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새로운 인생(3)
2016.12.18.
“그래. 주제를 아는 것 같으니 다행이구나.”
“.......”
마음이 욱씬 아팠다. 이건 예상보다 더 잔인했다.
“뻔뻔하게 어머니라고 부르기라도 할까 걱정했다만, 그래도 그리 멍청하진 않은 모양이구나.”
차가운 눈동자에는 조금의 온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나를 경멸하는 그녀의 생각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
“네 역할에 대해 주의를 주러 불렀다. 잘 듣거라.”
“네. 마..님.”
“너도 알다시피, 넌 심지어 남편의 사생아도 아니지. 하지만 쓸데없이 입을 놀리고 다녔다간 어떻게 될지 스스로 잘 알고 있겠지?”
제길... 백작영애로 살며 받은 교육 덕에 귀족법에 대해서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반쪽 귀족이기라도 한 사생아는, 배우자의 동의하에 가문에 입적시킬 수 있다. 하지만 나 같은 평민은 결코 귀족가에 입양될 수 없는 게 법이었다. 귀족가에 입양될 수 있는 건 같은 귀족뿐이니까.
하지만 레비넌 백작가의 친척 중에는, 입양할 만한 내 또래의 여아가 전혀 없었다. 그렇기에 날 사생아로 위장해서 보내려는 것이다.
귀족사칭죄는 중죄였다. 그렇기에 보통이라면, 생판 남인 평민 고아를 사생아로 위장할 생각도 못 한다. 출신이 다 티가 날 테니 말이다.
특히 최근 들어 개발된 성법이 문제였다. 사생아라면 적어도 신전에서 핏줄을 증명해 보일 수 있지만, 난 그것도 불가능하니까...
하지만 굳이 남의 집 사생아의 진위 여부를 따지는 사람은 거의 없다. 특히 나처럼 귀족적으로 잘 교육받은 모습을 보면, 그냥 어릴 때부터 거둬들여 키운 사생아인가보다 할 테니...
“네 비천한 출신이 드러나지 않도록 행동거지를 각별히 주의하거라. 한때 비올레티의 자리를 꿰차고 교육받았으니, 그 정도는 가능하겠지.”
그렇다 해도 불안요소가 있는 건 사실이니, 백작부인이 저렇게 신신당부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걸리면 말 그대로 끝일 테니까.
아마 백작가는 나에게 속았다고 발을 빼려 들겠지? 그럼 나만 끝장이야... 하지만 절대 혼자 망하지는 않겠어!
“네. 알겠습니다.”
이런 불안요소에도 불구하고, 백작가에서 비올레티 대신 나를 보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
뭐, 이젠 그것도 나랑 아무 상관없기에, 난 그저 가만히 대답했다.
“결코 레비넌 가문에 누를 끼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다. 만약에라도 딴 마음을 품었다간, 결코 곱게 죽지 못할 터이니 명심하도록 해라.”
“네.”
그 말을 끝으로 백작부인은 축객령을 내렸다.
“하아...”
한심하게도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몇 달 만에 다시 만난 한때의 어머니가 내게 한 말은, 일을 망치면 결코 곱게 죽지 못할 거라는 협박뿐이었다.
리엘, 바보 리엘. 대체 뭘 기대한 거니...? 이럴 줄 몰랐어? 울지 말아야지... 울면 나만 손해야. 울어봐야 달라지는 것도 없는데...
난 눈물을 슥 닦고, 현관으로 내려갔다. 마부 겸 기사 한명과 하녀 한 명이 전부인 단출한 일행이 보였다.
아무도 배웅해주지 않은 초라한 출발이었다. 그래도 공식적으로는 백작영애라 그런지, 가문의 문장이 새겨진 마차를 내어 주긴 했다.
***
마차여행은 그저 지루했다. 그래도 하루 종일 멍하니 창밖을 내다보며 앞으로의 처지를 고민하다보면 하루하루가 금세 지나갔다.
이제부터 어떻게 살게 되는 걸까? 내 인생인데 어떻게 흘러갈지 전혀 종잡을 수가 없으니 두려웠다.
흥, 괜찮아!! 약해지지 말자!
지금은 비록 이렇게 보잘 것 없지만, 난 반드시 팔자 펴 보일 거야! 남이 모르는 특별한 능력도 있으니 할 수 있어!!
아, 맞다. 남들에게도 꼭꼭 숨긴 내 특이한 능력이 뭐냐면... 그건 바로....!! 사람의 마음을 읽는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아무 생각이나 다 쏟아져 들어오는 건 아니다. 그랬으면 벌써 미쳐 죽었게?
