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그라츠 제국 (1)
2016.12.19.
공주의 등장에 모두가 무릎을 굽히며 허리를 깊게 숙였다. 이럴 때 괜히 튀어봐야 좋을 거 없기에, 나 역시 닥치고 숙였다.
“고개를 들라. 자네들이 나와 함께할 시녀들인가?”
공주는 우리들을 주욱 둘러보며 말했다. 당연히 아무도 대답이 없었다.
나는 이틈에 공주의 얼굴을 흘끗 훔쳐보았다.
음... 나보다 안 예쁘네... 그리고 성깔이 장난 아니게 생겼는데...?
흡! 눈이 마주쳐버려, 나는 황급히 얼굴을 처박았다.
아 젠장, 첫날부터 찍힌 거 아니겠지? 자기보다 예쁜 시녀를 거슬려 하는 건, 사극의 정석이던데...
눈을 내리깔아 공주의 표정을 볼 수도, 생각을 읽을 수도 없지만, 왠지 언짢아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리테인의 명성에 흠이 생기지 않도록 모두 처신을 똑바로 하도록.”
셀리나 공주는 왕비가 낳은 유일한 딸이었다. 그런데 볼모로 끌려간다니, 말 그대로 최고의 인질이었다.
물론 명분상으로는 볼모가 아니라, 황태자의 약혼녀 후보로 방문하는 것이다. 물론 약혼이 정말 성사될지는 모르겠지만, 강화협정의 제물 치고는 꽤 괜찮은 거래였다.
볼모로 끌려가면서도 끝까지 자존심은 세우고 싶은지, 공주는 한 마디 경고를 남기고 휙 나가버렸다.
“휴...”
다들 긴장했는지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그리고는 곧바로 출발이었다.
“이제 곧 떠나야 하니, 숙소에서 모두 짐을 챙겨서 정오까지 이곳으로 다시 모이도록!”
어라, 시녀교육도 없이 바로 이동하나보네?
아, 그라츠 제국으로 가는 거니까 거기서 알아서 교육하려나? 그나저나 왕족의 수발을 드는 건 한 번도 해본 적 없는데... 잘 할 수 있으려나? 막 조금만 실수해도 호되게 야단맞고 그러면 어쩌지?
파이팅! 겁내지 마! 이건 인생역전의 기회가 될 수도 있어! 평생 수녀원에서 허드렛일이나 하며 살 수 없잖아!
***
불안과 긴장 속에 드디어 제국행 마차에 올라탔다. 그라츠 제국은 여기서 마차로 일주일도 넘게 걸리는 먼 곳이었다.
낚자! 귀족! 낚자! 황족! 아, 이건 좀 오버인가...
그라츠 제국에 또래 황족이라고는 황태자 한명이 전부라는데, 그건 셀리나 공주가 이미 찜해놨지.
다른 귀족들도 많을 텐데, 괜히 공주의 남자를 건드렸다가 찍히지는 말아야지. 공주한테 밉보였다가는 인생 끝장일 테니까 황태자는 절!대! 건드리지 말아야겠다...
뭐... 나 같은 게 얼굴이나 마주칠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만...
아무튼, 귀족 소년들아 기다려라! 겉보기엔 순수한 소녀 같지만, 이미 알 거 다 아는 이 누님이 낚아서 좋은 거 알려줄게!!
몸은 15세 꽃다운 처녀인데, 머릿속은 이미 할 거 다 해본 밝히는 아줌마가 순진한 소년들 꼬시는 것쯤이야 식은 죽 먹기지. 난 육탄공세도 주저하지 않을 테니까!
아, 이렇게 닳고 닳은 소리해서 오해할지도 모르겠는데, 내가 또 생긴 건 안 그렇다.
오죽 내가 우아하고 예쁘게 생겼으면, 그 동안 귀족 핏줄이라고 굳게 생각했겠는가? 실제로는 피 한 방울 안 섞였는데 말이지.
정말이지 진짜 이 집 딸보다 내가 얼굴은 훌륭하다니까?
풍성하게 웨이브 져 흘러내리는 리치블론드의 긴 머리카락, 오렌지색 선명한 눈동자. 귀족적인 턱선과 오똑한 콧대 등등...
난 정말 화려하면서도 우아한 미모로 유명했다. 그냥 예쁜 것도 아니고, 아주 고상하게 생겼으니 말이다.
