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5화
프랑스 (1)
프랑스로 향하는 길.
국제적인 행사이지만 어떻게 보면 가장 규모가 적은, 그러니까 소규모의 인원만 향했다.
이 시기의 앙숙인 스페인과 프랑스.
북 이탈리아에서 피 튀기는 싸움을 했으니 앙숙이 되지 않았다는 말은 어불성설이었다.
최근 프랑스 내 재정 악화로 북 이탈리아의 알짜배기 국가들을 도로 토해낸 상태.
반면, 스페인의 경우 신대륙에서 밀려오는 금과 은으로 남부 이탈리아와 파르마에 영향력을 투사하고 있으니 프랑스 처지에서는 배가 아플 수밖에 없었다.
그런 배경을 가진 프랑스와 스페인의 관계.
그렇다 보니 나름 구색을 갖춘 조문단이지만 오스만 때와 달리 실무진이 전혀 참여하지 않았다.
나 혼자 가서 그냥 국밥…아니, 그냥 얼굴만 비추고 오면 되는 일.
앙리 2 세의 조문만 하고 나는 그대로 스페인 조문단과 헤어진 뒤 영국으로 향하면 됐다.
이런 배경이 있는 이번 스페인 조문단.
그래서 내 자유가 비교적 보장된, 나름 괜찮은 조문행이었다.
“마차가 조금 들썩일 겁니다. 각하.”
거마 관리관의 말에 엉덩이를 살짝 든 상태.
마차가 살짝 들썩이더니 이내 다시 원상태로 돌아왔다.
지금 우리가 지나고 있는 길은 과거 툴루즈 백작령 위쪽에 위치한 퀘르시 혹은 께흐시로 불리는 지역.
몰타 기사단의 그랜드 마스터, 장 파리조 드 발레트의 고향이기도 한 장소를 지나가고 있었다.
과거 로마의 속주였던 갈리아 지방이지만,
서고트 족과 프랑크 족의 침입으로 완전히 박살 나버린 남부 프랑스 내 로마 유산들.
그렇다 보니 이쪽을 통해 수도로 향하려면 꽤 고생해야 했다.
원래대로 라면 다른 길로 갔겠지만…
그럴 때 장례식이 다 끝날 때쯤에 도착할 테니 이 험한 길을 가야만 했다.
프랑스와 스페인이 앙숙 관계지만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무례하게 할 수 없는 이유.
그 이유는 이 당시 대부분의 유럽 왕가는 서로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직접적인 피는 연결되어 있지만 혼인 관계로 이루어진 각 국가들.
그렇다 보니 어떻게 보면 서로 친척 관계다 보니 어쩔 수 없었다.
단적으로 현재 사망한 왕인 앙리 2 세의 아버지, 프랑수아 1세의 경우 오스트리아의 엘레오노르와 결혼했는데…
이 엘레오노르는 내 아버지 카를 5 세 보다 2 살 많은 친누나였다.
이렇게 얽히고설킨 유럽의 왕가들.
그래서 최소한의 예의는 지켜야만 했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프랑스의 수도로 향하는 길.
나는 저 멀리 고즈넉한 들판을 보며 생각에 빠져들었다.
* * *
유럽의 전통적인 강호, 프랑스.
그런 프랑스의 왕이 기사들의 스포츠, 토너먼트를 하던 중 사망한 건 정말 기이한 일이었다.
16 세기에 있었던 많은 사고사 중에서도 손으로 꼽히는 그의 죽음.
사실 앙리 2세 이후로 발루아 왕조의 가세가 기울기 시작했다.
이 틈을 잘 노린 카트린 드 메디시스.
이 당시 이탈리아는 부유하지만 촌동네라는 인식이 있었기에 그녀는 프랑스 왕궁에서 소외 받았었다.
하지만 남편의 사후 기울어 가는 가문을 세우기 위해 정치적으로 왕성한 활동을 시작한 그녀.
앙리 2 세 사후 왕이 된, 병약한 프랑수아 2세를 보좌하고 있었다.
사실상 비선 실세에 가까운 카트린.
문제는 그런 시어머니를 깔보는 며느리, 메리 여왕이 그녀의 앞길을 막고 있었다.
