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2화 〉외전 1. 두 여자에겐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 잘 살아. 나 잊고.
- 왜 그래. 응? 갑자기 왜 불안한 소리를 해.
- 미안. 안녕.
강준은 벨리타를 꼬옥 안았다. 그리고 돌아서서 떠났다. 그녀는 울었다. 울면서 그의 뒤를 쫓아갔다. 그러나 발이 마치 진창에 빠진 것처럼 느렸다. 그녀는 결국 그를 잡지 못 했다.
“아, 안 돼애!”
악몽이었다. 벨리타는 상체를 슬그머니 일으켰다. 침대맡 탁상 위에 액자 하나가 있었다. 강준의 사진이 넣어져있는 액자였다.
그녀는 그걸 들고 한참 보다가 닭똥 같은 눈물을 뚜욱뚜욱 흘렸다.
“왜 떠난 거야. 왜애. 응! 나, 어떡하라구. 나 어떡하라구 두고떠났냐구우….”
그녀는 액자를 품에 안고 앞으로 고꾸라졌다. 그리고 한참 울었다.어제 울었는데도, 오늘 또 울었다. 눈물샘은 이상하리만큼 마르지 않았다.
다 울고 난 벨리타는 폰을 집어들었다. 배경화면도강준의 사진이었다. 그녀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쪽을 열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 잘 살아. 나 잊고. <쟈기♡>
2달 전에 온 이 쪽을 끝으로, 그녀는 강준과의 연락이 영영 끊겼다. 그는 바람처럼 사라졌다. S급 히어로, 장화영과 함께.
무성한 소문들이 있었다. 그가 플레이어라는 추측이 많았다. 그래서 쓸모 있는 장화영을 끌고 갔다는 말이 있었다. 벨리타는 혹시나 해서 장화영의 조카, 장혜연을 찾아갔다. 여러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게많아서.
- 아녜요. 고모님은 스스로 가셨어요.
장혜연은 그렇게 확답했다. 어떻게 확신하냐고 하니까, 고모님께선 스스로의 의지가 아니고선 차라리 목숨을 끊으실 분이라고 했다. 믿음이 대단했다.
벨리타도 장화영을 잘 알았다. 강준과 그녀의 사이는 각별했다. 아마 그래서 그를 따라간 게 틀림없다고 짐작했다. 그의 팀과 함께.
그럼 차라리 나도…, 나도 데리고 가지ㅡ.
그가 원망스러웠다. 그러나 이제 그런 마음은 싹 사라졌다. 그가 너무 보고 싶었다. 너무 보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잊으려고 노력해도 잊을 수 없었다. 그는 이미 그녀의 마음에 달군 인장을 지졌다. 절대 지워지지 않도록.
사공주 멤버들은 이별은 또 다른 사랑으로 지우는 거라면서 남자를 만나랬다. 그녀도 한 번 그래 보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그게 잘 안 됐다. 그녀는 강준에게서 벗어날 수 없었다.
- 벨리타 씨, 저오늘 출발하는데, 같이 가실래요? <이준영>
남자에게서 쪽이 왔다. 벨리타는 그걸 보고 잠깐 멈칫했다. 그녀는 쪽을 두드렸다.
- 혹시 동생이랑 가도 될까요? 걔도 많이 보고 싶어해서요.
- 아.
- 네! 그러세요 ^^
좀 머뭇거리던 티가 났다.
- 아, 괜히 부담드렸나?
- 아니에요 괜찮아요 ㅋ
- 그럼 준비 되면 연락 드릴게요. 출발은 언제 하세요?
- 언제든 출발해도 됩니다. 오늘까지 휴가라서요.
- 아 네. 그럼 나중에 봬요.
- 네 ^^
벨리타는 폰 시계를 확인했다. 오전 10시 22분이었다. 그녀는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요상한 벨소리가 울렸다.
이년이 진짜. 이딴 유치한 것 좀 하지 말라니깐ㅡ.
신호음은 오래갔다. 벨리타는 얼른 안 받는 상대를 잘근잘근 씹었다. 그러다가 달칵 연결됐다.
- 아, 언니이!
“야, 빨리 빨리 좀 받아라, 어?!”
