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혼자 메카네크-200화 (201/266)

201화. 산을 오르다(4)

“당신과 나를 같은 통로에 넣어줄 줄은 상상도 못 했는데 말이오.”

“뭐, 좋은 게 좋은 거 아니겠어요? 어차 피 우리 둘이야 알 만한 건 다 아는 처지 이기도 하고. 여기서 둘 다 정리할 생각 을 하는 건지도 모르죠. 후후.”

“우습소? 목숨이 달린 문제인데. 너무 오래 살아서 미쳐버린 걸 제발 좀 감추고

말하시오.”

“오늘따라 독설이 강하시네요. 겁이 나 시나요, 의장님?”

“생각해보세요. 엘더들이 우리를 여기 서 정말로 뜻을 모아 정리하겠어요? 그 러기엔 우리는 너무나 작은 자들이에요.”

소년은 붉은 눈동자를 빛내며 말했다.

아리에타의 지부장 모임의 내부 서클 니푸르.

그리고 그 목소리를 듣는 의장, 릿슈펠 트는 짜증이 왈칵 돋았다.

외눈 안경을 들어서 천으로 거칠게 닦 아내며 대꾸할 수밖에 없었다.

“그 말대로요. 너무 작은 자들을 한번 정리하려고 할지도 모를 일이지.”

“글쎄요

“이건 본래 그저 지부장 회의였소. 오 년에 한 번, 차원망에 구멍이 생기면 비 정기적으로 몇 번. 그나마도 이번 몬스터 사태 이전에는 백 년에 한 번꼴로 있는 일이었지. 그리고 지부장들끼리 만나서

하는 얘기는 더 시시했소. 그런데 여길 보시오....”

릿슈펠트가 두 손을 들어 좌우를 가리 켰다.

거대한 계단.

하늘을 덮고 있는 운무.

좌우에 솟아난 벽들은 진흙 사이로 오 래된 문명의 흔적들을 가득 품고 있었다.

알아볼 수 있는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 는것들뿐이었다.

아르케스가 말했다.

“그런데 갑자기 이 지부장 회의 장소를 도그마 안에서 꺼내 올린 신전 비스름한 데서 하자니 많이 당황하셨다는 얘기를 하려는 건가요? 세상을 누가 만들었는지 갑자기 말해준다는 게 좀 신기하긴 하겠 네요.”

이 세상은 창조되었다.

이 세상은 누군가의 의지에 의해 유지 되고 있다.

도그마에 대해 알게 된 자들은 누구나 그 비밀에 전율했다.

그리고 그것을 아는 자들이어야 비로소 아리에타의 마에스트로.

그 후에야 삼라만상의 조율자이자 정체 모를 엘더의 종으로서 비밀과 마법 위에 군림할수 있었다.

그러니 흡혈귀 아르케스에게는 신기할 것이 없었다.

이미 인류보다도 더 오래전부터 아리에 타의 마에스트로였던 그에게 도그마란 너무나 당연한 상식이 었으니까.

하지만 릿슈펠트는 흥분해서 외치고 있 었다.

“이 벽을 보시오. 아르케스! 당신은 늘 인류의 문자보다 당신이 더 나이가 많다 는 걸 자랑하곤 했지. 자, 그렇다면 보시 오. 이건 무슨 문자요? 누가 쓴 것이지?”

릿슈펠트는 진흙 사이에 파묻혀 있는 수정 벽을 가리키며 말했다.

한때 너무나도 아름다운 문명을 상징했 을 성분 모를 수정과, 수정 위에 새겨진 문자들은 누군가의 혼이 담긴 명필이었 다.

“아름답긴 하네요. 쐐기 문자도, 룬 문 자도 아닌 것 같기는 한데. 하지만….”

아르케스는 흐응 하는 소리를 내며 글 자를 죽 훑었다.

유려하고, 아름답고, 반복되어지는 문 자.

고대 문자다운 번잡함은 하나도 찾아볼 수 없고, 한 획 한 획이 모두 깔끔하고 정 교하게 쓰여지도록 오래 구성된 것.

마도학에 익숙한 자가 문자에 대해 모 를수는 없다.

아르케스는 그 문자를 매만지다가 릿슈 펠트를 바라보았다.

그는 오래 침묵했다.

“알아보겠소? 이건 아주 정교하게 개발 된 문자요. 누군가의 발성을 부호화하여 표음하여 낸 문자가 왜 여기 있단 말이 오? 도그마 가장 밑에서 끌어 올려진 유 적에!”

아르케스는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깨닫 고 전율했다.

그가 손을 들어 올려 염력을 사용했다.

강력한 힘이 좌우의 진흙을 밀어내며, 비석을 통째로 봅.아올렸다.

마지막까지 수정 비석을 붙잡고 있었던 정체 모를 뼈들이 비석과 함께 딸려 나와 통로에 흩뿌려졌다.

