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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EX급 헌터다-284화 (284/291)

# 284

#283화 준비 (1)

전력을 늘리는 건 무리지만, 사람들을 안전한 곳까지 옮길 시간은 되었다.

그 때문에 전략의 폭이 넓어진 건 말할 것도 없었다.

키리모토가 돌아간 뒤, 집무실로 돌아온 한태민은 곧바로 시크릿 라인에 접속했다.

전 세계 정상이 모여 은밀한 회담을 나누는 장소. 군사 위성을 이용한 통신망은 지금까지도 건재했다.

화면 너머로 익숙한 얼굴이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약속 시각이 되기도 전에 자리가 꽉 찬다. 이례적인 상황. 아마 미증유의 사태에 모두가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는 반증이리라.

그만큼 중요한 사안이기도 했다.

머리를 맞대도 올바른 결단을 내릴 수 있을지 없을지 불명확했다.

독단적으로 결정하는 건 언어도단이라 말할 수 있었다.

턱을 괸 한태민이 먼저 포문을 열었다.

“소식은 모두 들었을 테지.”

“화성에 나타난 오버로드의 군세가 지구로 침공한다는 소식 말인가? 듣긴 들었네.”

“여왕이 직접 나선 걸로 밝혀졌다. 아마 지금 오고 있는 건 오버로드 전체. 의심할 여지 없이 총공세에 가까운 진격이다.”

“그러면…….”

자리에 모인 정상들은 직감했다. 심상찮은 전조라는 걸.

오버로드의 체계는 익히 알고 있었다. 그들의 여왕이 알파이자 오메가인 군집체.

그녀가 무거운 엉덩이를 들었다는 건 끝장을 보겠다는 뜻일 터.

“최후의 일전이 될 거다. 그녀가 나선 이상, 중간은 없다. 인류가 멸종하든지 오버로드가 뿌리까지 뽑히든지 둘 중 하나일 테니까.”

“무엇이 걱정이란 말인가. 우리에겐 자네가 있는데.”

러시아의 대통령인 드미트리가 꾸밈없이 호감을 드러냈으나 들려오는 반응은 미비했다.

하지만 한태민은 냉정하게 고개를 저었다. 여왕은 쉽게 볼 상대가 아니었다.

“나 혼자서 모든 일을 처리하는 건 불가능하다. 여왕 한 명만으로도 벅찬 지경이니까.”

“그러면 저희의 도움을 바라는 거겠군요.”

“그보다 더 강력하고 명백한 권한을 원한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협조를 구하고 싶다는 거다. 한계가 없고, 조건 없는 일방적인 협조를.”

“특권을 달라는 건가?”

“내 말 한마디에 전 세계가 움직여야 한다.”

“하지만 그건…….”

한태민이 손을 들어 그 말을 제지했다. 한시가 아까웠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문제라느니, 타국인에게 그만한 권력을 줄 수 없다느니, 하는 이유로 왈가왈부할 여유는 없었다.

단번에 이쪽으로 주도권을 잡아당겨야 했다.

“다른 이가 선도해도 상관없다. 하지만 너희도 이제 뼈저리게 깨달았을 텐데? 내가 이 자리에 있는 그 누구보다 승산이 높은 싸움을 준비할 수 있다는 걸. 내 말이 틀린가?”

누구 하나 반론하지 않았다. 그들도 뼈저리게 체감하고 있었다.

평소처럼 이해득실을 따지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재앙은 다가왔고,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하냐 마냐의 문제가 아니라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였다.

그리고 이 상황을 가장 냉정하게 꿰뚫어 볼 수 있는 자는 한 명밖에 없었다.

잠시 후, 생각을 정리한 정상들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 한 마음이 되어 무제한적인 원조를 승인했다.

만족스럽게 웃은 한태민이 손가락을 튕기자 수많은 도표와 서술이 화면을 가득 채웠다.

그건 지금까지 정리한 전략과 전술이었다. 오로지 최후의 일전을 위해서.

여왕과 싸우는데 이골이 난 그였다.

전생에서 얻은 경험이 있으니 정립하는 건 쉬웠다.

수많은 패배를 겪은 다음에 얻은 깨달음이라고 해도 좋았다.

이변만 없다면 무사히 최소한의 전력으로 최대한의 승리를 챙길 수 있으리라.

“그러면 마지막이 될 수도 있는 작전을 설명하지.”

***

8월 10일. 최후의 일전까지 앞으로 12일.

여왕이 지구에 온다는 소식이 퍼지자 일대에 파란이 일었다. 하지만 이미 예견된 반응이었다.

