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4화 〉Chapter 16. 저주 받은 땅. (5)
강준은 불안 속에서 눈을 떴다. 밤새 자다 깨다를 반복한 탓에, 여전히 눈가에 피로가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그는 아직 어두침침한 바깥을 한 번 보고 한숨을 푹 쉬었다.
분신체가 움직이지 않을 거라고 믿으며 눕긴 했으나,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을 옆에 두고 잔 느낌이었다. 신궁 깔루아도 예민한 감각에 잠을 설쳤는지 자주 뒤척이는 걸 느꼈다.
아무튼, 다행히 밤은 무사히 보낸 모양이었다. 구울떼도 마수들도, 억지로 내성벽을 넘어 안까지 접근하진 않았다.
그는 양옆의 여자들이 깨지 않도록 조심스레 일어나 천막 밖으로 나갔다. 서늘한 공기가 그의 얼굴을 때렸다. 불침번을 서고 있던 사람들이 용사를 보며 얼른 일어났다. 그는 불침번들에게 수고한다고 손을 슬쩍 들어 보였다.
여기저기서 들리는 코골이를 빼면 도시는 신기할 만큼 고요했다. 후궁파는 버티다 못 해서 도시를 빠져나갔을 거라 예상했다. 그건 자리를 지키고 버틸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구울떼만 있는 게 아니라 마수들까지 있으니, 죽은 놈들도 적지 않을 테지.
강준은 잠시 야영지 주변을 휘 훑어보면서 내성 안을 살폈다. 여기도 바깥과 크게 다를 건 없었다. 아무래도 내성은 거진 잘난 놈들이 사는 곳이었을 텐데, 다 삭고 허물어지니까 바깥이랑 딱히 구분은 안 됐다.
그렇게 바깥을 한 바퀴 빙 돌고 돌아오니까 하늘은 짙은 청색으로 변해 있었다. 서서히 해가 떴다.
원정대는 기상했다. 얼굴에 피로가 덕지덕지 묻은 하인하녀들은 식사 준비를 한다고 바빴다. 일꾼들은 미리 간단히 식사를 한 후에 기사단과 태자 전하께서 준비를 마치고 나오시길 기다렸다. 그들이 식사를 하는 새에 짐을 챙기고 천막을 해체해 출발 준비를 끝마쳐야 하니까.
강준팀, 용병대, 기사단, 그리고 맨 마지막에 황태자가 창백한 낯빛으로 나왔다. 제국의 태자라기엔 너무나 초라한 꼴이었다. 그러나 아무도 그걸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그러기엔 자기 처한 상황이 너무나 위태로웠기에.
이제 식량도 그리 넉넉하지 않았다. 최대한 아껴먹긴 하지만, 길어 봐야 2주였다. 이런 극한의 상황을 겪어보지 못 한 귀족가 출신의 기사단원들은 다들 죽상이었다. 퀴퀴한 냄새가 나는 말린 고기 같은 것도 이제 거부할 수 없었다. 그나마 상태 좋은 건 모두 황태자의 차지였다.
“여기에 왜 와 가지곤.”
“다른 기사단에 지원하는 게 나았어. …힘들어 죽겠네.”
출세 하나만을 위해 기사가 되었던 이들은 충성심이 그리 깊은 편은 아니었다. 당연히 극한의 상황에 부딪히기 시작하니까, 슬슬 속에서 들끓던 불만이 터져나올 수밖에. 대놓고 말하면 불경죄였으므로, 당연히 그러진 않았다. 그러나 눈빛과 태도에서 은연 중에 표출되는 것까진 막기 힘들었다.
황태자는 자신을 바라보는 눈초리에 점점 불만이 쌓인다는 걸 못 느낄 리가 없었다. 그건 꽤 괴로운 일이었다. 황제 폐하께 간언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이런 꼴이 된 거니까. 물론 그게 잘못이라면 잘못이라고 할 수도있지만, 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나랏일은 뒷전이고 술과 여자에게만 매달리는 황제는 당연히 영특한 태자의 성에 차지 않았다. 늙은 황제의 사치 때문에 이젠 국고까지 바닥 나기 직전인 상태였다. 그런 상황에 진위를 모르는 소문 하나에 몸이 달아서 그걸 가지고 오라고 명령하는 게 정녕 정상인 것인가ㅡ! 자기 기분에 따라 황태자를 이 위험한 곳에 가라고 명령하는 것부터가 사실 터무니없는 짓이었다. …거대한 제국이 소문 하나와 후궁들의 몇 마디에 놀아난 꼴이었다.
