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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법이 더 쎈데-175화 (175/203)

< 제87장 - 만들어진 신 (1) >

“으, 으읍·········.”

간헐적으로 떨리는 눈꺼풀.

정신이 수면으로 부상하듯 천천히 의식이 돌아온다.

신체에 둔하게 남아있는 고통 탓에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찡그리는 그녀.

조슈펠은 천천히 흔들리는 눈동자의 초점을 다잡으며 눈을 떴다.

‘여긴·········.’

눈을 뜬 순간부터 조슈펠은 바로 상황 파악에 들어갔다.

자신이 있는 곳은 창고를 연상시키는 장소였다.

퀴퀴한 곰팡내가 코끝을 스치는 것이 위생과는 거리가 먼, 심히 불쾌한 장소.

그리고.

꿈틀.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팔은 물론. 입을 열지 못하도록 채워진 재갈에서는 미미한 마력의 향내까지 느껴진다.

아예 손가락 마디마디마저 단단하게 결박된 것을 보아하니.

‘마법행사를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결박법이야.’

즉 자신을 납치하여 이곳에 가둔 자는, 조슈펠 브랑슈아가 어떤 존재인지 잘 이해하고 있는 인물이란 뜻이었다.

여전히 쨍한 두통 속에서 전신이 철저하게 봉쇄당했다는 현실을 깨달은 그녀는 당황할만도 하건만.

그 대신.

‘후우.’

코로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다독였다.

그것은 귀족으로서, 그리고 브랑슈아가 만들어낸 희대의 재보(財寶)로서 당연한 몸가짐이기도 했다.

태어난 순간부터 조슈펠은 끊임없이 교육을 받아왔다.

- 네 가치가 무엇인지 잘 알아두도록 하여라. 브랑슈아가 만들어낸 걸작으로서, 스스로를 지키는 일에 소홀히 하지 말거라.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어온 고견.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조슈펠은 저도 모르게 입가를 씰룩였다.

‘새삼스러운 이야기도 아니지만.’

자신의 값어치를 고려한다면, 언제 어디서 납치당하거나 이용당할지도 모른다.

평생을 그런 교육을 받고 자라온 그녀가 겨우 이런 일에 당황할 리가 없었다.

물론 가장 최선은 처음부터 납치 따위를 당하지 않도록 주의를 게을리 하지 않고, 자신을 지킬 마법을 단련하는 것이지만.

이미 납치되어버린 것이라면, 여기서부터 해결책을 짜내야만·········.

······잠깐.

‘······그러고 보면, 어쩌다가.’

납치를 당하고야만 것일까.

제아무리 수학여행이라 하여 조금은 들뜬 기분으로 움직인 조슈펠일지라도.

자기 앞가림마저 내팽개치진 않았다.

아직도 격통으로 어슴푸레한 기억들을 애써서 뒤적이고 있으려니.

‘화장실을 들러서 용변을 보고 돌아오는 길에······.’

까맣게 잊고 있던 혼탁한 기억들이 하나 둘 떠오르기 시작했다.

- 어이.

하고 부르던 목소리가 있었다.

낯익은 목소리에 이끌려 고개를 돌리자.

치익.

무언가 알 수 없는 것이 조슈펠의 얼굴을 덮쳤다.

혼미해지는 정신, 힘이 빠지는 육체.

전신에서 감각이란 감각은 모두 앗아가는 느낌에 반사적으로 조슈펠은 마법을 펼치려 했지만.

- 아, 으.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 소용없어. 자색 마탑에서 만든 특제 현혹향이다. 가장 먼저 성대를 빼앗고 사지의 자유를 박탈하는 물건이지.

세상이 빙글빙글 돌고, 바닥으로 쓰러지려는 조슈펠의 눈동자에 마지막으로 담긴 건.

‘아.’

그가 누구인지 떠올린 순간.

끼익.

창고의 문이 열리고, 고즈넉한 저녁 무렵의 노을빛과 함께 놈은 나타났다.

터벅터벅 걷는 걸음걸이로 묶여 있는 조슈펠의 앞까지 다가온 남자.

‘적야견(赤野犬).’

램버트.

그가 음울한 눈동자로 조슈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

어쩐지 평소와 분위기가 다르다.

하지만 그 사실을 지적하기도 전에, 램버트는 손에 든 작은 펜대로 조슈펠의 재갈을 가리켰다.

그러자 툭 하고 조슈펠의 입을 막던 재갈이 풀렸다.

“당신······.”

키잉!

날카로운 파공성.

뺨을 찌르는 격통.

정신을 차리고 보니, 램버트의 펜대에서 쏘아진 불꽃의 궤적이 조슈펠의 뺨을 가른 뒤였다.

“읏······!”

치밀어 오르는 열통에 조슈펠이 신음을 흘린다.

그러거나 말거나.

“상황 파악은 이미 됐겠지. 함부로 입 열지 마. 마력을 끌어올리려고 하지도 마라. 전신을 묶은 봉인의 밧줄 때문에 애당초 마력 운용에 제약을 걸어뒀다. 거기서 함부로 마법을 썼다간 사지가 조각날 테지.”

