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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EX급 헌터다-253화 (253/291)

# 253

#252화 두 마리 (2)

“히익.”

양개가 새된 소리를 내뱉자 녀석은 무언가 언짢은 듯 강하게 지면을 밟았다.

“저를 비난한 주제에 도망치는 검까?”

아무래도 필사의 도주가 들킨 듯했다.

기시우는 양개의 대처에 코웃음을 치면서도 손에 쥔 쌍창을 놓지 않았다.

“자, 잠깐만. 나는 이런 곳에서 죽어도 되는 인간이 아니란 말이다.”

“뭐라는 검까. 그런 건 내가 정함다.”

“잘 이야기하…….”

콰드득.

섬뜩한 소리에 반사적으로 눈을 돌렸다.

일말의 망설임도 없는 집행.

양개의 넋두리는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자신의 힘을 맹신한 자다운 결말이었다.

그가 얼마나 방만했는지 곁에서 보았기에 동정의 여지도 생기지 않았다.

애당초 우선순위가 달랐다. 흩어지는 전력을 하나로 묶는 게 먼저였다.

“당령청 경!”

리더의 대처가 중요한 시점이었다. 하나, 아무리 불러도 들려오는 대답은 없었다. 이미 당한 걸까? 고민하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녀석이 지척까지 다가온 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3조의 대열은 엉망진창이었다.

동료의 죽음, 당령청의 부재. 그리고 강적의 등장.

“일단 도망쳐. 녀석도 이런 곳에서는 보이지 않을 거야.“

“공략이고 뭐고 사는 게 먼저지!“

“떠, 떨어져. 내가 먼저 갈 거야!“

“가까이 오는 녀석은 누구든지 벨 거야, 말했어!”

당나라 군대가 따로 없었다.

너도 나도 살겠다고 노력하는 게 가상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알까. 그러한 발악이 모두 부질없다는 걸.

쌍창을 강하게 쥔 기시우가 도약하려는 순간, 크롬은 돌연히 고개를 돌렸다.

“아, 도망치면 살 수 있다고 생각한 검까? 정말 제 얼굴에 얼마나 더 침을 뱉어야 만족할 검까.”

기시우를 말끔하게 지나치며 대열에서 이탈한 무리를 향해 팔을 휘저었다.

‘실?’

이 경우엔 강철처럼 억세니 강사(鋼絲)라고 해야 할 터.

그제야 녀석의 무기가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휘익, 가늘고 긴 선이 번쩍이더니 두 호흡이 채 지나기도 전에 진득한 악취가 피어올랐다.

그 위에 서 있는 이는 없었다. 등을 돌린 자들은 이미 유명을 달리했으니까.

“자, 이쪽은 정리가 됐으니 그쪽 차례군요.”

도망치려고 하면 먼저 죽고, 도망치지 않으면 나중에 죽는다.

어느 쪽이든 사형 선고를 받은 건 매한가지였다. 양자택일의 선택지에서 벗어나는 건 불가능했다.

마치, 개미지옥에 빠진 듯했다.

그때, 이 자리에서 가장 작은 소녀가 먼저 움직였다.

“도망칠 수 없다면 먼저 노리는 수밖에 없어.”

“레티나!”

멀어지는 레티나의 기척에 놀란 기시우가 황급히 손을 뻗었지만, 그녀는 이미 사라진 뒤였다.

“예리, 보조를 부탁할게.”

“알았어.”

둘이 덤벼도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대였다. 하지만 레티나의 말대로 도망칠 수 없다면 선공이 답이었다.

미적지근하게 눈치만 보면 지금 있는 전력도 활용하지 못하고 전멸할 게 뻔했다.

이렇게 된 이상 이판사판이었다.

격전이 일어나는 곳을 향해 달리고 달렸다.

시체의 강을 건너 유니콘의 뒤꽁무니까지 치달은 기시우는 훌쩍 뛰어올라 크롬의 목덜미를 노렸다.

여력은 남겨두지 않는다. 처음부터 전력을 다했다.

쌍창을 번갈아 뻗으며 용의 숨결을 연사했다. 순간, 대리석 바닥이 무너지고, 회랑의 축이 흔들릴 정도로 강렬한 파동이 일어났지만, 크롬은 여유롭게 웃었다.

“드디어 그럴듯한 상대가 나온 건가요. 기쁜 일임다.”

레티나가 응전하는 크롬의 배후를 노렸다.

할버드를 마음껏 휘두른 재해단천.

반응할 여지가 없는 일격이었지만, 녀석은 당연하다는 듯 강사를 던져 유니콘의 앞발을 베었다.

무게 중심을 잃은 레티나는 낙마하면서도 크롬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할버드를 휘둘렀다. 그에 호응하듯 그녀의 복부를 있는 힘껏 걷어찬 크롬이 휘파람을 불었다.

