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6화 〉Chapter 17. 지금 이 순간이 꿈이라면. (3)
장화영은 퉁퉁, 하고 문 두드리는 소리에 퍼뜩 깼다. 그리고 상체를 벌떡 세우고 사방을 한번 휘 훑었다. 주위가 캄캄했다.
괴로움에 발버둥치다가 그렇게 지쳐쓰러지듯 잠이 든 모양이었다. 머리가 띵했다.
- 누님, 누님.
동생이었다. 그녀는 폰을 켜 시간을확인했다. 오전 3시 21분. 깨우고 자시고 할 시간이 아니었다.
혹시 무슨 문제가 생긴 건가.
“…무슨 일이야?”
- 지부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이쪽 구역에 일이 터졌다고….
“일?”
- 괴수가 출몰했답니다. 근데 그 규모가 좀 크답니다. 출동하기 전에, 누님께 말씀은 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장화영은 손가락으로 뻐근한 눈을 꾹꾹 눌렀다.
- …누님?
“아, 그래….”
- 혹시나 해서 말씀드린 겁니다.
“그럼 나도 조금 있다가 출발하마.”
- 알겠습니다. 전 그럼 먼저 가 보겠습니다.
장철민이 빠르게 사라졌다. 장화영은 잠시 그대로 멍하게 앉아 있었다. 아니, 이럴 때가 아니지.
그녀는 찬물로 착착 세수를 했다. 느물느물 붙어 있던 잠이 확 달아났다. 세면대를 탁 잡은 채로 고개만 살짝 들어올려 물이 튄 거울을 바라봤다. 오똑한 콧대로 물방울이 또르르 흘러서뚝 떨어졌다.
물기 묻은 얼굴을 닦고 나온 그녀는 편안한 복장으로 갈아입었다. 풍성한 머리칼은 가운데 오목하게 머리끈으로 딱 묶고, 벽에 걸어둔 검집을 탁 쥐었다.
가자.
그녀는 저택에서 나와 넓은 주차장으로 척척 걸어갔다. 온 사방은 칠흑처럼 캄캄했다. 옅은 구름에 가려져 어둑한 달빛은 발 아래가 흙인지 돌인지 정도만딱 보여 주었다.
자신의 차로 척척 걸어가던 그녀의 발걸음이 점점 느려졌다. 누군가 차 문에 딱 기대고 팔짱을 낀 채 그녀를기다리고 있었다. …얼굴은 달빛을 등지고 있어서 보이지 않았지만, 그 실루엣만 봐도 누군지 알 것 같았다.
이강준.
안 그래도 싱숭생숭한 감정 때문에 기분 전환도 할 겸 혼자 가려고 했는데, 그만 처음부터 최종 보스를 만나고 만 꼴이었다.
“선배님.”
“강준아….”
“타세요. 제가 모실게요.”
강준은 조수석 문을 탁 열어 주었다. 장화영은 잠깐 머뭇거리다가 좌석에 탁 앉았다. 얼마 전 그녀가 한 대 뽑아준 그 세단이었다. 신차에서 나는 냄새가 아직도 느껴졌다.
탁.그는 조수석 문을 닫고 돌아가서 운전석에 올라탔다. 부웅. 고급 세단의 엔진이 부드럽게 울었다. 차는 곧바로 주차장을 스르륵 미끄러지듯 빠져나왔다.
“어딘지는 알아?”
“네, 지부에서 내용은 받았어요. 폰으로.”
“정확히 무슨 일인데?”
“근처에 괴수가 출몰했나 봐요.”
“규모는?”
“1급까진 아니고, 2급 정도로 추정하는 모양입니다.”
거기서 대화가 뚝 끊겼다. 장화영은 등받이에 푹 기댄 채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검은색을 뒤집어쓴 풍경이 쉭쉭 지나갔다.
장화영의 속내는 당연히 복잡했다. 강준은 여유롭게 운전하면서 그녀에게 무슨 음악 좋아하냐고 물었다.
“어?”
“좋아하시는 음악, 있어요? …뭐, 클래식이라든가, 재즈, 그런 거요.”