“괜찮으십니까.”
용사는 복잡한 표정의 황태자에게 다가와 그렇게 조심스레 물었다. 그는 이 이방인 용사에게 이상할 정도로 마음이 끌렸다.
그는 희한하리만큼 황태자에게 담백한 태도를 보였다. 앞으로 제국의 황제가 될 사람한테. 황태자는 자신이 겪었던 사람들 중에서 강준이 가장 독특했다. …동시에 그는 믿음직스러운 요소를 전부 지녔다.
솔직하고 정의로우며, 강하고 통솔력이 대단했다.
황태자는 자신에게 이런 신하가 한 명만 있었으면ㅡ, 하고 진심으로 바랐다. 정말 탐이 났다. 부하가 아니라도 좋았다. 조언자의 위치라도, 강준은 훌륭하게 수행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썩…, 괜찮진 않아.”
황태자의 입에서 나온 말은 늘 격식대로 하는 대답이 아니었다. 그는 속내를 털어놓고 자기가 왜 이런 말을 했지, 싶었다.
강준은 씩 웃으면서 어떤 점이 괜찮지 않은지 물어봤다. 살짝 머뭇거리던 황태자는 그에게 속상한 점을 줄줄 털어놨다.
“내 통솔력이 부족한 모양이야. …불만도 전보다 훨씬 많이 느껴지고. 나도 몸이 힘들어지니까 도량도 좁아지고. 원래라면 너그럽게 넘겼을 텐데.”
강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황태자의 말을 귀담아들었다. 이상하게 솔직하게 털어놓으니까 마음이 굉장히 편해졌다.
“이런 말씀드리기 민망하오나, 불경을 무릅쓰고 한마디 하겠습니다.”
“괜찮아. 해 보게.”
강준은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태자 전하께선 언젠가 가장 높은 위치에 오르실 분입니다. 그리고 주위엔 권력만 호시탐탐 노리는 승냥이 같은 자들이 즐비하겠지요. 물론 진심으로 나라를 위해 헌신하는 자들이 있을 테지만, 그들은 매우 소수입니다.”
황태자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제가 보기에 태자 전하는 매우 현명하신 분입니다. 전하께서 옳은 거라 믿으시는 길을 밀고 나가십시오. 물론 모든 게 생각처럼 잘되진 않을 겁니다. 그러나 그런 사소한 문제는 아랫것들이 알아서 해결하도록 내버려두십시오. 전하께선 큰 것만을 바라보고 가시면 됩니다. 그게 바로…, 대륙의 황제가 할 일입니다.”
…아….
“아뢰던 중에 좀 불편하게 들리신 부분이 있다면 너그러이 용서해 주십시오.”
황태자는 고개를 설렁설렁 흔들었다.
“아냐. 그런 건 없었어. …고맙네. 고마워.”
강준은 생긋 웃으며 고개를 살짝 수그렸다. 그리고 출발 준비를 해야겠다고 말했다.
“그래, 얼른 가 보게.”
“제가 도울 일이 있으면, 불러 주십시오. 곧장 달려오겠습니다.”
“…그래.”
황태자의 얼굴이 흐뭇하게 퍼졌다.
대충 씨부린 말이 그래도 잘 먹혀든 모양이었다. …상대도 지금 굉장히 마음이 심란할 테니, 이런 솔직한 대답이 의외로 효과가 좋을 거라 생각했던 게 적중했다.
강준은 자신은 끝까지 태자 전하의 편이라는 걸 은연 중에 어필하면서도, 아부하듯 비굴한 모습은 만들지 않았다. 어차피 주변에 굽신거리는 놈들이 널리고 널렸을 텐데, 오히려 당당한 그가 더 신선하게 보일 테니. 더 진정성이 느껴지고.
