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블랙펄(1)
[미래의 서예나는 광전사라는 별명 따위 는 없었어.]
[그래요?]
[응. 아마 저 광증을 없앨 수만 있다면 몇 배는 더 강해질 거야.]
진후는 조금 전의 전투를 되새겨 보았 다.
서예나의 공격은 거칠었지만 힘이 있었 고, 그녀가 사용하는 스킬은 하나부터 열 까지 고급이었다.
철을 계속 재생시킬 수 있는 진후가 아 니었다면 제대로 상대할 수 있는 전사는 거의 없어 보였다.
[대진이 그래서 앞서나갈수 있었겠지.]
진후는 대기실 테이블에 앉아 물끄러미 창밖을 보고 있는 서예나를 보았다.
서예나는 손등까지 가리는 하얀 스웨터 를 입고 커피잔을 잡고 있었다.
새하얀 손을 볼 때 도무지 검을 들고 싸 우는 사람이 라고는 상상할 수가 없었다.
서예나는 진후의 시선을 느꼈는지 고개 를 돌렸다.
“저기… 괜찮으세요?”
“네. 괜찮습니다.”
“아까는 죄송했어요.”
오히려 두 손으로 들어 올려서 던지기 직전까지 갔으니 내가 사과해야 하는 거 아닌가?
“턱 괜찮으세요?”
하지만 서예나는 순수하게 턱을 걷어찼 던 걸 이야기하는중이었다.
“이 정도야 뭐, 별것 아닙니다. 앞으로 상대할 것들에 비하면요.”
“하긴 그랬었죠. 그때 많은 하피들도 처 리해 주셨고요. 못 볼 꼴을 보여드렸 죠….”
다시 그녀는 커피잔만 만지작거리며 말 이 없어졌다.
원래 이렇게 말이 없는 사람이구나.
진후는 그냥 그렇게 생각하며 그녀가 바 라보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한겨울의 서울 하늘은 푸르고, 그 아래 에 넓게 펼쳐진 회색의 도시는 햇빛을 받 아 선명했다.
그리고 도시 사이를 흘러가는 한강이 빛 을 받아 반짝이는 동안, 서예나가 입을 열었다.
“사실 진후 씨와 얘기를 더 해보고 싶었 어요.”
“그렇습니까?”
조금 딱딱하게 구나?
하지만 진후는 더 친절하게 구는 법을 몰랐다.
하지만 서예나는 살포시 웃었다.
“네. 10번째 헌터가 나타났다는 말에 많 은 사람들이 관심을 보였거든요. 아마 여 러 기업에서 접촉하기 위해 애를 썼을 거 예요.”
“그랬겠죠.”
하지만 누구도 진후를 찾아낼 수는 없었 다.
진후의 통신은 하나부터 열까지 지아가 감시했고, 강원도의 공장 주변은 전부 지 아가 손바닥 들여다보듯이 관리하고 있 었다.
아리에타도 진후가 어디서 사는지, 뭐 하고 사는지는 전혀 모르는 마당.
어떤 그룹도 진후를 찾아내지 못한 상황 이었다.
“저를 도와주시고 우리 기업까지 와주 셔서 고마워요.”
“...뭐….”
“우리 회사는, 곧 보시겠지만… 그다지 사람을 잘 대해주는 회사는 아니 에요. 진 후 씨나 저나, 아마 톱니바퀴 이상은 안 될 거예요.”
예나는 그렇게 말하고는 커피를 내려놓 았다.
“진후 씨, 무슨 일이 있어도 살아남으세 요.”
“마치 대진그룹이 우리를 죽이기라도 할 것처럼 말씀하시네요.”
“...몸은 죽지 않겠죠. 하지만….”
“충분히 쉬었나?”
대기실 입구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진후가 고개를 돌려 보니 조강진이 서 있었다.
“아무래도 며칠은 적응 시간을 주고 싶 었지만, 상황이 바뀌었다.”
드르륵.
서예나가 의자를 뒤로 밀고 자리에서 일 어 났다.
“들어갑니까?”
“그래. 윗선에서 헌터도 두 명으로 늘었 으니 최대한 발리 진행하라는 명령이 내 려왔다.”
아무래도 진후만 빼고 둘은 무슨 상황인 지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진후가 앞으로 나오자 조강진이 엄지손 가락을 들어 복도 너 머를 가리 켰다.
“저기가 화상 회의실이다. 상세한 브리 핑은 저곳에서 하겠다.”
그들은 화상 회의실로 향했다.
조강진이 스크린 반대편 회의실 중앙에 앉고, 진후와 예나가 왼쪽으로 앉았다.
셋이 다 앉고 나자 조강진이 스크린을 틀었다.