담담히 말을 늘어놓을 뿐이지만, 그 내용을 이해한 조슈펠의 등허리로 소름이 돋았다.

대체.

“······무슨 짓을 하는 거죠? 이런 짓을 했다간 저희 청색 마탑도, 당신네 적색 마탑도 가만히 있을 수 없게 돼요.”

평소에 아무리 말썽쟁이에 양아치라고 불린 적야견이라고 해도, 그는 적색 마탑의 수재.

이런 일을 벌였다간 어떤 결과로 돌아올지 모를 위인이 아니다.

헌데.

“왜 이런 미친 짓을 벌이는 거죠?”

전면전이라도 할 생각인 거냐고.

날이 선 목소리로 비난 한다.

평소의 램버트 같았다면, 인상을 찌푸리고 입 닥치라 소리치며 분노를 터트렸을 테지.

아니, 여기까지 납치해온 걸 보면 그 이상의 짓도 서슴없이 저지를지 모른다.

옷을 찢고, 범하려고 들고, 자신의 욕망을 토해내려고 한다.

조슈펠이 파악하고 있는 램버트의 인간상이란.

어디까지나 간신히 규범이라는 사슬로 묶어둔 짐승이었다.

자신이 우위인 걸 확인하게 된 순간, 그 파멸의 고동은 멈추지 않는 방향으로 내달릴 터.

그걸 알고 있으면서도 조슈펠은 램버트를 비난할 수밖에 없었다.

‘이 일이 외부에 알려지게 되면.’

비발트는 피에 물들게 될 테니까.

혈겁이라는 말이 어떤 뜻인지, 우리의 눈으로 확인하게 될 것이다.

인간을 초월하여, 반신의 경지에 오른 마탑주들은 원치 않아도 체면과 마탑의 위신을 위해 싸우려고 들테니까.

거기까지 말한 조슈펠을 두고서.

“······역시 너는 아무것도 모르는 군.”

한층 더 음울한 눈동자로 램버트는 조슈펠을 흘겨보았다.

‘무슨.’

뭔가 이상하다.

평소의 램버트가 아니었다.

그는 무언가를 주저하고 있었다.

그토록 쓰러트리고 싶어 했던 조슈펠을 비겁한 수단을 사용해 제압한 쓰레기 주제에.

어째서인지 마지막 한 걸음을 내딛지 못하고 망설이고 있었던 것이다.

“무슨 일이 있던 거지요?”

그 심상치 않은 모습에

“너는······. 너는 아무 것도 몰라. 나는 예전부터 네년을 쳐죽이고 싶었다.”

날 무시하고, 나보다 뛰어난 모습을 보여주던 천재.

“내게는 없는 재능을 가지고 반짝이는 네년을, 나는 일평생을 저주해왔다. 범하고, 죽이고, 내 것으로 삼고 싶다고 생각해왔다.”

그것은 분노이며, 증오였고. 또한.

“동경이었지.”

고해성사와도 같은 말투, 그러나 램버트의 시선은 그저 조슈펠을 무감정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그토록 갈구했거늘.

“너 같은 반짝이는 별조차, 비발트에서 일어나는 일의 전말 따윈 하나도 모르고 있다니.”

“전말······?”

조슈펠은 램버트가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하나도 이해할 수 없었다.

램버트는 그저 어깨를 떨기 시작했다.

“크흣, 웃기지도 않아. 그렇게나 동경했던 여자가. 결국 아무것도 모르는 계집이었을 줄이야.”

이마를 부여잡고 어깨를 떨며 웃기 시작한 남자.

이내 웃음은 잦아들었다.

“그렇게나 놈들의 더러운 손을 잡고 노력해왔는데.”

이제 와서야 가까스로 그토록 갈구하고 원했던 것이.

“이리도 허망할 뿐이라는 걸, 나는 이제 와서야. 깨닫게 되다니······.”

흔들리는 눈동자로, 남자가 뱉어내는 괴소를 지켜보고만 있던 조슈펠에게 램버트가 물어왔다.

“조슈펠. 널 납치한 건 나다. 놈들이 준 아티팩트로 유인해서 잡아왔다. 하지만 내가 널 범하고, 죽이고, 빼앗고 나면.”

그 뒤에.

“······나는 어떻게 되는 거지?”

냄새.

조슈펠은 코끝을 스치는 냄새를 맡았다.

진하고 텁텁하고, 무엇보다도 강하게 ‘죽음’을 연상시키는 무거운 냄새를.

욕망을 해소하기보다도 답을 갈구하듯, 칭얼거리는 어린아이처럼 자신을 바라보는 램버트의 시선.

뭇 여성이라면 겁을 집어먹고, 바들바들 떨 수밖에 없는 포악한 시선 앞에서.

“저는 당신이 바라는 답을 줄 수 없어요.”

조슈펠은 단호히 대답을 입에 올렸다.

그랬다. 저 남자가 자신에게 무슨 말을 듣기를 원하는지는 모르지만.

어차피 내가 돌려줄 말은 없었다.

