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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EX급 헌터다-275화 (275/291)

# 275

#274화 역공 (3)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무저갱이 끝없이 이어지자 이시영은 미간에 힘을 주었다.

오금이 저릿거릴 지경이었다. 자칫 잘못하면 벽에 부딪쳐 나뒹굴 것 같았다.

“앞은 보고 달리는 거야?”

“빨리 달리는 것만 생각해. 방향은 내가 유도할 테니까.”

지금은 공격이 멈췄지만 방심할 수 없었다. 상대는 송곳니를 감춘 맹수, 언제 나타날지 몰랐다.

결국, 먼저 눈치채는 쪽이 이기는 판이었다.

저쪽이 이쪽을 찾는 데 애를 먹듯이, 이쪽도 저쪽을 찾는 데 애를 먹을 수밖에 없었으니까.

더욱더 깊은 곳으로 진입하자 관자놀이가 저릿거렸다. 그 형언할 수 없는 감각에 나현은 고개를 돌렸다.

유난히 어두운 골목길이었다. 마치, 무언가 튀어나올 것처럼.

숨을 죽이고 사태를 관망하자 뇌리를 울리는 경종이 점점 더 강렬해졌다.

쿵, 쿵, 쿵.

가슴을 울리는 고동이 정점에 달한 순간, 빛줄기가 쏘아졌다.

“비켜!”

“우앗?!”

기다렸다는 듯 이시영을 걷어찬 나현은 검을 세워 있는 힘껏 휘둘렀다. 이내 청명한 소리와 함께 강한 반동이 손목을 타고 올라왔다. 어금니를 꽉 깨물어 시큰한 고통을 참는다.

“큭.”

“처음이라 그런지 시간이 걸리네. 하긴 이런 것도 경험이겠지.”

반대쪽 통로에서 튀어나온 김시진은 반응할 시간조차 주지 않겠다는 듯 높이 도약했다.

빠르게 좁혀지는 거리.

그는 두 사람을 놓친 게 아니었다. 그저 먼저 추월하기 위해 다른 길을 선택했을 뿐.

김시진이 검을 거칠게 내려찍자 나현은 검면을 세워 그 일격을 흘렸다. 힘의 격차는 확연했지만, 방도가 없는 건 아니었다.

이시영이 넘어지면서 떨어뜨린 방패 조각을 집어 던졌다.

탕!

검을 비스듬히 세운 김시진이 움찔거렸다.

사실 나현이 노린 건 그때 생긴 찰나의 빈틈이었다. 승패를 가르는 건 화력이 아니라 적중률이었으니까.

하나, 노림수를 펼친 건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나현이 쇄도하는 것과 동시에 검을 수평으로 세운 김시진이 팔을 뒤로 당겼다. 그 자세가 실로 기묘해 마치 쇠뇌에 걸린 화살을 보는 듯했다.

“어서 와라.”

한껏 뒤로 젖혔던 몸을 앞으로 쑥 내민다. 동시에 길게 뻗은 검이 화살처럼 쏘아졌다.

날카로운 궤적을 피해 몸을 웅크린 나현은 눈앞에 환해지는 듯했다. 피한다고 피했건만, 검 끝은 아직도 미간을 노리고 있었다.

‘이건 못 막아.’

찌르기가 채 닿기도 전, 선천적인 감각이 암울한 미래를 예측했다. 아마 뒤통수까지 꿰뚫린 채 죽을 터.

두 눈을 질끈 감고 체념한 순간, 천장이 무너져 내렸다.

쿠웅.

지축이 흔들릴 정도로 커다란 충격에 검 끝이 요동쳤다.

자그마한 변수라고 해도 범위가 커지면 큰 오차를 낳는 법.

제자리에 털썩 주저앉은 나현은 이마를 쓰다듬었다. 다행히 종이 한 장 차이로 살 수 있었다.

“괜찮아?”

그때, 귓가에 익숙한 소리가 들렸다.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어 올리자 목소리의 주인이 보였다. 주위는 어두웠지만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국왕님? 여기는 어떻게……?”

“볼 일이 있어서 말이야. 다친 곳은 없지?”

“네. 덕분에요.”

명랑한 대답을 듣고 나서야 한태민은 안심할 수 있었다.

김시진이 던전 공략에 참가했다는 말을 듣고 부랴부랴 들어온 게 정답이었다. 하마터면 큰일을 치를 뻔했다.

“그것보다 앞에!”

나현이 검지로 가리킨 순간, 검기가 폭우처럼 쏟아졌다.

큐브 스테이크처럼 썰린 암굴이 무너져 내리자 한태민은 팔을 흔들었다. 마치 손등에 묻은 물기를 털어내듯이.

간단한 손짓 한 번. 단지 그것뿐이었지만 장내를 휩쓴 바윗덩어리는 흔적도 없이 전소했다.

“이제 그만해라, 김시진. 네가 도망칠 곳은 없으니까.”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오다가 봤다. 이미 한 명 죽였더군.”