“난 음악 안 들어.”
“아, 그래요? …한 번씩 들으면 나쁘지 않은데.”
장화영은 다시 바깥을 봤다. 강준은 곁눈질로 슬쩍 그녀의 위아래를 훑고 씨익 웃었다.
천하의 장화영이가, 고민거리가 많은가 보네.
음악 얘기를 끝으로, 둘은 오랫동안 대화가 없었다. 차는 그 상태로 조용히 한참을 달렸다.
오전 4시 18분.
거의 목적지에 도착한 강준은 시간을 확인했다. 그리고 곁눈질로 조수석 쪽을 봤다. 장화영은 눈을 감고 있었다. 자고 있는지, 아니면 눈만 감고 있는지는 몰랐다.
세단은 공터 쪽으로 들어갔다. 거기에 차들이 옹기종기 주차되어 있었다. 바퀴에서 찌직찌직 흙모래 부서지는 소리에 장화영도 눈을 떴다. 그 상태로 살짝 졸았던 모양이었다.
“선배님, 도착했어요.”
“아, 그래. 수고했다.”
둘은 안전벨트를 풀고 차에서 내렸다. 그녀를 보자마자 대기하고 있던 여히어로가 다가와 꾸벅 인사했다. C급 칼리라고밝혔다.
“어, 그래. 현황은?”
“아직 보고가 온 게 없어서 잘 모르겠습니다. 지금 한창 싸우고 있는 것 같습니다, 선배님.”
“알았다.”
강준과 장화영은 검을 뽑아들고 길 없는 비탈진 경사지를 좌악 타고 내려갔다. 어디라고 알려주지 않았지만, 멀리서 날뛰는 기운이 느껴졌다. 도심 근처였다. 가끔 번쩍거리는 폭발도 있었다.
둘은 그리로 빠르게 움직였다. 경사지 아래부터는 전부 우거진 나무숲이었다. 거기에도 괴수들이 몇 마리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넌 저쪽으로 가라, 난 이쪽으로 가마.”
“네.”
둘은 중간에서 찢어졌다. 그리고 만나는 괴수마다 무참히 베어 넘겼다. 기껏해야 레벨 200 언저리 밖에 안 되는 조무래기들은 감히 둘의 상대가 되지 못 했다.
그렇게 둘이 합쳐 8마리 정도 처리하고 목표 지점으로 가니, 히어로 네댓 명 정도가 앉아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그들 주변에 죽어서 나자빠진괴수 사체가 몇 개 있었다.
히어로들은 장화영을 보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깊숙이 허리를 숙였다. 장철민이 먼저 제 누님을 반겼다.
“아, 누님 오셨네요.”
“선배님, 오셨습니까! 근데, 저희들끼리 알아서 할 수 있는데….”
“아냐. 나도 히어론데, 빠지면 안 되지.”
그때 강준도 땀 맺힌이마를 손등으로 슥 닦으면서 숲에서 막 나오고 있었다.
“이쪽은 다 정리했습니다.”
“그럼 여긴 끝났고…. 나머지는?”
장화영은 그렇게 말하자, 히어로들은 아직 서너 마리 정도 남은 것 같다고 말했다. 도심 쪽도 대충 정리가 됐다고 방금 전에 연락이 왔댔다.
잠깐 숨을 돌린 강준은 마나를 최대한 넓게 퍼뜨렸다.
하나, 둘, 셋…. 아직 셋 남았네.
정확히 3마리였다. 그것들 전부 따로따로 흩어져 있었다. 장화영도 대충 놈들의 위치를 파악한 눈치였다. 강준이 엄지로 어느 방향을 척 가리켰다.
“선배님. 제가 이쪽 2마리 맡겠습니다.”
“알았다.”
엉? 나머지 히어로들은 둘이 나눈 대화를 얼른이해하지 못했다. …설마 여기서 괴수들의 위치를 파악한 건가? 그들은 최대한 마나를 퍼뜨렸지만 놈들을 찾지 못했다. 그럼 저 둘은 도대체 얼마나 멀리까지 알 수 있는 거야.
