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40화 〉외전 5. 나타샤 선생님. (5)
나타샤는 절망에 빠진 표정으로 이강준을 봤다.
“대체, 대체 왜 이러는 거야. …당신도, 당신도 한때 용사였잖아. 대륙에 대한 일말의 감정도 없어? 그러고도 인간이야? 그러고도 인간이냐구ㅡ!”
그녀가 그렇게 호소했으나 마왕은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좀 약하네. 더 설득해 봐.”
ㅡㅡ!!
그녀는 마왕의 잔인한 웃음을 보고 낙심했다. 그녀는 말발이 뛰어난 편은 아니니까. 그를 설득할 수 있을 가능성은 한없이 작았다.
“대륙을 상대로, 당신이 이길 거라고 생각해? …전 대륙이 힘을 합쳐서, 당신을 물리칠 거야ㅡ!”
나타샤는 마왕 이강준을 향해 대륙의 의지를 확실히 보여주었다. 마왕은 일부러 떠는 척했다.
“으, 그건 좀 무섭네. …그럼 본보기로 여기, 프란츠 왕국만 날려 볼까?”
ㅡㅡㅡㅡ!!!!
나타샤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그녀는 안 된다고 미친듯이 도리질쳤다.
“안 돼, 안 돼애ㅡ! 제발, 제발 그러지 마. 응? …여긴 마리아의 고향이기도 해. 당신 부인이잖아.”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다고 하면 돼. 그럼 마리아도 이해해 줄 걸.”
그녀는 용사 제이콥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어떻게든 이 미친놈을 막아야 했다. …그는 한다면 하는 놈이니까.
“혹시 그놈 생각하고 있는 거야? …이야, 좀 아쉬운데. 옛 애인을 두고 다른 남자를 생각한다고?”
강준은 삐뚜름한 웃음을 지은 채 나타샤에게로 천천히 다가갔다. 그녀는 두려워서 뒤로 주춤 주춤 물러났다. 그러나 곧 벽에 막혀 오도가도 못했다.
마왕은 나타샤의 턱을 와락 쥐었다. 읏ㅡ! 그녀는 공포와 증오가 섞인 눈으로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나, 네 생각 많이 했어.”
강준의 말소리가 좀 애틋해졌다. 나타샤는 시선을 휙 외면했다.
“넌 내 생각 안 했어?”
“…내가 당신 생각을 왜 해.”
“그래도 서로 즐기던 사이였잖아. 안 그래?”
“아냐. 나한텐 악몽 같은 시간이었어.”
“거짓말.”
ㅡㅡ!!
“날 속일 생각은 하지 마. 난 마왕이야. 네 생각 정돈 수월하게 읽을 수 있어.”
아, 아아ㅡ.
나타샤는 마왕에게서 빠져나가려고 몸부림쳤다. 안 돼, 안 돼, 들키면 안 돼ㅡ. 그녀는 자신의 속내가 들키는 게 너무 겁났다. …조르쥬가 아니라 딴 남자의 자지에 박혀 황홀한 쾌락에 교성을 내지르는 그 기억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너도 별 수 없는 암컷이구나.”
“아냐, 아냐….”
그러나 그녀는 마치 거미줄에 걸린 나비처럼 꼼짝달싹도 할 수 없었다.
마왕은 결국 그녀의 입술을 탐했다. 하웁ㅡ. 그녀는 입술을 꽈악 오므렸다. 그는 진득한 혀로 그녀의 입술을 마구 핥았다.
결국 그는 거센 저항에 물러났다. 그래도 그는 전혀 싫어하는 모습이 아니었다. 오히려 흥미 있는 눈치였다.
“그래, 언제까지 반항할 수 있나 한 번 보자. …넌 결국 나한테 오게 되어 있어.”
“절대 그럴 일 없어ㅡ!”
“그래, 그런 마음가짐, 참 훌륭해.…그럼 다음에 다시 오마.”
강준은 나타샤의 가슴을 한 번 꽈악 쥐어짠 뒤에 바람처럼 훅 사라졌다. 아아ㅡ. 그녀는 힘이 쭉 빠졌다. 그래서 바닥으로 훅 무너졌다.
도저히 상대할 수 없는 자였다. 그녀는 절망적이고 수치스러웠다. …다른 건 몰라도, 자신의 생각까지 들키는 건 정말 죽을 만큼 비참했다.
아냐, 아냐, 난 그런 여자가 아냐. 난, 난….