“레티나!”

“괜찮…, 지 않을지도.”

목구멍에서 올라온 핏물을 삼킨 레티나가 할버드를 지팡이 삼아 일어났다.

“정말 좋군요. 이렇게까지 짓밟았는데도 기개가 살아 있다니. 흔치 않은 일임다. 하긴 저를 보기 위해서 모였을 테니 이해함다.”

“순서는 똑바로 정하지. 네가 먼저 온 걸 텐데?”

“그 말은 옳지 않슴다. 이곳은 제가 만든 놀이터. 진흙 발로 들어온 건 너희임다.”

“집 앞마당에 이런 게 떡하니 있으면 싫어도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잖아.”

쌍창을 삐딱하게 세운 기시우가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강사가 여기저기에서 솟구쳤지만 전부 무시했다. 그저 우직하게 밀고 들어가 용의 숨결을 난사했다.

애당초 어른과 아이의 싸움이었다.

은색 비늘을 세워도 무용. 강사는 두부를 뭉개는 것처럼 손쉽게 살을 짓뭉갰다.

그쪽에 신경 쓰느니 한 번이라도 더 찌르는 게 나았다.

“크크, 어쩌면 이길 수 있다는 그 표정. 정말 좋슴다. 하찮기 짝이 없는 기대를 품고 있는 듯한데 그 전에 제가 박살 내드리겠슴다.”

재차 강사가 튀어올랐다. 눈에 익숙해진 터라, 안심하던 찰나 불안한 예감에 간담이 서늘해졌다. 아니나 다를까, 불순한 기세는 전혀 다른 곳을 향하고 있었다.

‘레티나!’

꼬리를 휘둘러 레티나를 후려쳤다. 그리고 밀려나는 그녀를 대신해 쌍창을 들이밀었다.

“크흑.”

무작정 흘리기엔 너무나도 강대한 힘이었다.

“어라, 안 통한 검까? 눈치는 빠르군요. 감탄했슴다.”

“이 빌어먹을 새끼가…….”

주르륵, 뒤로 밀려난다.

대체 무엇에 비유해야 할까, 비행기? 화물선?

어찌 되었건 한계를 넘어선 압력에 몸이 짜부라질 것 같다는 건 확실했다.

쌍창을 든 팔도 버티지 못하겠는지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그때, 눈앞에 장벽이 나타났다. 유리나 거울처럼 투명한 장벽이.

하나, 둘, 넷, 여덟…….

켜켜이 쌓인 장벽이 맹렬하게 회전하더니 그 속도가 정점에 다다르자마자 폭발했다.

쾅!

마치, 한껏 구부린 스프링이 탄성을 견디지 못하고 튀어 오르는 듯한 모양새였다.

충격을 견디지 못한 크롬이 뒤로 물러나며 쓰라린 턱을 부여잡았다.

“공간을 압축해서 한 번에 방출한 검까? 누가 괴물인지 모르겠슴다. 이런 건 저도 함부로 못 하는 건데.”

“닥치고 이거나 먹어.”

차예리의 대답이 끝나기 무섭게 사방에서 폭격이 떨어졌다.

어디 갔나 했더니 남은 이들을 끌어모으느라 시간이 걸린 듯했다.

“쥐새끼들의 반란이라. 고루하군요.”

크롬의 멱을 따기 위해 강사를 제치고 달리던 기시우는 급하게 선회했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녀석은 방금 전의 폭격으로 토벌대가 어디에 있는지 눈치챘다.

“모두 떨어져!”

목이 터져라 소리쳤지만, 크롬이 한 발 더 빨랐다.

허공을 관통하는 가느다란 강사.

순간, 회랑이 반으로 갈라지며 폭격이 사그라들었다.

차예리도 휩쓸린 건지 이렇다 할 반응이 없었다.

예정된 결말이 뺨을 때리고 지나갔다. 사정없이, 그리고 한 치의 자비도 없이.

하지만 지금은 애도할 때가 아니라 살아남을 때였다.

기시우는 잘게 떨리는 입술을 깨물며 크롬의 뒤를 노렸다.

“의도는 좋지만…….”

하나, 그 수는 이미 간파된 지 오래였다.

“딱 거기까지임다.”

강사로 기시우를 제지한 크롬이 가까이 다가와 툭, 하고 어깨에 손을 얹었다.

“포기하면 편한 검다.”

격려 비슷한 말과 함께.

“개소리 집어쳐.”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이해하지 못한 기시우는 크롬의 미간을 찌르기 위해 창을 들었다.

아니, 들려고 했다. 하지만 한 번 내려간 창은 두 번 다시 올라오지 못했다.

움직여지지 않았다. 마치, 보이지 않는 구멍에 신체의 일부가 낀 듯했다.

온 힘을 다해 당겨도 허공에 고정된 오른팔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뭐지?’

