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2화 〉Chapter 16. 저주 받은 땅. (3)
하아아음ㅡ.
원정대 여기저기서 연신 하품이 터졌다. 밤잠을 설친 탓이었다. 구울떼의 습격이 다 끝나고도, 그들은 쉽게 잠을 이루지 못 했다. 흥분한 몸뚱이가 그 첫 번째 이유였고, 불안한 마음이 두 번째 이유였다.
그래도 그 많은 구울들을 상대하면서, 사망자가 한 명도 나오지 않은 건 괄목할 만한 성과였다. 그리고 그 성과의 중심엔 강준팀이 있었다.
특히 용사 이강준의 활약은 눈부셨다. 겁도 없이 구울떼 안으로 뛰어들어간 그가 성검을 한 번 휘두를 때마다 눈부신 섬광과 함께 구울 십수 마리의 대가리가 터졌다. 그저 구경만 해야 하는 일꾼과 하인하녀들, 그리고 황태자는 여기저기 종횡무진하는 그의 활약상을 처음부터 끝까지 구경할 수 있었다.
모두가 강준을 대단하게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는 활약할 수 있었던 자신의 이유로 기사단장을 지목했다.
- 기사단이 든든하게 자리를 지키지 못 했더라면 제가 마음 놓고 싸우지 못 했을 겁니다. 그가 바로 숨은 공로자입니다.
영특한 황태자는 얼른 용사의 뜻을 눈치채고 기사단장도 치하했다. 그제서야 기사단장 베노프의 굳은 얼굴이 사르륵 풀렸다. 쓸데없이 자존심이 강해 좀 귀찮았으나, 그래도 단순해서 다행이었다. 딱 그 정도로만 챙겨준다면 불화가 생길 것 같진 않았다.
아무튼 용사 이강준과 그 팀의 위상은 하룻밤 새에 높게 치솟았다. 용병대는 생각보다 훨씬 더 강한 그들을 좀 더 조심스럽게 대했다.
용사를 향한 황태자의 믿음도전보다 훨씬 두터워졌다. 물론 그가 그걸 티가 날 정도로 표출하진 않았으나, 태도에서 그런 느낌을 은근하게 드러냈다.
기사단장 베노프도 이런 곳을 탐사하는 일에선 자신보다 용사가 더 나음을 인정했다. 어차피 기사단의 주 임무는 태자 전하의 신변을 안전하게 보호하는 거였다.
딴에는 인정할 건 인정할 줄 아는 배포 있는 사내다ㅡ, 라는 걸 황태자에게 어필하고 싶어한 것 같은데, 그게 남한테는 통해도 강준에겐 안 통했다. …물론 통한 척은 했다.
아무튼 용사만 믿으면 된다ㅡ, 하는 그런 분위기로 원정대의 발걸음은 처음보다 좀 더 가벼워졌다.
“그럼 매일 밤마다 구울을 상대해야 하는 거예요?”
“뭐, 운이 좋으면 하루쯤은 무사히 넘길 수도 있고.”
허ㅡ.
혜미는 혀를 내둘렀다. 출발할 때 강준의 경고를 듣고 지독한 곳이라고는 예상했으나, 생각보다 더했다. 매일 밤마다 이런 식으로 상대하면 체력이 남아나질 않을 것 같았다. 심지어 낮엔 또 강행군을 해야 하지 않나.
“아직 약과야. 중심부로 가면 더심해. …내가 괜히 사람들을 이렇게 많이 모은 게 아냐.”
혜미와 바바라는 진짜 큰일났다ㅡ, 하는 표정으로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예전에 들었던 강준의 경고가 더 날카롭게 다가왔다.
친절한 하나 씨는 해맑게 웃으면서, 그래도 설마 강준 씨가 자신들을 죽을 곳에 데려왔겠냐는 소리를 했다. …다들 그 소리에 더 섬뜩한 느낌을 받았다. 사실 그때 그 미궁 탐사들도 죽을 정돈 아니었다. 죽기 직전까지 굴려서 그렇지.
…설마 여기서도?
강준은 의미심장한 웃음만 보이고 아무 말도 안 했다. 그들은 그게 더 무서웠다. 친절한 하나 씨는 괜히 그런 얘길 했나, 하는 표정이 됐다.