저 빌어먹을이방인의 자지를 바라는 이 음란한 몸뚱이가 저주스러웠다. 왜, 대체 왜ㅡ! 심지어 그걸 상대에게 들키고 말았다. 그건 그녀를 한없이 깊은 심연으로 떨어뜨리게 만들기 충분했다.
한참 멍하니바닥에 앉아 있던 나타샤는 억지로 힘을 내 일어났다. 그녀는 학생들을 생각했다. 이렇게 패배자처럼 쓰러져 있을 수 없었다. 어떻게든 힘을 내야 했다.
나타샤는 옷을 갈아입고 밖으로 나갔다. 이미 기사학교는 난리가 나 있었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전부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학교장과 선생님들은 그들을 돌려보내야 할지 말지를 결정하고 있었다.
“저것은 틀림없는 악의 징조입니다. 학생들을 돌려보내고, 저희들은 왕국과 힘을 합쳐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어느 선생님이 그렇게 주장했다. 다른 사람들도 동의하는 눈치였다. 학교장도 결국 그렇게 하기로 결정했다.
학생들은 서둘러 짐을 쌌다. 그래도 다들 나름 살 만한 집안의 자제들이라 돌아갈 곳은 다 있었다. 나타샤는 떠나는 학생들을 위로해 주면서 작별 인사를 했다. 거기엔 그녀를 진심으로 믿고 따르던 키아라도 있었다.
“선생님, 꼭, 몸조심하세요, 아셨죠?”
“그래, 걱정 마렴.”
학생들은 그렇게 하나둘씩 기사 학교를 떠났다. 그들이 거의 다 떠날 때쯤, 용사가 이곳을 찾아왔다. 그는 일단 학교장부터 만났다. 그 다음 나타샤를 찾아갔다.
그녀는 더 이상 강준에 대한 걸 숨길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녀는 그에게 마왕과 만난 사실을 털어놨다.
“마왕을, 만났다구요?”
“네, 마왕이요.”
“대체, 어디서요?”
용사 제이콥은 그 말을 선뜻 믿을 수가 없었다. 마왕이란 존재가 진짜 있는 줄도 모르는 상태에서, 갑자기 마왕을 만났다고 주장하니까. 아무리 나타샤 선생님의 말이라도, 생리적으로 불신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믿기 힘든 건 이해해요. 나라도 그랬을 거예요. …하지만 믿어줘요. 그놈은 분명 마왕이었어요. 증명까지 했다구요.”
“하지만 그….”
“제이콥. 날 믿어요, 응?”
용사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이 간절한 외침을 외면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그녀가 헛된 소리를 지껄일 위인도 아니었고.
“마왕이 누굽니까?”
“당신은 잘 모를 거예요. …예전에 용사였던 이방인이에요.”
“…이방인이요? 그 사람이랑 선생님이랑 무슨 연관이 있나요?”
“…좀, 친분이 있던 사이였어요.”
그때 용사의 머릿속에서 갑자기 그 빌어먹을 이방인 생각이 스쳤다.
- 내가 아는 여자랑 이름이 똑같네. 그 여자 보지맛이 아주 일품이었는데.
설마, 아니겠지? 아닐 거야. 우연일 거야.
“그놈 이름이…, 뭐예요?”
제이콥은 불안한 마음을 억누르며 놈의 이름을 물었다. 나타샤는 말할까 말까 고민하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강준이요.”
ㅡㅡㅡㅡㅡㅡㅡ!!!!!!
용사는 끔찍한 충격에 빠졌다. 아, 아아ㅡ. 우연 치고는 너무나 딱딱 맞아떨어졌다.
왜, 왜 하필, 왜 하필 나랑…!
절망은 곧 분노로 치환됐다. …아직 놈의 말이진짜인지 가짜인지도 몰랐다. 허풍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그는 그렇게 믿고 싶었다.
“제이콥. 왜 그래요?”
“…아녜요. 아무것도.”
“전, 전 이제 당신밖에 믿을 데가 없어요. …제이콥, 용사인 당신이, 우리들의 희망이에요.”
나타샤는 촉촉히 젖은 눈으로 제이콥에게 그렇게 말했다. 그것을 본 그는 어떤 투철한 사명감이 생겼다.
그녀를 반드시 지키고 싶었다.
사랑하는 그녀를 지키기 위해선 뭐든 할 각오가 됐다.
“걱정 마세요. …반드시 그놈을 처단할 테니까요.”
