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5
#254화 두 마리 (4)
회랑 위로 분홍색 살덩이가 부풀어 올라 시야를 어지럽혔다.
이 자리엔 고아한 양식의 복도는 없었다. 그저 배고픈 미식가만 있을 뿐이었다.
삼삼오오 모여 형성한 방벽은 한계에 다다른 듯 불길한 소리를 내며 변색되었다.
딜러들은 활로를 뚫기 위해 전방위 공격을 내질렀지만, 소용없었다.
전 세계에서 모인 정예인 만큼 치명타에 가까운 상처를 남기는 건 가능했다. 하지만 그 뒤에 이어진 상황이 문제였다.
허공에서 나타난 오버로드들이 상처 부위에 다가가 껌딱지처럼 들러붙었다.
짓이기는 속도보다 회복하는 속도가 더 빠르니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녀석들의 의도는 뻔했다. 우리에 가둬놓고 천천히 말려 죽일 생각이었다.
격풍을 일으켜 부식액을 시원하게 쓸어버린 케인이 질렸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밀어도 밀어도 계속해서 밀려들어 왔다.
아무래도 먹잇감이 많아 군침이 멈추지 않는 듯했다.
“카리나, 아무래도 막다른 골목에 부딪친 거 같지?”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어.”
줄어들기 시작한 시간이 점점 목을 옥죄였다.
발목까지 차오른 산성액이 전투복을 갉아 먹고 있었다.
모던이 소환수를 부려 토벌대를 보호하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오래전에 눅눅한 스프가 되었을 터.
순간, 배 속에 수많은 구멍이 열리며 뜨뜻미지근한 열기가 장내를 달구기 시작했다.
쿠으응, 카으흥.
듣는 것만으로도 불쾌한 소리. 그 사이로 바람이 나갔다 들어오기를 반복했다.
규칙적인 걸 보니 숨구멍인 듯싶었다.
손가락을 튕긴 카리나가 악동 같이 웃기 시작했다.
“죽으라는 법은 없군. 하늘이 무너졌는데도 솟아날 구멍은 있으니까.”
놈이 숨을 뱉는 순간 구멍이 열리고, 들이쉬는 순간 구멍이 다시 닫혔다.
타이밍만 잘 맞추면 나가는 건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크기가 작아서 여럿이서 동시에 통과하는 건 불가능해 보이는데……. 어떻게 할 거지?”
금방에라도 뛰쳐나갈 듯 자세를 잡은 모던이 사소한 의문을 입에 담자 카리나가 호쾌하게 답했다.
“그래도 수는 많잖아. 각자 하나씩 잡아서 탈출하면 되지.”
“한 번에 움직여야 할 겁니다. 동시에 나가지 않으면 녀석이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니까요.”
“왜, 벌써 무서워졌어? 클락.”
“아닙니다.”
클락의 등을 두드린 카리나가 다 알고 있다는 듯 히죽였다.
“정 무서우면 내 뒤를 따라와. 가장 안전한 곳만 골라서 갈 테니까.”
갈림길이 나타나자 선택의 시간이 도래했다. 하염없이 버티며 서 있는 건 악수였다. 뿔뿔이 흩어지지 않으면 죽을 판이었다.
적어도 이 자리에서 벗어나야 했다. 그래야 다음 공략을 도모할 수 있을 테니까.
3조도 현 상황을 이해하고 마음을 단단히 먹은 상태였다.
“내가 길을 열게.”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두 팔을 번쩍 들어 올린 케인이 광풍을 일으켰다.
산성액과 부식액이 섞이며 중력을 거슬러 올라 하늘 높이 솟구치자 일대에 정적이 흘렀다.
탱커가 방패를 내리고 앞으로 내려치는 것과 동시에 모던이 소리쳤다.
“흩어져!”
순간, 사분오열한 토벌대가 구멍을 향해 내달렸다.
카리나 또한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질주했다.
망설일 시간 같은 건 없었다. 이건 엄연히 타임 어택이었다.
제한 시간 안에 나가지 못하면 여기에서 썩어 문드러질 수밖에 없었다.
후우.
거친 숨소리와 함께 구멍이 커진 순간, 빠르게 도약해 몸을 욱여넣었다.
시야가 반전하고 후덥지근한 공기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가볍게 공중제비를 넘은 카리나는 다른 오버로드들이 쫓아올세라 바쁘게 두 다리를 놀렸다.
안도의 한숨을 내뱉은 건 주위의 광경이 세 번 바뀌고 난 후.
“여기까지 왔으면 그 녀석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되겠지.”
다행히 이번 회랑은 이렇다 할 전조를 보이지 않았다. 슬그머니 뒤를 돌아본 카리나는 쓰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익숙한 얼굴이 그곳에 있었다.
