 쫓아가라. 중요한 용의자다. 놓치지 말아야 해.”

“누누이 말하지만 나는 사냥개가…….”

“놓칠 시, 정신 교육 3시간.”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리야는 영체가 되어 온갖 종류의 물체를 통과했다.

제한된 시간이 될 때마다 바깥으로 모습을 드러내야 하는 녀석과는 다르게 그녀의 투과 능력은 한계가 없었다.

두 사람의 거리가 줄어드는 건 당연한 수순.

“잡았다!”

뒤에서 녀석을 덮친 리야가 땅바닥을 뒹군 순간, 메마른 총성이 울려 퍼졌다. 놈의 손에는 어느새 두툼한 권총이 들려 있었다.

“아프지 않더냐.”

투덜거린 리야가 옆구리를 걷어차려고 무릎을 구부리자 녀석은 또다시 땅바닥으로 꺼졌다. 팡, 힘껏 걷어찬 발차기는 목표물을 잃고 애꿎은 허공만 두드렸다.

“거참, 바람에 흔들리는 연도 아니고 중심 좀 잡고 살 거라.”

짧게 혀를 찬 리야를 뒤로 한 채, 한태민은 다음 순간을 주시했다. 제한된 시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모습을 드러내야 하는 그 순간을.

정신을 집중했다. 그리고 녀석이 바깥으로 나오자마자 중지를 튕겼다.

쿵, 하고 묵직한 소리가 울려 퍼지며 손끝에서 나온 마력 포탄이 모든 걸 집어삼키며 쏘아졌다.

하지만 녀석의 몸에 닿는 순간, 마력 포탄의 일부가 무로 돌아갔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게 마력 무효화와 다르다는 걸.

굳이 따지자면 2년 전, 데메무어가 사용한 기술과 매우 흡사했다.

‘그럼, 길버트가 연구하고 있던 게?’

생각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녀석이 다시 필사의 도주를 감행했기 때문이다. 이번엔 저항도 거셌다.

쏜살같이 날아오는 탄환을 한 손으로 낚아챈다. 손바닥을 보니 그을린 자국이 선명했다.

이 또한 평범한 물건은 아니었다. 개인의 일탈이라고 치부하기엔 너무나도 체계적이었다. 적어도 그에 합당한 목표가 있을 게 분명했다.

“멈추거라.”

순간, 구석에서 튀어나온 리야가 녀석의 발목을 붙잡았다. 무척이나 시기적절한 타이밍. 빠르게 거리를 좁힌 한태민이 중심을 잃고 넘어진 녀석을 짓밟으며, 머리 위에 네 개의 헤일로를 띄웠다.

모든 능력의 원천이 되는 마력을 짓누르는 고리가 나타난 이상, 녀석이 도망칠 길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누구의 사주를 받은 거지? 아니, 어디 소속인 거냐.”

진실을 내뱉게 만드는 반지, 악마의 유혹을 내밀자 녀석은 대답하는 것보다 먼저 입꼬리를 올렸다. 한쪽만 괴이하게 뒤틀린 게 여간 보기 역겨운 게 아니었다.

무어라고 말하려던 찰나, 녀석의 외투가 펄럭였다. 위화감을 느낀 뒤에는 이미 늦었다. 녀석은 이미 기폭 장치를 누른 뒤였다.

쾅.

귀가 먹먹해질 정도로 커다란 굉음이 머리를 때렸다.

폭발이 멀리 퍼지는 건 다행이 막을 수 있었지만, 녀석의 정체는 끝내 알아내지 못했다. 검게 그을려 숯이 되었으니 더 물어볼 수도 없었다.

일개 연구원을 처리하기 위해 이런 짓까지 서슴지 않고 저지르다니……. 과한 처사였다.

실과 득이 서로 맞물리지 않았다.

‘아니면 내가 모르는 사정이 있나?’

녀석이 남겼던 미소를 떠올렸다.

그것은 부아가 몹시 치밀어 오르는 미소. 분명 어디에선가 본 적이 있는 미소였다. 아마도 멀지 않은 곳에 답이 있을 터.

마주친 이상, 언젠가 부딪칠 수밖에 없었다. 상대가 원하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물줄기를 타고 올라가 어디에서부터 시작된 건지 알아낼 테니까.

***

어두운 그림자가 온 사방을 잠식한 지하.