그래도 낮엔 밤과는 달리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구울들이 낮엔 어슬렁거리며 다니지 않는다는 게 이곳에서의 유일한 위안거리였다.
아직 가야 할 길이 멀었으나, 원정대는 벌써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그나마 이런 일에 익숙한 강준팀과 용병대만 좀 나은 형편이었다. 황궁 생활에 익숙한 이들은 낯빛이 꽤 어두웠다. 이러다가 객사하는 게 아닌가ㅡ, 하는 걱정도 보였다. 그런 기운은 아랫것들에게 더 진하게 나타났다. 그러나 하기 싫어도 하라면 해야 하는 게 그들의 운명이었다. 설령 그게 사지로 향하는 일이라도.
아무튼 원정대는 저녁 때까지 걷고 또 걸었다. 노을이 지기 시작할 무렵, 그들은 어제 후궁파가 머문 듯한 흔적이 있는 장소에 도착했다.
그들 역시 어제 대규모 전투가 있었는지, 여기저기 시체를 태운 흔적이 보였다. 태운 건 적아를 가리지 않았다. 일부 희생된 아군도 싹 모아 태운 모양이었다. …그러지 않으면 어차피 다시 구울이 되어 버릴 테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으리라ㅡ.
시체 태운 곳에 야영을 하기는 좀 께름칙한 면이 있어서, 그들은 조금 더 움직였다. 그렇게 황태자파는 적당한 위치에 야영지를 정했다.
…그리고 그날 밤에도, 그들은 몰려드는 구울떼를 상대해야 했다. 그래도 한 번 상대해 본 전력이 있어서, 어제처럼 허둥지둥거리진 않았다.
그렇게 꼬박 일주일을 걸었다.
이제 문제는 식수였다. 물론 마지막 마을을 떠나기 전에 물을 넉넉히 챙겨오긴 했으나, 그것도 한계가 있었다. 인원 수가 워낙 많고, 또 거듭된 강행군 때문에 소모되는 물의 양이 예상보다 훨씬 더 많았다. 중간에 시냇물이 있긴 했지만, 저주 받은 땅에서 흐르는 물을 함부로 마시기는 또 그랬다. …그저 비가 오길 바라야 했다.
황태자도 강준과 베노프와 함께 밤마다 그 내용으로 고민을 했다. 그러나 다행히 그날 밤에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원정대는 통이란 통엔 전부 빗물을 받아뒀다. 짐꾼이 짊어져야 할 무게가 많아졌으나, 그래도 식수 고민은 대충 해결됐다.
그리고 다시 사흘을 더 걸으니, 드디어 죽은 자들의 도시, 에레보사가 시야에 잡히기 시작했다. 거리상으론 하루 정도 더 걸어야 할 듯했으나, 그래도 목적지가 보이고 안 보이고의 차이는 꽤 컸다.
그러나 다음 날에 부슬부슬 비가 와서 안개가 자욱했다. 풀 한 포기 없는 땅, 음산한 공기. 그런 환경의 안개 속을 걷고 있으니, 정말로 저승 세계에 온 듯한 기분이었다.
늘 깔끔하고 단정한 황태자도 죽음의 땅을 1주 넘게 헤매고 나니까 살짝 꾀죄죄해졌다. 아무래도 물이 부족한 이 상황에 씻는 것이 좀 힘든 탓이었다. 겨우 아침 저녁으로 세수 한 번 정도가 다였다. 그것도 황태자라서 가능한 거지, 다른 사람들은 얼굴에 물 한 방울도 못 묻혔다.
모두가 지저분한 꼴이었으나, 희한하게 요정 깔루아만은 평소와 거의 비슷한 모습을 유지했다. 신기하긴 했다. 이래서 요정 똥꼬에서 민트향이 난다는 건가 싶었다.
아무튼 지칠 대로 지친 이 원정대는 그래도 계속 나아갔다. 지치는 만큼 그들은 용사 이강준에게 점점 더 많은 것을 의지했다. 황태자 역시 그가 말하는 거라면 뭐든 수락했다. 그 역시 기댈 곳이 필요한 듯했다. 기사단장과 용병대장도비슷한 처지였다.
원정대 중에선 그나마 강준팀이 가장 쌩쌩했다. 좀 힘들긴 하지만, 그래도 아직은 버틸 만하다는 눈치였다.