그래... 아무도 유모의 딸이라 생각 못했을 정도로......
에잇, 왜 또 우울해지려 해!
그러니까 입만 안 열면 돼! 입을 열어서 이 머릿속의 음흉한 생각만 안 들키면 백전백승이야! 내숭 100단!
나는 그렇게 잡념에 빠진 채 일주일을 먹고 자고하며 마차에 실려갔다.
가는 동안 줄리와 꽤나 친해질 수 있었다. 우린 생각보다 쿵짝이 잘 맞았다. 덕분에 줄리 말고도 나랑 비슷한 처지들의 사생아들과도 제법 말을 텄다.
우리 같은 찌끄레기들이 무슨 힘이 있겠냐만은, 그래도 뭉치지 않는 것보다는 낫겠지 싶다. 물론 여기도 이미 무리가 생성되어 있었지만, 줄리 덕분에 난 그 안에 쉽게 들어갈 수 있었다.
***
“에구구 허리야...”
드디어 도착했다. 이 세계의 마차는 정말 사람이 탈 것이 아니었다. 화물 운송수단이면 모를까. 이 끔찍한 승차감이라니...
전생은 다른 건 몰라도 문명 하나는 끝내주게 발달했었는데... 그땐 이딴 걸 타고 다니진 않았던 것 같다.
운송수단 뿐 아니라 특히 먹거리가 좋았는데... 모르긴 몰라도 그때의 서민이 여기 귀족들보다 더 잘 먹었을 것이다.
아... 치킨...
근데 치킨이 뭐더라. 뭔데 기억도 잘 안 나는 주제에 입에서 자꾸 생각나지...?
“리엘, 뭐해 정신 차려. 얼른 줄 서”
아차차, 내렸으니 일렬로 서서 공주가 지나가길 기다려야지... 제길 신분 서럽다.
저 앞에 세워진 공주의 호화스러운 마차가 보였다. 저건 승차감도 부드럽겠지? 안에도 호화로운 소파와 쿠션이 놓여있을 테고...
젠장, 공주년. 잘 태어나서 잘 먹고 잘 살았겠지... 이역만리 타국에서 고생이나 잔뜩 해 봐라.
하지만 이건 동화가 아니라 현실이니까, 저 공주년은 결국 황태자랑 결혼하고, 나는 조연도 아닌 단역1 정도인 시녀가 되겠지?
하지만 난 절대 단역1로 끝나진 않겠어!!
***
도착하자마자 저녁 때 연회가 있었다. 물론 우리들을 위한 게 아니라 공주를 위한 것이었다.
그 사이 우리들은 잠시 쉬었다가 처소를 안내받고 각자의 할 일을 배정받았다.
“....그러니까”
“우리가...”
“뭐라고?”
“헐...”
다행히 나는 줄리와 같은 방이 되었다. 거기까지는 다 좋았는데, 그 다음 소식이 정말 충격적이었다.
“이런 게 어디 있어! 귀족 출신인 우리가 하녀라니!!”
친딸무리의 대표인 아만다가 소리 질렀다.
나름 각 귀족가에서 시녀로 뽑혀 온 우리들이, 이곳에서 왕궁 시녀가 아니라 하녀노릇을 해야 한단다...
그래, 넌 진짜 귀족 영애니 억울하겠지.
원래 왕궁의 시녀는 귀족의 딸들이 하는 명예직이었다. 왕족의 시녀, 이름부터가 ‘ladies in waiting’ 이다. 한 마디로 레이디, 왕궁 시녀들은 대부분 귀족영애나 귀부인들이었다.
시녀는 허드렛일을 하녀와는 전혀 다른 존재로, 왕족의 간단한 시중을 들며 말동무를 해주는 정도의 역할이었다.
물론 나야 진짜 귀족이 아니니까 공주의 측근까지는 기대하지도 않았다. 그래도 공주의 처소에 소속되어 차나 타고, 옷이나 입히는 그런 자질구레한 수발을 들 줄 알았다.
하아... 내 인생은 허드렛일이라고 정해져 있기라도 한 건가... 뭐, 나만 굴러 떨어진 거 아니니 그나마 덜 슬프다.
