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9화 〉Chapter 2. 검제의 제자. (4)
사봉 선출전은 바로 본선이 시작되는 게 아니라 예선을 거쳐야 했다. 참가자가 하도 많으니 본선까지 숫자를 좀 줄여야 할 필요성이 있는 탓이었다.
물론 그게 말은 예선인데, 단순한 골라내기 작업에 불과했다. 심사관들 앞에서 스무 명씩 나란히 잠깐 서 있다가 돌아가는 게 전부였다. 그 중 한 명, 많아야 겨우 두 명이 합격표를 받았다.
잘나가는 가문들은 미리 합격이 내정되어 있는 상태라 외모가 살짝 떨어져도 합격표를 받았다. 당연히 반발하는 자들도 많았다. 아주 먼 길을 온 참가자들도 적지 않은데, 겨우 얼굴 한 번 내비치고 끝나 버리니 화딱지가 날 수밖에ㅡ.
- 사봉이 얼굴만 따지면 되냐ㅡ!
그래서 불만이 있는 자들은 따로 무공을 펼칠 기회도 주었다. 물론 그건 또 참가비를따로 내야 했다. 그러나 그 액수가 상당해서 어지간한 가문들은 감히 시도도 못 해보고 물러났다. …한마디로 돈은 있는데 뒷배가 없는 자들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주겠다는 소리나 다름없었다.
아무튼 사천당가라는 어마어마한 후광을 가진 당호연은 당연히 합격표를 받았다. 그녀는 오히려 저런 호박들 사이에서 평가를 받아야 한다는 게 썩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잘난 가문들은 참가자뿐만 아니라 호위무사들의 차림새까지 귀티가 났다. 그러나 이도 저도 아닌 가문들은 딱 봐도 가난한 냄새가 나는 듯했다.
당호연은 예선전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익숙한 얼굴과 만났다.
“어머, 소소 아니야ㅡ!”
“호연아.”
청초한 미녀인 남궁소소도 이곳에 있었다. 당호연은 간만에 만난 친구와 조우해 대단히 기뻤다.
“언제 온 거야?”
“얼마 안 됐어. 한 주 정도.”
“진짜 반갑다, 얘.”
“그러게.”
남궁소소는 여긴 너무 복잡하니까 이따가 다시 만나서 얘기를 하자고 했다. 안 그래도 둘을 향해 쏟아지는 시선들이 대단했다. 그녀들은 서로 묵는 곳을 알려주고 헤어졌다. 숙소로 돌아가는 당호연의 발걸음이 부쩍 가벼워졌다. 그녀는 근래에 기분이 가장 좋았다.
그렇게 당호연이 숙소에 도착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친구 남궁소소가 방문했다. 화산파의 천영령, 사천당문의 당호연, 남궁세가의 남궁소소, 그리고 제갈세가의 제갈유화, 이렇게 넷은 어릴 때부터 각별히 친한 사이였다.
아무래도 무림맹의 핵심 문파인 만큼 교류의 기회가 많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또래인 그녀들도 가까워졌다.
“별일은 없고?”
“나야 뭐 늘 똑같지.”
둘은 서로를 보고 살풋 웃었다. 그녀들은 신나게 조잘조잘 떠들었다.
“아휴 사봉이고 뭐고, 괜히 왔다 싶어. 이렇게 고생할 줄 알았으면, 그냥 동생이나 보낼 걸 그랬다니깐.”
“서령이?”
“지가 나 대신 오겠다면서 얼마나 울고 불고 난리가 난 줄 알아? …말도 마, 진짜. 아유 다시 생각만 해도 몸이 떨린다 떨려.”
“서령이가 왜 그럴까.”
“몰라, 진짜. …꼭 날 이겨 먹으려고 든다니깐. 쬐끄만 게.”
“언니가 대단해 보여서겠지. 있잖아. 우상을 뛰어넘고 싶다ㅡ, 그런 거.”
피히ㅡ. 당호연이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그럴 애 절대 아냐. 우상? 흥, 지 언니 개똥으로도 안 보는 애야 걘.”
“그래도 개똥은 심했다.”