- 나 지금 일하느라구…. 미안해요.
“…일해?”
- 네.
“잠깐 나 볼 수 있지?”
-어…, 네.
사실 벨리타는 약간 띨띨한 동생을 좀 이용해 먹을 생각이었다. 렉시는 그것도 모르고 여전히 해맑았다.
물론 그녀는 그 해맑음에 지울 수 없는 슬픔이 배어 있다는 걸 알았다. …강준이 사라진 걸 슬퍼하는 사람은 비단 벨리타뿐만이 아니었다. 렉시도 세상이 무너진 것처럼 슬퍼했다.
“일단 알았어. 어딘지 쪽으로 보내.”
- 네! 그럼 나중에 봐요, 언니.
“응.”
벨리타는 곧 씻고 외출 준비를 했다. 그리고 짐을 챙긴 다음 마지막으로 집을 슥 훑었다. 정이 든 곳이었다. …어쩐지 느낌이 묘했다.
그녀는 집을 나와 차에 올라탔다. 그리고 멋들어지게 꾸민 모습을보면서 외쳤다.
“야, 이강준! 타!”
그리고 활짝 웃었다. …그러나 웃음은 오래가지 못 했다.
나쁜놈. 씨발 새끼. 두고 봐. 내가 어디 가만히 있나ㅡ!
그녀는 부웅 차를 몰았다. 도로를 쌩쌩 달리니까 다른 차들이 빵빵 요란하게 경적을 울렸다. 그녀는 창을 내리고 우아하게 가운데 손가락을 척 내밀었다.
차는 렉시가 일하는 가게 근처에 섰다. 주말에 알바로 일하는 곳이랬다. 벨리타는 인도 가까이 차를 붙여 세우고 나왔다. 그리고 가게 안으로 들어가 서빙을 하고 있던 핑크 대가리를 불렀다.
“야, 렉시!”
“어, 언니!”
“잠깐 나와 봐. 아저씨, 잠깐 얘기 좀 할게요.”
“사장님, 저 잠시만요….”
늙은 사장이 좀 못마땅한 눈치였으나, 그래도 손님 앞에서 안 된다고 딱 자르기엔 좀 보기가 그랬다. 렉시는 사장에게 어색한 미소를 보내면서 앞치마를 한 채로 나왔다.
“언니, 갑자기 웬 일이에요?”
“잠깐 차에 타 봐.”
“…차요?”
“아 한 바퀴만 돌게.”
“아…, 네. 근데 저 오래 못 있어요. 바로 들어가 봐야 돼요.”
“아 알았으니까 빨리.”
렉시는 좀 주저하다가 에라 모르겠다, 하고 벨리타 차에 올라탔다. 그리고 편안한 시트에 앉자마자 아휴우 앓는 소리를 냈다.
“저 사장님 너무 부려먹어서 아주 죽겠다니까요.”
벨리타는 차를 부웅 몰았다. 렉시는 사진 한 장을 찍었다.
#휴식 #언니랑 #앞치마해도청순 #존예둘ㅋㅋ
“야.”
“네.”
“…너, 이강준 보고 싶지?”
또닥거리던 손가락이 뚝 멈췄다. 렉시의 얼굴에서 미소가 서서히 지워졌다.
“…아뇨.”
“거짓말 마. 맨날 울던 주제에.”
“아녜요. 이제 잊었어요.”
“어젯밤에도 울었잖아. 기지배가 진짜.”
앗.
“어, 어떻게 아셨어요? 혹시, 저, 저 스토킹….”
“죽을래? 내가 니 스토킹을 왜 해!”
“혹시 제가 강준이를 숨기고 있는지 의심해서…. 제가 좀, 매력적이니까….”
벨리타는 황당해서 웃음도 안 나왔다.
“뒤진다 진짜.”
“아, 농담이죠오. 헤헤…. 저도 강준이 어딨는지 몰라요. …사실 보고 싶어요. 많이.”
그때 렉시 폰이 울렸다. 앗. 그녀가 얼른 황송하게 받았다.
“아, 네. 사장님! 아, 네! 바로 들어갈게요. 저 지금 들어가요!”
그때 갑자기 벨리타가 렉시의 폰을 빼앗았다. 어, 어ㅡ?!
