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9화 〉Chapter 20. 준비 단계. (5)
유난히 춥던 겨울도 이제 슬슬 끝물이 다가오고 있었다.
황태자비는 식당으로 향하는 길에, 우연히 복도의 창 밖으로 시선이 갔다. 어젯밤 소복히 쌓인 눈밭엔 아직도 발자국 하나 없이 깨끗했다. …1년 전까지만 해도 그녀 역시 저 순백의 눈처럼 순결했었는데, 일이 어쩌다가 이렇게까지 됐나 하고 한숨이 푹 나왔다.
그녀는 곧 식당에 도착해 널따란 식탁에 홀로 앉았다. 푸짐한 음식이 담긴 접시들이 상다리가 휘도록 차려져 있었다.
요즘따라 태자비는 기름진 것들을 볼 때마다 속이 니글거리는 기분이었다. 오늘은 그게 유난히 심했다. 그래도 물을 한 잔 마시며 울렁거리는 속을 좀 다스린 뒤에 억지로라도 몇 입 먹으려고 했다.
그러나, 음식을 잘라 입에 갖다댄 순간, 그녀는 그만 참지 못 하고 욱 헛구역질을 했다.
“마마?”
늙은 유모가 놀란 눈으로 태자비를 불렀다. 그녀는 인상을 찡그린 채 손으로 가슴을 꾹 누르며 잠시 속을 다스렸다.
“속이 좀 불편해서…. 이제 괜찮네.”
“사람을 부를까요?”
“아냐, 괜찮다니까.”
태자비는 작게 한숨을 쉬고 다시 음식을 먹으려는데, 이번에도 참을 수 없는 구역질이 나서 그만 욱 소리를 냈다. 그제서야 유모는 이걸 그냥 넘겨선 안 될 문제라고 판단했다. …그리고 잠깐 무언가 생각하더니 설마ㅡ, 하는 눈이 됐다.
“마마, 혹시…!”
유모의 어두운 표정이 점점 밝아졌다. 태자비는 이상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그녀의 변화를 도통 이해할 수 없어서.
“왜 그러는가?”
“이거, 어쩌면…,경사스러운 일일 수도 있사옵니다.”
“…경사?”
헛구역질에 웬 경산가 싶었다. 늙은 유모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회임하신 듯하옵니다!”
…아ㅡ!
태자비가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무래도 회임하시어 입덧을 하신 게 아닌가….”
늙은 유모가 이 놀라운 일을 자신만 알아선 안 된다고 당장 아랫것들을 불렀다. 그녀는 어서 태자궁에 이 사실을 알리려고 했다.
“…잠깐!”
“네?”
태자비는 뜸을 들이다가 말했다.
“전하껜내가 직접 전해 드리겠네.”
“아! 알겠사옵니다.”
유모는 정 속이 불편하시다면 얼른 담백한 음식으로 준비하겠다고 했다. 태자비는 알겠다면서 음식이 준비되는 대로 침소로 갖다 달라고 했다.
“좀 피곤해서.”
“물론이옵니다. 어서 존체를 보전하시옵소서.”
태자비는 식당을 나섰다. …어쩐지 월초에 했어야 할 월경이 말까지 없었던 게 좀 이상했었다. 설마 회임을 했을 줄이야ㅡ.
어떡하지. 어떡하지….
그녀는 이상하게 너무 겁이 났다. 그래서 침소에 박혀 불안에 떨었다. 걸쭉한 스프도 겨우 한 그릇 비우는 둥 마는 둥 했다.
바라고 한 일이잖아. 바라던 일이었잖아….
태자비는 이상하게 가슴이 답답했다. 방안을 이리저리 불안하게 왔다갔다하다가 침상 위로 풀썩 눕기를 여러 차례 반복했다. 고아한 태자비의 행동으로 어울리지 않았지만, 그녀는 지금 그런 걸 따질 여유가 없었다.