조건이 생각보다 까다롭다. 나를 향해 하는 생각만 읽을 수 있으며, 그것도 일단 눈을 마주친 상태에서 꽤나 집중해야 가능하다. 그래서 생각보다 쉽지가 않다.
대화 중에는 내 머릿속 역시 꽉 차 있는데다가, 무언가 말하고 있기라도 하면 정신이 자꾸 흐트러진다. 상대방이 말할 때도, 대화내용 들으랴, 집중해서 속마음 들으랴 정신이 없다.
아무튼 쉬운 일은 아니지만, 이걸 잘만 활용하면 순진한 십대 소년 하나 공략하는 건 일도 아니겠지?
게다가 내 능력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내가 정말 순수하게 이 세계에서 처음 태어난 아기였으면, 크면서 무심결에 능력을 보여 들켰을 거다.
하지만 난 어렴풋이 전생의 기억이 있었고, 내가 정상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그러니 누구에게도 내보였을 리가 없다. 괜히 마녀취급이나 당하면 끝장이니까!
그리고 어차피 영애시절이었던 동안은 굳이 머리 아프게 이런 능력을 쓸 필요도 없었다. 다들 내 눈치만 보며 굽실거리는데, 뭣 하러 내가 남의 머릿속까지 들여다보며 상황파악하려 노력하겠어?
하지만 지금은 처지가 전혀 달라졌으니, 적극 활용해야겠다.
근데 왜 이런 능력이 있는 거지? 전생을 기억하는 거랑 뭔가 관련이 있나? 초능력은 뇌의 이상 때문이라는 말도 있는데...
아무튼 이 능력을 비롯한 이런저런 이유들 때문에, 어릴 때부터 난 기억이 참 뒤죽박죽이었다. 그리고 성장하면서 점점 머리가 발달함에 따라, 깊숙이 가라앉아있던 기억들이 점차 떠오르며 더 복잡해졌다.
그 덕에, 가끔 나도 모르게 전생의 지식이 불쑥 튀어나오기도 한다. 나도 모르는 말들이 가끔 제멋대로 툭툭 튀어나오는 것이다.
한 마디로 난 조금 이상하다. 하지만 알 게 뭔가, 성공만 하면 되지!
덜컹
“내리시지요, 아가씨”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왕궁에 도착해 있었다.
왕궁이라... 으 떨리네...
마차에서 내리자 눈앞에 황토빛 대리석으로 지어진 건물이 보였다.
“여기가 왕궁?”
아니, 왕궁 치고는 너무 초라하잖아.
“왕궁에 딸린 고용인들의 숙소입니다.”
“.......”
아차, 나 시녀 신분이지. 무슨 공주님 같은 게 아니라... 에휴... 왕궁이란 말에 잠깐 들떴네...
“여기서 하룻밤 묶고, 내일 아침에 그라츠 제국으로 이동한다고 합니다. 그럼 전 여기서 이만.”
날 데리고 온 기사는 할 말만 하고 재빨리 사라졌다.
“........빠르기도 하지.”
벌써 밤이었기에, 일단 난 신분패를 들고 건물의 쪽문으로 향했다.
그러고 보니 이 신분패, 빨리도 만들었네. 수녀원으로 날 데리러 오기 전에 이미 다 작업해 놓았던 거구나...
신분패에 적힌 내 이름은 다행히도 리엘이었다. 리엘 반 레비넌. 수도원에서 내가 리엘이라고 불린다는 걸 미리 조사해 둔 모양이었다.
이름 새로 지어주기도 귀찮았나 보구나...
입구에서 신원을 확인받자, 나는 곧 시녀들의 숙소로 이동되었다. 하녀가 방으로 안내해 주었다.
“이곳에 짐을 풀면 됩니다.”
4인 1실... 수녀원의 8인 1실보다는 나았지만, 평생 혼자 방을 쓰던 나는 2인실도 고역이다.
뭐 하룻밤이니까...
다들 이미 자고 있는지 방 안은 어두웠다. 난 대충 빈 침대를 찾아서 조용히 살금살금 기어들어갔다.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 시커먼 방 안은, 마치 불확실한 내 미래 같았다.
그래도 진짜 15세 소녀가 아니라 환생자라 다행이다.
기억과 지식은 흐릿하지만, 그나마 마음만은 꿋꿋하달까... 합산 나이가 40대인걸 뭐. 내가 대충 27세쯤에 죽었으니, 27 +15 하면 대충 맞지?
