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화 〉Chapter 1. 뉴빈데 무슨 문제라도? (4)
주변은 빠르게 어둑어둑해졌다. 근처에 웅덩이 하나를 발견하긴 했지만, 흐르지 않는 물이라 오염되었을 가능성이 있었다. 그래서 그건 일단 포기하기로 했다. 정말로 급하면 그거라도 마셔야겠지만, 하루이틀 물 안 마신다고 당장 죽는 건 아니니까.
날이 어둑해지니 산짐승들은 서서히 자취를 감췄다. 놈들도 곧 괴수들의 활동 시간이 다가오는 걸 아는 탓이었다. 강준은 하는 수 없이 썩은 나무 줄기를 뜯어 애벌레를 잔뜩 들고 복귀했다. 손바닥 위에서 꿈틀대는 벌레를 본 일행들이 모두 기겁했다. 그러나, 소모된 에너지를 보충해야 했으므로, 그거라도 섭취해야 했다. 그래도 불에 바짝 구우니까 나름 먹을 만하다는 평을 받았다. 번데기를 구우면 대충 이런 맛이 나겠지.
“무기는?”
“이 정도면 괜찮겠지?”
제법 두꺼운 나무막대기의 끝을 뾰족하게 깎아 만든 조잡한 창이었다. 괴수한테 이딴 나무창이 얼마나 먹히겠냐마는, 그래도 이거라도 쥐고 안 쥐고에 사람 심리가 참 극적으로 변했다.
바람이라도 피할 수 있는 적당한 은신처가 없는지 살폈으나, 아쉽게도 근처엔 그런 곳이 없었다. 일단 임시방편으로 만든 움막 안에서 쪼그리고 자야할 듯했다.
“불침번을 정하자. 시간을 확인할 방법이 없으니까, 서로 양심적으로 깨워야 해. 딱 3일이야. 3일 동안만 서로 좀 고생하자고.”
“강준이랑 요코가 오늘 제일 고생했으니까, 쟤들한테 먼저 선택권을 주자.”
“좋아.”
“나도 찬성.”
첫날이라 그런지 다들 아직 그 정도 양보할 여유는 있는 듯했다. 요코가 딱 잘됐다고 좋아했다. 강준은 첫 번째로 하겠다고 했다. 그렇게 제비 뽑기로 나머지 순서도 결정됐다.
여덟 명은 쪼그만 움막 두 개에 나뉘어서 들어갔다. 곧 드르렁 코고는 소리가 울렸다. 굶주린 데다가 피곤하기까지 하니 눕자마자 잠든 모양이었다.
일본녀도 꾸벅꾸벅 졸다가 깨길 반복했다. 그럴 때마다 강준에게 얼마나 지났냐고 물었다.
“조금 밖에 안 지났어.”
“…진짜 피곤해 죽을 것 같애.”
그러다가 곧 자신의 처지에 서러움이 폭발했는지, 훌쩍이며 울기 시작했다. 사실 에너지를 최대한 아껴야 하는 이곳에선 울음도 사치였다. 그는 그걸 주지시킬까, 하다가 그만뒀다. 어차피 자기 사정이었다.
“흑, 미안. 꼴불견이었지?”
“좀 많이.”
“에에, 진짜로 그렇게 생각한 거야?”
태생이 일본인이라 그런지, 제스쳐가 확실히 남달랐다. 그래서 놀리는 맛이 좀 각별했다.
“나도 얼른 마력 개화하고 싶어. 그럼 엄청 강해지겠지?”
“생긴다고 만능은 아냐. 그걸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천차만별이니까.”
“그래도 없는 것보단 낫잖아. …난 지금 짐덩이 같기만 하고.”
“잘 알고 있네, 짐덩이 맞아.”
“아앗, 오빠 미워 미웟.”
웬만하면 이런 쓸데없는 입놀림은 자제할 텐데, 사실 그도 조금 피곤해서 주둥이를 좀 나불댄 경향이 없지 않았다. 말이라도 하면 잠이 좀 달아나니까. 상대 반응이 재밌기도 하고.
‘조교, 그년도 자고 있나?’
강준은 조교가 올라간 나무 위를 정확하게 응시했다. 움직임이 없었다. 그렇다고 잔다고 확신할 순 없었다. 한참 전부터 저 상태였으니까. …설마 그때부터 자고 있던 건 아닐 테고.