회임…, 회임ㅡ!
그걸 위해서 용사의 자지를 받아들인 거지만, 정말로 회임을 했다고 생각하니 정신이 어질어질했다. …지금 그녀의 뱃속에서 자라는 생명체는, 태자의 씨앗이 아니라 용사의 씨앗이었다.
몸이 달달 떨렸다. …무서워서. 이상하게 큰 죄를 저지른 것 같아서.
아냐…, 어쩔 수 없었어. 이 방법 밖에 없었잖아ㅡ.
태자비는 그렇게 한참 동안 고민하며 뒤척이다가 바깥에 대기하고 있는 하인들에게 태자궁으로 갈 채비를 하라고 일렀다.
- 예, 마마ㅡ.
그들은 당장 바쁘게 움직여 떠날 준비를 했다.
태자비는 태자궁에 도착할 때까지 어떻게 왔는지도 기억이 안 날 만큼 정신이 혼미했다. 급기야 마차에서 내릴 때 하마터면 미끄러질 뻔했다. 늙은 유모가 앞으로 더 조심하셔야 할 몸이라고신신당부를 했다.
태자는 태자비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미리 응접실에서 따끈한 차와 함께 기다리고있었다. 그는 활짝 웃으며 아리따운 부인을 맞이했다.
“어서 오세요, 부인. 날이 무척 쌀쌀하던데, 오는 동안 춥진 않았소?”
“아, 괜찮았습니다. 따뜻하게 입고 왔습니다, 전하.”
“그럼 다행이네요.”
태자는 그녀에게 자리를 권했다. 태자비는 침을 꼴깍 삼키면서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찻잔을 쥐는 손이 달달 떨렸다. 그의 입에서 미소가 좀 사라졌다.
“왜 그래요, 부인? 혹시 몸이 안 좋아요? 사람을 부를까요?”
“아녜요, 괜찮아요.”
“…안 좋아 보이는데, 많이.”
태자비는 억지로 웃었다. 정말 괜찮다면서. 태자는 미간을 살짝 모으며 그녀를 유심히 관찰했다.
“뭔가 고민이 있어요?”
“…아뇨, 없어요.”
말해야 하는데…,
이상하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부인?”
태자비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무릎 위에 얹은 주먹에 힘을 꽈악 주었다.
…밝혀야 했다. 힘들더라도.
“그…, 저….”
태자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계속 말해 보라는 식으로.
“ㅎ, 회,임을, 한 것 같습니다….”
태자비의 고개가 뚝 떨어졌다. 짧은 침묵이 이어졌다. 그러나 그녀는 그게 너무나 길게 느껴졌다.
태자는 벌떡 일어나 태자비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고개를 푹 수그린 그녀의 손을 꽈악 잡고 가볍게 흔들었다.
“정말…, 정말 잘 됐어요ㅡ! 아주 경사스런 일입니다, 부인ㅡ!”
태자는 정말 기뻐하는 표정이었다. 그를 바라보는 태자비는 안도와 슬픔을 동시에 느꼈다.
더 이상 불안에 떨 필요가 없다는 안도,
…그리고, 태자가 아니라 용사의 아이를 회임했다는 슬픔.
“이 경사를 우리만 알면 안 되지요!”
그렇게 태자는 아랫것들을 불러 태자비가 회임했다는 소식을 알리라고 외쳤다. 태자비의 표정은 복잡했다. 입은 기쁘고 눈은 슬펐다.
“전하….”
“그동안 참 고생했어요.”
“아닙니다. 저보단 전하께서, 마음 고생이 더 심하셨을 텐데요….”
태자비는 자신의 추태를 떠올리며 가슴을 졸였다. 태자에게 낯부끄러운 장면을 얼마나 많이 보여줬던가ㅡ! 수치와 부끄러움에 그녀는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다.
“고생 많았어요, 부인. …정말로.”