“야, 씨발, 더러워서 일 안 한다, 이 대머리 새꺄! 으이그, 머리털만 없는 게 아니라 측은지심도 없지? 에라, 엿이나 처먹어라 대머리 할배 새꺄!”
뚜우ㅡ.
렉시 얼굴이 순식간에 흙빛이 됐다.
“아무리 대머리라도, 그렇게 말하면, 저, 진짜 잘려요! 언니, 나 어떡해요! 아직 할부 많이 남았는데!”
“아 돈 줄게! 됐지!”
그러니까 놀란 얼굴이 좀 진정됐다. 돈의 힘이었다.
“그…, 얼마요?”
“아이 씨. 원하는 대로 다 줄게. 됐지?”
“저 이번 달에 할부 70만 원 있는데에….”
70만 원ㅡ?! 렉시의 사정을 아는 벨리타의 궁둥이가 벌떡 튀었다.
“야이 씨, 돈도 없는 년이 뭘 산 거야?!”
“백…. 너무 예뻐서요.”
“넌 진짜…. 아니다, 그만 말하자.”
그래, 어차피 다 부질없는 것을…. 벨리타는 갑자기 진리 깨달은 도인처럼 해탈했다.
렉시는 어디 가는 거냐고 물었다. 벨리타는 좀 멀리 간다고 했다.
“근데 저 가게에 짐 있는데요.”
“아 잔말 말고 그냥 따라와. 너 이강준 보고 싶다며!”
“설마…, 어딨는지 찾으셨어요?!”
“어, 찾았으니까 따라와. 알았지?”
핑크 대가리가 갑자기 울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벨리타도 갑자기 울컥했다.
“야, 우, 울지 마. 야이 년아, 울지 말, 라니, 끄으으허엉.”
그렇게 둘이 한참 추하게 울었다.
“너 때문에 나까지 울었잖아! 화장 다 어떻게 할 거야!”
“미안해요 언니. 근데, 갑자기 눈물이 나와서….”
“이제 울지 마. 알았어?!”
“네.”
“그놈 만나면 확 패는 거야, 알았지?”
팬다고?! 렉시의 눈이 동그래졌다.
“마, 만나면 키스하려구 했는데….”
“하, 키스으ㅡ?! 누구 맘대로 키스 시켜 준대!”
“저도 할 건 다했다구요ㅡ!”
그건 이미 알고있었다. 그래서 더 열불이 났다.
“아무튼 싫어. 나 안 시켜줄거야. 키스는 내가 할 거거든.”
“흥, 방금까진 팬다고 했으면서. …몰래 해야지.”
“야 너 방금 뭐라고 했어.”
“아뇨, 아무 말도 안 했는데요.”
이년이 진짜.
벨리타는 저 얄미운 렉시년을 한 번 흘겼다가 또 마음이 사르르 약해졌다. 그래, 이년도 맘 고생 많이 했는데. …키스 정돈 시켜 줄까.
“아무튼, 강준이 찾은 거예요?”
“…비슷해.”
렉시는 그 말을 찾았다는 뜻으로 해석했다. 그래서 얼굴에 확 미소가 피어올랐다.
“대단해요 언니! 진짜로! 진짜 제가 제일 존경하는 히어로예요! 정말루!”
“내가 좀 대단하긴 하지. 엄청 추리한 거 알아? 와, 진짜 내 생애 최고의 추적이었어.”
“진짜 대단해요!”
“암튼 넌 모른 척해야 돼. 알았지? 그냥 내가 하라는 대로만 해.”
“네!”
둘은 곧 이준영을 만났다. 그녀들은 벨리타의 차에서 내려 그의 차에 올라탔다.
“와 진짜 기,대,된,다.”
이 씨발, 그냥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할 걸 그랬나.
렉시의 연기가 너무 어색해서 어이가 없었다. 이준영은 다행히 눈치채지 못했다. 아주 둔감했다.
“준영 씨 덕분에 좋은 거 구경할 수 있네요.”
“아휴, 벨리타 씨도 히어로신데, 이 정도는 알아두시는 것도 좋죠.역사적인 현장이잖아요. S급들이 여섯이나 모인 전투였으니까요.”