물론 현재 몸 나이가 어려서인지 머릿속이 꽤 유치하긴 하지만... 전생을 대충 반만 쳐 줘도 눈높이는 거의 30이다.
그러니까 화이팅!
난 그런 생각을 하며 순식간에 곯아떨어졌다. 하루 종일 마차에 실려 왔으니 피곤할 만도 했다.
***
새벽부터 두드려 깨워진 난, 다른 시녀들과 함께 작은 홀로 이동되었다.
그나저나 텃세 같은 게 없어야 할 텐데... 나보다 먼저 도착한 애들이 이미 지들끼리 무리를 만들어 놨으면 어쩌지...?
“저기, 넌 무슨 출신이야? 너도 혹시 영애님 같은 거야?”
멍하니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데, 누가 다가와 물었다.
“응? 아, 안녕? 난 레비넌 백작가에서 왔어. 리엘이라고 해.”
“안녕. 난 줄리야. 근데 그런 거 말고... 넌 무슨 출신이야? 이름 불러도 돼?”
“응?”
“설마, 진짜 백작 영애님이야? 친딸?”
“아, 아니...”
무슨 출신을 묻는가 했더니, 진짜 신분을 묻는 것이었다. 친딸인지, 조카딸인지, 사생아인지 등등...
음, 뭐라고 대답해야 하나. 설정 상으로는 사생아이지만 사실은 완전 가짜인데 15년간 친딸인 줄 알았다고 하면 또라이 같겠지?
“아... 난 사생아야. 넌?”
그래서 그냥 설정상 신분을 둘러댔다. 내 신분이 들통 나면, 나도 백작가도 끝장이기 때문이었다.
“정말? 나도! 여기 오기 전까지는 저택에서 하녀로 허드렛일을 했어.”
“그렇구나...”
“갑자기 영애랍시고 교육을 받으려니 죽을 맛이었어. 너도 그랬지?”
“으응...”
뭐 너랑은 조금 다르지만 내 인생도 만만치 않게 다이내믹했단다. 휴...
“그나저나, 우리 사생아는 사생아들끼리 뭉쳐야 해. 저기 보여?”
“응?”
아니나 다를까 이미 파벌은 형성되어 있었는지, 지들끼리 삼삼오오 수다를 떠는 모습이 보였다.
“이 안에서도 신분에 따라 뭉쳐있거든. 저 쪽 반질반질해 보이는 무리들은 진짜 영애들.”
“정말? 친딸을 보내기도 해?”
나는 깜짝 놀라 물었다. 혹시라도 친딸시절 내 얼굴을 본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행히 아무도 아는 얼굴은 없었다.
하긴, 그런 것도 미리 조사하지 않고 날 데리러 왔겠어? 레비넌 영지 근처의 가문에서는 다들 사생아를 보낸 모양이었다.
어차피 난 아직 성년이 아니라 지역 사교계에 데뷔도 안 했다. 그리고 교류를 가졌던 주변 영지의 영애들도 몇 없었다.
“응. 나도 잘 모르겠지만, 일부 귀족가에서 딸을 통해 권력을 노리려는 속셈이래.”
줄리는 작게 속삭였다.
자기들은 진짜 귀족영애기에 저렇게 배타적으로 구나 보다. 보아하니 이미 저들끼리는 어느 정도 알고 지내던 사이인 모양이었다.
하긴, 내가 워낙 지방 영지에 처박혀 살아서 그렇지, 왕도 근처에 사는 애들은 자기들끼리 이미 교류가 있었겠지.
“그렇구나...”
“그리고 저쪽은 조카딸들 무리. 친딸을 보내긴 싫고, 중앙에 줄은 대고 싶은 자들이래. 뭐 나도 그냥 주워들은 거지만...”
“넌 어떻게 그렇게 빠삭해?”
“난 사생아 출신이니까. 귀족 노릇 배우라며 궁에 일주일도 더 전에 들어와서 교육받았어. 너처럼 출발 직전에야 온 게 특이하지.”
“그렇구나... 그럼 우리처럼 사생아들은?”
“세력이랄 거나 있겠어? 그냥 알아서 살아남는 거지.”
“......”
젠장
“쟤네들은 제국으로 가도, 아마 집안에서 최대한 줄을 대 주어 편한 자리로 갈 걸?”
젠장, 이 세계도 결국은 뇌물과 연줄이 판치는 군... 아니 오히려 더 했으면 더 했지 덜 할 리가 없다.
“모두 조용!”
곧 공주가 들어오는지 시종이 나타나 우리들을 정렬시켰다.
“리테인 왕국 제 1왕녀, 셀리나 피엔스 반 리테인 공주저하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