각국은 대대적인 선전을 펼치며 공포에 질린 이들의 시선을 돌렸다. 이길 수 있다고, 이것도 스쳐 지나가는 고비일 뿐이라며 위로했다.

단결과 협동이 중요시되는 시기였다. 벌써부터 분열되면 될 것도 되지 않았다.

인류 종말이라는 낯선 주제를 접한 대중이 갈피를 잡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는 사이, 전 세계에서 모인 물자와 인력이 아스란에 집결했다.

명화전은 총사령부가 되었고, 섬 몇 개는 보급 창고가 되었다. 자그마한 섬나라가 인류의 심장부가 되는데 걸린 시간은 고작 3일.

수많은 기사와 함께 작전을 수정하던 한태민은 뜻밖의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완성됐어.”

탁, 카리나가 주먹만 한 큐브를 내려놓았다. 대리석을 깎아 만든 듯 매끈한 표면. 보기보다 서늘한 감촉에 놀란 한태민이 탄성을 터뜨렸다. 익히 알고 있는 형태였다.

“이건…….”

▼이브

평가 : SSS

효과 : 공간의 연장선이 펼쳐진다

설명 : 인접한 차원을 뚫어 유사 세계를 창조할 수 있으나 규모와 크기에 따라 제한 시간이 급감한다

최후의 일전을 앞둔 상황에서 비장의 카드라 칭할 수 있는 아이템이 나타났다. 그것도 절묘한 타이밍에.

스티븐이 제작할 수 없다고 끙끙대던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완성이라니….

한태민의 시선은 저절로 카리나에게 돌아갔다.

“누님이 참여한 건가요?”

“귀찮지만 어쩔 수 없잖아. 허송세월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

역시, 카리나가 스티븐에게 붙어서 이만한 결과를 낸 것이리라.

아무튼 시제품이 나왔다는 건 고무적이었다. 양산할 수 있다는 소리일 테니까. 고양이 손이라도 빌려야 할 때. 패는 많을수록 좋았다.

“싸우는 사람들의 생환율이 높아지겠네요.”

“기뻐하기엔 일러. 불필요한 공정이 많으니까. 안타깝지만 지금 기술로는 줄일 수 없어. 그럴 시간도 없고. 제시간에 맞춘 것만 해도 기적이야. 아마 결전의 날까지 맞출 수 있는 수량도 한정적일 거야.”

“얼마나 될 거라고 예상하는데요?”

“대략 250개. 일단 100개는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을 거야.”

“정말 엄청난 성과예요. 고생하셨어요, 누님.”

멋쩍은 듯 헛기침을 내뱉은 카리나가 머리를 긁적였다.

“그래, 전장이 확장되어도 이브만 있다면 피해를 줄일 수 있을 테니까.”

고개를 끄덕인 한태민이 돌연히 손뼉을 쳤다.

“그런데 누님, 사용 시간을 줄이고 입구를 극단적으로 늘릴 수 있을까요?”

“입구를? 얼마나 늘리고 싶은데?”

“산처럼 높이 늘리고 싶은데요. 안 될까요?”

“할 수야 있지만, 그건 왜?”

카리나의 의문은 지당했다.

그녀의 입장에서 기껏 제작한 이브를 그런 식으로 변형한다는 건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한태민의 입장은 또 달랐다. 여왕의 밑바닥을 본 전적이 있었으니까.

“여왕은 전쟁이 시작되면 바로 지구에 폭격을 쏟아부을 거예요. 아마 대처할 시간도 주지 않고 짓밟을 테죠.”

키리모토도 보았다고 하니 그건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그러면 입구를 늘린다는 말은…?”

“여왕의 폭격을 막을 거예요.”

원형 대륙, 하이모데아가 뿜어내는 대규모 폭격은 한태민도 어찌할 수 없는 영역에 있었다. 행성을 부수기 위한 병기였으니까.

유성우처럼 떨어지는 빛줄기는 핵도 녹일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나 둘이면 모르되, 수십 개가 되면 쫓아가는 것도 버거웠다.

‘하지만 유사 세계가 대신 맞는다면?’

한태민이 비릿하게 웃었다.

“그녀가 당황하면 그게 반격의 서막이 될 테죠.”

***

8월 15일, 최후의 일전까지 앞으로 7일.

급하게 마련된 대피소가 이른 아침부터 북적거렸다.

칭얼거리는 아이, 성내는 아저씨, 인파에 휩쓸려 허우적거리는 노인,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청년. 온갖 인간 군상들이 모여 혼란을 자아냈다.

대피소야 매일 수백 개씩 늘어나고 있지만 역부족이었다. 너나 할 것 없이 수도권 지역으로 모이고 있었던 것이다.