이걸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앙리 2세의 장례식장.
스코틀랜드 출신인 메리 여왕이 나서서 사람들을 맞이하고 있었고,
카트린 드 메디시스로 보이는 사람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이걸 티를 낼 수 없는 상황.
그래서 나는 메리 여왕, 스코틀랜드 출신인 그녀에게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이렇게 조문을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검은 드레스를 입은 그녀.
이 시기의 아이돌이라 할 정도로 무수한 남자들의 청혼을 받는 여인 답게 검은 드레스를 입었음에도 아름다움이 눈에 보였다.
적갈색 머리카락에 활발하고 건강한 미녀 상.
지적이며 키가 큰 엘리자베스의 친척이라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아름다운 외모였다.
하지만 자제력이 부족한 그녀.
적성국이었지만 나름 친인척 관계인 스페인 조문단의 수장인 나를, 그것도 펠리페 2세의 이복동생을 상대하는데 대충대충 상대했다.
내 입장에서는 상관 없지만,
그녀의 성격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모습.
이런 자제력이 부족한 성격 때문에 시어머니를 피렌체 출신 장사꾼이라 폄하해 눈 밖에 나버린 건 유명한 일이었다.
“그럼 저는 이만…”
그렇게 스페인 조문단을 뒤로하고 다른 사람을 상대하러 가는 메리 스튜어트.
나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혀를 찼다.
“좋은 사람은 아닌 거 같아 보입니다.”
이번 조문행에 참가한 가레스 1 중대장.
내 개인 근위병의 책임자이자 내 경호 대장으로 그를 데려왔다.
생각 같아서는 무관장인 지암바티스타를 데려와 같이 암호표 제작을 할 생각이었지만,
내가 부재중일 시 그가 말라가-세우타 영지를 수호해야 했기에 차선책으로 아군 내 군부 2 순위인 가레스 1 중대장을 데려왔다.
마침, 테르시오 훈련 당시 저지대에서 훈련 받은 경험이 있는 그.
그의 말로는 지옥 같은 경험이라 했었는데...
그를 제외하고는 저지대에 아는 사람이 없었는지라 길잡이겸 가레스 1 중대장이 뽑혔다.
아무튼 내게 이런 말을 하는 가레스 중대장.
나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는 조심하도록. 여기는 프랑스 왕궁이니 벽에도 귀가 붙어 있을 수 있다.”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가레스 중대장.
그는 내게 바짝 붙어 주변을 살폈다.
앙리 2 세의 장례식.
유럽의 전통적인 강호, 프랑스 왕의 장례식이다 보니 많은 귀족들이 모여 있었다.
복잡한 장례식.
나는 식장 내부를 돌며 프랑스 내 유력 귀족들과 대화를 나누었다.
적성국이었지만 같은 카톨릭 국가.
물론 오스만 제국과 동맹 관계인 프랑스를 온전히 카톨릭 국가라보기 어렵지만,
그래도 비슷한 문화를 공유하다 보니 오스만 때보다 사교 활동이 원활했다.
이들 중 내게 관심을 보이는 일부 귀족들.
브르타뉴 공작, 로렌 공작, 사보이 공작 등.
프랑스 내 아직 남아 있는 공작들과 사교 활동을 이어 나갔다.
특히 내게 적극적으로 다가오는 로렌 공작.
로렌 지방은 저지대 인근, 그러니까 프랑스와 저지대 사이의 지대였기에 나를 적극 반겼다.
어떻게 보면 상속권이 있는 룩셈부르크 인근 지방.
그렇다 보니 로렌 공작 샤를 3 세는 나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싶어 했다.
프랑스 특유의 귀족 복식에 깃털 장식을 한 벨벳 모자를 쓴 공작.
그는 나를 바라보며 반가운 듯 미소를 지었다.
“룩셈부르크 공작 님을 이렇게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날 공작으로 불러 주는 로렌 공작.
나는 그의 말에 손사래를 치며 겸손한 척 자세를 잡았다.
“아직 상속을 온전히 받지 못 했으니 말라가-세우타 백작이라 불러 주시길 바랍니다.”
