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331화 〉Chapter 8. 대가. (4) (331/448)



〈 331화 〉Chapter 8. 대가. (4)

“자수하겠습니다.”

정인호는 그렇게 선언했다.


됐다ㅡ.



강준은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속으로는 잔인하게 웃고 있었지만.

“잘 생각했습니다. 차라리 그게 나을 겁니다. 이곳에 떨어진  얼마 되지 않은 이방인이라는  잘 설명하면 어느 정도 참작이 될 거예요. …제가 최대한 도와주지요.”

“고맙습니다. …제 사정을 이해해 주셔서요.”


“그래도 마냥 쉽지는 않을 겁니다.”


“각오하고 있습니다.”

“만약 정 일이 틀어진다면, 도망치도록 도와주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도망칠 구멍까지 만들어 주겠다고 하니, 정인호도 더는 머뭇거릴 이유가 없었다.



그렇게정인호는 자수하기 위해 강준과 함께 무림맹으로 향했다. 무림맹도 녹림인을 잡으려고 혈안이 되어있었으므로, 정인호는 곧바로 감옥에 갇혔다. 어마어마하게 두꺼운 족쇄가 그의 팔다리에 주렁주렁 매달렸다.



“꼭 부탁드립니다, 강준 씨.”


“걱정 말고, 편히 있어요.”




주인공 정인호를 안심시키던 강준은 감옥을 나오자마자 얼굴을 싹 굳혔다.




드디어 방해꾼이 사라졌다. 이제 샤를롯을 요리할 차례였다. 물론 이 훌륭한 재료를 성급하게 다루어 망칠 생각은 전혀 없었다.




강준은 먼저 검후의 제자 이설을 찾아갔다. 검후 황보주혜는 현재 근신 중이므로, 외부와의 접촉을 끊고 있었다.

“이 공자님ㅡ!”




이제 강준을 향한 신뢰가 두터워진 이설은 그를 반갑게 맞이했다. 강준도 훌륭하고 정의로운 정파인의 연기를 빼먹지 않았다.



“그동안 잘 지냈어?”


“네. 공자님은요?”


“나도 잘 지냈지. …선배님은?”


“스승님도  계세요. 안 그래도 공자님 소식을 궁금해하고 계셨어요.”


“그래? …근신만 아니면 찾아 뵐 텐데.”



잠깐 대화가 끊겼다.강준은 찻물을 한 모금 호롭 삼켜서 그 침묵을 채웠다.

“참, 방금 한  자수시키고 오는 길이야.”


“…자수요?”


이건  무슨 소린가 하는 표정이었다.



“동생이랑 싸웠던 녹림인. …이방인이더라구.”


“그놈이요?!”

“음.”



이설은 그때 생각이 나서 분한지 주먹을 불끈 쥐었다.

“녹림인들은 싸그리 다 죽여 버려야 해요.”


누가 무림인 아니랄까 봐, 앞뒤 분간도 없이 일단 죽이겠다고 난리였다.



“그게, 사정이 있었던 것 같더라고.”

“사정이 있었어도, 녹림이었던  용서할  없어요.”

“이곳에 떨어졌다가 녹림채 사람한테 목숨을 빚졌나 보더라. 은인에게 은혜를 갚아야 해서 어쩔 수가 없었댄다.”



은인과 은혜ㅡ.



명분을 좋아하는 무림인들은 은원 관계에 대해서도 아주 철저했다. 특히 은인에게 은혜를 갚는 걸 매우 훌륭한 행동이라 여겼다.


그래서 그런 변명을 하면 아무리 악독한 일이라도, 어느 정도 정상 참작이 들어갔다. 물론 악용하는 사례도 빈번하나, 그래도 그런 통념이 쉬이 사라지진 않았다. …그놈에겐 다행스런 일이겠지ㅡ.


“그래도 녹림 소속인  좀 과해요.”


“그래서 자수했잖아. 잘못된 일이란 걸 알면서도 어쩔 수 없었던 모양이야.”



이설은 강준이 이런 말을 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변호하는 걸 좀 도와 달라는 뜻이겠지.


“그래서, 그를 용서하라구요?”


