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새로운 인생(2)
2016.12.17.
백작 영애...? 갑자기 무슨...?
이곳에 처음 올 때는 유모의 딸인 고아로서 왔었기에, 이들은 내 사정을 전혀 몰랐다. 그래서인지 정말 숨겨진 백작 영애라도 대하듯 수녀는 정중했다.
부담스러울 정도로 정중한 태도였으나, 그녀의 눈을 보니 뭐라고 생각하는 지 뻔히 느껴져 별로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뭐? 그러고 보니 어쩐지 귀족적이게 생겼다 싶었다고? 귀족핏줄인 줄 알았으면 그렇게 구박하는 게 아니었는데, 설마 이르진 않겠지? 라니...
그 동안 나한테 한 짓이 찔리긴 하나 보구나?
쳇. 뭐 그다지 좋은 기분은 아니지만 어차피 이제 두 번 다시 볼 일 없는 사람이니 뭐 어쩌겠어.
아무튼! 아... 나의 고난이 벌써 끝났구나!! 오라버니, 이튼 오라버니가 드디어 날 데리러 온 거야!!
나는 환희에 차올랐다. 잠들기 직전까지 여길 떠나면 뭐 먹고 사나 걱정했던 근심들이 싹 날아갔다.
어 하는 새에 나는 이미 마차에 태워졌다. 잠에서 덜 깨 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이미 백작가로 향하고 있는 것이었다.
잠깐, 그런데 뭔가 이상한데? 잃어버렸던 딸은커녕 난 사생아조차 아니잖아. 백작가의 핏줄이라고는 한 방울도 섞이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아무리 이튼 오라버니가 힘을 써줬다 해도, 백작 영애로서 날 데려간다고? 기껏 해야 후견인이 되어 주는 정도일 텐데, 딸이라니 말도 안 돼. 그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데!
생각해 보니 내가 참 한심했다. 아무리 잠결이라도 어떻게 뒤도 안 돌아보고 덥석 여기에 올라탄 거지?
설마... 데려가서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이려는 건가? 그래서 이렇게 야심한 시각에?
멍청하게 이런 걱정이 이제야 퍼뜩 들다니... 하지만 난 이미 마차에 태워져 실려 가고 있었다.
달칵
혹시 해서 문을 열어보았지만 역시나 잠겨 있었다. 도망갈 구석은 없었다.
아냐... 평민 고아 하나 죽는다고 해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을 텐데, 사람을 시켜 수도원에서 독살시키는 게 낫지 왜 굳이 백작가에서 데려간다고 공공연하게 알리겠어?
일단은 죽일 생각은 아닌 것 같으나, 나는 긴장을 풀지 않은 채 상황을 주의 깊게 지켜보기로 했다.
그럼 이제 와서 내가 필요해지기라도 한 건가? 이게 그나마 가장 그럴싸한 추측이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확신할 수가 없었다.
***
“네? 뭐라고요?”
내가 지금 무슨 말을 들은 거지?
한밤중에 불려왔건만, 정작 백작가의 사람 누구도 만나볼 수 없었다. 심지어 날 불러오는 데 힘썼을 거라 생각하는 이튼 오라버니마저.
날 홀로 맞이한 건 젊은 집사였다. 원래의 노집사는 그새 교체된 것인지 모르는 얼굴이었다. 이 자는 그럼 나를 정말 숨겨진 딸, 한 마디로 사생아인줄 알겠구나.
그보다 정말 다시 백작영애가 되라니...
조금 전에 집사는 백작 부부의 결정을 나에게 일방적으로 전달했다. 그리고 멍하니 되묻는 나에게 기계적인 답변을 반복하고 있었다.
“말씀드린 그대로입니다, 아가씨. 주인님께서 아가씨께 하해와 같은 은혜를 베풀어 백작가에 입적시켜 드리기로 하셨습니다.”
“아, 아니 그 부분 말고 그 뒤에 부분이요!”
집사는 심드렁한 얼굴로 다시 한 번 입을 열었다.
“백작가의 막내딸로서 셀리나 공주저하의 시녀가 되어 그라츠 제국 황궁으로 가셔야 합니다.”