그 말에 김시진이 어깨를 들썩였다.

“제가 했다는 증거라도 있나 봅니다?”

“이 자리에 그때 그 상황을 지켜본 사람이 둘이나 있다. 그걸 잊지 마라.”

“그 둘이 먼저 공격했을 가능성도 있지 않습니까.”

“말장난하지 마라. 방금 전에 가한 선공은 어떻게 설명할 거지?”

“보다시피 암굴이라서 말입니다. 괴물이라도 튀어나온 줄 알았습니다. 천장에서 불쑥 뛰어내리면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뻔뻔하기 그지없는 대답이었다.

애당초 던전에서 사람을 해한 녀석이었다. 모르쇠로 일관할 거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방도를 마련하지 않으면 절대 입을 열지 않을 터.

“쉽게 가자고.”

처음부터 녀석과 실랑이할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나 말고도 너를 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많으니까.”

쿵, 쿵, 쿵.

한태민이 허공을 강하게 두드리자 그 지점에 균열이 생겼다.

“미친…….”

벽도 아니고 공간이 달걀 껍질처럼 깨지다니…….

이 무슨 해괴한 위력이란 말인가. 한태민의 무력을 코앞에서 목격한 김시진의 이마 위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차원 통로가 허물어지며 두 세계의 경계가 사라지기 시작한 건 그때였다.

이윽고, 구멍 너머로 수많은 사람이 보였다. 들어가기 전까지만 해도 한산했던 장소이건만, 지금은 관중으로 북적이고 있었다.

맨 앞에 박종인이 서 있다는 걸 깨달은 김시진이 서둘러 피 묻은 검을 등 뒤로 숨겼지만, 그런 얕은 수작이 통할 리 없었다.

범행 도구를 숨긴다고 해도, 그 과정에서 생긴 기세를 감출 수 있을 리 만무했다.

희번덕거리는 김시진의 눈빛을 본 박종인은 고개를 저으며 참담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사전에 연락을 받았으나 반신반의하고 있던 참이었다. 들어온 지 얼마 되지도 않은 김시진이 이런 범행을 저지른다는 게 말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이게 웬걸. 현실은 막연한 추측보다 더 잔인했다.

“설마설마했지만,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이야. 내 실책이다. 재능에 눈이 멀어서 검증을 게을리했어. 네가 이런 녀석이었다는 걸 미리 알았다면 절대 길드에 들이지 않았을 건데…….”

비단 그런 감상은 박종인만 품은 게 아니었다. 주위를 둘러싼 모든 이가 김시진을 싸늘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빼도 박도 못 하는 상황. 마치 발가벗고 은밀한 치부를 드러낸 것 같았다.

앞으로 밝은 미래만 펼쳐질 줄 알았건만. 이렇게 허망하게 나락으로 떨어질 줄이야. 이런 건 자신의 청사진에 없었다. 고려하지도 않았다.

“오, 오해입니다, 마스터. 한태민 국왕이 갑자기 나타나 저도 모르게 검을 휘두른 것뿐입니다.”

“거기까지만 해라, 추하니까.”

“저는 억울합니다. 교관은 안타까운 사고로 죽은 것뿐입니다. 듣고 계시는 겁니까? 마스터, 마스터어!!”

필사적으로 항변해도 믿는 이는 한 명도 없었다.

오히려 더욱 차분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김시진을 응시할 뿐이었다.

가까이 다가간 한태민이 그의 목덜미를 낚아채며 나지막이 읊조렸다.

“이래도 증거가 필요해?”

***

사건은 빠르게 정리되었다.

범인이 김시진 한 명인 것도 있지만, 헌터 제압 부대가 미리 대기하고 있던 것도 컸다. 더욱이 도깨비 길드가 지원을 아끼지 않은 덕분에 잡음이 일어나고 조용히 끝날 수 있었다.

“이거 뭐라고 감사의 인사를 해야 할지. 한태민 국왕이 아니었으면 길드가 존폐의 기로에 섰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박종인이 꾸벅 고개를 숙이자 한태민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손을 저었다.

“괜찮습니다, 박종인 경의 잘못이 아니니까요.”

“그래도 어떻게 사례를 하고 싶은데…….”

“마음만 받겠습니다.

“그러면 나중에라도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찾아오십시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무조건 도와드리겠습니다.”

다시 한 번, 허리를 숙여 고마움을 표현한 박종인은 잠시 후 길드원들과 함께 사라졌다.

그 역시 뒷정리를 하느라 바쁠 테니 발목을 잡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때, 헌터 제압 부대를 지휘하던 이지아가 다가왔다.

“네 말대로 김시진은 조용한 시설로 이송될 거야.”

“최신 설비가 있는 곳이면 좋겠는데요.”

“그건 기본이지. 정부에서도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했으니 지원을 더 받을 수도 있을 거야.”

고개를 끄덕였다.