나 자신이 원하는 답은, 남이 주는 것이 아니다.

- 네가 떠들어댄 너의 가치는, 결국 네 가문이 정해준 가치다.

남이 하는 이야기는 고작 그 정도.

참고할 값어치 따윈 전혀 없는 헛소리에 불과하다고.

그녀의 스승 된 자. 아르민 일레인스가 말해주지 않았던가.

답은 하나만이 아니고.

그것은 다른 타인이 줄 수 있는 게 아니다.

‘내가 걸어온 길, 그리고 걸어갈 길에서 찾을 수 있는 답은 무수히 많다고. 그는 말했어’

결론을 내려야 하는 건 남이 아닌, 다름 아닌 나 자신이다.

“궤변이로군.”

“네, 동감이에요.”

램버트의 일갈에 조슈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저는 정답이라고 생각해요.”

램버트는 고개를 흔들었다.

“어차피 이미 전부 늦었다. 말장난 같은 이야기는 여기까지다.”

천천히 다가오는 손길 앞에, 조슈펠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이렇게 위험한 순간.

바로 1초 뒤에 자기의 목이 달아날 것이 분명한 순간에서도 조슈펠이 떠올리는 건 가족의 얼굴 따위가 아니었다.

‘스승님, 그리고······.’

최근에서야 가까스로 생긴 친우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툭.

머리통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

아르민은 내달렸다.

가용할 수 있는 마력신경을 전부 끌어다 발휘한 가속 마법.

당연하게도 다른 이들은 아르민의 속도를 따라오지 못했다.

오로지 드래곤의 육체로 음속을 돌파하는 재주를 가진 이스텔만이 주인을 보조하기 위해 아르민의 뒤에 바짝 붙었을 뿐이다.

- 먼저 움직이마.

뒤에 남은 이들을 향해 심언 마법을 남긴 채, 아르민은 정면을 바라보았다.

‘엘레노아는 헬레나와 세희가 보호해줄 거야. 문제는 이 앞이로군.’

한 걸음, 두 걸음.

그 육체의 움직임은 저 머나먼 신화 속, 달린다는 행위로 신화 속에서 맹위를 떨친 전설의 영웅 아킬레우스를 연상시킬 정도였으니.

‘바로 코앞이다.’

바람을 밟고 달리는 것처럼.

얼마나 내달렸을까.

저 멀리 보이기 시작했다.

별이 머무는 땅의 외각.

허름한 창고로 위장되었지만, 아르민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희미하게 흐르는 마력의 잔향은 저곳이 특별한 목적으로 지어진 공방이란 사실을 나타낸다.

주변을 보호하는 결계가 쳐져 있지만, 고작 해봐야 4서클 수준.

결계를 해킹할 필요도 없이.

“이스텔, 돌입한다······!”

“예스, 마이 로드.”

마지막 도약과 함께 허공으로 떠오른 아르민은 다리를 휘감는 마력의 불길과 함께.

그대로 결계를 찢으며 창고로 돌진했다.

콰아앙!!!

‘안에서 느껴지는 기척은 둘.’

당장 고개를 들이민 창고엔 덩그러니 놓여있는 의자 하나와 바닥을 적시는 핏자국이 보였다.

불온한 기운이 느껴졌다.

우선 이곳에서 느껴진 기척은 보다 아래, 지하쪽으로 이동 중인 듯 했다.

놓칠 수 없다.

“이스텔.”

“예스, 마이 로드.”

아르민의 부름에 이스텔은 신속정확하게 오른손을 드래곤의 발톱으로 변화시킨 뒤.

“장애물, 돌파합니다.”

콰아아앙!!

주저없이 바닥을 내리쳤다.

콰지지지직!

지상 최강의 생명체라고 불린 용종의 근력이다.

다소 마력으로 보호되고는 있다고는 하나, 마력 그 자체를 찢어버리는 이스텔 앞에선 종잇장이나 마찬가지였다.

꽈르르르릉!

무너져 내리는 토사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갱도.

‘처음부터 은신처로 쓰이는 공방이라 짐작은 했다만, 탈출로까지 마련된 건가?’

한 번 더.

타앙!

총알처럼 각력을 발휘해 튀어나간 아르민은 이동하고 있는 인기척의 뒤를 쫓았다.

한 걸음, 두 걸음.

실시간으로 줄어드는 거리.

그리고.

“잡았다!”

갱도의 모퉁이를 돈 순간.

휘이익!

마탄의 세례가 날아든다.

아르민은 날파리 떼를 쫓듯이 손을 휘저어 마탄 자체를 흐트러트렸지만.

강대한 위력을 지닌 마탄은, 튕겨져 나가 닿는 자리마다 생명 그 자체를 말소하고는 대지를 시꺼멓게 죽게 만들었다.

가공할 정도의 위력이지만.

아르민은 그곳에는 눈길 하나 주지 않은 채 눈앞에 있는 이들을 바라보며 목소리를 내었다.

“······넌?”

< 제87장 - 만들어진 신 (1) > 끝

ⓒ 뫄뫄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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