“지금까지는 맛보기였어. 이제부터 진짜야. 도시 안으로 들어가면, 그때부턴 지옥이다.”
맛보기라고ㅡ?!
팀원들은 울상이 됐다. 설마 이게 맛보기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공포 영화도 강준의 이 말 한마디보다 무섭진 않으리라.
부팀장 쯔쉬가 팀원들을 보면서 격려했다. 그래도 자신들은 충분히 헤쳐나갈 힘이 있을 거라고. 그리고, 팀장님이 떡 버티고 계시는데 무슨 큰 문제가 생기겠냐고.
지옥이 될 조짐은 도시 근처에서부터 시작됐다.
이젠 구울만 나타나는 게 아니었다.살짝 열린 틈을 통해 이쪽 세계로 넘어온 마계의 존재들도 나타났다.
놈들의 몸에선 마기(魔氣)가 마치 연기처럼 풀풀 피어올랐다. 한 놈 한 놈이 전부 레벨 200은 거뜬히 넘겼다. 높은 녀석은 250도 됐다. 이곳에서의 진짜 적은 이런 놈들이었다. 구울떼가 맛보기란 소리는 과장이 아니었다.
성인 남자의 두 배는 될 법한 키에, 소의 머리, 아인의 몸통, 염소의 다리, 사자의 꼬리를 한 마수는 뾰족한 괴성을 내지르면서 덤볐다. 이 섬뜩한 괴성소리를 듣자마자 그 자리에서 지리는 하인하녀들이 적지 않았다. 마치 사나운 포식자 앞에 놓인 피식자처럼.
신궁 깔루아는 겁먹지 않고 매서운 눈으로 놈의 대가리를 향해 화살을 피잉 날렸다. 그러나 놈은 고개만 샥 틀어서 그걸 가뿐히 피했다.
그때 용사 이강준이 나섰다.
놈의 앞에 나타난 그는, 빛살처럼 검을 휘둘렀다.
ㅡㅡㅡ!!!
마수는 사타구니부터 대가리까지 단숨에 이등분이 되어 갈라졌다. 몸속의 내용물을 왈칵 쏟아내면서 죽은 놈을 보며, 그들은 용사의 강함을 다시 한 번 더 느꼈다. 이제 그에 대한 믿음은 광적일 정도로 굳건해졌다.
당연히 마수는 놈 한 마리만 있는 게 아니었다. 모습도 각양각색이고, 레벨도 천지차이였다. 물론 어느 존재도 하나같이 만만히 볼 것들이 없었다. 그런 놈들은 강준팀이나서서 처리했다. 몰려드는 조무래기들은 기사단이나 용병대에서 처리했고.
원정대는 갈수록정신적으로나 신체적으로 지쳐갔다. 그러나 목적지를 코앞에 두고 돌아갈 수는 없었다.
황태자는 도시에 도착하기 전날 밤, 강준을 불렀다. 처음에 비해 굉장히 초췌해 보이는 그는, 믿고 의지할 데가 필요해 보였다.
“저만 믿으십시오, 태자 전하.”
“그래, 난자네만 믿어.”
태자는 진심으로 강준을 의지하는 모양새였다. 그는 정의롭고 강하며, 그리고 통솔력까지 있었다. 분명 아주 훌륭한 인재였다. 황태자도 그와 두터운 관계를 맺어두면 자신에게 아주 큰 도움이 될 거라 보는 듯했다.
꿍꿍이가 있는 강준 역시 황태자를 살갑게 대했다. 어떨 때는 깍듯하게, 또 어떨 때는 사근사근하게. …그의 환심을 사 두어야, 나중에 의심없이 잘 써먹을 수 있을 테니까.
서로가 서로를 이용해 먹는 거긴 하지만, 원래이 바닥이 다 그런 법 아니겠나. 순수한 호의라는 걸 병신처럼 믿다가 뒤통수 맞는 게 호구 새끼지ㅡ.
아무튼.
그렇게, 지옥문 앞에서의 마지막 혼란스러운 밤을 보내고, 그들은 새벽 일찍 죽은 자들의 도시, 에레보사를 향해 움직였다.
황태자파는 도시의 서문으로 향했다.
