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8화. 유언(1)
“이거 맛있네요. 더 드셔 봐요.”
“아, 고마워요.”
“이것도요. 와, 이거 뭐로 만들었지?”
“먹고 있어서 잠시만….”
“우앙! 이거 봐! 이거, 이건 뭐지? 우 와!”
하연은 눈앞에서 음식을 입안에 퍼 넣 고 있는 할리아를 보았다.
진후가 훈련을 시작한 지 이제 23시간 째.
아마 저 안에서는 시간이 다르게 지난 다고 하니까, 꽤 오래 훈련하고 있을 터 였다.
할 수 있는 한 최대로 오래 하면 좋을 텐데.
그래도 백 년 단위면 좀 더 쓸 만하지 않을까?
중앙체와 낙티란이랑 같이 있던 놈들은 시간을 왜곡하여 얼마나 오래 훈련했을 지, 상상도 가지 않았다.
결국 그런 생각에 깨작거리는 하연의 어깨를, 할리아가 잡았다.
“아까는 그렇게 기운 넘치더니, 왜 그렇 게 갑자기 약하게 굴어요?”
“아. 아니에요.”
“너무 걱정 마요! 당신 남편도 세지만, 내가 보기엔 당신도 정말 센데. 그 백발. 엘더의 힘이라는 거 난 알아요. 아마 몇 몇은 알아볼걸요?”
“음, 그렇긴 하겠죠. 어쩌다가 백은발이 됐지만, 이건 숨겨지지도 않아요. 염색을 해도, 그대로 사라져 버리거든요.”
“어쩔 수 없잖아요. 그게 힘의 연결 고 리인데. 누군가에는 아티팩트가 있어야 하는 수준의 일을, 당신은 그냥 대수롭지 않게 할 수 있는 거잖아요.”
하연은 눈앞의 라미아를 문득 다시 보 았다.
헤라오스의 시녀라면, 분명 최상위 혈 족.
확실히 아는 것도, 다른 자들과는 비교 도못할 만큼 많으리라.
물론 지금 입안에 넣고 있는 음식이 2000인분을 넘어가고, 18시간 동안 연 속으로 먹고 있다는 점과, 그걸 계속 가 져다주는 1등급 숙소 직원들의 덤덤한 시선은 아주 어색했지만.
“이해해 줘요. 큰 힘을 쓰려면 많이 먹 어야 하고, 또 내가 바보 같이 먹고 있으 면 아무도 의심 안 할 테니까. 일석이조 잖아요. 그리고 당장 떠나가면 오래 못 먹을 테고. 뱀이 원래 그래요. 배에 많이 넣을 수 있어요.”
“당신도, 사람을 많이 잡아먹었나요?”
“아, 뭐. 그랬죠. 뭐… 음. 뭐라고 얘기 해야 하나? 당신, 내가 몇 살 같아요?”
“글쎄… 한….”
“7902세예요.”
할리아는 키득키득 웃었다.
“인간이나 당신 같은 호문클루스는 나 를 이해하기 어렵겠죠. 나도 당신들을 이
해하기 어렵긴 마찬가지예요. 하지만 당 신들이 10개월을 사는 동물을 먹는 것과 7천 년을 사는 내가 100년을 못 사는 인 간을 먹는 것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죠?”
“인간은 말을 하죠.”
“재밌으셔라. 당신, 동물 생각 정도는 우습게 보실 수 있으시면서.”
“남편 때문에 그냥 말해 봤어요.”
“그럴 줄 알았어요. 당신 남편은 눈에 독기가 줄줄 흐르니까. 세르쿤드가 더 약 하지만 않았다면, 우린 당신들을 살려두 지 않았을 거예요. 그게 현실이에요. 당 신도 잘 아는 거 같은데.”
“당신들의 현실은 서로가 전부라는 거 군요.”
“그래요. 우리가 도망치면 흔한 일이니 까 메네메사는 아무 일도 안 할 거예요. 어디선가 죽은 거라 생각하겠죠. 시녀를 누가 잡아먹었는지 부럽긴 하지만, 힘 있 는 놈이 먹었을 테니 모른 척 하는가 보 다할 테고.”
“그래요.”
할리아는 인간형 손가락을 쪽쪽 빨아 먹더니 말을 이었다.
