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는 EX급 헌터다-266화 (266/291)

# 266

#265화 독기 (1)

이미 내친걸음이었다.

김시진의 결정이 변하지 않았다는 걸 다시 한 번 확인한 노인이 김태영의 어깨에 손을 얹으려는 순간, 이변이 일어났다.

본능적으로 위기를 느낀 김태영이 뛰쳐나간 것이다.

“도, 도와주세요! 누구 없나요, 살려주세요! 아무라도 좋으니까, 제발!”

애석하게도 필사의 도주는 얼마가지 않아 막을 내렸다.

애당초 병을 앓아 약해질 대로 약해진 몸이었다. 뛰는 건커녕 걷는 것조차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주저앉은 김태영을 무릎으로 짓누른 김시진은 윽박질렀다.

“조용히 해. 아프지 않으니까. 금방 끝날 거야.”

“혀, 형. 이, 이러지 말고 그냥 가자. 오늘 있었던 일은 잊을 테니까. 분명 다른 방법이 있을 거야.”

“그런 건 없어.”

우악스럽게 김태영의 턱을 누르며 고갯짓하자 노인이 다가와 김시진의 머리 위에 손을 올려놓았다. 그리고 다른 손을 들어 김태영을 붙잡았다.

“……반전.”

노인이 읊조리는 것과 동시에 섬뜩한 파열음이 울려 퍼졌다. 순간, 펄떡거리며 저항하던 김태영의 움직임이 멎었다.

황망하게 스러진 동생을 밟고 일어선 김시진이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혈관을 타고 흐르는 마력은 짜릿한 감각을 선사했다.

“선택받은 녀석들은 이런 기분을 매일 느끼며 산다는 건가.”

“기뻐하는 건 좋지만 우리가 맺은 계약을 잊은 건 아니겠지?”

“잊지 않았습니다.”

들끓는 흥분을 감춘 채 고개를 끄덕였다.

“어서 오게. 자네라면 좋은 재목이 될 것 같군.”

노인의 손을 잡은 김시진이 등을 돌렸다.

두 사람이 지나간 자리에 남은 건 아무것도 없었다. 처음부터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듯이.

***

몽롱한 표정으로 일어난 이지아가 기지개를 켰다.

오랜만에 찾아온 휴일이었으나 자도 잔 것 같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게,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일정을 소화하느라 눈코 뜰 틈도 없이 돌아다녔던 것이다.

비단 어제일 뿐만이 아니었다.

부대의 특성상 해마다, 분기마다, 달마다, 날마다 정해진 업무를 제시간에 처리해야 했다.

훈련 처리, 중진 회의, 개인 잡무.

공적인 임무는 물론이고, 사적인 의뢰에 이르기까지.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란 상황이었다.

그래도 보람이 없는 건 아니었다. 그녀가 노력하는 만큼 헌터 제압 부대도 성장했으니까.

시대의 흐름이라고도 볼 수 있었다.

처음에는 범죄자들을 잡는 데 그쳤으나, 오버로드가 출현하고 기사라는 개념이 등장하면서 헌터 제압 부대의 중요도가 급상승했다.

크기와 규모는 3년 사이에 몰라보게 달라졌으며 그 위상 또한 높아졌다.

국가의 무력 기관이란 국력을 만방에 알리는 척도가 되었으니까.

지금에 이르러서는 특수한 능력과 관련된 업무라면 뭐든지 맡고 있었다.

이대로 쭉 실적을 쌓는다면 준장 자리도 노려봄 직했다.

소령에서 대령까지 진급하는 데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으니 운이 좋다면 최연소 타이틀도 얻을 수 있으리라.

그야말로 탄탄대로. 모든 성과가 압도적이니 여성으로서 올라갈 수 있는 자리에 제한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어깨에 힘을 주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집에서는 평범하게 지내고 싶었다.

“볼 거 없나.”

텔레비전을 켜니 유명한 아이돌 그룹이 나와 춤을 추기 시작했다.

남성미를 강조하는 게 눈이 즐거울 법도 하건만, 어떠한 감응도 없었다. 나이가 든 탓일까? 채널을 돌려 예능을 봐도 재미가 없었다. 차라리 뉴스가 더 흥미진진했다.

반쯤 뜬 눈으로 배를 벅벅 긁고 있자니, 완전 깬다는 듯한 표정으로 한 사람이 지나갔다.

누구 집 자식인지 몰라도 잘 컸다, 라는 감상이 나올 법한 청년이었지만 이지아에겐 원수일 뿐이었다.

“왜 그런 표정이야?”

“아니, 누나 말이야. 밖이랑 안이랑 너무 다르지 않아? 밖에서는 한껏 치장하고 다니면서, 집에서는 왜 그런 꼴인데. 기껏 예쁜 얼굴에게 미안하지도 않아?”