멀리서 본 도시와 가까이서 본 도시는 많이 달랐다. 거의 다 허물어진 성벽과 뜯겨져 나간 성문은 그들에게 더 무서운 상상을 불러일으켰다. 차라리 새파란 풀 한 포기라도 있었으면 보는 재미라도 있겠는데, 이건 그런 것도 전혀 없었다. 딱 공포스러운 그림을 보는 기분이었다.
원정대는 성문 앞에서 잠깐 휴식을 취하고, 천천히 도시 안으로 들어갔다. 다들 발걸음이 무거워 보였다. 안 그래도 하늘에 구름까지 거멓게 껴서 분위기는 더욱 음산했다.
도시 안은 처참했다. 멀쩡한 건물이 정말 단 하나도 없었다. 모든 게 무너지고 삭았다. 이상한 냄새도 나는 듯했다. 정말 끔찍했다.
간덩이 작은 하인하녀들은 벌써부터 두려운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면서 덜덜 떨었다. 용병놈은 바닥에 걸쭉한 침을 퉤 뱉으면서 상스런 소리를 했다.
“씨발, 꿈에 존나 나오겠네.”
악몽이 현실화된다면 딱이런 느낌이지 않을까, 하는 분위기였다. 당장 어딘가에서 유령이 튀어나와도 이상할 것 같지 않았다. 아주 오랫동안 사람의 발길이 닿은 적이 없는 이곳은, 이렇게 변해 있었다.
원정대는 도시에 들어오기 전에 미리 목적지를 정해둔 상태였다. 그들은 도시의 내성을 향해 움직였다. 문제는 중간중간에 건물이 허물어지면서 길이 막히는 바람에 그걸 넘어가야 하는 수고가 필요했다. 체력 약한 황태자는 겨우 돌덩이 몇 개 넘는 것도 하인들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곧 심약한 몇몇이 이상한 걸 봤다고 소란을 피우기 시작했다. 그들은 환각과 환청에 시달렸다. 그건 갈수록 더 심해졌다. 일부는 발작까지 일으켰다.
“여기 되게 기분 나쁜 곳이네. 내가 갔던 곳들 중에서도 최악이야.”
신궁 깔루아는 대륙 곳곳을 떠돌아다녀도 이만큼 사악한 기운이 넘실거리는 곳은 못 봤다고 했다. 그럴 수밖에. 불완전하다고는 해도, 마계와 연결된 곳이니까.
무너진 잔해를 몇 번씩 넘어가면서 그들은 쉬고 걷고를 반복했다. 인원이 적은 게 아니라서 넘는 데 걸리는 시간도 만만찮게 소모됐다. 그러다 보니까, 사방은 더 어두컴컴하게 변했다.
또 빗방울이 하나둘씩 뚜욱뚜욱 떨어지며 바닥에 짙은 점을 그리기 시작했다. 원정대는 기다렸다는 듯이 얼른 통들을 꺼내 바닥에 깔았다. 그리고 쏴아ㅡ, 하고 장대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들은 건물에 들어가지 않고 천막을 쳤다. 충격을 받으면 건물이 폭삭 내려앉을 수도 있어서 위험했다.
얄궂은 용병놈들은 이때다 싶어 옷을 홀딱 벗고 빗물에 몸을 씻기 시작했다. 여용병도 예외는 아니었다. 겨우 알몸이 보인다고 부끄러워 하는 그런 성격으론 이 바닥에서 살아남을 수 없었다.
강준팀도 빗물로 간만에 머리와 손발을 씻었다. 그래도 용병놈들처럼 홀딱 벗은 채 빗속에서 춤을 추진 못 했다.
비는 그렇게 오래 쏟아지진 않았다. 그래도 물통에 가득찰 만큼은 내렸다. 덕분에 다들 위장이 가득 찰 만큼 물을 실컷 마셨다.
그들은 내성문이 딱 보이는 곳에서 행군을 멈췄다. 어쩔 수 없이 도시 안에서 하룻밤을 보내야 할 듯했다.
“어떻겠나?”
간만에 머리에 물 좀 묻힌 황태자가 좀 깔끔해진 얼굴로 그렇게 물었다. 물론 초췌한 표정은 여전했다.
강준은 잠깐 도시와 하늘을 한 번 봤다가 다시 황태자의 눈을 응시했다.
“각오가 필요할 겁니다.”
“…무슨 각오?”
용사 이강준이 씩 웃었다.
“죽기 살기로 싸울각오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