인구 밀도가 비정상적으로 높아져 여러 문제가 야기됐지만, 폭격을 피하려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어차피, 이것도 한순간이었다.

최후의 일전에서 밀려나면 이런 고민을 할 것도 없이 모두 쓸려나갈 테니까.

아스란 또한 대피소만큼이나 소란스러웠다. 이데아가 축복을 내리고, 영단과 마테리얼 웨폰이 배급되는 현장이 바로 그곳이었기 때문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전력을 늘리기 위해 수많은 노력이 오고 갔다.

전 인류가 뜻을 합친 대화합의 장.

눈이 휙휙 돌아갈 정도로 바삐 돌아가는 곳에 선 한태민이 베아트리스를 발견한 건 그때였다.

“놀라지 않는 것 같군요.”

느긋하게 다가온 사람이 할 말은 아니지만 그러려니 했다. 어차피 예상했던 일이었다.

베아트리스가 여왕이 오기 전에 한 번 방문할 거라는 걸.

그녀의 소원은 여왕의 죽음.

최후의 일전이 다가왔다는 말은 곧 소원이 이루어질 날이 머지않았다는 걸 의미했다.

“나이트 오더도 왔는데 네가 오지 못하는 게 더 이상하지.”

“하긴 그렇군요.”

그리고 침묵. 한태민은 베아트리스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그녀가 처한 상황을 고려하면 짐작하는 건 일도 아니었다.

“……결정은 바뀌지 않은 건가?”

“네, 그게 제 유일한 소망이니까요.”

“네가 전적으로 협조한다고 해도 이길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른다. 최악의 경우, 여왕이 승리하면 너는 변절자로 찍혀 죽음보다 더 끔찍한 고통을 겪을 테지.”

지고 싶은 마음은 없었으나, 그래도 그녀의 선택이 도박이라는 건 부정할 수 없었다.

“후회하지 않나?”

“제 인생 자체가 후회였어요.”

두 손을 마주 잡은 베아트리스가 눈을 감았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가장 사랑하는 이를 죽인 여왕에게 충성을 바치며 꼭두각시처럼 살아왔다. 이런 걸 후회라고 하지 않으면 무얼 후회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러니 이 선택은 제 처음이자 마지막 선택이 될 거예요.”

모든 걸 내려놓은 베아트리스가 어색하게 웃자 한태민이 고갯짓했다.

“이데아 님에게 말하면 살 수 있는 길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녀가 오버로드가 아닌 인간이라면 이데아도 최선을 다해 방법을 생각할 테니까. 하지만 베아트리스는 한태민의 호의를 밀어내듯이 고개를 저었다.

“저도 살 만큼 살았어요. 구차하게 연명하고 싶지 않아요. 여왕의 일그러진 얼굴 하나만 보아도 충분한걸요. 그러니…….”

한 박자 늘어뜨리며 한태민을 쳐다본다.

“동요하지 마세요. 제가 하고 싶은 일을 하듯 당신도 당신이 해야 할 일을 잊지 마세요.”

단호한 선언이었다. 여기에 온 건 통보인 듯했다. 여차할 때 당황하지 말라는, 주저 없이 검을 내려치라는.

“그런가.”

워낙 강경한 터라 한태민도 말릴 수 없었다.

아마 오래전부터 정한 일일 터. 수천 년의 고뇌가 담긴 결정이었다.

고작 몇 번 본 타인이 간섭한다고 바뀔 리 없었다.

“그리고 제가 차일드라는 건 당신만 알았으면 해요. 저는 차일드 카자야가 아니라 인간 베아트리스로 죽고 싶으니까요.”

순간, 영국의 여왕인 루이스의 얼굴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할머니를 염두에 둔 건가?”

“전생엔 지켜드리지 못했으니, 현생이라도 지켜드리고 싶어요.”

“알겠다, 너는 죽는 순간까지 영국의 왕녀다.”

묵인하지 못할 것도 없었다.

일곱 번째 차일드, 카자야는 여왕이 죽는 걸 보고 도망쳤다. 그렇게 고하면 될 뿐이니까.

“……무리한 부탁을 들어줘서 고마워요.”

안심했다는 듯 한숨을 내뱉은 베아트리스가 가볍게 허리를 숙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자그마한 등이 멀어진다. 아마 이 광경을 다시 보는 일은 없겠지.

최후의 일전이 어떻게 막을 내리든 베아트리스는 죽는다. 그건 변하지 않는 사실이었다.

그녀가 죽어야 비로소 여왕이 지닌 불멸이 깨지니까.

그 사실이 참을 수 없이 씁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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