“그런 것까지 신경 쓰면 못 버텨. 그리고 가족의 눈치를 보느라 완전 무장을 하는 것도 웃긴 일이잖아.”

“그래도 나도 엄연히 남자야, 그런 차림은 좀 그렇잖아. 안 그래?”

뺨을 긁적이며 고개를 돌린다.

무슨 소리냐는 듯 고개를 숙이니 자유분방한 옷차림이 보였다.

돌핀 팬츠에 축 늘어진 민소매.

그녀의 몸매가 한껏 드러난 모양새였다.

가슴께가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물론, 보인다고 해도 요청을 들어줄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조그만 게 벌써부터 밝히긴. 미래가 걱정이다, 걱정이야.”

“그, 그런 게 아니라 누나는 부끄럽지도 않아?”

“딱히.”

그런 거에 일일이 반응하면 군부대에 있지도 못했다.

한숨을 내쉬며 동생을 쳐다보았다.

이시영, 집안의 늦둥이로 금실 좋은 부모의 예상치 못한 결실이었다.

고등학교도 졸업하지 않은 파릇파릇한 시기.

오냐오냐 키웠던 탓일까? 장난기 많은 성격으로 자란 게 흠이라면 흠이었다.

물론, 어렸을 땐 그것도 장점 중 하나였다. 스스럼없이 다가와 천진난만하게 웃을 땐 그녀도 기뻤으니까.

하지만 나이가 들어 머리가 굵어진 걸 보니 징그럽기만 했다.

이지아가 하품을 하며 다리를 쭉 펴자 이시영이 혀를 찼다.

“정말 선머슴이 따로 없네. 그러니까 주말에도 혼자 놀지. 유일한 친구가 리모컨이라니. 누나 대신 눈물 흘려도 되는 타이밍이지?”

“아침부터 건드리지 말고 네 볼일이나 봐라. 누나, 피곤하다.”

나이 먹고 동생이랑 투닥거리는 것도 우스운지라 이지아는 어디에서 개가 짖냐는 듯 무심하게 손을 흔들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시영의 깐죽거림은 그치지 않았다.

“일에 푹 빠져서 남자 친구도 없지? 하긴 분기마다 한 번 쉴까 말까 하는 데 있을 턱이 없지.”

“…….”

“얼굴이 예쁘면 뭐해. 마음이 삭았는데.”

그 말은 금기나 다름없었다. 상황이 이렇게 됐는데 참을 이유가 없었다.

이시영에게 한없이 무른 부모를 대신해 집안의 기강을 잡는 건 언제나 그녀의 몫이었다.

“이리 와. 그동안 사랑의 매가 많이 모자랐지? 쉬는 김에 사랑으로 채워 넣어 줄게.”

이지아가 일어나자 식겁한 이시영이 도망치려고 등을 돌렸지만, 허사였다.

수많은 실전을 통해 다져진 이지아의 손은 목표물을 놓치지 않았다.

“아아악! 엄마! 누나가 때려! 부러진다, 부러진다고. 허리, 허리!”

“누나 대신 눈물을 흘려준다며. 빨리 흘려 봐.”

보스턴 크랩에 당한 이시영의 허리가 비정상적인 각도로 비틀어질 때즈음, 부엌에서 김 여사가 나타났다.

“너희는 그 나이가 돼서도 싸우니. 그리고 지아, 너는 동생이 옆에서 좀 건드린다고 그렇게 반응하니. 어른스럽지 못하게.”

“어, 음. 엄마, 그게 아니라…….”

“변명은 됐으니까 그만하고 밥이나 먹으렴.”

김 여사의 명에 따라 남매는 순한 양이 되어 자리에 앉았다.

수저가 움직이는 소리가 간간히 들릴 뿐, 식탁 위는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 ……신의 존재가 확증되는 날이 올 줄이야. 정말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장 박사님? ]

[ 34개국에 포털 도어가 설치되어 시험 운행 중에 있습니다. 우리 대한민국도 그중 한 곳인데요. 현장에 나가 있는……. ]

[ 여왕의 등장은 인류에게 큰 위협이 되었습니다. 오버로드의 군세 또한 심상치 않은 동향을 보이고 있습니다. 황폐해진 토지가 작년도에 비해 45%가량 급증하는 등……. ]

텔레비전이 제멋대로 떠드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자니, 한 사람이 화면에 비쳤다.

모든 뉴스의 중심, 한태민.

처음에 보았을 때만 해도 햇병아리에 불과했다.

물론, 당시에도 범상치 않다는 건 어렴풋이 깨달았지만, 이렇게 성장할 줄이야 누가 예상이나 했겠는가.