남녀는 또 양쪽으로 찢어졌다. 다른 히어로들을 시켜도 되겠지만, 그들이 빨리 움직여 신속히 처리해 버리는 게 조금이라도 피해가 덜했다. 히어로의 사명이란 게 원래 그런 거 아닌가.
강준은 대략 10분 정도 걸려 맡은 2마리를 처리하고 이물질 묻은 검날을 헝겊으로 삭닦아냈다. 그리고 곧장 차를 세워둔 공터 쪽으로 움직였다. 일은 이제 다 끝났으니, 되도 않는 친목질이나 할 게 아니라면 굳이 다른 히어로들을 만나러 갈 필욘 없었다.
공터엔 아직 장화영이 보이지 않았다. 쪼그리고 앉아 혼자서 대기하던 C급 칼리가 벌떡 일어나 어떻게 됐냐고 물었다.
“다 끝났어요.”
“아, 그래?”
얼마 지나지 않아 장화영도곧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경사면을 두 걸음 탁탁 디뎌 공터에 우뚝 올라섰다. 칼리가 얼른 달려가 고개를 꾸벅꾸벅 숙이면서 수고하셨습니다 선배님, 하고 인사했다.
“그럼 먼저 가 보마. 수고해.”
“네, 조심히 들어가세요, 선배님!”
그리고 출발하기전, 강준은 장철민과 통화했다.
- 어, 그래 강준아.
“네, 다 처리했습니다.”
- 그래? 수고했다, 정말로.
“저랑 선배님은 공터에 도착했어요.”
- 벌써 거기야?
“네, 그럼 저희 먼저 돌아가 보겠습니다.”
- 아, 그래. 누님 피곤하시겠다. 얼른 모시고 들어가. …그래, 조금만 더 고생하고.
“고생은요 뭘. 그럼, 끊겠습니다.”
뚜우. 그는 통화를 끊고 몸을 돌렸다. 장화영은 벌써 조수석에 앉아 있었다.
강준은 운전석에 탁 올라탔다. 땀과 비누가 섞인 체취가 확 다가왔다. 그게 그를 굉장히 자극했다. 특히 한참 날뛰어 심장이 쿵쿵 뛰다가 천천히 식고 있는 이때…. 이젠 살육의 흥분이 가라앉고, 다른 종류의 흥분이 떠오르고 있었다.
부웅.
시동 버튼을 누르니 엔진이 울었다. 강준은 운전대를 잡았다. 그는 마른 입술을 핥았다.
“출발하겠습니다.”
“그래. …수고했어.”
“별로 한 것도 없는데요, 뭘.”
차는 뒤로 좀 후진하다가 빙글 반바퀴 돌았다. C급 칼리가 멀어지는 차의 뒤꽁무니를 향해 상체를 꾸벅 숙였다. 강준은 백미러로 그걸 잠깐 봤다가 다시 시선을 돌렸다.
검은 세단은 인적 없는 외딴 국도를 부웅 달렸다. 새카맣던 하늘은 바다색으로 서서히 잠기고 있었다. 속에 있는 꿈틀거림을 자극하는, 그런 새벽 분위기였다.
진한 여자의 냄새는, 자꾸 그의 사타구니를 찔렀다. 그의 물건은 결국 버티지 못하고 점점 부풀었다.
물론 그녀도 그녀대로 지금 굉장히 곤란한 상태였다.
진한 남자의 냄새가 여과없이 그녀의 콧속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땀에 섞인 그의 체취…. 그 날 밤에 맡았던, 바로 그의 냄새였다. 흥분이 안 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철민이 차를 타고갈 걸 그랬어….
타고 왔을 때처럼, 갈 때도 별 문제 없을 줄 알았다. 살짝 가라앉았던 감정이다시 부글부글 끓기 시작했다. 하필이면 장소도 그랬다. 바로 옆에서 그를 느낄 수 있는 밀폐된 공간이니….
그래서 그녀는 이번에도 아까처럼 계속 창밖만 바라보고 있었다. 코만으론 숨쉬기가 좀 버거워져서, 입을 살짝 벌리고 데워진 숨을 뱉었다. …그녀는 이 정적을 버티기 점점 힘들었다.