그걸 본 기사단장이 살짝 위기감 같은 걸 느꼈는지 얼른 황태자에게 다가가 아부하듯 굽신거렸다. 물론 강준은 그러든가 말든가 신경쓰지 않았다.
하늘에 은빛 여명이 비칠 때, 원정대는 다시 출발했다. 그들은 내성 한가운데에 우뚝 서 있는 저 궁성을 향해 척척 접근했다.
햇빛에 반사되는 그것은 이상하게 음침해 보였다. 날이 밝아도 음산한 기운은 사라지지 않았다.
심약한 자들은 여전히 환각과 환청에 시달렸다. 가끔 발작을 일으키며 비명도 질렀다. 그런 건 힐도 소용이 없었다. 그저 진정할 때까지 수레에 짐과 함께 실려갔다.
신궁 깔루아는 평소와 달리 상당히 긴장한 표정으로 연신 침을 꼴깍꼴깍 삼키다가 결국 참을 수 없었는지 앞서 걷던 강준의 팔을 탁 낚아챘다.
“팀장…. 여긴, 아닌 것 같아 진짜로. 진짜 이상해. …진짜, 가면 안 될 것 같애.”
깔루아는 그녀답지 않게 굉장히 약한 소리를 했다. 그걸 들은 팀원들이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괜찮아. 날 믿어. 나도 알아. 뭔가 심상찮은 게 있는 건.”
“이건 아닌 것 같다니깐. 물론 나도 당신을 믿는데…, 이건, 이건 좀 심해.”
요정은 웁ㅡ, 하고 헛구역질을 했다. 인간들보다 몇 배는 더 예민한 그녀의 몸이 거부반응을 일으키는 모양이었다.
…하긴, 분신체라고는 해도, 세계관 최강의 존재의 분신인데, 당연히 본능적으로 두려움이 일어날 수밖에.
“날 믿어.”
“그래도….”
“깔루아….”
강준은 굉장히 진지한 표정으로 요정을 바라봤다. 그녀는 그의 말에서 잔말 말고 따라오라는 기운을 느꼈다. 이 이상 못 가겠다고 뻗대는 건 그의 권위를 향한 도전이었다.
신궁 깔루아는 수그렸다. 어마어마한 기운이 그녀를 압박해서.
그래, 이 남자가 있잖아. …믿자. 이 남자를 믿자.
요정은 용사를 믿었다. 사실 믿는 수밖에 없긴 했다.
그쯤 되자 장화영도 심상찮은 걸 점점 느끼기 시작했다. 어쩐지 저 궁성으로 가면 안 될 것 같다는 직감이었다. 그쪽에서 어마어마한 기운이 느껴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미 강준은 요정의 청도 거절하고 가겠다고 선언한 상태였다. 그녀가 나서서 무어라 지껄이는 건, 그의 권위만 흠집내는 행위였다. 그렇다고 그가 그녀에게 큰소리를 내거나 비난할 수도 없지 않나.
장화영과 깔루아가 슬쩍 시선을 교환했다. 그리고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각오하자는 눈빛이었다.
궁성에 거진 도착할 때쯤엔, 여러 사람에 짐수레에 실린 상태였다. 둔감한 황태자조차, 궁성에서 심상찮은 기운이 있다는 걸 느끼는 듯했다.
“용사…, 정말 괜찮겠나?”
“여기까지 왔는데, 돌아갈 순 없지 않습니까.”
“하지만….”
솔직히 황태자는 겁을 먹었다. 들어가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었다. 온몸이 거부하고 있었다.
“용의 비늘이 없다는 걸 확인해야지요. 안 그렇습니까?”
황태자는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돌아간다면 틀림없이 원정대에 속한 누군가가 황제에게 아무 소득 없이 그냥 돌아갔다고 전부 고자질할 게 분명했다. 지금 사리분별이 불명확한 황제가 그 소릴 듣는다면 태자를 진짜 폐위시킬지도 모를 일이었다.