“뭐야, 클락. 정말 따라왔던 거야?”
“먼저 권한 건 카리나 경입니다만.”
“그래도 그렇지, 네가 순순히 따라올 줄은 몰랐는걸. 그것도 다른 녀석들이랑 같이.”
클락이 두리번거린 건 그때였다.
“그나저나 케인 경은 따라오지 않은 겁니까?”
“알아서 잘 탈출했겠지. 우리가 걱정할 군번은 아니잖아? 따지고 보면 녀석의 스탯이 제일 높으니까.”
“그렇군요. 주위에 있는 건 우리밖에 없군요.”
길게 여운을 남기며 말꼬리를 흐렸다.
“그러면 이제…….”
푹, 싸늘한 감촉이 배 속 깊숙하게 들어오자 어떻게 할 거냐고 물으려던 입이 조가비처럼 닫혔다.
갑작스러운 기습. 순식간에 거리를 줄이며 회심의 일격을 찔러 넣은 클락을 멍하니 쳐다본다.
설마, 아군이 이런 짓거리를 할 줄이야. 실책이었다.
“얕았나.”
“이 새끼가!”
클락을 후려치며 거리를 벌린 카리나가 쓰라린 배를 부여잡았다.
독이라도 바른 건지 상처는 아물지 않고 점점 벌어졌다.
우발적인 행동이 아니라 계획적인 범행이라는 뜻일 터. 머리가 싸늘하게 식었다.
“이게 뭐 하는 짓거리지. 정신이라도 나간 거야?”
그렇게 소리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모두 클락을 배제할 줄 알았건만,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 싸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가만히 보니 전부 안티 베놈 소속이었다. 그제야 무언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걸 깨달은 카리나가 싸늘하게 일갈했다.
“크크, 그러니까 처음부터 이럴 생각이었다는 거지?”
“카리나 경, 당신은 선을 넘었습니다.”
“저기, 내 꼴을 보고도 지금 그런 말이 나와? 선을 넘은 건 너 같은데. 그리고 그 옆에 붙어 있는 떨거지 전부.”
양심의 가책을 느낄 만도 하건만, 클락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그동안 미국 정부는 당신의 일탈을 묵인했습니다. 일일이 나열하지 않아도 그건 카리나 경이 제일 잘 알고 계실 테죠.”
“뭐, 찔린 게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 되겠지.”
애당초 무한 회랑 같은 복마전을 찾기 위해 전 세계를 전전긍긍한 것도 넓은 의미에서 보자면 일탈이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왜 하필 지금이지?”
“당신이 참여해 기어코 완성시킨 포털 도어, 그건 정말 위험한 물건입니다.”
거리와 거리를 초월해 서로 다른 공간을 잇는 도구.
그건 다음 세대를 선도할 수 있는 대혁명이자 대발명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걸 한태민에게 넘겼다. 마치, 그녀가 나고 자란 미국은 어찌 되어도 좋다는 듯이.
“미국 정부는 더 이상 참지 않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래서 이런 결론을 내렸다는 거야? 참을성이 너무 부족하지 않아?”
“싱귤래리티 코어 또한 카리나 경의 손에서 나왔다는 걸 이미 알고 있습니다. 이것만으로 이유는 차고 넘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제멋대로 알을 낳는 황금 거위는 필요 없다는 거네?”
가당찮다는 듯 코웃음을 친 카리나가 낮게 읊조렸다.
“미친 새끼들.”
“그리 성낼 거 없습니다. 말했을 텐데요. 입은 만악의 근원이라고. 타국인도 아닌 자국민이 그러고 다니는데 정부가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을 리 없습니다. 여기저기 떠벌리고 다닌 값을 치른다고 생각하십시오.”
“크게 당할 때가 온다는 건 지금 이런 상황을 말한 거야? 웃기지도 않네.”
“무엇 때문에 한태민 국왕에게 꼬리를 흔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처신을 잘못했습니다. 카리나 경. 당신이 잘 보여야 했던 건 아스란이 아니라 우리 미국이었습니다.”
“가르치려 들지 마. 내가 갈 길은 내가 정해.”
쿵.
강하게 발을 굴린 카리나가 차게 가라앉은 눈으로 클락을 노려보았다.
정부의 주도하에 모인 기사 집단, 안티 베놈.
처음부터 수상하다고 생각했었다. 길드 출신이 아니라는 것도, 고위층과 연이 있는 것도 전부.
누군가 설계한 듯한 냄새가 물씬 풍기지 않던가. 아니나 다를까, 하늘에서 뚝 떨어진 녀석들은 기대를 배신하지 않았다.
녀석들의 용도는 오버로드 사냥이 아니었다.