“하지만 우리가 도망치는 김에 테러를 저지르고 헤라오스의 세계 근처의 비밀 기지로 도망가면, 아마 고독의 기사는 인 생 최고의 즐거움을 즐기러 떠나겠죠. 맨 날 고독하니까, 쳐죽일 때 빼고는.”
“...그렇게 쉬울까요? 솔직히 전제 남편 이 너무 쉽게 움직인다는 생각을 하고 있 기도한데요.”
“키킥. 당신은 잘 모르시는구나. 이 잔 치. 벌이에요. 벌.”
“...벌? 누가 받는 벌이죠? 설마 고독의 기사가 받는 벌이에요?”
“그래요. 검은 황제 하레사스는 사색의 밤에 들어갔죠. 저 어두운 밤하늘 별의 정렬은 하레사스가 이곳을 돌아올 곳으 로 알게 하기 위해 만든 표시판이나 아니 면 등대 같은 거예요. 하레사스는 어딘지 모를 곳에서 뭔가 엄청난 걸 하고 있다고 해요. 아무도 모르지만. 어쩌면 또 모르 죠. 수백만 갈래로 자기를 나눠서 사방에 뿌려 놨을지.”
“뭐, 당신은 해봤자 천년도 못 살았을 테니까, 이런저런 얘기 해도 다 이해하긴 어렵겠죠. 하지만 걱정 마요. 제가 당신 을 이렇게 존중하는 것도, 당신 힘에 대
한 존중이니까. 모른다고 무시하거나 하 진 않아요. 어떻게 얻은 기회를 잃을 수 는 없거든요.”
땡떙땡
또 종이 울린다, 지나가는 시종이 담담 하게 고개를 내밀었다.
하기야 해골 얼굴에 무슨 표정이 있겠 냐마는 할리아는 갑자기 바보 연기를 시 작했다.
“꼬기! 잔뜩! 이거보다 더 많이! 한가 득!”
그러면 이제 하연이 슬쩍 보면서 말했 다.
“방을다 채워줘요.”
“알겠습니다.”
시종은 고개를 끄덕이고 떠나갔고, 다 시 결계 속에서 할리아는 바보짓을 멈췄 다.
그래도 먹는 건 멈추지 않고 있었다.
“알을가졌었어요.”
“…그거 때문에 들켰겠군요.”
“당신 종족은 우리보다 더 힘들겠죠. 배 안에 있어야 하니까. 아까 애 아베’, 애 아 빠하던데. 애는 어디….”
“배 밖에 꺼내 놨어요.”
“와, 신기하네. 하려면 할 수 있구나, 당 신들도….”
“그렇긴 해요. 하던 얘기나 더 해줘요.”
“그래요. 고독의 기사. 그자는 하레사스 의 검이에요. 마지막 트리엘프 황족 5단 계 타락 각성자죠.”
“...뭐, 뭐라고요?”
하연이 깜짝 놀랐다.
트리 엘프는, 사슴 왕자가 아니 었나?
이제는 이름도 잘 기억나지 않는 그 거 대 사슴 괴물이 엘프라는 이름으로 불리 는지 전혀 이해가 가지 않았었는데.
진화 등급이라도 있던 건가?
“하레사스가 가장 정복하기 어려웠던 세계가 트리엘프의 세계예요. 가장 강력 했고, 또 가장 처음에 무너졌죠. 그들을 멸망시키기 위해 참가한 면면들이 화려 해요. 당연히 블랙 헥사의 하레사스 검은 황제, 그리고 우리 뱀 새끼, 중앙체, 그때 는 이름이 달랐지. 릴리스랑 또….”
“…트리엘프가 그렇게 세요?”
“트리엘프가 세다기보다는, 트리엘프 종족 자체가 이 우주와 맞닿은 면이 많아 요. 그러니 터무니 없는 방법으로 보호를 받았죠. 이 층계라는 것도 세계수의 안을 오고 가는 거고, 지하에는 니드호그란 놈 이 있는 거 알죠?”
“들었어요.”
우르그 신족의 얘기 몄다.
그놈들이 스스로 신족 어쩌고 해도, 옆 의 최고위 시녀의 비늘 하나보다도 약할 테지만….
“근데 트리엘프라고 불리잖아요. 세계 수를 관리하는 일족인 거예요. 그래서 그 자들이 모두 죽었기 때문에, 살아남은 자 들을 찾을 때까지, 나무의 ‘의지’가 문을 여는 거고요.”