“일단은 좀 두고 보자고. …내 얼굴을 봐서라도. 음?”



그렇게 말하니까 또 마음이  약해졌다. 강준은 검후의 은인이었다. 그러면 제자인 이설이 그의 부탁을 외면할 수 없었다.


“…알았어요. 생각해 볼게요.”

“그래, 고마워.”


일단 말은 잘 됐다. 그러나, 이걸 그대로 샤를롯에게 알릴 생각은 없었다. 최대한 이용해 먹어야지ㅡ.


강준은 작별 인사를 하고 무림맹을 떠났다.








샤를롯은 인호가 걱정이 되어 하루 종일 일이 손에 잡히질 않았다. 그녀는 내내 한숨만 푹푹 쉬었다.



그때 누군가 숙소를 찾아왔다. 강준이었다. 그녀는 얼른 안으로 들어오시라고 했다.



“실례할게요.”



때마침 숙소엔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그녀가 직접 찻물을 우려 대접했다.

“얘기가 대충 잘 됐습니다.”



샤를롯의 얼굴이 환해졌다.

“정말요?”


“제가 검후 선배님의 목숨을 구한 적이 있어서, 거기서 도움을 좀 얻었지요.”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강준은 찻물을 한 모금 호롭 삼켰다. 그는 안도하는 그녀를  번 힐끔 보고 찻잔을 탁 내려놨다. 순간 분위기가 좀 달라졌다.


“그런데 말이죠.”

“…네?”

“저도 체면이란  있는데, 너무 눈에 보이게 빼낼 순 없잖습니까.”



ㅡㅡ!!

샤를롯은 좀 당황했다.

“아니, 그럼…!”

“아, 물론  도운다는 뜻이 아니라…, 아무래도 검후 선배님의 입을 빌리는 일인데, 죄가 뚜렷한 사람을 그냥 풀어주기는 힘들다 이겁니다.”

검후라는 이름이 나오니 그녀도 딱히  말이 없었다. 그래서 고개를 뚝 떨궜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제가 염치없이 어떻게 그런 부탁을 합니까.”

샤를롯은 슬픈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두 손을 모아 간절히 빌었다.




“부탁드려요. 제발요. 제발 한 번만 도와주세요. 네? 이 은혜 절대 잊지 않을게요. 부탁드려요. 제발요. …저흰 인호가 없으면 안 돼요. 저희 팀은 인호 하나만 바라보고 있어요. 저희들  살려 주세요…, 네?”


“후우….”


강준은 한숨을 길게 내쉬면서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샤를롯은 안달이 났다. 가만히 의자에 앉아 있을 수만은 없어서, 바닥에 내려와 무릎을 꿇었다.



그 자존심 강한 샤를롯이 무릎을 꿇다니…. 참, 세상 오래 살고 볼 일이야ㅡ.

그만큼 인호가 중요하다는 뜻이었다.자신의 자존심 따윈 아랑곳하지 않을 정도로.


“부탁드리겠습니다. 제발요. 뭐든 하겠습니다. 제발 딱  번만 도와주세요, 네? 이 은혜는 절대 잊지 않을게요. 부탁드려요, 강준 씨.”

“일어나세요.”

“아니요. 이렇게 있을게요. …머리를 박으라면 박겠습니다. 그러니까 제발….”

그러나 강준의 입에선 여전히 긍정적인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샤를롯은 그의 다리에 매달리며 아쉬운 소리를 했다.




“최대한 도와주시기로 했잖아요. 그렇게 약속하셨잖아요…!”


“이것도 나름대로 많이 도우는 겁니다. …하지만, 그걸 완전히 없던 일로  수는 없잖습니까.”




어떡하지. 이걸 어떡하냐구….

그녀는  지독한 괴로움을 견디기힘들었다.




- 고마워, 누나. …내가 누나 얼마나 의지하는지 알지?



지금 이 순간에도, 인호는 일이 잘 풀리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으리라. 자수를 하라고 독촉한  그녀였다. …그녀는 무슨 수를 쓰더라도 그를 무사히 꺼내려고 마음먹었다.