연구원 이준영은 거기에 가 보면 깜짝 놀랄 거라면서 굉장히 들떠 있었다. 아무래도 자신의 일터를 보여주면서 뽐내면 벨리타의 마음이 많이 넘어올 거라는 계산 때문인 듯했다.
차는 그대로 52구역까지 달렸다. 렉시는 설마 이렇게까지 멀리 올 줄은 몰라서, 안절부절못했다.
“어차피 두 분 다 히어로시죠? 그럼 굳이 외부인 허가증은 필요 없겠네요.”
“네, 그냥 구경만 하는 거니까요.”
“제가 가까이서 볼 수 있도록 해 드릴게요.”
“어머, 그럴 수 있어요?”
“전에 말씀드렸다시피, 이래뵈도 전 저희 팀의 수석 연구원입니다. 그 정도는 문제없죠.”
이준영은 아주 자랑질을 마구 했다. 벨리타는 좀 과장되게 박수까지 치며 반응을 해 줬다. 렉시가 이 언니가 뭘 잘못 먹었나, 하고 요상한 눈빛으로 봤다.
그래도 수석 연구원이라는 위치 덕분인지, 그들은 차에서 내리지도 않고 검문소를 슝슝 통과했다. 벨리타는 침을 꼴깍 삼켰다. 안으로 깊이 들어갈수록 분위기가 예사롭지 않아서.
“예전에 사건이 한 번 터진 적이 있어서요. 그때부터 경비가 좀 삼엄해졌습니다.”
벨리타는 그가 언급한 사건이 뭔지 대번에 눈치챘다. 강준팀과 장화영이 함께 포탈로 들어가 버린 그걸 말하는 것이리라ㅡ. 그녀는 주먹을 꽈악 쥐었다.
누가 곱게 보낼 줄 알고? 꼭 데리고 올 거야. 무슨 수를 쓰더라도ㅡ!
그녀는 그런 포부를 다지며 멍청한 얼굴로 바깥 구경이나 하고 있는 렉시를 바라봤다.
사실 핑크 대가리를 데리고 가는 이유는 딴 게 아니었다. …아무래도 혼자 가는 건 좀 무서워서. 그래서 강준이라는 미끼 삼아 그녀를 동행으로 삼았다.
벨리타는 강준팀이 사라진 사건을 조사하면서 많은 걸 알게 됐다.
결전의 장소가 있었던 곳에 포탈이란 게 있다. 총 네 개가 있으며, 세 개는 열려 있고 한 개는 닫혀 있다. 강준팀은 첫 번째 포탈로 들어갔다. 포탈은 아마 다른 세상과 연결해 주는 통로일 것이다.
그리고 시험적으로 몇몇을 포탈로 보냈지만, 아무도 돌아오지 못 했다는 것까지 알았다. 실험은 거기서 종료됐다.
그래도 연구는 계속 진행 중이었다. 물론 큰 진척은 없지만, 저런 중요한 장소를 가만히 내버려둘 순 없으니까.
벨리타는 포탈에 대한 걸 알고 나서 의도적으로 수석 연구원인 이준영에게 접근했다. 그리고 무슨 일을 하는지 물어보면서 한번 구경해 보고 싶다고 살살 긁었다. 매력적인 그녀가 남자 하나 꼬드기는 건 일도 아니었다. 남자가 좀 숙맥이기도 했고.
와아ㅡ.
싱크홀 근처에서 내린 그들은 바닥에 뻥 뚫린 거대한 구멍을 보고 입을 쩍 벌렸다. 어마어마한 크기였다. 렉시는 저것 좀 보라고 방방 뛰었다.
“진짜 엄청나요.”
이준영은 여기서 일어난 일을 마치 겪었던 것처럼 읊었다. 사고가 터졌을 땐 근처에 오지도 않았으면서. 그게 영 얄미워 보였지만, 벨리타는 연신 감탄하면서 대단하다고 박수를 쳤다.
남자는 거기서 더 호기가 생겼다. 벨리타의 마음이 반쯤 넘어왔다고 생각하는 눈치였다. 이제 자기 일터를 보여주면 단박에 빡 넘어오겠지 했다.
“그럼 내려갈까요?”