“............”
역시 이 세상은 아무래도 날 호락호락 잘 살게 해 줄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나는 순식간에 상황이 어떻게 된 것인지 파악하고야 말았다.
말했다시피 내가 환생한 나라인 리테인 왕국은, 옆옆 나라인 그라츠 제국과 거의 십 년째 전쟁 중이었다.
그리고 이름에서부터 보면 알겠지만, 고작 일개 왕국이 제국을 이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것도 현재 대륙의 패권을 쥐고 있는 가장 강한 제국을 말이다.
결국 오랜 전쟁을 끌어오던 리테인 국왕은 제국과 강화협정을 맺은 모양이었다. 그리고 공주는 아마도 볼모로서 제도에 끌려가는 거겠지.
이왕이면 볼모층을 탄탄히 하기 위해 각 유력 귀족가문의 영애를 시녀로 함께 데려가려는 것일 테고.
하아... 역시 내 인생은 꼬였어.
아냐, 잘 생각해 보면 수도원에 처박혀 있는 것 보다는 나을 지도? 어쨌든 그곳은 황궁이란 말이지? 높으신 귀족 나리들을 많이 만나볼 수 있는!
게다가 무늬뿐이긴 하지만 귀족 영애가 될 수 있다고! 수도원 출신 평민 고아에 비하면 하늘과 땅 차이야!
그래, 인정하자. 윈윈이라고.
백작가에 딸은 하나밖에 없다. 정품 비올레티. 그런데 친딸을 볼모로 보낼 수는 없겠지.
아마 레비넌 백작가 뿐 아니라 모든 가문이 발칵 뒤집어 졌을 게 뻔했다. 어디서 먼 조카딸이라도 구해 오든가, 평소에는 인간 취급도 안 하던 사생아를 부랴부랴 데려 오든가 발등에 불이 떨어졌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내가 생각해도 최적의 제물이다. 제도로 가서 죽든 말든 전혀 신경 쓸 필요 없는 존재인데, 귀족의 예법에는 빠삭하다. 이만큼 딸로 위장하기 좋은 경우가 어디 있을까?
아, 물론 딸이라 봤자 사생아 타이틀이겠지만 말이다.
한참을 고민하던 나는 결국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거부한다 해도 소용없겠지만, 적어도 그냥 내 의지로 선택하는 기분이라도 내고 싶었다.
“알겠어요. 출발은 언제죠?”
“일주일 후 왕도로 출발합니다. 왕도에 모인 후 그라츠 제국 황궁으로 다시 출발한다고 합니다. 내일부터 일주일 간 간단한 교육이 있을 테니, 일단은 주무시기 바랍니다.”
집사는 빠르게 말을 남기고 등을 돌렸다. 그리고는 시녀에게 눈짓을 해 내게 방을 내주라고 했다.
“잠, 잠깐만요!”
“네.”
집사는 뚱한 표정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아마도 사생아라고 제대로 아가씨 대접을 해 줄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우씨, 니 생각 다 들린다고!
사생아임에도 이런데, 내가 백작가의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자신과 같은 평민이라는 걸 알면 얼마나 업신여길지 불 보듯 뻔했다.
반드시 상류층으로 기어 올라가겠다는 다짐을 다시 한 번 되새기며, 나는 다급히 물었다.
“오라버니, 이튼 오라버니를 만나보고 싶어요.”
내 말에 집사는 잠시 당황한 표정이었다. 일개 사생아인 내가 백작가의 도련님을 잘 아는 듯이 말하는 게 이상해 보였겠지. 흥, 나 세 달 전까지만 해도 이 집에서 살았었다고!
“이튼 오라버니도 제 소식을 알고 있나요?”
집사가 침묵하든 말든 나는 재차 독촉했다.
“.......아가씨. 이튼 도련님께서는 저택에 안 계십니다.”
“네? 왜요? 출타중인가요?”
“자세한 내용은 말해드릴 수 없습니다. 그럼...”
쌩하고 등 돌려 떠나는 집사에게 나는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했다.
오라버니는 나를 잊었나봐... 내가 여기 온 것도 오라버니의 뜻이 아니었어...