“하하. 룩셈부르크는 곧 공작 님에게 갈 예정이니 미리 호칭해 문제 될 것이 있습니까?”
“이는 신성로마제국과 스페인, 나아가 외스터라이히(Österreich)-합스부르크의 문제이니 자제를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러시다면 원하시는 대로 불러 드리겠습니다.”
이 부분을 걸고 넘어질지도 모르는 내 형, 펠리페 2 세.
그렇다 보니 항상 조심할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그렇게 기분 나빠하지 않아 하는 로렌 공작.
그의 처지에서는 나와의 우호를 쌓기 위함이니 내 의견을 존중해 주는 듯 보였다.
프랑스와 신성로마제국 사이에 있는 로렌 지방.
그렇다 보니 로렌 공작은 언제나 두 세력 사이를 오가는 중립 정책을 해왔었다.
그의 아버지인 로렌 공작, 프랑수아 1 세도 마찬가지.
하지만 지금의 공작 샤를 3 세는 프랑스에 더 많은 신경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의 아내가 앙리 2세와 카트린의 딸, 발루아의 클로드였기에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말라가-세우타 백작 님께서는 장례식 이후 일정이 어떻게 되십니까? 시간이 되신다면 저희 영지로 초대를 하고 싶은데…”
살짝 운을 띄우는 로렌 공작.
그는 프랑스와 신성로마제국 사이의 중립 관계에 한계를 느꼈는지 나를 통해 스페인 세력과도 연을 닿으려는 것으로 보였다.
저지대 17 개 주를 지배하는 스페인.
그 저지대 바로 밑으로 룩셈부르크가 있었고 그 룩셈부르크의 상속권은 내게 있었다.
나를 통해서 스페인 세력과 관계를 맺어보려는 그의 행보 내 이상한 점은 없었기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장례식에는 하루 만 있을 예정.
원래 목표로 한 카트린 드 메디시스를 만나지 못했으니 일정에는 문제가 없었다.
“초대 감사합니다. 마침 저지대를 거쳐 잉글랜드로 향하려 했는데 로렌 공작 님의 고견이 듣고 싶습니다.”
“잉글랜드 말씀이십니까?”
고개를 갸웃하는 로렌 공작.
나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예, 개인적인 일로 향하고 있습니다.”
“확실히 스페인 군대가 있는 저지대를 통해 잉글랜드로 가는 것이 좋긴 하지만…”
잠시 뜸을 들이는 로렌 공작.
그는 주변을 살피더니 조심스럽게 말했다.
“북부 7 개 주에 이단자들이 득실 거리는데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 누이인 마르게리타 총독도 만날 겸 향하려 하고 있으니 너무 걱정 하지 않으셔도 될 거 같습니다.”
펠리페 2 세의 여동생이자 내 누나인 마르게리타 총독.
현재 형의 명령을 받아 저지대 총독으로 저지대 17 개 주를 관리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이미 알고 있는 부분이지만 짐짓 모르는 척하는 로렌 공작.
확실히 프랑스와 신성로마제국을 오가는 중립 외교를 하는 사람 답게 연기력이 장난이 아니었다.
대략 18 살에서 19 살 정도로 보이는데 늙은 너구리 하나 상대하는 기분.
그래도 내게 피해를 입히는 부분은 없으니 그와 대화를 이어 나갔다.
“지금 저지대의 상황이 많이 안 좋습니까?”
“예, 조금 멀리 떨어져 있는 제 영지로도 종종 위그노(Huguenot)들의 과격 행위가 들려오곤 합니다.”
프랑스 내 개신교도들.
이들은 프랑스와 오늘날의 벨기에에 해당하는 왈롱 지역에서 활동하는 이단자들이었다.
이들과 연계하여 확장을 꾀하는 북부 7 개 주의 청교도들.
여기에 추가로 잉글랜드 내 청교도들과도 연락을 주고받으며 연계를 하고 있으니…
북부 프랑스, 저지대, 남부 잉글랜드는 현재 유럽 내 화약고라 할 수 있었다.
원래 역사에서도 결국 터져 버린 전쟁.
흔히 위그노 전쟁이라는 일이 터진 것도, 그리고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이 일어난 것도 이 지역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