큭큭큭. 저 영애들은 기절할 노릇이겠지. 나도 수녀원에서 미리 단련되지 않았다면, 그리고 인생이 이미 바닥으로 굴러 떨어지지 않았다면 저들처럼 입에 거품 물고 있겠지.
아무튼 우리들은 셀리나 공주가 머물 별궁에 전부 하녀로 배치되었다.
그래도 그 중 핵심세력들은 공주 침실의 하녀가 되었지만, 나 같이 돈 없고 백 없는 서러운 인생들은 별궁 구석구석에 허드렛일을 배정받았다.
아... 이래서 시녀교육이 필요 없었구나. 왕족을 모실 일이 없으니 말이야.
그리고 셀리나 공주의 최측근 시녀는 제국사람으로 채워졌다. 애초에 공주는 고국에서 왕궁시녀들을 하나도 못 데리고 왔다.
하긴, 이 정도 안전장치도 없이 볼모를 데려왔겠어? 공주가 무슨 일을 꾸밀 줄 알고 측근들을 딱 붙여두겠어...
***
난 일주일간 수습기간이랍시고 온갖 잡일을 다 했다. 쭈그려 앉아 계단도 닦고, 난간도 윤이 나게 왁스칠하고, 창틀도 구석구석 닦았다.
어째 수녀원 때랑 별로 달라진 게 없는 것 같다...? 이래서 귀족 소년은 언제 낚지?
난 황제황후가 산다는 본궁에는 단 한 번도 못 가봤다. 맨날 별궁에 처박혀서 이러고 있으니 어디서 귀공자를 만나... 흐흑...
그래도 제국의 하녀노릇은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아니, 생각보다 복지가 꽤 빵빵하다!
일단 리테인 왕국과 달리 하루 종일 중노동을 하며 착취당하지 않았다. 보통 하녀들은 새벽 대여섯 시부터 밤 11~12시까지 혹사당하는 게 보통이었다.
하지만 이곳은 늦어도 저녁 7시 정도면 일이 끝났다. 노동시간은 짧은데 반대로 봉급은 높았다.
게다가 하녀 치고 식사도 꽤 잘 나오는데다가 숙소는 2인 1실이었다.
그리고 무려 휴가제도도 보장되어 있었다. 하녀장에게 빌고 빌어서 겨우 눈치껏 하루 허락받고 나가는 게 아닌, 정해진 휴가일수가 있다! 와우!!
“하아... 리엘, 허리 안 아파?”
사생아 출신이지만 어머니가 오래오래 총애 받은 덕에, 나름 호의호식하고 자란 캐럴이 물었다.
저기, 이 정도면 진짜진짜 좋은 환경이거든..? 이건 거의 전생의 그 뭐더라... 시험 봐서 뽑히는... 뭐더라 이름이 생각이 안 나네... 공노? 관무원? 아닌데? 아무튼 내가 되지 못했던 그런 거랑 비슷했다.
리테인에서는 왕궁이든 귀족가든 간에 평민 하녀들은 인간취급도 못 받는데 말이야.
“캐럴, 백일의 기적이라고 들어봤어?”
“응? 그게 뭐야?”
“그냥 뭐든지 백일만 굴러 보면 다 적응된다고...”
“......어... 위로 고마워...”
나도 태어날 때부터 나름 귀족영애였다고... 그런데 진짜 백일이면 적응 되더라. 이미 수녀원에서 굴러 봤거든.
거기에 비하면 여긴... 정말 좋은 곳이었다. 적국이지만 정말 꿀이네. 뭔가 압제의 상징이라야 할 것 같은 이 대제국이 이렇다니!
제국 출신 하녀들의 말을 들어보니, 다 황후폐하 덕분이라 했다. 어쩐지 원래 제국출신 하녀들의 표정이 다들 밝더라...
음... 이거이거 황후폐하... 환생이나 회귀, 빙의, 차원이동 뭐 이런 것 중 최소 하나 아닐까!? 오리지널 이 시대 사람 맞아?
알고 보면, 사실 모두가 환생 하는 게 아닐까? 나랑 달리 단지 기억을 못 하는 건 뿐!?
에휴, 아무튼 나도 이왕 환생할 거면 이런 나라에게 태어날 걸...
“휴우...”