태자는 태자비의 어깨를 부드럽게 손으로 감쌌다. 그녀는 그만 눈물이 나올 뻔했다.
안도했다.
…그러나,
슬픔은 끝내 떨어지지 않고 그녀를 끈질기게 따라왔다.
· · ·
강준팀은 환상 미궁으로 가기 위해 겨우내 만반의 준비를 했다. 강준은 팀 훈련을 마치면 한 명씩 개인적으로 불러 특훈을 하기도 했다.
그 중 가장 열성적으로 훈련에 임했던 인물은 의심할 것도 없이 검후 랑젤이었다. 그녀는 조금이라도 더 그의 배움을 얻기 위해 몸을 사리지 않았다. 그 열정만큼은 정말 형용할 수 없을 만큼 대단했다.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알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둘 셋 정도는 아는 재주에, 둘째 가라면 서러울 정도의 노력이 합쳐지니, 정말 눈에 띌 정도로 발전했다. 이대로라면 얼마 지나지 않아 장화영과 비등비등해질 정도로….
그녀 스스로도 그걸 알고 더 의욕이 생기는지, 틈만 나면 훈련장에 와서 검을 휘둘렀다. 강준은 훈련장에 올 때마다 검을 휘두르고있는 랑젤을 보면서 참 대단한 여자구나 했다.
…그렇게 겨울이 거의 지나갈 무렵.
강준은 황궁에서 경사스러운 일이라고 전달된 소식 하나를 들었다. 내용을 듣기 전까지, 그는 별 대수롭지 않은 일일 거라고 지레짐작하고 있었다.
- 황태자비께서 회임을 하셨답니다ㅡ!
그 소식을 듣자마자 강준의 눈이 번쩍 뜨였다. 약을 끊은 지는 두 달 정도 됐기에, 언제 임신이 되어도 이상하지 않긴 했다. …그러나 막상 그 얘길 들으니, 기분이 좀 묘했다.
용사의 아이를 밴 황태자비라니. …심지어 황태자가 보는 앞에서 그의 씨앗을 받아내지 않았나.
강준은 그녀의 심정이 어떤지 좀 궁금했다. 남편 앞에서 남의 아이를 밴 아내의 심정이 어떠한지는, 사실 상상만으로는 예상하기 힘들었다.
아무튼ㅡ.
잡념은 딱 거기까지만이었다. 더 이상 거기에 신경쓸 여유는 없었다. 비록 태자비가 기가 막히게 쫄깃한 좆집이긴 해도, 그녀가 주 목적은 아니니까.
황태자도 용사가 바쁜 줄 알고 있어서, 회임 소식만 전하고 그를 따로 불러내거나 하진 않았다.
…그렇게 시간은 물 흐르듯 지나갔다.
어느덧 성큼 다가온 초봄.
눈이 녹아 흐물흐물해진 땅은 봄바람을 맞고 바짝 말랐다.
겨울 동안 뜸했던 마차 행렬은 이제 폭발적으로 불어났다. 찬 바람만 불던 길가에 좌판상들이 생기고, 대로는 봄 공기처럼 생기가 돌았다.
검후 랑젤은 잠깐 쉬고 있는 동안, 나비 한 쌍이 하늘하늘 날아와 아무것도 없는 흙바닥 위에 탁 안착한 것을 가만히 구경하고 있었다. 두 흰나비들은 그렇게 날개를 접었다 폈다 몇 번 하더니 다시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리고 어디론가 날아가더니 시야에서 영영 사라졌다. …어쩐지 기분이 싱숭생숭한 봄날이었다.
“쉬고 있었나 봐요?”
랑젤은 소리가 난 곳으로 고개를 팩 돌렸다. 용사였다. 그녀는 얼른 일어나 화악 웃으며 공손히 상체를 숙였다.
“아, 선생님!”
“요즘 어때요.”
“…그냥, 계속 연습하고 있어요.”