안티 베놈을 모집한 정부도 그들이 미국의 얼굴이 되길 바라지 않았을 터.
그저 가장 깊은 곳에서 활동할 히트맨이 필요했던 거였다.
“쉽게 말해서 안티 베놈이 지정한 대적이 오버로드가 아니라 나였다는 거잖아.”
“일시적인 방침일 뿐입니다. 카리나 경만 사라지면 정상적으로 돌아갈 겁니다.”
“그게 아니라는 건 네가 잘 알 텐데?”
“……카리나 경이 참견할 문제가 아닌 것 같군요.”
클락이 손가락을 튕기자 안티 베놈의 일원들이 주위를 에워쌌다.
상대할지 말지 아리송한 마당에 이렇게 적대적으로 나오니 오히려 상쾌할 지경이었다.
그래, 이런 고난도 있고 저런 고난도 있어야 마지막에 유종의 미를 거둘 수 있지 않겠는가.
“안타깝지만 카리나 경에 대한 정보 수집은 모두 끝났습니다. 현대 화기를 이용한 전투를 애용하신다고요?”
피식, 웃은 클락이 검을 들었다.
현대 화기는 사용하기 편한 만큼 그 한계가 명확했다.
안티 베놈이 노리는 건 바로 그 점이었다.
원거리 사격에 대한 대비도 완벽하게 준비했으니 더할 나위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알까?
그녀의 본질을 꿰뚫어 보지 못한 것이야말로 맹점 중의 맹점이라는 걸.
“그러니까 현대 화기를 봉쇄하면 해볼 만 하다고?”
“왜 아닐까요?”
“거기 가만히 있어.”
다용도 군용 벨트를 벗어 던진 카리나가 깍지 낀 손을 번쩍 올렸다.
마치, 이따위 상처는 아무런 방해도 되지 않는다는 듯.
우드득, 우드득.
관절을 풀며 정면을 응시했다.
“지금이라도 투항하면 상부에 전달해서 최소한의 자비를 베풀겠습니다.”
“가지가지 하네, 정말.”
[ 오의 - 한걸음 ]
쿠쾅.
폭음이 터진 것과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기사가 날아간 건 거의 동시였다. 그야말로 창졸간에 벌어진 일.
기사들이 넋을 놓고 있는 사이, 카리나는 여세를 몰아 한 박자 더 빠르게 움직였다.
쾅, 쾅, 쾅.
내려간 주먹이 올라와 관자놀이를 사정없이 치고 갈 때까지 보이는 과정은 하나도 없었다.
준비 동작도 없이 쏘아진 권격이 뼈를 짓뭉개면 그제야 소리가 따라와 굉음을 터뜨렸다.
인지 부조화가 일어날 정도로 강렬한 임팩트. 발도술이 아니라 발권술이라 할 수 있었다.
몇 초 지나지 않아 주위를 에워싼 기사 모두가 쓰러졌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우위를 점했던 건 이쪽이건만, 아차 하는 사이에 주도권을 빼앗겼다.
눈 깜빡할 사이에 일어난 공수 변환.
극명한 온도 차에 놀란 클락은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카리나 경은 사, 격술에 재능이 있었던 게……?”
“뭐라는 거야. 그쪽은 취미 생활이고, 이쪽이 진짜지. 조사했다면서 이런 건 몰랐나 봐?”
악동 같이 웃으며 걸어간 카리나가 클락 앞에 섰다.
숨결이 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 귓가에 입을 댄 카리나가 나지막이 읊조렸다.
“나는 미국 정부의 요청에 따라 헌터들이 사용할만한 기술을 가르친 적이 있어. 특수 요원은 물론이고, 장성에 이르기까지 전부. 사실상 실무자라고 할 수 있는 녀석 모두 내 밑에서 기었지.”
위협하듯이 한 걸음 더 나가며 말을 잇는다.
“그게 무엇을 뜻하는지 알아?”
“…….”
“미국 땅에서 내 손을 거치지 않은 녀석은 없다는 뜻이야. 네가 누구에게 배웠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전수했던 형태가 그대로 남아 있어서 하는 말이야.”
순간, 소름이 돋았다. 카리나와 눈이 마주친 클락은 마른침을 삼켰다.
들었던 정보와 일치하는 게 하나도 없었다. 처음부터 이길 수 없는 싸움이었다.
“듣고 나니 갑자기 이건 아닌가 싶지? 하지만 아쉬워서 어쩌지. 너희가 싫어도 이제 내가 하고 싶은걸.”
“으악!”
클락의 어깨를 움켜쥔 카리나가 음흉하게 눈꺼풀을 내리깔았다.
무저갱처럼 깊은 눈동자를 쳐다본 클락은 놀라 자지러졌다.
“분란의 싹은 없애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