· · ·
해가 가려졌으나, 그 외에는 별다른 일이 벌어지진 않았다. 그러나 프란츠 왕국은 이 재앙의 징조에 떨었다. 수도는 전시 상태에 돌입했다.
수많은 사람들은 신전으로 몰려들었다. 그들은 신께 간절히 기도하며 부디 이 땅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않기를 빌고 또 빌었다.
용사 제이콥은 따로 자기 밑에 군대를 창설했다. 한 팔이라도 거들겠다고 몰린 수많은 청년들은 창칼을쥐고 병사가 됐다. 그렇게 모인 사람들의 수가 대략 오백이나 됐다. 용사는 그들을 백 명씩 잘라 하나의 부대로 구분했다. 그리고 나타샤는 거기서 용사의 임명을 받아 2번 백인대의 장이 됐다.
이런 저런 준비를 하는 새에, 이틀이란 시간이 눈 깜빡할 새에 지나갔다. 다행히 그때까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해는 여전히 가려져 있었다.
다른 마을에서도 수도로 피난을 왔다. 아무래도 높은 성벽이 있는 수도가 더 안전할 테니까. 그런 피난 행렬이 어마어마했다.
사람들은 세상이 망할 징조인가 보다ㅡ, 하고 두려움에 떨었다. 신전은 기도하려는 사람들도 북새통을 이뤘다. 수상한 종교집단도 생겼다. 그렇게 또 수도 내에 퍼진 이단을 사냥한다고 시끌벅적해졌다.
이런 상황에 늙은 국왕은 용사에게 공주를 소개시켜 주었다. 아무래도 용사 정도면 핏줄로 맺어두는 편이 좋겠다는 판단을 내린 듯했다.
물론 용사는 면전에서 그럴 수 없다고 거부하기는 애매했다. 지금 모두 힘을 합쳐야 할 시기에, 그런 소란을 만들어 내부에 분란을 조장할 필욘 없으니까.
당연히 그 소문은 나타샤의 귀에도 들어갔다. 물론 그녀도 그의 난처한 입장을 이해했다.
“차라리, 날 잊고 공주님과 맺어지는 건 어때요? …나 같은 여자 말고.”
“선생님, 제발 그런 말 마세요.”
제이콥이 그렇게 애원할 때마다, 나타샤는 거기서 이상야릇한 희열을 느끼곤 했다.
그녀는 못된 성질이란 걸 알면서도, 본능적으로 샘솟는 그 이기심을 완전히 없앨 순 없었다.
…그러면서 둘은 조금씩 조금씩 서로를 더 알아 갔다.
하지만 그들은 눈치껏 이강준의 얘기는 피했다.
그렇게 해가 가려진 지 나흘째ㅡ.
사람들은 이 상황에 적응하면서도, 불안감을 떨치지 못했다.그리고 그들을 현혹시키는 이단들이 슬슬 판을 치기 시작했다. 물건 값은 폭등했고, 범죄는 눈덩이 불듯 불어났다. 수도는 빠르게 아비규환의 도가니로 변했다.
나타샤는 치안대를 구성해 최대한 수도를 진정시키려고 노력했으나, 쉴새 없이 터지는 사건 사고에 서서히 절망하고 있었다. 심지어 백인대 내부에서도 갈등이 심했다.
그녀는 문득 혹시 마왕이 이것을 노린 게 아닐까ㅡ,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그가 벌인 일은 해를 가린 것뿐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이 거기서 서로 때리고 싸우기 시작했다.
자멸ㅡ.
나타샤는 제이콥에게 그 생각을 말해 주었으나, 그걸 안다고 해서 딱히 뚜렷한 방도는 없었다. 그들은 무력하게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보고 있어야 했다.
…그리고, 그렇게 맞이한 닷새째 새벽ㅡ.
밤새 뒤척이다가 겨우 선잠에 빠졌던 나타샤는 자신의 옆자리에서 무언가 인기척을 느끼고 왁 놀라며 깨어났다.
마왕 이강준이었다.
그녀는 침대에서 후다닥 내려와 검부터 꺼내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그에게 겨눈 채 사납게 노려봤다.
물론 강준은 전혀 위협이 안 된다는 듯이 선선하게 웃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 장난감으로날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러나 나타샤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적이었다. 대륙을 위해서 반드시 섬멸해야 할.
“당장 사라져ㅡ!”
“대우가 좀 그런데. 어디까지나 친목 도모를 위한 일인데.”
“용사님을 부를 거야.”
“아아, 그 새끼? …불러 봐 그럼.”