강준은 긴 나무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옆자리를 손바닥으로 퉁퉁 쳤다. 랑젤이 조심스럽게 거기에 엉덩이를 붙였다.
“내일 출발하는데, 좀 쉬지 그래요.”
“아직 갈 길이 먼데, 쉴 수 있나요. 끊임없이 노력해야죠.”
강준이 씩 웃었다. 그리고 대견하다는 듯이 랑젤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경은 틀림없이 크게 될 겁니다. 내가 장담해요.”
랑젤은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과한 칭찬이세요. 선생님에 비하면 한참 모자랍니다.”
“굳이 비교할 게 뭐가 있어요. 저는 저고, 경은 경입니다. …경은 크게 될 겁니다.”
그는 친절한 미소를 만들었다. 그녀는 수줍게 웃었다.
“고마워요…. 더 열심히 노력할게요. 선생님께 부끄럽지 않도록요.”
“이것보다 어떻게 더 열심히 해요. 경은 저한텐 과분한 제잡니다.”
“아뇨! 선생님이 제게 너무 과분한 분이시죠.”
둘은 마주보며 웃었다. 랑젤의 시선은 다시 흙바닥으로 뚜욱 떨어졌다.
잠깐 어색하게 뚝 끊겼던 대화는 강준의 입에서 다시 이어졌다.
“이번에 대륙의 북쪽 마경에 환상 미궁이란 곳으로 가는 건 알고 있죠?”
“네, 알고 있어요.”
“크게 걱정하는 건 아닌데, 아무래도 미궁이란 곳이 워낙 종잡을 수가 없어서요.”
“아, 네….”
강준은 랑젤의 눈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환상은 언제 어떻게 발현될 지 몰라요. 그러니까 꼭 조심해야 돼요. 알았죠?”
“네, 걱정 마세요!”
“랑젤 경은 잘할 거라 믿어요.”
그는 친절히 웃으며 마지막으로 그녀를 격려했다. 둘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검후는 떠나는 용사의 등을 한참 바라봤다. …이상하게 마음이 좀 허전해졌다.
랑젤은 고개를 붕붕 흔들며 다시 검을불끈 쥐고 그걸 휘둘렀다.잡념을 떨쳐 버리기에, 수련만큼 좋은 게 없었다.
헛, 허엇ㅡ.
…검을 반복적으로 휘두르는 그녀의 신경이, 저 멀리까지 날아갔다.
“…랑젤 경?”
검후가 퍼뜩 고개를 돌렸다. 바로 맞은편에 그녀가 존경하는 용사님이 앉아 있었다.
“아, 네 선생님.”
“여기서도 검술 생각이에요?”
“…모자란 만큼, 더 노력해야죠. 전 재능이 부족하니까요.”
강준의 옆자리에 앉아 있던 마리아 공주가 정말 대단한 노력가라고 감탄했다. 랑젤은 쑥스럽게 웃었다.
“경이 재능이 부족하다고 하면, 다른 사람들이 울겠는데요.”
마차에 타고 있던 팀원들이 피식피식 웃었다.
강준은 만약 기회가 닿는다면 대단한 검술을 가르쳐 준다고 했다. 놀란 랑젤의 궁둥이가 한 번 들썩했다.
“정, 정말이요?”
“네, …전 말하는 건 지키잖아요.”
“네! 물론이죠! 선생님은 절대로 거짓말 할 분이 아니니까요.”
용사를 향한 검후의 믿음은 대단했다. 그는 거짓말할 사람이 결코 아니었다. 불가능이란 없는 사람이, 바로 용사 이강준이었다.
분명 그는 대단한 검술이라고 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용사 이강준의 말이었다. 그에게서 대단하다는 수식어가 붙을 정도면, 대체 어느 정도일지 감도 안 잡혔다.
드디어, 나도…!
…랑젤의 가슴이 기대감으로 부풀어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