궁성 앞에서 짧은 휴식을 취한 원정대는 천천히 안으로 들어갔다. 다들 마른 입안에 물을 넣고 혀를 적셨다. 무시무시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마지막 성벽을 통과한 원정대는 주변과 완전히 단절된 듯한 공간에 들어갔다. 이젠 바람 부는 소리까지 사라졌다. 원정대가 만들어내는 소리만 들렸다.
그들은 곧 궁성으로 들어갔다. 양쪽 문짝이 날아가 버린 그 거대한 입구를 통과해 음침한 그곳에 발을 디뎠다.
아아악ㅡㅡ!!
누군가 발작을 일으켰다. 이 씨발ㅡ! 깜짝 놀란 용병놈이 펄쩍 뛰면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발작하던 하녀는 켁켁거리며 숨이 쉬어지지 않는 목구멍을 손톱으로 벅벅 긁기 시작했다. 놀란 동료들이 얼른 그녀를 진정시키려고 했으나, 발작을 일으킨 여자는 결국 혀를 축 빼물고 죽어 버렸다.
“아, 아아ㅡ.”
사람이 죽은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리고 또 다시 누군가가 발작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이번엔 젊은 하인이었다. 놈은 뭍에 나온 고기처럼 몸을 튕기더니 급기야 팔다리를 꺾기 시작했다. 관절이 뒤틀릴 정도로.
ㅡㅡ!!
다들 놀라서 그의 주변에서 멀어졌다. 거품을 부글부글 물던 그도 결국 목숨을 잃었다. 다들 놀란 눈으로 숨만 헐떡였다. 하인하녀들은 무서워서 엉엉 울었다.
“조용히 안 해?!”
기사단장이 우는 자들을 향해 꽥 소리쳤다. 그들은 손으로 주둥이를 콱 틀어막고 숨죽여 흐느꼈다.
그때 갑자기 황태자가 풀썩 쓰러졌다.
“전하아ㅡㅡ!!”
기사단장이 기겁하며 그에게 달려갔다. 태자는 손으로 가슴을 쥐어뜯으며 거친 숨을 헐떡였다.
“하억, 하억ㅡ.”
“뭐, 뭣들 해! 뭣들 하고 있느냐! 무슨, 무슨 방도를 찾아! 어서어!”
그러나 다들 벌벌 떨기만 하고 움직이지 못 했다. 기사단장은 어쩔 줄을 몰라 했다.
호흡곤란이었다. 강준은 이대로 놔두면 안 된다 싶어서 얼른 황태자를 안아들었다. 기사단장이 놀라서 말했다.
“이, 무슨 불경한 짓이오!”
강준은 황태자에게 스믈스믈 붙는 마기를 쫓아냈다. 그제서야 그의 숨이 겨우 정상으로 돌아왔다. 마기로부터 몸을 지키기엔 마력 수치가 너무 낮은 게 문제였다.
“용,사….”
“제가 전하를 업고 가겠습니다. 밀착해서 보호해야 할 것 같습니다.”
기사단장이 펄쩍뛰었다. 전하의 옥체를 함부로 만지는 건 불경죄랬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황태자가 단호하게 딱 말했다.
“용사가…, 원하는 대로 하게.”
“그래도 끝을 보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 봐야지.”
황태자의 각오는 굳건했다. 이곳에 용의 비늘 따윈 없음을 폐하께 증명하고 싶었다.
강준은 황태자를 업었다. 그는 태자를 손으로 받쳐올렸다. 하녀들이 얼른 보자기 같은 걸 들고 와 둘의 몸을 딱 고정시켰다.
“제가 업어 드리겠습니다, 전하ㅡ!”
“아니네. 이렇게 하겠네.”
기사단장은 자신이 전하를 대신 업겠다고 했으나, 황태자가 거절했다.
또 누군가 발작을 일으켰다. 강준은 저들을 안까지 계속 데리고 가는 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수행원들 전원, 그리고 기사단과 용병대 일부를 바깥에 대기시키기로 했다.
그렇게 궁성을 탐사할 인원이 결정됐다.
“안으로 들어가겠습니다.”
“그러게.”
황태자가 약간 힘 빠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원정대는 지독한 마기가 넘실거리는 궁성 안으로 천천히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