죽은 듯이 누워 있던 남자가 감았던 두 눈을 떴다. 장소가 바뀌었음에도 방금 전까지의 상황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실패한 건가.”

목소리에 진한 아쉬움이 남는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직접 나서서 조종했음에도 이 꼴이었으니까, 그나마 좋은 소식이라면 미리 난적을 만나볼 수 있었다는 것 정도.

“좋지 않군. 하필이면 기어들어 간 곳이 그곳이라니. 너무 몰아붙였나.”

‘아니면 운명은 막을 수 없다는 건가…….’ 나지막이 중얼거린 남자가 턱을 괴었다.

난적을 상대하기 위해 2년 동안 강구했다. 과연 철옹성 같은 상대를 무너뜨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다행히 해답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아스란 총체 요람.

적은 오래전부터 자신의 약점을 드러내고 있었다.

지피지기면 백전불태라, 아스란 총체 요람을 탐독하고 연구하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하지만 그 결과물이 바라던 것과 조금 달라지면서 일에 차질이 생겼다. 지금도 예정이 계속해서 바뀌고 있었다.

길버트를 죽이려던 것도 그 일부분이었다.

물론, 그가 살아 있어서 곤란한 점은 없지만, 그래도 만일을 위해서 죽는 편이 더 나았다.

그때, 어두운 그림자를 뚫고 한 여인이 나타났다. 뜻하지 않는 불청객의 등장에 남자는 눈살을 찌푸렸다.

“일이 생각대로 풀리지 않는 것 같군요.”

“네가 다시 한 번 언급하지 않아도 알고 있다.”

팔짱을 끼며 고갯짓한다.

“그래서 무슨 일이지?”

“사전에 조율했던 것보다 더 많은 곳에 전선을 형성하고 있더군요.”

“그건 내 권한일 텐데? 그리고 언제부터 우리가 남의 눈치나 보며 전선을 형성했지?”

“어머님의 명령을 그새 잊은 건가요?”

파급력은 최소한으로. 무슨 연유인지 모르겠으나, 2년 전 어떠한 날을 기점으로 여왕이 내린 전언은 한결 간소해졌다. 마치, 무언가 엄청난 걸 깨닫기라도 한 것처럼.

또한 뒤에서 은밀하게 움직이는 걸 추천하기까지 했다. 이렇게 인간 세상에 내려온 것도 그 때문이었다.

“연이은 실패에 소극적으로 변한 거다. 이런 말은 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그날부터 어머니는 겁쟁이가 되었어. 계속 몰아붙이면 쟁취할 수 있는 걸 갑자기 방향을 돌리다니. 이게 가당하기나 한 지시라고 생각하나?”

“그럼요, 어머님은 조금 더 효율적인 전략을 선택하신 거예요. 한결같이 몰아붙이는 게 능사가 아니라는 걸 깨달은 거죠.”

“그래서 2년 동안 백중지세인가. 정말 좋은 전략이군. 두 다리 쭉 뻗고 편히 잘 수 있을 정도로.”

여인이 기세를 끌어올리며 송곳니를 드러냈다.

성모처럼 자애로웠던 미모는 온데간데없고, 흉악한 짐승만이 이 자리에 남아 있었다.

“어머님에 대한 불충은……!”

“……네가 재단하는 게 아니다. 너만 최고고, 너만 옳다는 생각은 버려라.”

여인을 한 번 노려본 남자는 시답잖다는 듯, 손을 휘휘 저었다.

“왜 무모한 짓을 사서 하는 거죠? 나중에 따라올 어머님의 질책과 실망이 두렵지 않나요?”

“너는 궁극이 탐나지 않는 건가?”

그 말에 여인은 입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모든 일의 원인은 궁극에서 비롯되었다.

다른 녀석들도 그 때문에 연락도 하지 않고, 암중에 숨어 제 갈 길 가느라 바쁘지 않던가.

“한 몸에 두 개의 능력을 받아들였을 때, 어떻게 될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어요.”

여왕의 능력은 강대했다. 하나만 있어도 능히 대륙을 거꾸러뜨릴 수 있을 정도로.

하지만 그것은 장점이자 단점이었다. 능력이 요구하는 상한선은 너무나도 높았다. 기회가 있다고 해도 궁극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을지 없을지는 또 다른 문제였다.