아차차, 지금 이런 하녀자리에 만족하고 주저앉으면 안 되지!! 좋아. 기필코 이곳 국민이 되어야겠어! 일명 제국민 되기 프로젝트!!
설마 일개 평민? 오,노! 하녀자리가 아무리 꿀이라도 그렇게 꿈이 약하면 쓰겠어? 그걸로 만족할 내가 아니지! 그리고 하녀도 꿀인데, 위로 올라가면 얼마나 더 꿀이겠어?
낚자! 낚아!
그래, 100일의 기적! 반대로 말하면, 신분상승 후에 또 100일만 지나면 귀족사회에 완전히 녹아들 수 있다는 뜻이겠지? 음훼훼훼훼. 기다려라 귀공자들아!
그런데 귀공자들을 대체 언제 만나지...?
“에휴.....”
“리엘, 아까부터 웬 한숨이야?”
“....어디서 만나지?”
“응? 누구를?”
“아냐....”
님을 봐야 뽕을 따지!!!!!!
***
그렇게 시간은 훌쩍 흐르고, 난 한달 동안 귀공자들 코빼기도 못 봤다.
수습기간이 끝난 후 난 시트 교체와 다림질 업무를 맡았다. 다행히 세탁하는 이들은 따로 있었지만, 다림질과 교체는 내 몫이었다.
즉, 이 별궁에 있는 모든 린넨류 - 침대 시트, 냅킨, 식탁보 등등에 빳빳이 풀을 먹여 다려 놓고, 매일 교체를 해야 했다. 그리고 공주의 드레스 다림질도 내 몫이었다.
그래도 차라리 공주 근처에 잘 안 가는 하녀노릇이라 참 다행이었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공주가 그렇게 성질이 더러워서 하녀들을 매일같이 쥐 잡듯이 팬다고 한다.
제국에서 붙여준 귀족 시녀들에게 패악을 부릴 수는 없으니, 애꿎은 모국 출신 하녀들을 때리는데, 그 정도가 정말 장난이 아니라고 들었다.
와, 제대로 미친년인가 보네... 그러니 황태자가 근처에도 안 오지.
공주가 저렇게 성질을 부리는 이유는 다 황태자 때문이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첫날 연회부터 바람맞았다나...
황태자는 정략혼 따위에 관심 없다고 나타나지도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황제랑 황후는 황태자의 뜻에 맡기겠다고 방치하는 상태고... 큭큭큭 꼴좋다.
황태자는 그 후에도 별궁에 단 한 번도 오지 않았다고 들었다.
그런데 문제는 황태자가 먼저 방문하여 교류를 트기 전에는, 더 낮은 신분인 공주가 먼저 본궁에 찾아갈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공주는 하염없이 황태자가 오기만을 기다려야겠지.
그러고 보면 공주도 좀 불쌍하네? 이대로 결혼 못 하고 고국으로 돌아가면, 결혼협정 대신 다른 강화협정을 맺어야 한다. 그리고 혼담이 오가다가 파투난 공주 본인의 혼삿길은 영영 막힐 것이다.
아냐, 지금 내가 누굴 동정하는 거야. 세상에서 제일 쓸데없는 걱정이 왕족과 귀족걱정, 부자걱정이랬는데...
그리고 저 공주년 때문에 나도 피해보고 있다고!
난 요즘 귀공자낚시는커녕, 친딸무리와 조카무리들 텃세에 치여 온갖 갈굼을 당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공주에게 괴롭힘 당한 저 무리들이, 또 다시 만만한 우리에게 화풀이를 하는 그런 악순환이 반복되는 중이었다.
“에휴... 느는 게 한숨뿐이라니...”
어쨌든 난 열기와 사투하며 열심히 다림질한 드레스를 들고, 공주의 방으로 올라왔다. 공주의 무시무시한 소문을 들은 지라, 크게 심호흡을 한 후 방문을 두드렸다.
똑똑똑
관심등록.댓글.별.하트는 큰 힘이 됩니다♡
2016.12.19.
안녕하세요. 엘리's입니다!
글을 쓰기 시작한 게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벌써 하나 완결내고 차기작이라니 기분이 묘하네요^^
글을 읽어주시는 모든 분들께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댓글, 관심, 하트, 별점 모두모두 감사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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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운내서 열심히 비축분 모아 연참하도록 노력할게요^^
그럼 모두 행복하세요~~!!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