“그렇군요.”
“다 몰랐나 봐요. 밖이었으면 비싸게 받 고 들려줘야 할 얘긴데. 갚아야 할 게 너 무 많아서 아직도 한참 모자란 기분만 드 네요.”
그건 다행이었다.
하연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래서, 그 의지는 계속 트리엘프를 찾 고 있다고요?”
“그래요. 특히나 아직 타락하지 않은 어 린 트리엘프가 나타나기라도 한다면, 하 레사스의 의도를 아는 자들은 온 우주를 뒤집을 거예요. 시시한 놈들은 그냥 ‘아 신기한 옛날 종족이구나~ 영혼이 비싸서 메네메사가 비싸게 사들이지하는 정도 로만 알지만요.”
할리아가 여전히 들고 있던 커다란 새 한 마리를 꿀떡 삼키고는 말을 이었다.
“물론 하레사스가 5단계 트리엘프인 고 를 지금처럼 지배한 채 살려서 의지 앞에 데려가기 전까지만 그랬겠죠.”
침묵이 길어지자, 할리아가 슬쩍 물었 다.
“설마당신남편이?”
“아, 그게.”
“어쩐지 뭔가 느껴지… 이아? 이거 반 지? 이거 트리엘프 불이잖아!”
“...알아보는군요. 최대한 숨기려고 했 는데.”
“걱정 마요, 이런 얘기 하다가 보니까 안 거지, 당신의 엘더의 힘이 충분히 잘 숨기고 있어요. 그러면 그렇지. 당신 남 편이나 당신이 트리엘프였으면 어떻게 여길 오겠어요. 오자마자 고가 죽이러 올 텐데. 그나저나 이 정도 불이라니. 와, 정 말 이런 반지는 말도 안 되는 예물이네 요.”
진후가 그 불을 통째로 가져다가 써먹 고 있으니….
그리고 용이 왜 트리엘프가 자기 고향 에 가면 고통스러워할 거라고 한 건지도 이제 알 것 같았다.
5단계라.
그때 봤던 순혈 왕족 트리엘프는 그럼 몇 단계일까?
아직 사슴 생김새였으니, 훨씬 단계가 낮은 걸까?
“어쨌거나, 고독의 기사가 트리엘프군 요.”
“그래요. 하레사스는 고 외의 트리엘프 동족이 단 하나라도 남아 있으면 안 돼 요. 아직 고가 살아 있는 이유는 마지막 순간에 최정상에서 트리 엘프가 통제하던 ‘의지’를 부술수 있는게 그밖에 없으니 까… 그런 거고요.”
할리아가 물을 마셨다.
“지금은 그게 하레사스 손에 있는 거 고… 뭐, 솔직히 하레사스가 제일 강하니
까. 그래도 그도 올라갈 방도가 없어서 이리저리 탐색한 것도 벌써 3200만 년이 넘어가요.”
“니드호그도 멍청하죠. 천년만년도 아 니고 그렇게 오래 갉아대는데 아마 그 의 지라는 게 정말 터무니없이 강한 모양이 에요. 옛날에 화난 니드호그가 다른 길 찾겠다고 여기저기 부수고 다닐 때는 정 말 하루도 빠짐 없이 싸우러 다녔었어요.”
“많이 싸웠나요?”
“헤헤, 그게, 알잖아요. 땀 뻘뻘 흘리면 서 싸우고, 막 가슴 뛰도록 하루 종일 때
리고 쳐죽이고 그러다가 보면 갑자기 발 정 나서 막 덮치고 싶고… 그리고 전장에 어쩌다가 다 죽어버렸는데 쓸 만한 남자 랑 둘만 남아버리면 어쩌겠어요? 제가 들이대 버렸죠. 우리 둘밖에는 없었으니 까. 우리 둘만 그럴 자격이 있었으니까. 그리고… 그러고 보니까 그게 사랑이었 네.”
“...킥”
“에헤, 이제야 웃으시네. 그래. 좀 웃고 살아요. 당신도 똑같은 경험이 있나요?”
“완전히 똑같은데요. 우리 둘밖에 없죠. 우리 같은….”