“그만큼의 가치가 있다는 걸 어째서 모르지? 궁극을 받아들일 수만 있다면 어머니에게 한 걸음 더 다가갈 수 있다.”

오직 여왕만이 일곱 개의 능력을 완벽하게 다룰 수 있었다. 따라서 여러 개의 능력을 다룰 수 있다는 건 그녀의 뒤를 이을 수 있다는 걸 단적으로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했다.

괜히 모두가 이 일에 열을 올리는 게 아니었다.

“이해할 수 없군요.”

“그래, 너는 이해하지 못하겠지.”

남자는 잘 알고 있었다. 눈앞에 있는 여인이 얼마나 불합리한 존재인지. 여왕의 총애를 받아 가장 강한 능력을 하사받았으니 그럴 만도 했다. 여인은 이질적이며, 그렇기에 특별했다.

“당연한 이야기예요. 혹시라도 제 몸을 뚫고 파티마 같은 녀석이 나오는 건 사양하고 싶으니까요.”

능력엔 수많은 기억이 들어 있다. 그렇기 때문인지 본래대로 돌아가고자 하는 본능이 강했다.

상위 넘버즈에게 궁극을 부여한다면 파티마와 다르지만, 파티마와 한없이 비슷한 녀석이 나올 게 틀림없었다. 이건 추측이 아니라 확신이었다.

수많은 세월을 보내며 얻은 확신.

능력과 능력의 결합이 어려운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상관없다. 그마저도 내가 지배하면 되니까.”

남자는 겁 없이 웃으며 손바닥을 활짝 펼쳤다. 그러자 주변의 마력이 동결되었다. 모든 마력은 그의 손안에 있었다.

그가 여왕으로부터 부여받은 능력은 지배. 무엇이든지 쟁취하는 약탈자였다.

***

선망의 시선이 끊이지 않았다. 어딜 가든 긴 꼬리가 따라붙었다. 약속 장소에 도착한 유소라는 아무도 모르게 한숨을 푹 쉬었다.

한국 랭킹 1위였을 때도 받지 못한 관심이었다. 아스란의 위상이 그만큼 높아졌다는 걸 의미하는 걸 테지만, 유쾌한 경험은 아니었다.

애써 무시하며 약속 시각이 다가오길 기다리고 있자니, 한 사람이 다가왔다. 애석하게도 약속한 상대는 아니었다. 경지도 다를뿐더러, 성별도 달랐다.

서슴없이 다가온 이는 오늘 처음 보는 남자였다.

“안녕하세요, 저는 미르 길드에 소속된 유찬열이라고 합니다. 아직 미숙하지만, 곧 SS급 헌터로 승격될 예정이죠.”

예전이라면 놀랐을 말. 하지만 지금은 마력 단련법이 널리 퍼져 SS급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결코, 흔한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보기 드문 것도 아니었다.

“유소라 헌터의 활약은 잘 듣고 있습니다. 저번에는 불법 무장 단체를 검거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고 하던데요. 같은 한국인으로서 자랑스러울 따름입니다. 또…….”

반사적으로 손을 든 유소라가 남자의 말에 반박했다.

“저는 한국인이 아니라 아스란인입니다만.”

“그게 중요한 건 아니지 않습니까? 그리고 한국인이었다는 사실이 어디로 가는 건 아니니까요. 솔직히 아직도 유소라 헌터를 한국인이라고 생각하는 분들도 많을 겁니다.”

말이 조금씩 엇나가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미소로 무장하고 있어 쉽게 꼬집을 수 없지만, 가까이하는 것만으로 불쾌해지는 남자였다.

아스란을 은근히 폄하하는 것부터가 그러했다.

한태민이 아스란을 건국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던가. 밤낮없이 일하는 건 물론이고, 끊임없이 관심과 정성을 기울였다.

그런데 그런 그의 노력이 무색해지는 반응이라니. 괜스레 짜증이 이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싶은데요. 시간이 되시면 저쪽에서 차 한 잔이라도 어떻습니까? 아, 부담을 주려는 건 아니니 거절하셔도 상관없습니다.”

순간, 일대에 탄성이 터졌다. 흥미로운 구경거리가 나타났다고 생각한 걸까? 마치 우리에 갇힌 원숭이라도 된 듯했다.

유소라는 이미 마음에 두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그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