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화. 몰아치는 폭풍우(4)
철썩_
바닷물 소리는 여전하다.
저 멀리 서쪽 바다에서는 폭음이 연신 들려오고, 인천항에서는 사이렌 소리가 들려오고 있지만,
바닷물 철썩이는 소리는 늘 똑같았다.
진성은 깜깜한 밤바다를 흘깃 보고는, 다시 눈앞의 커다란 창고로 눈을 돌렸다.
“...정말 크군. 하지만 이렇게까지 무방 비하게 버려둘 줄이야.”
경비는 물론이거니와 그 흔한 탐지등 하나 없는 창고.
인천항 부두 창고 중에서 이렇게까지 대충 관리하는 창고란 찾아볼 수 없을 것 이다.
그 옆에 선 남자도 긴장을 숨기지 못하 고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오면서 싸우지 않은 게 어딘가. 아마 경비들이 다 빠져서 서울 본사를 지키러 갔을지도 모르지.”
“그렇게까지 하겠습니까?”
“글쎄. 아무튼 이런 기회는 다시없을 거 라고 보네.”
“부수는 데 얼마나 걸리겠습니까?”
그는 창고를 바라보며 턱을 만지다가 말했다.
“그들이 헌터스 대표를 얼마나 잡아둘 수 있느냐에 달렸겠지. 어쨌거나 우리 같 은 자들에게 이런 기회는 다시없을 거 다.”
“맞습니다. 어서 시작하시죠.”
그들이 고개를 끄덕이자, 곧 그들과 함 께 따라온 수십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창 고를 향해 우르르 몰려 나갔다.
그들은 품에서 스크롤을 꺼내 문과 벽 에 겹겹이 붙였다.
“물러나라. 둘 중에 하나 먼저 뚫리는 곳으로들어가자. 진성, 시작해.”
“발(發).”
진성이 주문을 외치자 스크롤이 일제히 폭발했다.
꽝! 하는 폭음이 부두를 뒤흔드는 순간, 창고 전체가 흔들리며 먼지가 사방으로 뿌려졌다.
“젠장, 역시 한 번에 부서질 리가 없지!”
진성이 욕설을 내뱉었다.
마법 결계가 느껴지지 않아 이상하다 생각은 했지만, 아예 통째로 금고 수준의 두터운 격벽으로 창고를 덮어버린 모양 이었다.
방금의 폭발 스크롤로 상당히 깊이 패 었고 또 녹여 버렸지만, 철문과 벽 안쪽 으로 또다시 두꺼운 금속 벽이 보였다.
“…아무리 그래도 10m 이상 이렇게 할 수는 없을 거야. 계속 부수고 안의 것을 꺼낸다. 계속해.”
“발(發)!”
다시 한번 주문이 폭발하면서 창고가 뒤흔들렸다.
하나의 홀로그램에서는 커다란 맘모스 가 미사일을 몸으로 받아가며 바다로 헤
엄쳐 함대를 향해 나아가는 모습이 보였 다.
고대 바이킹 식의 길쭉한 롱보트는, 바 다 속을 걸을 만큼 거대한 세 마리 맘모 스의 호위를 받으며 항모 전단을 향해 나 아가고 있었다.
아무리 봐도 비현실적 인 광경이 었다.
동쪽에서 한국군의 포격과 미군 항모 전단 소속 미사일 구축함 및 전투기의 원 거리 미사일 공격이 이어지는동안,
서쪽에서는 바다 위에서 떼를 이루어 수십 명의 마법사들이 난전을 벌이고 있 었다.
진후가 그 광경을 보며 중얼거 렸다.
“보통은 힘을 합쳐서 보물을 찾고 그 다 음에 싸우지 않아?”
“저자들을 이해하려고 하지 마. 오늘 싸 움을 내일로 미룰 수 없는 게 저자들의 저주니까.”
하연이 말했다.
그때 지아가 말했다.
“주인님, 인천부두 17번 창고에 습격 경보입니다.”
지아의 말에 진후는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또 하나의 홀로그램이 켜졌는 데, 수십 명은 되어 보이는 헌터들이 주 문을 이용해 창고를 폭파하고 있었다.
“저거… 창고가 아니라 큐브잖아?”
진후가 그 모습을 보며 머리를 저었다.
화면 속에서는 일단의 마법사들이 스크 롤을 계속 사용해서 벽과 문을 뚫고 또 뚫으며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마치 광산 속을 곡괭이로 뚫고 들어가 는 광부들을 보는 것처럼, 그들은 커다란 창고를 뚫고 또 뚫으며 그저 기다란 굴을 파고 있을 분이었다.
녹아버린 금속들이 쇳물을 이루어 파헤 쳐진 구멍 좌우로 흘러내리고, 유독한 금 속 증기가 펄펄 피어오르고 있었다.