처음에 그가 아스란을 건국한다는 말을 했을 때만 해도 모두가 반신반의했건만, 지금은 보란 듯 성장해 강대국이 되었다.

오랜만에 반가운 얼굴을 보니 표정이 절로 풀어졌다.

“태민이네?”

그 말에 이시영이 눈살을 찌푸렸다.

“태민이라니……, 국왕님이 누나 친구야? 왜 친근하게 불러.”

“되지 못할 것도 없지.”

“자신감 지리네. 이거 보여? 패기에 질려서 소름이 돋았잖아. 대체 어디에서 그런 자신감이 나오는 거야? 이제 곧 서른이면서. 아니지, 서른인가?”

이시영의 어깨를 잡은 이지아가 어금니를 깨물자 굳게 닫힌 입술 사이로 바람이 새어 나왔다.

“나이는 상관없잖니, 동생아?”

“마, 맞아. 누나도 겉만 보면 원톱이니까.”

“한마디가 많은 것 같은데. 이번엔 코브라 트위스트?”

큼, 헛기침을 내뱉은 이시영이 생각을 정리했다.

“걱정돼서 하는 말이야.”

“그게 무슨 말이야?”

“나는 누나가 환상을 좇는 게 아니라 현실을 쫓았으면 좋겠어. 아무리 저쪽이 누나를 모른다고 해도 화면에 대고 친한 척하는 건 좀 그렇잖아. 중증 빠순이도 아니고 말이야.”

좋은 말 같지만 곱씹으면 까는 말이었다.

“네가 누나에 대해서 모르는 게 많네.”

“응?”

“이미 태민이랑 사적인 자리에서 몇 번 만난 적 있다는 소리야. 안쓰럽게 볼 것도 없이 진짜로 아는 사이라는 거지.”

이시영이 벌떡 일어났다.

한태민이라면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기사였다.

권력이면 권력, 실력이면 실력.

뭐 하나 빠지는 게 없는 셀럽이었다.

그런 사람과 아는 사이라니. 놀랄 노 자였다.

“국왕님을 알고 있다고, 정말?”

“그래, 친하다면 친하다고 할 수 있는 사이지.”

“연락하면 바로 답장 오고 그래?”

“아마, 올걸?”

말끝이 흐려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한태민과 연락을 나눈 지 꽤 됐기 때문이다. 서로 바빠서 그럴 시간이 없었다고 해야 하나?

그래도 이지아는 한태민이 자신을 잊지 않았다고 단언할 수 있었다. 수면 아래에서 같이 한국을 바꾼 동료였으니까.

기실 가치관에 많은 영향을 미친 사람이기도 했다.

그가 아니었다면 부당한 상황을 보고도 못 본 척 넘어갔을 테니까.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특별한 관계인 건 틀림없었다.

“그런 이야기는 여태껏 없었잖아. 대체 언제 만난 거야?”

“한 3년 전쯤?”

“와우, 한참 됐잖아. 둘이 무슨 관계야? 어떻게 친해지게 됐어? 누나 성격에 들이밀었을 것 같진 않은데.”

이지아는 말을 아꼈다. 동생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같은 비밀을 공유하는 동료?

친한 누나 동생 사이?

줄 건 주고받을 건 받는 관계?

딱, 하고 이거다 싶은 게 없었다. 한태민이 아스란으로 간 뒤 거리가 멀어진 감이 없잖아 있었다.

새삼스럽지만 서운했다. 괜히 싱숭생숭해 입술을 깨문다.

“혼자만 알지 말고, 말해 줘. 설마 대외비야?”

“그건 아니지만…….”

무어라고 말하려던 순간, 스마트폰이 울렸다.

[ 휴가 중에 정말 죄송합니다, 대령님. 아무래도 오셔서 확인해보셔야 할 사안이 생겼는데요. ]

***

[ 한국대학교 병원 ]

3년 전, 균열 홍수가 일어나 지지 기반을 잃고 쓰러질 뻔했으나, 기적적으로 회생해 지금까지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곳이었다.

그때, 일어난 재앙을 보여주듯 곳곳에 보강한 흔적이 역력했다. 과연 전국에서도 수위에 드는 종합 병원이라 할 수 있었다.

“대령님. 여기입니다, 여기.”

제1병동을 지나 제2병동에 들어가자 후임인 남동렬이 손을 흔들며 다가왔다.

“그래서 무슨 일이지? 이런 사건이 드문 것도 아닐 텐데?”

이미 차에서 사건의 개요를 살짝 훑어보았다.

제2병동에서 실종 사건이 일어났다고. 흔한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새삼스레 놀랄 일도 아니었다.

“그건 일단 현장에 가서 말씀드리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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