무언가 있나 싶어 왼손에 쥔 창을 휘둘러봤지만, 애꿎은 허공만 찌르고 지나갈 뿐이었다.

‘설마 어깨를 만진 게…….’

떠올릴 수 있는 요소는 그것밖에 없었다.

“자, 여기에 도망칠 수 없는 샌드백이 하나 있네요.”

퍽.

주먹질 한 번에 갈비뼈가 부러지며 폐부를 찔렀다.

헉, 하고 바람 빠진 소리를 내뱉은 기시우는 반사적으로 창을 휘둘러 용의 숨결을 쏘았다.

그러나 크롬이 손을 내밀자 은빛 광선은 더 나아가지 못하고 정지했다.

멈췄다고 말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마치, 그 광경만 사진으로 찍어 액자에 박아넣은 듯했기에.

“뭐?”

비단 놀란 건 기시우 뿐만이 아니었다.

둘의 격돌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본 레티나 또한 일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있다는 걸 직감했다.

“뭘 놀라는 검까. 다른 동료들도 이만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걸 보았을 텐데요. 그에 비하면 저는 소소하고 자잘한 검다.”

보란 듯 손을 저은 크롬이 이죽거렸다.

그가 여왕에게서 부여받은 능력은 영원.

손에 닿는 건 무엇이든지 멈출 수 있었다. 그래, 상태나 현상마저도.

“그러면 정말로 안녕임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제법 즐거웠슴다.”

그리고 아무런 감흥도 없다는 듯 폭력을 휘둘렀다.

저항조차 할 수 없는 상황.

두 눈을 감은 기시우는 나지막이 읊조렸다.

‘죄송해요, 형.’

모든 걸 포기한 순간, 레티나가 그 앞을 막아섰다.

“레티나?”

“너는 내가 지킬 테니 포기하지 마.”

“아니, 그건…….”

고개를 돌린 소녀가 걱정하지 말라는 듯 미소를 지었다.

“이런 상황을 위해서 고용된 거잖아?”

그 말에 크롬이 자지러졌다.

“히히히, 눈물겹군요, 눈물겨워. 분위기를 깨고 싶은 건 아니지만 역할이 바뀐 거 아님까? 누가 보아도 보호를 받아야 하는 쪽이 명백한데요. 그래도 잘 어울리니 다행임다. 그러니…….”

입꼬리를 내리며 낮게 조소한다.

“사이좋게 죽고 싶다면야, 그렇게 해 드리지 못할 것도 없죠.”

레티나의 가슴에 긴 상흔이 새겨졌다.

아차, 하는 사이에 벌어진 일.

비릿한 피 냄새가 그녀에게 벌어진 비극을 단적으로 알려주었다.

“레티나!”

팔을 뻗었지만 닿지 않았다. 오른팔이 붙잡힌 탓이었다.

엎어지면 코 닿을 곳에 있는데도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숨은 붙어 있는 것 같군요.”

레티나를 걷어찬 크롬이 다시 손을 들었다.

저 손이 내려간다면 이제 두 번 다시 소녀를 볼 수 없으리라.

정신이 혼미해질 듯한 조바심에 기시우는 고개를 돌려 거치적거리는 오른팔을 보았다.

‘짐밖에 되지 않는다면 차라리…….’

“끄으아악.”

지지직.

무언가 뒤틀리는 소리가 나며 어깨가 통째로 찢어졌다.

전신을 내달리는 고통을 무시한 채, 한 발자국 내디딘다.

2년 동안 죽어라 고생한 보람이 있었다.

극한까지 내몰린 상황에서도 정신을 잃지 않을 수 있었으니까.

“이미 늦었슴다.”

바랐다. 그저 바랐다.

죽어도 좋으니 레티나만큼은 구하고 싶다고.

한 가지 염원만을 되뇌며 마지막 한 발자국을 내딛는다.

콰직.

어깨가 허전해진 순간, 뇌리에 선명한 울림이 퍼졌다.

[ 새로운 어빌리티가 추가되었습니다 ]

[ 용언(SSS) NEW ]

하나가 가고, 또 하나가 찾아온다.

“나는 바란다, 금강역사.”

그 말과 함께 왼팔이 한계까지 부풀어 올랐다. 거기에 담긴 건 거대한 신력.

기시우가 창을 내지르자 회랑 한쪽이 쓸려나갔다.

창졸지간에 벌어진 일, 떨어진 팔을 바라본 크롬이 어깨를 으쓱였다.

“이런 걸 바란 건 아니었는데요. 연인의 희생으로 각성한다니. 너무 구질구질한 레퍼토리지 않슴까?”

장난스럽게 입을 열었지만 기시우는 대꾸도 하지 않고 자기 할 말만 내뱉었다.

“그 아이한테 손대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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