“큐브라니?”
하연이 물었다.
“저건 창고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창고 가 아니라 커다란 금속 덩어리야. 고철을 잔뜩 모아서 저기에 큐브 형태로 하적해 둔상태지.”
“그러면 저렇게 내내 파고들어 가다 보 면……
“반대편으로 나오게 될 거야.”
진후는 머리를 저었다.
위기를 틈타 헌터스 창고를 약탈하겠다 는 마음가짐은 가상했지만, 그들이 저기 서 얻을 수 있는 건 녹아내리는 쇳물이 전부였다.
그것도 모르고 저 비싼 폭발 스크롤을 쓰고 땀방울을 흘리며 고된 터널 뚫는 노 동을 하고 있는 셈이었다.
“부산항 제32번 창고에도 습격이 시작 되었습니다.”
다시 지아의 보고와 함께 홀로그램이 나타났다.
이쪽에서도 복면을 뒤집어쓴 무리들이 폭약과 마법으로 창고 문을 때려 부수고 있었다.
“동일 조직인가?”
“다른 것 같아요. 복장도, 사용하는 마 법 형태도 다릅니다. 저들 사이의 공통점 은 모두 큐브를 뚫고 있다는 것뿐이에 요.”
“...안타깝네.”
하연이 혀를 찼다.
“저들뿐 아니라, 총 23곳에 비슷한 공 격이 감지되었습니다.”
지아의 말에 숫자가 쓰여진 홀로그램 여러 개가 공중에 떠올랐다.
가지각색의 사람들이 헌터스의 것으로 알려진 창고들을 곳곳에서 습격하고 있 었다.
어떤 자들은 마법사로 보였고, 어떤 자 들은 무기를 들고 있는 전사들로 보였다.
심지어는 외국인으로 보이는 사람들도 여럿 있었다.
차라리 마법이라도 사용해서 벽을 뚫는 자들은 칭찬이라도 해줘야 할 상황이었 다.
저들 중 일부는 망치와 도끼로 문을 부 수고 있었는데, 당연한 얘기지만 그것은 정말 망치로 광산을 뚫고 들어가는 짓거 리였다.
“부적응 헌터들이 생각보다 많았군.”
진후가 팔짱을 끼며 말했다.
“이렇게 일이 터지자마자 움직일 정도 로 세가 불어 있는 줄은 몰랐네요.”
지아가 말했다.
“생산 기지에 대해서도 방어를 강화하 겠습니다. 여분의 스켈레톤은 생산 공장 으로 옮길게요.”
“응.”
진후가 고개를 끄덕 였다.
창고를 노리는 자들이 하이에나 같은 잔챙이들이고, 아티팩트를 노리는 자들 이 진짜 적이라면, 그 중간에서 이익을 보려는 자들도 분명 있을 터 였다.
“발견했습니다. 우리 공장 클러스터 13km 지점에서 몬스터를 앞세운 헌터와 마법사들이 다수 감지되었습니다.”
지아가 다시 한번 영상을 공중에 띄워 올렸다.
이제까지 봤던 오합지졸들과는 확실히 달랐다.
모두 통일된 복장을 갖춰 입고 있었다.
교수대의 사형수가 쓸 법한 머리 전체 를 덮는 붉은 복면, 가슴팍에는 붉은 휘 장에 검은 나무가 그려진 옷을 입은 일단 의 무리가 공장을 향해 접근하고 있었다.
그들은 목에 커다란 개목걸이를 맨 전 투 트롤을 이끈 채 전진하고 있었다.
하연이 그 모습을 보고 말했다.
“지부장 클리베르의 병사들이야.”
“처음 듣는 이름인데.”
“지중해 일대에서 꽤나 큰 세력을 가지 고 있는 음흉한 마법사야.”
“서울을 직접 노리기에는 부담스러웠던 모양인가.”
“그럴지도.”
하연은 팔짱을 낀 채 말했다.
“어떻게 할 거야? 우리 둘 중한 명이라 도 여기를 비울 수는 없을 거야. 나는 진 짜 강적이 쳐들어오면 수정 두 개를 컨트 롤해야 하고, 너도 지하에 아티팩트를 직 접 지켜야 할 텐데. 여기서도 네 시설을 방어할수 있겠어?”
진후는 고개를 끄덕 였다.
“괜찮아. 저기에는 괜찮은 마법사가 있 거든.”
“마법사?”
“아리에타 소속이었지. 아마 브라이온 은알 거 같은데.”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의 하연이 다시 홀로그램으로 고개를 돌렸 다.
높은 곳에서 시야를 잡은 홀로그램이 보몄다.
그리고 그 홀로그램 속에 뭔가 익숙한 것을 발견한 듯, 하연이 가까이 다가가 자세히 보았다.
“...건물 위에, 저지팡이.”