“하기야, 그렇겠죠. 당신들도 아주 이상 하니까. 아무튼. 알이 생겨 버렸고, 금방 들켜버렸죠. 나는 아주 간절히 빌었어요. 정말, 정말로… 엄마한테, 나는 시녀, 그 러니까 공주급이니까, 알 하나쯤… 제 발… 남겨 달라고.”
그녀의 손이 떨렸다.
그녀는 다시 커다란 고기를 씹지 않고 삼켰다.
“세큰두르의 입을 벌리고 우리 알을 쑤 셔 넣었어요, 그다음 배를 때려 배 안에
서 알이 깨지게 했지요. 그리고 살려둔 채로 모든 살을 파내어 언데드가 된 채 저와 함께 여기 던져졌죠.”
갑작스러운 얘기에 하연이 멈칫했다.
그녀는 들고 있던 음식을 내려놓고 천 천히 말했다.
“굳이 다 얘기하지 않아도 돼요.”
“아니, 당신에게 말하고 싶어서 말하는 게 아니에요. 나 자신에게 하는 얘기지.”
“헤라오스는 미워도 엄마니까. 하지만 죽어야 하는 엄마예요. 죽어야 해. 내가 죽는 게 아니라, 엄마가 죽어야 해요. 내 알... 내 알….”
하연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할리 아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
“고마워요, 어쨌든 난 울 줄은 모르니 까. 이게 뱀의 고위 혈족이라 그런 건지 는 몰라도. 하지만 화가 난다는 게 뭔지 는 알아요. 그리고, 언제 그걸 보여줘야 하는지도….”
그리고는 음식으로 잔뜩 부푼 배를 만 졌다.
“...곧 훈련이 끝날 거예요. 그이의 정신 이 느껴지네요. 나도 준비가 끝났어요. 대폭발이 일어날 거예요. 당신은 어디 피 해 있을 거예요?”
“어디든 가 있어요. 휘말리지 말고. 내 게 가해진 저주를 재가공해서, 그냥 죽는 게 아니라 백치가 되어 사방의 모든 것을 공격하다가 죽는 저주의 힘이에요.”
“아직 고가 왜 벌을 받는 건지는 말해주 지 않았어요.”
“그거야 자꾸 자살하려고 하니까요.”
“네?”
“그는 죽고 싶어 해요. 정말로. 그래서 이런 잔치를 계속하라는 벌을 내린 거예 요. 말도 안 되는 얘기죠. 싸워 이기지 못 할 상대랑은 싸우지 말고, 하찮은 것들과 계속 싸우라고… 이런 벌을 내린 거죠.”
“하지만 누가 이 시합을 방해하면 고가 직접 나간다면서요?”
“우주에 바보들은 미어터지니까 당신네 엘더도 그렇게 오래 장사해 먹은 거 아니
겠어요?”
그녀는 정말 갑자기 크게 웃었다.
“정말, 진짜. 머저리들. 죽고 싶어서 달 려 나오는 고를 본 자들은 진짜 얼마나 어처구니 없었을까. 다 소문인 줄 알았겠 지. 그 트리엘프의 힘이라는 게 다 장난 인 줄 키키킥…. 우리 엄마도, 그렇게 되 겠죠. 나 때문에? 키키킥… 내알….”
하연은 침을 삼켰다.
“...나중에 마음이 풀리면 연락해요. 저 쪽도 비슷한 얘기를 했을지 모르곘네요.”
“...문이 열려요.”
뜨득.
한쪽 문이 갈라지면서, 그 안에서 진후 가 걸어 나왔다.
그리고는 바로 달려와서 하연을 안았 다.
“윽, 왜 이래!”
“우리방 가자.”
“뭐, 뭐야, 미쳤어…?”
“시합 시작하기 전에, 어서.”
이쪽은 신혼인 아내를 2년 만에 보는 거란 말이다.
할리아는 크게 웃었다.
“좋은 핑계네요, 다녀와요. 나도 그이랑 얘기 좀 하고, 주인석에서 준비해 둘 테
니까, 산책 좀 하는 척하면서… 좀 멀 리… 가 있어요. 경기장 북쪽 끝 정도는 가야 할걸? 히히.”
하연이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진후 가 그녀를 들어 올려 안았다.
“야! 내가 걸어갈게!”
“잘 빠져나가시오.”
“그래요, 당신 아내 잘 사랑해 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