마음이 너무 아팠다.
아냐, 지금 이런 감상적인 기분 따위에 빠져 있을 때가 아니지... 이제 완전히 새로운 인생이 시작된다고. 나 잘 할 수 있을까?
***
다음날부터 교육이라는 게 시작되었다. 물론 사생아인 내 설정 때문에 구색을 맞추는 것뿐, 난 더 이상 귀족의 소양 따위 배울 필요가 없었다.
단, 지금 이 꼴로는 누가 봐도 백작 영애로 보이지 않았으니 피폐해진 내 몰골을 회복시켜 줄 필요는 있어 보였다.
“아가씨, 목욕물을 준비했습니다.”
아... 좋다. 이게 얼마 만에 누리는 호사야...
내 몰골 귀족영애 만들기 프로젝트 덕분에, 나는 간만에 사치스러운 목욕시중과 마사지를 받고 있었다.
다 좋은데 한 가지 단점이라면...
저택에 아직 내 얼굴을 아는 고용인들이 남아있었기에, 방에 거의 감금되다시피 지내야 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한때 내 부모님이었던 사람들은 단 한 번도 나를 보러 오지 않았다. 어느 정도 예상했던 일이지만, 그래도 서운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래도 이게 어디야... 일주일간 놀고먹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다!
며칠 잘 먹고 잘 자니, 비루했던 꼴이 많이 봐줄만 하게 바뀌었다. 밭일로 인해 거칠어지고 그을린 피부를 되돌리기 위해, 하녀들이 달라붙어 매일같이 피부 관리를 해 주었으니까.
그런데 마음 한구석이 허전했다.
“이튼 오라버니...”
날 벌써 잊은 건가요...
고아원에 있는 동안에도 오라버니는 내게 편지 한 통 하지 않았었다. 매일매일 눈이 빠지게 기다렸는데...
덕분에 새삼 깨달았다. 이 넓고 막막한 세상에서 나는 철저하게 혼자라는 것을...
아냐. 아직 단정하긴 일러. 오라버니가 내가 있는 곳을 몰랐을 수도 있잖아... 백작 내외라면 충분히 알려주지 않았을 만 해.
사실 그때 나도 백작가를 떠나는 순간까지 내가 정확히 어디로 가는지 몰랐었으니 말이다.
에휴, 이런 고민도 사치지... 사실 허전한 마음보다는, 당장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더 컸다.
이제 내일이면 왕도로 떠나는 구나... 그라츠 제국에 가면 무슨 일을 하게 될까...
걱정 반, 기대 반 설레는 마음으로 나는 일찍 잠이 들었다.
***
“아가씨, 아가씨!”
일찍 자길 정말 잘했다.
서둘러 출발해야 한다며 하녀들이 나를 해뜨기 전부터 득달같이 깨웠기 때문이다.
“하아암... 졸려...”
내 상태가 어떻든 간에 하녀들은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단장시켰다.
순식간에 준비가 끝나고, 나는 마차에 타기 위해 방을 나섰다.
그런데 그때,
“리엘 아가씨. 마님께서 부르십니다.”
막 계단을 내려가려는데, 하인 한 명이 와서 나에게 전했다.
“...저를요?”
백작부인이 날...? 한때 어머니였던, 하지만 지금은 생판 남이 되어버린 백작부인이다.
필요에 의해 날 다시 데려오긴 했지만, 일주일간 나를 쳐다보지도 않던 그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혹시나 하는 기대감에 설렜다. 그래도 15년간 딸이었으니, 조금이나마 정이 남아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난 걱정 반 기대 반의 마음을 가지고 하인을 따라 백작부인을 보러 갔다.
똑똑
“마님, 리엘 아가씨를 모셔왔습니다.”
“들어오너라.”
나를 안내해 준 하인은 공손히 인사하고 물러났다. 방안에는 나와 백작부인 단둘밖에 안 남았다.
날 대체 왜 부른 거지...? 이제 와서 왜?
“.........”
뭐라고 불러야할지 몰라, 일단 난 말없이 인사를 올렸다.
한참을 가만히 앉아있던 백작부인은, 곧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