그래도 차는 자꾸 달렸다. 그리고 언젠가 저택에 도착하겠지. 그녀는 그때만 기다리고 있었다. …강준이 엉뚱한 데로 가는 줄도 모르고.
장화영은 점점 머리가 복잡해졌다. …그리고, 길게 이어지던 그 생각의 끈은, 점점, 수렁으로 향했다.
그녀는 아까 저질러선 안 될 사고를 떠올리고 말았다. 그래서 진정하려고 얼른 눈을 꾸욱 감았다가 떴다. 벨트를 맨 상태론 잘 움직일 수도 없어서, 엉덩이와 등 쪽엔 자꾸 땀이 찼다. 그녀는 한 번씩 몸을 움직여 열을 빼냈다. 그러나, 그때 잠시 뿐이었다.
“어디 불편하세요?”
“아냐. 땀이 차서.”
에어컨은 적정한 온도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속에 찬 열은 빠지지 않았다. 마치 열병을 앓는 것처럼. 차가운 곳만 계속 더 차가워졌다.
혜연이랑 강준이가 그걸….
또 그 생각이 났다. 한 번 물꼬를 틀어 길이 만들어져 버린 탓에, 생각의 방향은 자꾸 그쪽으로 흘러갔다.
그녀는 그때보다 더 떨었던 적은 없었다. 동시에 미칠 듯이 흥분됐다. 등허리에 찔찔 진땀이 흐르는 그 긴장감 속에서, 그녀는 흥분과 열로 앓았다. …벽에 귀를 댄 채, 처음으로 자신의 가슴과 사타구니를 손으로 만지고 비볐다.
그 애타는 신음과,
그 야릇한 살소리를 들으며.
애써 외면하려고 했던 것들이, 이제 하나씩 그녀를찾아왔다. 강준의 냄새는 그것의 촉발제가 됐다.
…아냐, 이건 아무도 몰라. 들키지만 않으면 돼.
뺑소니였다. 옆차와 살짝 긁혔지만, 다행히 들키지 않았다. 그녀는 그대로 모른 척하고 지나가기로 했다.
아무도 모른다면 크게 문제될 일은 아니었다. 그 정도로 차가 못 달리는 건 아니잖아.
아직도 도로는 정체 없이 계속 서행 중이었다. 전복 사고만 나지 않으면, 아무 문제도 일어나지 않으리라.
양심의 가책에 좀 시달리겠지만, 그래도 꿋꿋하게 운전대를 잡았다. 목적지를 향해서. 그리고 강준이를 위해서.
그냥 조금 엿들은 것 뿐이잖아. 들키지만 않으면, 둘에겐 아무 영향도 없어. 강준이가…, 강준이가 옳은 길만 가면돼. 나는 상관없어.
잠깐 현실로 돌아온 장화영은, 그제서야 달리는 도로가 좀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다. …이쪽 길이 아닌 것 같은데.
“강준아. …길을 잘못 든 것 같은데. 혹시 반대편으로 빠진 거 아니니?”
강준은 잠깐 폰을 보더니 옳게 왔다고 했다. 그때 마침 표지판을 지나쳤다. 역시 반대편 길이었다.
“여기 아냐. 강준아, 아까 나온 갈림길에서 반대편으로 갔어야….”
그러나 장화영은 뒷말을 더 잇지 못했다. 그의 옆얼굴을 보고 말아서….
입을 딱 다물고 정면을 바라보는 그 모습은, 무언가 평소와는 다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차 속도는 점점 느려지더니, 결국 멈췄다.
지독한 정적이 흘렀다.
“선배님.”
장화영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녀는 입을 살짝 벌린 채, 뱀을 본 개구리처럼 굳어 버렸다.
강준의 고개가 천천히 그녀 쪽으로 돌아갔다. 그의 강렬한 눈빛에, 그녀는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아까 왜…,”
설마….
“몰래 엿들었어요?”
…그녀가몰던 차는 거기서 그만,
전복 사고가 일어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