남궁소소는 입을 가리며 크게 웃었다. 그녀는 당호연의 이 왈가닥스러움이 재밌었다. …사실 동생 당서령과 둘이 똑 닮았다고 하면 기겁하면서 부정하겠지ㅡ.
얘기는 점점 무르익어갔다. 그녀들은 차도 마시고 다과도 먹으면서 오랜만에 만난 이 즐거움을 만끽했다.
한참 이어진 대화가 잠깐 끊기고 약간의 침묵이 흐르고 있을 때, 남궁소소가 뜸을 들이며 당호연의 눈치를 봤다.
“저…, 호연아.”
“응.”
달달한 다과를 씹던 당호연이 눈을 들어 친우를 똑바로 쳐다봤다. 남궁소소는 천천히 말을 꺼냈다.
“…듣고 놀라지 마?”
“뭔데 그래. 어서 말해 봐.”
“사실 나…, 약혼했어.”
남궁소소가 수줍게 웃었다. 당호연의 눈이 커지고 엉덩이가 들썩했다.
“저엉말?”
“응.”
“누구랑?”
소소는 친구의 눈치를 사알짝 보다가 상대의 정체를 밝혔다.
“천 오라버니.”
ㅡㅡ!!
순간 당호연의 입가에 웃음기가 사라졌다가 다시 얼른 미소를 만들었다. 그러나 이번엔 좀 어색한 웃음이었다.
“그으래? 잘됐다 정말ㅡ!”
그렇게 말하고 나서 당호연은 잠깐 시선을 바깥으로 돌렸다. …순간 정신이 없었다.
수년 전 32대 육룡(六龍)의 일원이었던 천세진은 화산파뿐만 아니라 무림맹에서도 기대를 한몸에 받고 있는 인재였다. 현 가주, 천우지의 장남이라 앞으로 화산파를 이끌고 나갈 미래의 가주이기도 했다.
사실 당호연은 천세진을 속으로 몰래 사모하고 있었다. 아주 오래 전부터. …만약 누군가와 약혼을 한다면, 그게 천 오라버니가 되었으면 하고 바라기도 했다.
“…괜찮아?”
남궁소소는 갑자기 좀 심각해진 듯한 공기에 걱정스러운 표정이 됐다. 당호연이 천세진에게 마음이 있다는 건 함께 지내다 보면 자연스럽게 알게 될 수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그녀는 그게 못내 마음에 걸렸다.
“어? 어, 당연히 괜찮지ㅡ! 정말 축하해. 정말 잘됐다. 천 오라버니면 너랑 잘 어울리지. …누가 너 데리고 갈까 걱정했는데, 이제 좀 마음이 놓인다 얘.”
“…고마워.”
“아냐. …사실, 나도…, 나도 약혼한 사람이 있어.”
당호연은 어쩌다 보니까 그만 그런 말이 튀어나와 버렸다. 남궁소소는 꽤 놀란 눈치였다.
“정말? 누군데?”
그제서야 당호연은 순간 자신이 실수했다는 걸 느꼈다. 어떡하지ㅡ. 일단 말을 내뱉어 버렸으니까, 아니라고 하면 또 그림이 이상했다. …방금 그건 솔직히 비참함을 숨기려는 일종의 반발심이었다.
“어, 그….”
어쩌지, 어쩌지….
당호연은 당황하여 눈을 살짝 내리깔고 입술을 잘근잘근 씹어댔다. 남궁소소는 부끄러워하지 말고 얘기해 달라고 재촉했다.
…그리고 그때 정말 우연하게도, 이강준이 딱 등장했다.
마치 당호연의 구세주처럼….
“처음 뵙는 분이 계시네요.”
당호연은 살짝 수그렸던 머리를 번쩍 들고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홱 틀었다.
기가 막히게 잘생긴 남자가 살풋 웃고 있었다. 당호연은 이때만큼 그가 반가운 적이 없었다.
“이 공자님!”
남궁소소도 그의 외모에 좀 놀란 눈치였다. 천세진도 분명 미남이었으나, 상대에 비하면 어딘가 모자라 보일 정도였다. 그만큼 대단한 미공자였다.