“제가, 대체 어떻게 하면 될까요, 네?”

“당신은 아무 잘못도 없는데, 뭘 하고 말고가 어딨어요.”

“팀장의 잘못은, 곧 팀원의 잘못이에요.”

“그런 생각은 옳지못합니다.”

“전 그렇게 생각해요. 잘못은 함께 짊어져야 해요. 그게 바로 팀이에요.”


샤를롯은 강한 여자였다. 강준은 속으로 웃었다. 정인호는 그가 만든 주인공이지만, 참 병신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겨우 지 자지만 놀릴  아는 새끼지, 뭐ㅡ.


그놈에게 주기는 너무 아까운 인물이었다. 그러나 쉽게 넘어올 여자는 아니었다. 긴 작업이 필요했다.


“당신 마음은 알겠어요. …일단 노력은 해 보겠습니다.”

“어떻게…, 안 될까요?”

“아무리 그래도 대가도 없이 너무 많은 걸 바라는 거 아닙니까? …그냥 풀어 달라는 말만 하지 말고, 절 설득시켜 보세요.”

설득ㅡ.



샤를롯은 순간 암담했다. 자신이  남자를 설득할 수 있을까 싶어서. …이강준 이 남자는 결코 만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아니면 풀릴 때까지 시간이 좀 걸릴 겁니다. 그냥 이 사건이 잠잠해질 때까지 기다리는 게 나을 겁니다.”

“…그게 언제죠?”


“저도 모르죠. 한 달이  지, 일 년이 될 지….”


…그런 말을 남기고 강준은 떠났다. 샤를롯은 끔찍하게 괴로웠다. 도저히 이 속마음을 털어놓지 않고선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처음엔 미나를 찾아가려고 했으나…, 예전에 그 거리감이 떠올라 차마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같은 팀원인 에리카 언니에게 속내를 털어놓았다.


“인호가 쉽게 풀릴 것 같진 않대. …죄가 있으니까, 그냥 바로 풀려나는 건 어렵나 봐.”


“그래? …어떡하지.”

에리카도 심란한 표정이었다.


“더 나은 결과를 바라면 자길 설득해 보래.”

“누가? …강준이?”

“응.”

 여자는 잠깐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그렇게 한참 있다가, 에리카가 침묵을 끊고 입을 열었다.

“그럼…, 내가 해 볼까?”


“언니가? 어떻게?”



샤를롯은에리카가 딱히 말재주가 있는 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런데 어떻게 설득을 하겠다는 뜻인가ㅡ.


“가지고 있는 게  몸뚱아리 하나니까. …한  유혹이라도 해 볼게.”



당연히 샤를롯은 놀라서 펄쩍 뛰었다.




“언니, 그게 무슨 소리야ㅡ!”

“나, 이제까지 아무 도움도 못 됐잖아. …이렇게라도 도움이 되고 싶어.”


“헛소리하지 마. 무슨 도움이 안 됐다고 그래ㅡ!”


“그럼 어떡해? 할 수 있는 게 없는데.”

“부팀장으로서 용납할 수 없어. 어떻게 팀원을 팔 수가 있어ㅡ! 절대 그러지 마ㅡ!”



그녀는 단호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고민은 더 수렁으로 빠졌다.







그리고 얼마 뒤, 무림맹에서 녹림을 향한 선전포고가 있었다. 이제부터 녹림채 소속은 죄가 가볍고 무겁고를 막론하고 모두 잡아 죽이겠다는 선포였다. 진짜 어지간히 뿔이 난 듯했다. …일단 정인호는 선포 전에 자수하긴 했지만, 그래도 불안한 건 마찬가지였다.



샤를롯은 걱정에 한시도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당장 강준을 찾아갔다. 그리고 그를 보자마자 무릎을 꿇었다.

“제발 인호를 꺼내 주세요. 제발요. 제발 이렇게 부탁드릴게요. 네? 일단 꺼내만 주시면,  은혜는 절대 잊지 않을게요. 절대요. …강준 씨, 예전 인연을 생각해서라도 한 번만 자비를 베풀어 주세요.”

그러나 강준의 표정은 싸늘했다.