이것은 인간도, 다른 동물의 뼈도 아닌 뼈 였다.

그 뼈는 마치 영장류의 뼈처럼 생겼으 면서도, 가시가 돋았고 그 안은 새의 뼈 처럼 텅 비어 있었다.

그 뼈를 손에 든 아르케스가 미간을 찌 푸렸다.

릿슈펠트가 말했다.

“우리는 많은 세계가 멸망하면서 끝없 이 위로 올라가는 것으로 알고 있었소. 돌아올 아리에타와 함께 엘더가 되는 자 들은 승천하여 다음 층으로 올라갈 것으 로생각했지.”

“…아직 그게 부정된 건 아닙니다.”

아르케스의 목소리가 차갑게 떨렸다.

“하지만이건다른 증거요.”

릿슈펠트는 아르케스의 곁으로 다가와 뼈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이 존재가 지구에서 태어난 존재이든, 혹은 다른 세계에서 온 자이든 상관없소. 중요한 것은 우리가 알지 못한다는 것이 지. 우리도 모르는 일들이 우리 세계에서 일어났다는 거요. 그것도 여러 차례나.”

아르케스는 그 말을 듣자마자 앞으로 달려 나갔다. 그는 계단을 안개로 변해 날아올라 빠르게 쏘아져 올라갔다.

“그만! 젠장! 함부로 움직이지 마시오!”

하지만 아르케스는 멈추지 않았다.

그가 전속력을 내며 날아오르자, 광풍 이 된 안개가 시야에서 금세 사라졌다.

릿슈펠트도 더 빠르게 달려 쫓자, 주변 의 풍경이 급하게 변했다.

진흙 사이로 파묻힌 수정처럼 보이는 구조물들의 행렬이 끝나자, 또 다른 형태 의 구조물들이 나타났다.

어떤 것은 뼈로 되어 있었고, 어떤 것은 금으로 되어 있었으며, 어떤 것은 보석 같은 것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그만! 젠장! 습격을 받을 수도 있으니 멈추시오!”

릿슈펠트가 다시 소리쳤다.

그제야 아르케스는 마침내 계단의 중 턱, 공터에 내려앉았다.

“후우! 정말이지….”

아르케스가 안개로 변했던 그가 다시 원래의 형상을 취했을 때, 소년의 모습 어디 에도 여유로움은 남아 있지 않았다.

두드드드득….

그가 손에 쥐고 있던 것들을 바닥에 떨 어뜨렸다.

안개로 변해 있는 상태에서 벽을 긁어 여러 물건들을 쓸어 온 모양이었다.

그의 손에서 떨어지는 것들은 모두 알 수 없는 언어로 쓰여진 서판이거나 혹은 뼈, 비늘 같은 흔적이었다.

어디에도 그들이 아는 종의 흔적은 전 혀 없었다.

“열 종류가 넘는군.”

“...그렇다면 의장님 말이 맞겠군요.”

“그렇소. 도그마는 단순히 세상을 조율 하는 것이 아니었소. 차원 너머의 영향을

배제하고, 인간이 살아가기에 적절하게 마법을 조절하는 게 끝이 아니 었소….”

아르케스가 잠시 머뭇거 리다가 말했다.

“그렇다면 도그마라는 게 대체 뭐죠?”

“덮어씌우는 것입니다.”

그 둘은 동시 에 고개를 돌렸다.

대답이 다른 곳에서 들려온 까닭이었 다.

공터의 끝.

그들의 시선의 끝자락에, 붉은 로브를 입은 존재가 허공에 두 팔을 벌리고 서 있었다.

그 존재의 좌우로 붉은 후광이 비치고 있었다.

마치 늦저녁의 노을 같은 불빛으로 계 단을 물들이자, 릿슈펠트와 아르케스 모 두 전투 자세를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진후가 보았던 것들을, 그들도 똑같이 보고 말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것도 똑같은 말을 전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지부장들이여.”

“ 젠장!”

릿슈펠트는 욕설로 맞이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동시에 아르케스는 안 그래도 창백해진 얼굴이 더욱 새하얗게 질려 짧은 딸꾹질 을 시작했다.

그러더니 천천히 고개를 돌려 의장을 보며 말했다.

“의장님… 니푸르 지부장들이 과연 살 아서 올라갈 수 있을까요?”

“지금은 올라가도 살아남을 수 있을지 를 물어야 할 것 같소만.”

의장은 품에서 지팡이를 꺼내며 말했 다.

“제 이름은 이든입니다.”

“반갑습니다. 이든.”

“나는 푸르샤요.”

검은 무사, 그리고 동남아에서 명성을 날리던 ‘해체자’들. 이들 각각의 이름을 몰랐던 건 아니지만, 진후는 공개적으로 이들을 칭찬한 후 그들을 받아들였다.