당호연은 그런 친구의 반응을 슬쩍 곁눈질로 확인했다. 이상하게 아까의 질투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그 자리엔 쾌감이 들어찼다.
“아, 이쪽은 제 친구 남궁소소예요. 소소야, 이분은 이강준 공자님이셔.”
“이강준이라 합니다. 참 고우시군요.”
강준은 포권을 취하며 가볍게인사했다. 남궁소소도 얼른 마주 인사했다.
“남궁소소라고 해요.”
그리고 친우 당호연에게 둘이 무슨 사이냐는 식으로 살짝 눈짓을 주었다. 그녀는 약간 더듬거렸다.
“아, 그, 이분은…, 어, 내…, 약혼,자셔.”
그러면서 얼른 강준을 홱 돌아봤다. 그리고 제발 잠깐만 자기를 좀 도와 달라는 식으로 애탄 눈빛을 그에게 날렸다. 물론 눈치 빠른 그가 그 눈빛의 의미를 못 읽을 리가 없었다.
“당 소저의 약혼자입니다.”
“아, 그러시구나. 참, 선남선녀예요.”
당호연은 활짝 웃으면서 자기가 무슨 선녀냐고 손사레를 쳤다.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리며.
강준은 괜히 자기가 끼어 어색한 것 같다며 눈치껏 자리를 피해주었다. …아무튼 그 덕분에 당호연은 다시 기가 살아났다. 일단 뒷일은 나중에 생각할 노릇이고.
“정말 둘이 잘 어울려. …우리들 중에서 네가 제일 마지막에 시집갈 줄 알았더니ㅡ.”
“어쩌다 보니까, 그렇게 됐어.”
“그래, 애도 낳고 그래야 행복이지. 혼자 살면 얼마나 외롭겠어.”
“맞아.”
둘은 조금 더 얘기를 이어가다가 자리를 파했다. 남궁소소는 정말 즐거운 시간이었다면서 해맑게 웃었다.
“참, 나중에 영령 만나러 갈 건데, 같이 갈 거지?”
“그럼.”
“네 약혼자분도 함께. 영령한테도 소개해 주자. 깜짝 놀랄 걸?”
“어, 어?”
“천 가가도 계시니까. 너 약혼했다는 얘길 들으면 분명 기뻐하실 거야.”
…아….
거절할 계제가 없었다.
“어…, 응. 알았어.”
“그래, 그럼 다음에 보자.”
남궁소소가 손을 살짝 흔든 뒤에 여관을 떠났다. 잠깐 고요한 침묵 속에서 당호연은 넋이 나간 채 서 있었다.
그녀는 일이 그만 겉잡을 수 없을 만큼 커져 버렸다는 걸 깨달았다. …그때 욱하는 마음을 다스려야 했었다. 강준이 전부터 그 다혈질부터 고치라고 누누이 말해 왔는데, 그게 그만 그녀의 발목을 잡은 셈이었다.
어떡하지. 어떡하지ㅡ.
당호연은 발을 동동 굴리면서 안절부절못했다. 이제 남궁소소뿐만 아니라 천 남매에게까지 밝히게 생겼다.
오라버니….
당호연은 천세진을 떠올리면서 손으로 가슴을 꾸욱 눌렀다. 이상하게 그와 친구의 약혼을 진심으로 환영할 수가 없었다. …오랫동안 연모했던 사내였다. 그게 당연할 수밖에.
속상함은 곧 다가올 걱정에 잡아먹혔다. 이제 이 문제를어떻게 해결하느냐를 고민하면서, 그녀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아, 진짜 큰일났다. 어떡하냐고 진짜ㅡ.
그녀는 침상 위로 푹 고꾸라지면서 자신의 방정맞은 주둥이를 원망했다. 하필 나와도 그런 말이 나오다니.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당장 그때로 되돌리고 싶었다.
그때 누군가 방문을 똑똑 두드렸다. 침상에 엎어져 있던 그녀가 고개를 번쩍 세우며 누구냐고 물었다.
- 나예요.