“때가 되면 나올 겁니다.”

“도저히 안심이 안 돼요. …저러다가 정말 큰일이라도 나면 어떡해요ㅡ!”


“그러지 않게 조치는 취하겠습니다. …죽진 않을 거니까 걱정 마세요.”

그게 더 무서운 말이었다. 죽진 않을 거라니ㅡ!  말엔 분명 온갖 의미가 내포되어 있었다. 그녀는 그의 다리로 엉금엉금 기어서매달렸다.

“이렇게 부탁드릴게요. 네? 인호를  빼주세요. 제발요.”

“샤를롯 씨. …계속 이러실 겁니까?”

샤를롯은 다시 슬그머니 떨어졌다. 괜히 그의 심기를 건드릴까 봐. …그녀는 어떻게든 그의 비위를  맞춰야 했다.




“그럼  제자분이라도 만나게 해 주세요. 네?”

“…좋습니다.”

의외로 강준은순순히 허락했다.





다음 날, 샤를롯은 무림맹에 있는 검후의 제자, 이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녀는 강준과 함께 들어온 여자의 정체를 물었다.


“이분은 누구시죠?”


“그 남자의 동료야.”

“…아.”

이설의 얼굴은 순식간에 차갑게 굳었다. 샤를롯은 얼른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이제 자존심 따윈 없었다. 그녀는 인호를 빼내기 위해 무슨 짓이라도 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번만 자비를 베풀어 주세요. 이 은혜는 잊지않겠습니다.”


“나랑 얘기할 거 없어요. 제가 결정하는 게 아니니까요.”

“그래도 발언권이 있으시다고 들었어요. …제발 이렇게 빌겠습니다.  번만 도와주세요.”


“…그만 가세요.”


그러나 이설은 매몰차게 축객령을 내렸다. 샤를롯은 절망적인 심정으로 무림맹을 떠날 수밖에없었다.



“동생이 좀 화가  모양이더라구요. 설득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일단 목숨은 구한 것 같지만, 이 다음은 어떻게 될지 확신은 못 주겠군요.”


“그럼 어떡하죠? …제가 최대한 해결하겠다고 했다구요. 인호한테, 제가 해결하겠다고 약속했단 말예요.”


“…글쎄요. 그래도 최소한의 죗값은 받아야 하지 않겠어요? 일단 지은 죄가 너무 크니까.”




ㅡㅡ!!

샤를롯은 강준에게 들러붙었다.


“도와주기로 했잖아요. 강준 씨, 최대한 도와주시기로 했잖아요. 그러니까, 제발  도와주세요, 네?”

“저도 지금 많이 힘듭니다. 저라고 좋게 해결하고 싶지 않겠어요?”

“제가, 어떻게든 대신 치르면  될까요? 제가 조금이라도 죗값을 나눠서…!”

“미안하게 됐습니다.”




강준은 샤를롯의 어깨를 잡고 살짝 밀어냈다.



…안 돼. 안 돼ㅡ!


절망적이었다. 인호가 스스로 들어갈 때까지만 해도 어렵지 않게 나올 줄 알았는데, 일이 너무 꼬여 버렸다. …특히  제자라는 여자의 반응이 심상치 않았다.



그래도 지금 믿을 수 있는 사람은 강준뿐이었다. 그가 적극적으로 나서 준다면,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도  이설이라는 여자가 강준의 말은  듣는  같았으니까.


…그런데 저 남자를 어떻게 설득하지?



샤를롯은 저벅저벅 걸어가는 강준의 등짝을 심란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그녀는 며칠 전 에리카 언니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가지고 있는 게 이 몸뚱아리 하나니까. …한 번 유혹이라도 해 볼게.

유혹, 유혹…!

비겁한 방법이지만, 몸을 바쳐서 그의 환심을 사면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아냐, 아냐ㅡ! 내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ㅡ!



샤를롯은 안 될 일이라면서 고개를 휘휘 흔들었다. 그녀는 강준을 터덜터덜 따라갔다.




유혹, 유혹….



정말 못할 짓이었다. 절대 옳은 행동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제 그녀는 그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