세 남녀는 간이 엘리베이터로 갔다. 거기서 신분 검사가 있었다. 두 여자는 히어로증이 있어서 통과하는 게 그리 어렵진 않았다. 물론 방문 계획이 없었지만, 수석 연구원이 융통성을 좀 부렸다.
그들은 어느 구멍을 통과한 다음 이동카트를 탔다. 걸어가면 하루가 넘게 걸릴 게, 카트를 타고 가면 빠르게 2, 3시간 만에 도착할 수 있댔다.
미궁에선 무언가 퀴퀴한 냄새가 났다. 벨리타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고귀한 자신과는 좀 어울리지 않는 장소인 것 같아서.
렉시는 설마 미궁에서 카트를 타고 움직일 줄은 몰라서 신기해 하는 눈치였다. 그녀는 이곳 저곳을 구경하면서 와와 탄성을 터트렸다.
그들은 꽤 오래 달렸다. 그리고 곧 그의 일터 입구에 도착했다.
“여깁니다. 대단하죠?”
미궁에 어울리지 않게 거대한 문이 있었다. 그들은 내려서 또 신분 검사를했다. 이번에도 수석 연구원이 힘을 좀 썼다. 셋은 안으로 들어갔다. 진짜 대단했다.
“와아, 진짜, 이런 게 있네!”
“여기서 12명이 혈전을 벌였답니다. 거대한 괴수하구요.”
여기 저기에 무언가 전시되어 있었다. 한쪽 구석엔 연구원들이 생활하는 숙식 장소가 구비되어 있었다. 이준영은 거길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자신은 저기에서 생활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은근한 눈으로 벨리타를 바라봤다.
“하루 묵으셔도 됩니다.”
“아, 네.”
벨리타는 수줍은 척하며 웃었다. 둘의 분위기가 좀 이상야릇해졌다. 물론 바보 렉시는 그 분위기를 파악 못 하고 이 넓은 장소에 정신이 팔렸다.
벨리타는 이준영의 일터에 가보고 싶었지만, 너무 서두르지 않았다. 일단 그가 숙식한다는 천막으로 들어갔다.
남자는 두 여자에게 차를 대접했다. 그래도 안에는 있을 건 다 있었다. 그는 동료들한테 잠깐 인사만 하고 오겠다고 자리를 비웠다. 벨리타는 그가 사라지자마자 생각 없는 렉시의 멱살을 탁 쥐었다. 어머머.
“야, 지금부터 중요해. 알았지? 엄청 중요해. 내 말 잘 들어.”
“네, 언니!”
무언가엄청난 일을 한다고 생각했는지, 렉시의 얼굴이 꽤 비장해졌다. 벨리타는 자신의 계획을 자세히 읊었다. 바보 렉시는 알아들었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별로 대단할 건 없었다. 경비와 이준영을 속이고 포탈 안으로 확 들어간다는 내용이었다.
“근데 포탈이 뭐예요?”
“강준이 있는 곳.”
“거기로 가면 강준이 있어요?”
“…아마도.”
렉시는 그냥 앞마당에간다는 수준으로 생각했다. 별 대수롭지 않게.
“근데 나중에 저희 벌점 크게 받는 거 아녜요? 나, 또 받으면 다음에 진급하기 힘든데에….”
“아 내가 좀 도와줄게. 본부에 아는 사람 있어. 됐지?”
“…히히.”
…이년 멍청한 척하는 거 아닐까, 진짜?
아무튼 벨리타는 렉시와 은밀한 계획을 세웠다. 곧 이준영이 들어왔다. 그리고 지금 일터 구경해 보시겠냐고 물었다. 그녀는 당연히 좋다고 했다. 그러면서 핑크 대가리와 살짝 시선을 교환했다.
셋은천막에서 나와 다시 미궁 안을 걸었다. 거대한 제단 같은 곳 뒤로 돌아가니까 또 거대한 공간이 나왔다. 그리고, 거기에 파란 빛으로 번들거리는 포탈들이 보였다. 그건 마치 노이즈 낀 티비 화면 같았다. 크기도 거대했다.
“와….”
렉시는 그걸 보자마자 감탄했다. 물론 거기에도 경비가 있었다. 셋은 포탈 근처로 갔다.