그녀는 갑옷을 입은 것처럼 온몸이 철 로 덮여 있는 사람의 정체는 알 수 없었 다.
하지만 그 지팡이가 누구의 것인지는 잘 알고 있었다.
“특임파견자 아룬달…? 저 사람, 죽었다 고 들었는데.”
하연이 입을 벌리며 말했다.
영상 속에서 아룬달이 지팡이를 든 채 건물 옥상에 서서 거대한 장벽의 주문을 시전했다.
곧 불투명한 유리장 같은 장벽이 시설 전체를 덮어 나갔다.
그 유리장 같은 돔 장벽 위에 다시금 진 홍색 불길이 스며 올랐다.
진후가 대답했다.
“완전히 죽지는 않았지.”
“일부러 지부장 승격을 미루고 특임 의 뢰만 맡아 전 세계를 돌아다니는 자라고
알고 있었어. 그런가. 지부장이 되는 대 신 당신 편에 서기로 했구나.”
하연이 고개를 끄덕이는 동안, 숲의 한 복판에서 트롤들이 입을 벌렸다.
트롤들은 입에 커다란 마스크를 쓰고 있었는데, 가운데가 뚫려 긴 대롱 같은 것이 달려 있는 채였다.
꽈아아'아—
트롤들이 일제히 고성을 지르자, 마스 크에 달려 있던 대롱에서 붉은 탄환들이
건물을 향해 날아갔다.
트롤들의 입에서 쏘아진 마법의 구체들 이 장벽을 두들기자, 곧 장벽 곳곳이 깨 지면서 폭발이 일어났다.
깨진 장벽을 향해서 적 마법사와 전사 들이 뛰어들기 위해 몸을 던져 넣었지만,
“커으윽!”
“크악!”
깨진 것처럼 보이는 장벽은 모두 환상 이었다.
실제로는 어떤 장벽도 깨지지 않았고, 도리어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몸을 던져 넣은 적 무리의 온몸에 커다란 구멍이 난 채 돔 위로 굴러 떨어져 내렸다.
“방금 보셨어요?”
“응. 대단한데!”
진후가솔직히 감탄했다.
“이번에 새로 개발한 디스펠 주문이 장 착된 탄환이에요. 여러 가지 복잡한 주문
필요 없이, 적의 저항력을 파괴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은 탄환입니다.”
총으로 각성자의 몸을 뚫었다는 것은 충격적인 일이었다.
“누가 쐈지?”
하연은 이어서 화면 속의 스켈레톤들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몇몇 강화된 스켈레톤들은 등 뒤에 커 다란 가방 같은 배터리를 짊어진 채, 전
선이 연결되어 있는 총기를 들고 상공을 겨누고 있었다.
“아무나 쏜다고 저런 위력이 나오진 않 겠지만, 충분한 에너지를 공급할 수 있다 면 가능하죠.”
지아가 말했다.
하지만 적들도 쉽게 물러날 생각은 없 어 보였다.
커다란 트롤들이 뛰어들어서 방벽을 향 해 머리를 부딪치고 주먹을 들어 올려 후 려치자, 방벽 전체가 파지직! 하는 소리 와 함께 흔들렸다.
스무 마리가 넘는 중대형 몬스터의 일 제 돌격과 함께 아룬달의 지팡이가 공중 에서 흔들렸다.
힘으로 그것들을 억누르려는 것이 그다 지 쉬운 일은 아니 었던 것이다.
하지만 잠시 후, 하연은 그 옆에서 두 개체의 아룬달이 더 만들어지는 것을 보 았다.
서로를 향해 간단한 눈인사 대신 소리 를 낸 다른 아룬달 하나가 다시 여러 겹 의 마법을 시전하자, 건물 전체의 장벽이 강화되었다.
트롤들이 뒤로 물러나는 동안, 아직 주 문을 사용하지 않은 아룬달이 스켈레톤 들과 함께 마법을 써서 앞으로 날아갔다.
곧 그 아룬달로부터 붉은 진홍색 화염 이 트롤들과 적 마법사들을 향해 쏟아져
내리자, 고요했던 숲 전체가 금세 불길에 휩싸여 타오르기 시작했다.
“여럿… 을가지고 있는건가?”
“하나의 자아에 여러 개의 신체를 허락 했을 분이에요. 저희가 에너지를 제공하 는 동안에는, 그 몸들이 모두 한 자아 안 에서 원하는 만큼 주문을 사용할 수 있는 겁니다.”
지아가 말했다.
“정말, 터무니없는 일들을 태연하게 해 내는구나.”
하연이 중얼거 렸다.
“하지만 아룬달이 살아 있다는 것을 봐 버렸으니, 내게도 좋은 생각이 있어.”
“뭔데?”
“이번 사태가 마무리되면, 그를 지부장 회의에 참석시키자.”
하연이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