아ㅡ.
“불러 보라니깐. 마침 잘됐네. 탁자 위가 좀 휑하던데. 그 새끼 대가리를 잘라서 장식해 두면 딱 보기 좋겠다, 그치?”
마왕은 잔인한 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지껄였다. 그러나 나타샤는 놈이 그럴 만한 능력도 의지도 있다는 걸 믿어 의심치 않았다.
“대, 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왜 이러긴. 내가 너한테 뭘 했는데.”
“날, 날 괴롭히고 있잖아.”
“너도 바라는 거잖아.”
“아냐, 헛소리하지 마ㅡ!”
“끝까지 부정하겠다라….”
마왕은 삐뚜름하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이상하게 위압감이 들었다. 그녀의 몸이 잘게 떨렸다.
그는 그녀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손바닥으로 사타구니 쪽을 탁탁 쳤다.
“오랜만에 우리 나타샤 입보지 좀 맛볼까?”
“…뭐?”
“빨아 봐.”
“시, 싫어ㅡ! 당장 떨어져. 당장. 주, 죽일 거야ㅡ!”
나타샤는 마왕의 가슴에 검을 겨눴다. 그러나 칼끝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래? 찔러 봐그럼.”
마왕은 잔인하게 웃으며 한 발 나아갔다. 그러나 그녀는 찌르지 못하고 뒤로 물러났다. …통하지 않을 거란 건 바보가 아닌 이상 알 수 있었다.
“왜 안 찔러? 죽이겠다며. 방금 전 그 패기는 어디로 갔어?”
나타샤는 계속 뒤로 물러났다. 아, 아ㅡ.
결국 그녀의 등은 벽에 탁 막혔다. 더 물러날 구석도 없었다.
“찔러 보라니깐.”
마왕은 검끝이가슴을 콕 찌르는 거리까지 붙었다. 나타샤는 달달 떨다가, 결국 이를 악물고 눈을 질끈 감으며 팔에 힘을 주었다.
그러나 검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의 몸은 마치 돌덩이처럼 단단했다.
이, 이익, 이이익ㅡ!
나타샤는 어떻게든 찌르려고 악을 썼다. 그러나 아무 소용도 없었다. 그걸 내려다보던 마왕의 미소가 잔인하게 변했다.
“아무리 용을 써 봐야, 소용없어. …이제 알겠지? 네 발버둥이 얼마나 의미 없는 건지.”
아냐, 아냐, 아냐ㅡ.
“그러니까, 씨발, 자지 빨라면, 곱게 빨아. 응?”
아냐, 아냐, 아냐, 아냐아ㅡ!
나타샤가 점점 절망에 빠지고 있을 때, 갑자기 누군가 그녀의 방으로 난입했다. 용사 제이콥이었다.
“나타샤ㅡㅡ!!”
강준이 고개를 돌려 놈을 보았다.
“어이쿠, 이거 누구야. 내 친구 제이콥 아니신가, 응?”
“너, 너 이 개새끼야…! 당장 선생님한테서 떨어져ㅡㅡ!!”
용사는 번쩍이는 성검으로 마왕을 척 겨누며 외쳤다.
“옛 애인과의 재회에, 방해꾼이 나서면 쓰나.”
“닥쳐, 이 개새끼야아아아ㅡㅡ!!”
제이콥은 순간 눈깔이 휙 돌았다. 그는 마왕에게 달려들었다. 눈부신 성검이 화려한 궤적을 만들며 그를 향해 움직였다.
그러나 그의 검은 아무것도 없는 공간만 허무하게 갈랐다.
마왕은 그들의 눈앞에서 사라졌다.
제이콥은 숨을 헐떡이며 주위를 휘휘 훑으며 경계했다. 언제 어디서 놈이 갑자기 튀어나올지 모르니까.
그러나 마왕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제서야 용사는 반쯤 넋이 나가 있는 나타샤에게 다가가 그녀의 안위를 살폈다.
다행히그녀는 무사했다. 그는 그녀를 와락 안았다.
“다행이에요. 진짜 다행이에요, 선생님.”
“제,이콥….”
“내가 지켜줄게요. 내가 선생님 꼭 지켜줄게요. 그러니까, 그러니까, 걱정 말아요. 아셨죠?”
나타샤도 팔로 그의 등을 꼬옥 감쌌다.
“응….”
그리고 마왕 이강준이 그 모든 걸 지켜보고 있었다.
삐뚜름한 웃음을 지은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