여기까지 같이 들어오겠다며 따라 들어 온 헌터들의 숫자는 모두 800명.

그중 두각을 먼저 드러낸 자들이 진후 와 같은 편에 서겠다고 말하는 건 당연했 다.

‘저게 머리 위에 있는 이상….’

해체자들의 대장인 푸르샤는 힐끗 하늘 을 올려 봤다.

안개에 덮인 천장 속에는 아까 빛나는 촉수를 날렸던 스퀴즈라고 불리는 것이 도사리고 있을 터였다.

몬스터를 지배한 것인지 다른 뭔가를 소환한 건지는 몰라도, 저 검은 무사들이 애를 써서 간신히 잘라낸 머리를 단숨에 터트린 것이 예사롭지 않았다.

여차했다간 몬스터들 앞에서 공분을 일 으켜 전멸을 당하느니, 지금 와서는 그나 마 인망도 있고, 무엇보다 거래소를 꽉 잡고 있는 진후와 협력하는 편이 제일 나 았다.

그런 생각을 하는 건 모두 마찬가지였 다.

‘그리고 어차피 나중에 가면 누군가는 분배를 해야 해. 아마 저 양반이 지금까 지 하는 행동대로라면 이번에도 분배를 잘하려고 하겠지.’

오직 일부는 다른 생각을 품고 있었다.

‘아, 괜히 들어왔다. 어떻게 해야 살아 나갈 수 있을까? 하라는 대로만 하지 말 고 살길을 반드시 찾아야 할 텐데….’

이런저런 생각들 중에서, 진후는 미리 준비된 데이터베이스와 이들의 실제 능 력을 비교 검토하면서 전진했다.

“아까 우리는 올라가도 된다고 했으니, 생각보다 오래 걸리지 않을 것 같습니

다.”

아룬달이 진후에게 말했다.

그 말을 옆에서 들은 기준이 고개를 갸 웃거리더니 말했다.

“직감인가요, 그건?”

기준의 질문에 아룬달이 고개를 끄덕였 다.

“어린 자여. 아마 그 시험은 우리가 치 른 게 아니라, 그 죽은 자가 치른 것일 테 다.”

“네? 우리가 그를… 그러니까… 그 사람 을 죽인 게 시험 통과가 아니라고요?”

“그래. 그것은 그자가 극한에 도달했을 때 무엇을 소망했는가를 보고자 했을 뿐 이었다.”

“그의 소망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면 우 리는 못 올라갔단 말인가요?”

기준의 질문에 아룬달은 잠시 침묵하더 니 바닥의 흙을 한 움큼 쥐어 올리며 말

했다.

“어린 자여 보라. 헌터가 각성한다고 했 을 때의 능력이란 참으로 이 모래 같은 것이다. 이것으로 너는 성을 만들 수 있 겠느냐?”

“에…?”

“하지만 너는 네 의지로 현실을 조작하 지. 그것은 마법으로 따지자면 도무지 불 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그것을 ‘각성’이 라고 하고, 그 각성의 ‘끝’에서 그가 본 것에 대해… 그가 그런 반응을 한 것을 그 존재가 칭찬한 것이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그래. 네가 알 필요는 없다. 나의 마스 터와 내가 고민할 문제니까.”

간단하게 잘라 버린 아룬달의 말에 기 준은 머리를 긁적이며 물러났다.

진후는 팔짱을 꼈다.

무슨 말인지는 얼추 이해할 수 있었다.

헌터의 끝에서 본 게 뭔지 모르겠지만, 그걸 보고 우리 모두를 죽여 버리려고 한 걸 칭찬했다는 게 아닌가.

기분 나쁜 이야기 였다.

“하지만끝이 가까웠군.”

“예. 마스터. 보십시오. 저기 문입니다.”

그리고 아룬달의 직감이 맞았다.

머나먼 계단 끝자락에 커다란 문이 하 나 솟아 있었다.

상공 수십 km까지 솟은 산의 꼭대기에 도달하기에 너무나 짧은 거 리를 걸었다.

하지만 그 문은 통로의 끝을 보여주고 있었다.

“역시 일반적인 차원은 아니었어… 문 을 열겠다.”

진후가 앞장서서 그 문에 두 손을 대었 다.

문의 가운데 틈새가 벌어지면서 빛이 들어왔고, 동시에 그 문이 좌우로 크게 열렸다.

그리고 나타난 곳은 콜로세움만큼이나 더 거대한 회의장이었다.

그리고 진후가 열고 들어온 것과 같은 문들이 그들의 시야에만 수백 개가 놓여 있었고,

그 시설의 한가운데, 오직 커다란 테이 블만이 하나놓여 있었다.

“...와버렸군.”

회의장에 도착했다.

진후는 침을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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