이강준이었다. 당호연의 몸이 번쩍 세워졌다. 그녀는 얼른 옷매무새를 고치고 문을 열었다.
생긋 웃고 있는 그가 보였다. 이상하게 그녀의 얼굴이 뜨거웠다. …아까의 일이 떠올라서. 그건 분명 대단히 부끄러운 짓이었다. 속으로 얼마나 비웃고 있을지 상상도 안 됐다.
“아까 일은 잘 풀렸어요?”
“…네, 그땐 고마웠어요.”
“딱히 어려울 건 없었어요.”
강준은 상냥하게 웃었다. 당호연은 이걸 어쩌나ㅡ, 하고 대단히 고민하면서 자꾸 그의 얼굴을 힐끔힐끔 흘겼다.
“무슨 고민 있어요?”
“아, 그….”
아가씨는 뜸을 들이다가 갑자기 문 밖으로 고개를 홱 빼고 좌우를 살핀 다음에 강준을 보고 들어오라고손짓을 했다. 다 큰 처녀의 방에 남자가 들어가는 건 보기 좋지 못했으나, 그녀는 지금 그런 걸 따지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등 뒤로 문을 탁 닫은 그녀는 한숨을 푹 쉬었다. 그리고 의미심장하게 웃고 있는 강준을 향해 입을 열었다.
“저, 공자님.”
“네.”
“아까 일은, 그…, 고마웠어요.”
“방금 전에 고맙다고 했잖아요.”
“다시 한 번 더 표현하고 싶어서요.”
사실 큰 부탁을 위한 초석을 깔아 두었다는 게 옳았지만, 대놓고 그런 말을 어떻게 하나ㅡ.
당호연은 진짜 목구멍에 걸려 나오지 않는 말을 억지로 끄집어내려고 노력했다. …부끄럽다고 미뤄 봤자, 언젠가는 말해야 할 일이었다.
강준은 그녀의 상황을 눈치채고 먼저 말을 했다.
“무슨 말 못 할 사정이라도…?”
“아, 그, 있잖아요…, 아까 그 친구 기억나시죠?”
“남궁소소라고 했죠.”
당호연은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그 친구랑 갈 데가 있거든요. 다른 친구가 여기 살아서….”
“그래서요?”
“그런데, 소소가 선배님과 동행하면 좋겠다고 해서요.”
“날? …왜요?”
“아까 제가 공자님하고 얘기가 그렇게 됐잖아요. …약혼자라고.”
“아아ㅡ.”
강준은 알겠다는 듯이 작게 탄성을 터트렸다.
“그때 잠깐 동행할 수 있을까요?”
“…약혼자로?”
“…네. 약혼자로.”
흐음ㅡ. 강준은 고민하는 척했다. 사실 결정은 진작에 했다. 이런 좋은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정말 우연하게 만들어진 기회였다.
“알았어요. 당 소저한테도 다 속사정이 있을 테니까. …맞죠?”
“네. …고마워요, 정말로.”
“나도 화산 구경도 해 보고, 좋은 경험이 되겠죠. 이때가 아니면 언제 눈호강을 해 보겠어요.”
당호연은 걱정을 덜고 숨을 푹 쉬었다. 강준은 편히 쉬라고 하면서 방을 나갔다. 그녀는 다시 침상 위로 푹 고꾸라졌다.
어쩌다가 내 꼴이 이렇게 됐나ㅡ.
그 당당하고 고고한 흑호접이 정체도 확신할 수 없는 남자에게 애걸복걸하는 꼴이라니. 그녀는 갑자기 스스로가 너무 못나 보였다. 그래서 침상 위에서 버둥거리며 막 신경질을 부렸다.
다 걔 때문이야. 나한테 그런 말만 안 했어도…. 치사해, 진짜…!
물론 소소의 잘못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상하게 원망하는 마음이 생겼다. …천 오라버니를 빼앗긴 것 같아서.
당호연은 그런 원망을 하는 자신이 미웠다. 소소도 미웠다. 천 오라버니도 미웠다. 너그럽게 받아준 강준도 미웠다.
그녀는 고개를 푹 박았다.
…이상하게 속이 메슥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