그는 주기적으로 마나를 주변으로 퍼트렸다. 가끔 무언가 움직이는 게 느껴지긴 했으나, 땅바닥에 조그맣게 기어다니는 짐승들이었다. 괴수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운 좋게 넘어가려나?’
그러면 다행이긴 하겠지만, 하필 그런 운이 그들에게 일어날 리는 거의 없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맛있고 영양가 있는 먹이들이 한 곳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데, 어지간히 병신이 아닌 이상 괴수들이 그걸 놓칠 리는 없었다.
“그래두 다행이다. 여기 괴수가 나타난다고 했잖아? 오늘은 안 나타날 것 같애.”
“플래그라고 알아? 그런 말하면 무조건 나타나는 거.”
“좀 긍정적으로 생각하자구요, 이 상.”
강준은 대답 대신에 어깨만 으쓱했다. 이 세계가 긍정적이지 않은데 어떡하랴. 그리고 그의 긍정 회로는 하도 돌리는 바람에 이제 회생이 불가능할 정도로 홀라당 타 버렸다.
대화가 끊어지자, 그녀는 다시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참을 있다가, 강준은 다음 순서로 넘어가기로 했다. 그는 움막에 웅크린 채 죽은 듯이 자고 있는 두 남녀를 깨웠다.
“교대 시간이야.”
“…아이 썅, 진짜 금방 잔 것 같은데.”
“생각보다 엄청 지났어. 사정 좀 봐줬다.”
“알았다, 알았어.”
한참 단잠에 빠져 있던 둘은 죽을 것 같은 얼굴로 교대했다. 일본녀는 아무것도 깔지 않은 바닥이라도 누우니까 살 것 같다고 아구구 앓는 소리를 냈다. 신체 능력이 떨어진 강준도 사실 그녀와 비슷한 마음이었다. 사서삼경을 다 외어도, 누울 와 자가 최고라더니.
그녀는 곧 잠에 빠졌다. 강준도 눕자마자 금세 잘 줄 알았는데, 희한하게 누우니까 또 잠이 오지 않았다. …이상야릇한 기분 때문이었다. 무언가 아까보다 살기가 조금 더 짙어진 느낌이었다. 그의 날선 감각은 그 미묘한 변화도 알아챘다.
강준은 혹시나 싶어 마나를 다시 퍼트렸다. 그때, 그의 감각에 어떤 존재가 딱 걸렸다. 틀림없는 괴수였다. 숫자는 놈 하나였지만, 그 덩치가 꽤 상당했다. 물론 덩치와 강함이 무조건 비례하는 건 아니나, 괴수들은 대체로 그게 일치했다.
‘그래, 이래야 정상이지.’
강준은 가물가물하던 잠이 싹 달아났다. 그는 눈을 감은 채 감각을 계속 넓혔다. 놈은 그들에게 서서히 접근하고 있었다. 의외로 신중한 움직임이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무 위에 가만히 있던 조교의 움직임도 느껴졌다. 그녀 역시 괴수의 존재를 알아챈 듯했다. 그러나, 살짝 몸을 뒤튼 정도가 전부였다. 일단은 두고 볼 작정인 듯했다.
일본녀가 작게 코를 골기 시작하는 그때, 불침번들이 자는 일행들을 막 깨우기 시작했다. 멀리서 수상한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고.
“그냥, 산짐승 아냐?”
“아냐. 그런 소리랑 완전히 달랐어. 뭔가 좀 많이 이상해.”
그 소릴 들은 일행들은 잠이 싹 달아난 표정이 됐다. 다들 자리에서 일어나 나무창을 쥐었다.
확실히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그 흔한 산짐승하고 격이 달랐다. 무언가 훨씬 더 크고 무거운 놈이었다.
이미 놈의 정체를 확실히 알고 있는 강준은, 이쯤에서 일행들에게 확신을 주었다.
“괴수다.”
“진짜야?”
“확실해. 숨소리가 산짐승이랑 달라.”
이렇게까지 확신한다면 그들도 더 부정할 수 없었다. 다들 긴장된 표정으로 창을 쥔 채 주위를 주의 깊게 살폈다. 갑자기 어디서 왁 하고 튀어나올지 모르는 탓이었다.
“조교님 불러야 하는 거 아냐?”
“부른다고 오겠냐, 씨발. 그리고, 진작에 알았을 걸.”
그렇게 단언한 남자는 지구에서의 직업이 통계학 연구원이라던가. 그래서인지 조교의 성향을 정확히 꿰뚫어 보았다.