“어때요? 대단하죠?”
이준영은 기대에 찬 눈으로 벨리타를 바라봤다. 그녀는 그의 기대에 부응했다.
“와, 진짜 대단해요! 이런 건 처음이에요! 와, 친구들한테 꼭 자랑하고 싶어요!”
“뭐, 전 자주 보는 거라, 이젠 좀 감흥이 덜하네요.”
뭐라는 거야, 이 새낀 또.
물론 벨리타는 자기 속마음을 감쪽같이 속였다. 그녀는 셀카 한 번 찍고 싶다고 했다. 이준영은 그러라고 했다.
찰칵ㅡ, 하고 사진을 찍었다. 그러나 벨리타는 좀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이준영이 왜 그러시냐고 물었다.
“좀 이상하게 나오네요. 가까이서 찍어야 되나.”
그리고 다시 찍었다. 그래도 얼굴은 펴지지 않았다. 그는 가슴이 좀 철렁했다.
“야, 렉시야. 가서 한 번 찍어 봐.”
“네!”
그리고 렉시는 폰을 가지고 가서 두 남녀를 화면에 담았다. 벨리타는 여기서 한 번 크게 밀어붙이자 싶었다. 그래서 그의 팔짱을 끼고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이준영은 진짜 좋아죽을 것 같았다. 미녀 히어로와 드디어 기념비적인 밤을 가질 수 있겠구나, 하고.
“어때요?”
“좀그렇네. 준영 씨, 우리 좀 더 가까이서 찍으면 안 돼요?”
“가까이서요?”
“네, 저기에서요.”
벨리타는 포탈을 가리켰다. 이준영은 좀 곤란한 표정이 됐다.
“어, 저긴 좀….”
“아, 그래요?”
그녀는 대단히 실망한 표정이 됐다. 그는 안절부절못했다. 그녀의 부탁이라고 해도, 저긴 좀 많이 곤란했다.
씨발, 어쩔 수 없다ㅡ.
벨리타는 최후의 수단을 쓰기로 했다.
“제가, 밤에, 마사지 해드릴게요. …네?”
그러면서 손으로은근히 그의 팔과 허리를 쓰다듬었다. 이렇게까지 유혹하는데 이준영은 물러설 수 없었다. 아니면 고자 새끼지.
“네, 잠깐만요.”
그래서 경비에게 사정사정했다. 수석 연구원의 명예까지 다 걸었다. 가능하다면 자기 좆까지 걸 기세였다.
그렇게 한참 실랑이 끝에, 이준영은 허락을 받았다. 거기서 벨리타는 살짝 걱정이 되긴 했지만, 이미 사랑에 눈이 먼 그녀는 뒤가 보이질 않았다.
처음엔 커플 사진을 찍었다. 어머머, 너무 잘 나왔다아ㅡ.
“저희들도 한 번 찍어주면 안 돼요?”
“물론이죠! 서 보세요.”
그렇게 이준영이 폰을 들었다. 두 여자는 포탈 앞에 섰다.
벨리타는 무척 떨렸다. 바로 뒤에, 이강준이 있는 곳이 있으니까.
어디로 통하는지는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미지에 대한 두려움이 그녀를 떨게 했다. …그러나 강준을 떠올리니까 또 열이 확 올랐다.
씨발놈. 무조건 찾아낼 거야ㅡ!
렉시는그것도 모르고 섹시한 포즈를 만들고 있었다. 아주 대단한 사진이 나올 거라면서.
“야, 셋 하면 뛰어.”
“…네?”
“셋 하면 뛰라고.”
“셋요?”
그때 이준영이 자 찍습니다, 하고 셋부터 외쳤다.
“셋.”
- 셋.
“둘.”
- 둘.
“하나.”
- 하나.
그리고 이준영은 이상한 사진을 찍었다.
…어ㅡ?
그는 화면에서 현실로 돌아왔다. 저기에 있어야 할 여자들이 안 보였다. 경비들은 난리가 났다.
- 포, 포탈로 들어갔다아ㅡ!
이준영은 폰을 툭 떨어뜨렸다.
켜져 있는 화면엔, 두 여자가 포탈로 몸을 던지는 게 찍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