체포된 김시진은 감옥이 아닌 연구소로 배송될 예정이었다.

저지른 죄도 죄지만 그가 지닌 능력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파악하는 게 우선이었다.

하탐과 연관되었다는 걸 안 이상, 철저한 조사는 필수 불가결했다.

“영국의 베아트리스 경에게 정보 공유를 요청하세요. 기본적인 예의만 지킨다면 무난하게 수락할 겁니다. 그리고 진만수 경과 스티븐 박사님을 그쪽에 보내고 싶은데요. 괜찮죠?”

“그래, 따로 자리를 마련할게.”

진만수는 훈련에서 복귀해야 하고, 스티븐은 연구를 잠시 멈춰야겠지만 어쩔 수 없었다.

김시진은 귀중한 샘플이었다.

콜린 때야 녀석의 중요성을 몰라 불살랐지만, 이 녀석은 놓칠 수 없었다.

“그래도 의외네. 네가 데려갈 줄 알았는데 말이야.”

“누나에게도 필요하잖아요, 실적이.”

“네가 그런 걸 챙겨줄 생각을 다 하다니. 해가 서쪽에서 뜨겠는걸. 아니, 어쩌면…….”

“말이 길어지는 것 같은데 그냥 데려가도 되는 거죠?”

아니 될 말이었다. 서둘러 의뭉스러운 표정을 거둔 이지아가 헛기침을 내뱉었다.

“크흠, 고마워.”

“그래요. 솔직하게 말하니까 얼마나 보기 좋아요.”

“국왕님!”

투다다다.

저 멀리에서 달려온 나현이 품 안에 안겼다.

머리를 쓰다듬기도 전에 기분 좋게 그르렁거리는 걸 보니 던전 안에서 일어난 사건은 싹 다 잊은 듯했다.

“최고였어요. 역시 국왕님은 제게 위기에 빠질 걸 알고, 미리 준비하셨던 거죠, 그렇죠?”

“그, 그렇지. 아마?”

쾌활하게 웃는 나현의 등 뒤로 한 사람이 더 나타났다.

던전 내에서도 보았던 얼굴이었다. 이시영이라고 했던가. 교복을 입고 있는 걸 보니 학생인 듯싶었다.

한태민이 지그시 바라보자 이시영은 젖은 손바닥을 바지에 쓰윽 문댔다. 그리고 한 번 더, 또 한 번 더.

시선을 마주치는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문대는 횟수도 많아지는 걸 보니 여간 긴장한 게 아닌 듯싶었다.

보다 못한 한태민이 먼저 손을 내밀자 이시영은 황송하다는 듯 손을 잡으며 허리를 숙였다.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한태민 국왕님이 아니었으면 여기에 서 있지도 못했을 거예요. 이 은혜는 결코 잊지 않고 살아가겠습니다! 앞으로 매일 아스란이 있는 곳을 향해 삼백 배 할 테니 지켜봐 주세요.”

사랑이 무거운 타입이었다.

어색하게 웃고 있자니, 이지아가 다가와 이시영의 머리를 후려쳤다. 퍽, 하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강하게.

“하지도 않을 거면서 과장 좀 하지 마. 부끄러우니까.”

“아는 사이예요?”

“동생이야, 동생.”

“친동생이요?”

“그러면 다른 동생도 있어?”

자세히 보니 닮은 것 같기도 했다.

“지아 누나에게 동생이 있었다는 소리는 처음 듣는데요.”

“일부러 말하지 않았으니까. 솔직히 이런 녀석이 있다는 걸 말해서 어디에 쓰겠어.”

이지아가 한심하게 쳐다보았지만, 이시영은 개의치 않고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서로 편하게 부르는 걸 보니 하루 이틀 만난 사이는 아닌 듯했다.

물론, 듣기야 했다. 하지만 상대가 상대였다.

한 나라의 국왕과 자신의 누나가 친한 사이라니. 예상외의 사실에 놀라서 혀가 꼬일 지경이었다.

“하, 하, 한태민 국왕님은 정말 우리 누나랑 아는 사이예요?”

“그래. 헌터 시절 때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지.”

“말도 안 돼요. 국왕님이라면 조금 더 좋은 만남을 가질 수 있었을 텐데 왜 우리 누나 따위랑.”

“너, 주말에 덜 맞았지?”

이지아가 으르렁거리자 이시영이 몸을 움츠렸다. 아웅다웅하는 남매의 모습에 웃음을 흘린 한태민이 대답했다.

“이 이상의 좋은 만남은 떠오르지 않는걸. 지아 누나처럼 자기 일에 성실한 사람도 없으니까. 파트너로 삼기엔 제격이었지.”

“하긴 누나가 그런 점은 확실하죠. 주말에는 배를 벅벅 긁으며 무료함을 달래는 게 일상이고, 치맥을 물 마시듯 흡수해도 책임감 하나는 자신 있게 자랑할 수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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