아무튼 팀원들은 자신들의 힘만으로 이 위기를 탈출하자고 단단히 마음먹었다. 그래도 아직 튜토리얼이니까, 열 명이서 힘을 합치면 괴수 하나쯤은 상대할 수 있을 거라는 자신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그들 역시 평범한 인간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았는가. …그러나, 그런 과신은 어둠 속에서 서서히 나타나는 놈의 실루엣을 보고 싹 사라졌다.
“이 씹…!”
다들 놈의 모습을 보자마자 숨이 턱 막혔다. 퓨마처럼 생긴 주제에, 덩치는 무슨, 불곰 서너 마리를 붙여 놓은 듯했다. 지옥에서 올라온 케르베로스의 세 개의 대가리 중 왼쪽 오른쪽 두 개를 자르면 딱 이럴 것 같다는 느낌이었다.
강준은 보자마자 놈의 정체를 알았다. 1던전에서 꽤 흔하게 볼 수 있는 놈이었다. 플레이어들 사이에선, 자이언트 퓨마라고 불렸다.
레벨은 대략 50 전후. 그보다 더 높은 녀석들도 종종 있지만, 대부분 그 언저리에서 놀았다. 능력치1당 레벨 1로 계산해서 비교해 보면, 지금 이딴 나부랭이들은 가볍게 가지고 놀 수준이었다.
그런 능력치 차이에서 느껴지는, 본능적인 두려움이 팀원들을 꿀꺽 삼켰다. 그래도 집단이라는 게, 쉽게 공포에 전염되기도 하고, 반대로 쉽게 공포에서 벗어나기도 했다. 놈은 하나고 우린 열이다, 그런 생각이 들자 굳었던 몸이 서서히 움직였다.
“다, 다같이 덤비면 이길 수 있어. 다들 정신 차려!”
용기 있는 청년이 그렇게 외쳤다. 다들 이를 악물면서 창을 쥔 손에 바짝 힘을 넣었다. 그러나, 괴수의 단 한 번의 도약에, 희망이 산산조각났다.
“아아…, 꺄아아!”
자이언트 퓨마가 일행 한 명을 주둥이로 콱 낚아채어 머리와 몸통을 그 자리에서 분리시켜 버렸다. 여자들이 패닉 상태에 빠지며 비명을 질렀다. 사실 남자들도 놀란건 마찬가지였다. 놈의 움직임이 빨라서, 다들 반응도 전혀 못했다.
강준은 조교가 아직도자리를 지키고 있는 걸 확인하고 슬쩍 채팅창을 열었다. 무언가 미션 같은 게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희망 때문이었다.
- 박으면 열 개. <떡치면열개줌>
- ㅋㅋ 수간물 나오나요. <귀욤띠>
- 이종교배 쌉가능. <나사실신임>
- 저거 수컷인데? <처녀킬러>
- 덜렁덜렁 ㅋㅋ 맛만 좋으면 된 거 아님? ㅋㅋ <맛만좋으면다됨>
역시 기대한 내가 병신이지. 강준은 이딴 거에 미션을 걸 만큼 자비로운 신이 없다는 걸 다시 확인하며 채팅창을 껐다. 역시 야설은 야설답게 놀아야 했다. 진짜로 박겠다고 하면 쿠폰 주겠다는 새끼들이 나올지도.
잠깐 한눈을 판 사이에, 놈에게 왁 죽은 사람이 한 명 더 생겼다. 그때 팀원 중 하나가 도망갔다. 그리고 그를 따라서 두 사람이 더 달아났다. 이제 그 자리엔 다섯만 멀쩡히 서 있었다.
놈은 두 사람으로 먹이가 충분하다고 여겼는지, 주변을 좀 빙빙 돌다가 그걸 꿀꺽 삼키고 미련도 없이 휙 사라졌다. 강준을 포함한 다섯은 한참 그 자리에 얼어붙은 채 서 있었다.
“가, 갔나…?”
자이언트 퓨마가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지고 나서도, 그들은 한참 앉지 못했다. 그리고 사위가 조용해지자, 넋을 잃고 주저앉았다. 여자들은 하도 놀라서 울 기운도 없는 듯했다.
“지, 진짜로 죽은 거야? 진짜 죽었어?”
일본녀는 사람 죽는 걸 목격한 게 이번이 처음이었는지, 양손을 달달 떨고 있었다. 강준을 뺀 모두가 그녀와 비슷한 처지였다. 조교는 끝까지 내려오지 않았다.