스크린에는 세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한 명은 나이가 지긋한 노인이었고, 한 명의 여자는 까칠하게 보이는 중년이었 으며, 가장 끝에 있는 사람은 군인처럼 보이는 영국인이 었다.
“호오, 이분이 새로운 헌터신 모양이군 요.”
그렇습니다.
노인이 화면 속에서 빙그레 웃고 있었 다.
조강진은 그 노인을 향해 깍듯한 자세로 말했다.
“반가워요. 나는 전무이사 일을 하는 정 채성이라고 해요.”
“반갑습니다. 진후라고 합니다.”
“앞으로 나는 전무님이라고 불러주면 되겠군요.”
“예. 전무님.”
“그대에게 거는 기대가 커요. 부디 열심 히 일해주길 바라요. 물론 충분한 보답을 해드리겠어요.”
“감사합니다.”
조서산 회장을 가까이에서 모시는 사람 이고 나이가 많다면, 아무래도 이 그룹의 공신 중 하나일 터였다.
그래서일까, 허허롭게 웃고 있지만 깊숙 한 곳에서 진후를 살펴보고 있다는 느낌 이 강했다.
전무는 고개를 돌려 조강진을 보았다.
“조강진 팀장.”
“예, 전무님.”
“원래는 새로운 헌터가 적응하는 시간 도 주고, 또 조금 더 위력 정찰을 시도한 후에 움직이는 게 맞다고 생각하고 있었 어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일을 이렇게 급하게……
“그만.”
말이 잘린 사람은 화면 가장 왼쪽에 있 는 군인 머리의 금발 남자였다.
영국인처럼 보이는 남자는 인상을 찌푸 리며 입을 다물고 있었고, 아주 아주 기 분이 나븐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바로시 씨, 당신 마음은 잘 알아요. 하 지만 이건 회장님의 의중입니다. 당신이 필요한 지원은 충분히 해드릴 테니 당신 은 우리가 필요한 걸 가져오기만 하세 요.”
바로시라고 불린 남자는 차마 전무에게 대들 수는 없는지 입을 다물었다.
대신 조강진과 서예나를 보고, 다시금 진후를 보더니 숨을 내쉬었다.
“회장님께서 지금 바로 움직이라고 하 셨습니까?”
이번에 말을 꺼낸 것은 불테 안경을 쓴 여성이었다.
3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여인은 날카 로운 눈매에 눈 아래에 다크서클이 진했 는데, 그걸 뿔테로 가리고 있는 듯했다.
아주 고강도의 업무에 치여 사는 듯한 인상이었다.
“그래요. 유나씨.”
“그러면 이들에게 목표를 설명해 드려 도 되겠습니까?”
“그렇게 하세요.”
전무의 허락이 떨어지자, 유나라고 불린 여자의 화면이 바뀌었다.
처음 보는 광물처 럼 보이는 것이 었는데, 네모난 형상이 반복적으로 나타나며 수
정처럼 자라나는 생김새를 하고 있었다.
색깔은 황금과 푸른색이 안에서 섞여서 회오리치듯이 일렁이고 있었으며, 보는 각도에 따라서는 무지개 색깔 같은 빛을 내기도 하고 있었다.
예나가 고개를 갸웃했지만, 진후는 저게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마르디론의 껍질이다.]
[주인님. 그게 뭐예요?]
대답은 유나가 대신했다.
“신소재 BRY-13241 가 함유된 생체 부 품입니다. 우리 목표는 이 광물을 최대한 많이 획득하는 거예요.”
진후는 생각에 잠겼다.
[마르디론이라고 불리는 거대 몬스터가 있어. 거북이를 닮은 녀석인데, 녀석의
등껍질은 그야말로 천문학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었지.]
[왜 비쌌는데요?]
[이 사람들이 아는지는 모르겠지만… 일 단 저 가루만 발라도 스텔스 도료 역할을 하거든.]
스텔스.
스텔스 기능이 있는 신식 전투기는 공중 전에서 파리 떼를 찢는 매와 같다.
비스텔스기는 스텔스기에 상대가 되지 않는것이다.
그런 스텔스 기체를 가지기 위해 많은 나라가 고군분투하고 있는 이 시점.
그저 바르기만 해도 레이더 피탄 면적을 극소화하거나 아예 없애 버릴 수 있는 저 물건은 그야말로 천문학적인 가치를 갖 고 있었다.
[전차나 잠수함, 함선은 물론이고 요인 장갑차에도 바를 수 있지. 마르디론은 굉 장히 큰 녀석이라. 한 마리만 잡아도 많 이 나와.]
하지만 뭔가 이상하다.
[하지만 마르디론 같은 거대 괴수를 헌 터 둘이서 잡을 수는 없어. 그건 불가능 해.]