그들은 거의 뜬눈으로 밤을 지샜다. 주위가 제법 밝아졌을 때, 조교가 척 나타났다. 그녀는 인원이 반으로 뚝 줄어든 걸 보고도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그래, 이제 좀 실감이 돼? 여기가 어떤 곳인지.”
“사람이 죽었어요. 진짜 사람이 죽었다구요. 그런데 그런 소리가 나와요?!”
남자가 벌떡 일어나 반항하듯 소리를 질렀다. 조교는 그의 아랫배를 강하게 걷어찼다. 악. 그는 바닥을 뒹굴면서 쓰러졌다.
“내가 이런 걸 한두 번 본 줄 알아? 약하면 죽는다. 그게 이 세계의 법칙이야. 알겠냐, 이 머저리 새끼들아?”
다들 벌벌 떨면서 아무 말도 못했다. 그러나 예전과 달리 반항기 섞인 눈빛까지 숨기진 않았다. 죽음을 목격한 효과였다. 그 눈빛이 좀 마음에 들었는지, 조교는 픽 웃기만 하고 건들진 않았다. 그녀는 이런 식으로 독하게 키우는 모양이었다. 희생이 좀 필요한 방법이었지만, 효과는 분명 확실했다.
“일단 움직이자. 그래도 산 놈은 살아야지.”
강준은 널부러져 있는 넷을 향해 그렇게 말했다. 이제 인원도 적당히 줄었으니, 그가 대장 역할을 맡을 생각이었다. 그래도 나중에 팀 대항전에서 이기려면, 이보다 인원이 줄면 좀 곤란했다.
“우선 식수랑 식량을 구해야 돼.”
남자 팀원이 손을 슬그머니 들었다.
“물은 내가 구해볼게.”
강준이 고개를 끄덕인 뒤, 일본녀를 바라봤다.
“식량은, 요코, 니가 해. 경험이 있으니까.”
“…응, 일단 최선은 다해 볼게.”
“물이랑 식량은 한 명씩 더 붙어. 난 혹시 은신처로 삼을 곳이 있나 둘러 볼게. 좀 멀리 가 볼 거니까, 그때까지 조심들 하고.”
다들 이번 습격 이후에 은신처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강준의 말대로, 좀 멀리 나가는 한이 있더라도, 일단 찾아야 할 듯했다.
“오빠도 조심해야 돼. 아직 주변에 있을 수도 있잖아.”
이미 겁을 잔뜩 집어먹은 그들은 멀리 움직일 간담도 없었다.
“도망친 사람들은 안 올까?”
“안 오는 게 아니라 못 오는 거지. 여기서 길 잃으면 어떻게 될지 알잖아. 또 밤이었고.”
마나를 퍼트려 수색하다 보면 찾을 수도 있겠지만, 강준은 그런 쓸데없는 일에 힘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다섯이면 인원은 딱 적당한 편이었다. 다른 팀들도 둘셋 정돈 죽을 테니까, 차이도 그리 많이 나진 않을 터.
“꼭 표시 남기면서 움직여.”
그들은 나무창을 쥐고 각자 맡은 일을 하러 움직였다. 강준도 한 방향을 잡고 척척 앞으로 걸어갔다.
그는 곧 자신을 뒤따라오는 인기척을 느꼈다. 조교였다. 옳거니. 그는, 그녀가 자신이 의도한 대로 움직이는 걸 보고 삐뚜름하게 웃었다. 교관들과 조교들은 마력을 개화하는 것만 도와주었지, 마나를 이용하는 법에 대해선 전혀 가르쳐 준 바가 없었다. 틀림없이 이상하다고 여겼을 터.
강준은 꽤 멀리 갔다가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고 몸을 빙글 돌렸다. 그리고 정확히 그녀가 있는 곳을 향해 시선을 주었다.
“이제 나오시지요. 조교님.”
나무 위에서 조교가 뚝 떨어졌다. 그를 보는 눈길이 심상치 않았다.
“너, 이 새끼…, 너 정체가 뭐야? 정말 훈련생이 맞나?”
강준은 이가 보이게 웃었다.
“보면 모릅니까.”
“훈련생이,마나를 그렇게 다룰 수 있다고? …내 눈은 못 속인다, 이 새끼야. 바른대로 말해.”
강준이 웃음기를 싹 지우고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아니, 근데….”
그의 눈빛이 섬뜩하게 빛났다.
“왜 자꾸 아까부터, 말끝마다 새끼래, 이 씨발년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