마르디론은 아파트 한 동이 걸어 다니는 것 같은 크기를 자랑하는 거북이다.
그리고 주변 분위기를 보아하니 마르디 론이 아직 뭔지도 모르는 상황.
본래 그런 녀석을 사냥하려면 대형 길드 가 총동원되어 야 한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은 그저 저 예쁜 광 물을 보며 다들 고개를 갸웃하고 있는 상
황이었다.
“ ..쯧.”
그리고 누구 들으라는 듯 큰 소리로 혓 소리를 내는 사람이 있었다.
“존 바로시 팀장. 필요한 지원은 모두 해드리 겠다고 말씀드렸습니 다. ”
유나는 찢어진 눈을 흘겼다.
그 눈빛만 봐도 대부분의 사람이 위축될 법한데, 존 바로시라는 남자는 오히려 책 상을 쾅 내리쳤다.
“150명이 죽었소.
낮게 꽉 억눌려, 으르렁거리는 듯한 숨 소리가 입 안에서만 맴도는 것 같은 목소 리였다.
그야말로 짐승이 물기 직전에 내는 소 리.
진후는 존 바로시라는 사람이 겉으로나 실제 경험으로나 아수라장을 여러 차례
돌파해 온 사람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
“그 이상의 희생을 내게 강요하는 거 요?”
“이번에는 300인입니다.”
유나가 입을 다무는 동안, 전무가 폭탄 을 터트렸다.
“17타격대 전부를 보낼 계획입니다.”
“헌터 둘과 함께.
전무는 책상을 두어 번 가볍게 두드렸 다.
그러자 이번에는 전무의 화면이 변했다.
그것은 등고선을 포함하고 있는 지도의 모습이 되었다.
마치 바다와 땅을 가르는 선처럼 보이는 것이 하나 있었고, 그 선을 따라 X자가 몇 개 그려져 있었다.
최근 전투가 일어난 지점을 기록한 정보 였다.
“위력 정찰. 몇 차례에 걸친 침투에 따 라 마침내 위치를 확정 지었습니다. 바로 여기지요.”
전무가 가리 키는 곳은 등고선이 좁게 모 여 원을 그리고 있는 장소였다.
다시 말해 작은 분지였으며, 분지의 꼭 대기에는 작아 보이지만 꽤 넓은 평지가 펼쳐져 있었다.
“산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평평하고 검은 세계이지만, 이곳에는 둔덕이 있지
요. 그리고 우리의 채탐 드론이 지역에서 예의 그 신물질을 발견했습니다. 우린 그 게 필요해요. 지금 당장.”
진후는 그 지도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욕 설을 뱉을 수밖에 없었다.
[젠장.]
[왜 그래요, 주인님? 뭐 실수했어요? 괜 히 위장 취업했다 싶으세요?]
[그런 게 아냐. 저기, 블랙펄이다.]
[예? 기준이 보고 토한 그 세계요?]
[응. 대진그룹 자료에서 봤었지. 희생자 가 너무 커서 다시 가지 않을 줄 알았는 데, 헌터가 둘이 되었다고 바로 들어갈 생각인가 보네.]
진후는 속으로 혀를 찰 수밖에 없었다.
당시 영상 속에서 대진 그룹의 PMC는 막대한 손해를 보았다.
기관총 등 중화기로 무장한 군대가 펄 아래에서 올라오는 진흙 괴물에게 그야 말로 처참하게 살해당했다.
사실상 부대의 20%만 손실해도 ‘전 멸’이라고불러도부족함이 없는데,
이 세계에서 군대 대부분이 죽었으니 뭐 라 말하지도 못할 정도로 끔찍한 싸움이 었다.
[블랙펄이라는 세계가 어설프게 가면 뼈 도 못 추리는 곳이기도 해.]
물론 블랙펄은 B급 정도 되는 세계라, 미래의 입장에서 보면 극단적으로 위험 한 세 계는 아니 었다.
그곳이 고여서 썩은 물과 괴물이 득실거 린다고는 하나, 헌터들도 고이고 고인 자 들이 많게 되었으니까.
하지만 지금 대진그룹의 수준에서는 도 무지 도달하기 어려운 세계였으며, 극단 적으로 어렵다고 말해도 부족할 그런 세 계였다.
[최소 헌터 10인 정도가 모여야 할 만한 장소를 인력으로 돌파하겠다, 이 이야기 로군.]
게이트가 곳곳에 열린 후 각 국가가 초 반에 많이 했던 짓거리다.
그리고 지금이 바로 그 초반이 었다.
아니, 극 초반이었다.
“알겠습니다. 준비하겠습니다.”
하지만 조강진은 진후와 예나를 똑바로 바라봤다.
“별문제 없을 겁니다.”
그러고는 슬며시 미소를 지 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