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그라츠 제국 (2)
2016.12.20.
잔뜩 긴장했는데, 공주의 침실에 딸린 곁방에서 하녀 하나가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친딸 무리중 하나이며 어쩌고 자작영애인 낸시였다.
맞다. 늘 그랬지만 공주가 직접 나올 리가 없지. 새삼 괜히 쫄았네...
“왜 이렇게 늦었어! 얼마나 닦달 당했는지 알아!?”
“미안”
“너 말이 짧다?”
“같이 하녀끼리 말도 높여야 해?”
“같은 하녀라니!! 엄연히 급이 달라!! 게다가 넌 사생아고 난 당당한 귀족 영애인데 어딜 감히!”
굳이 머릿속을 읽어보지 않아도, 나를 향한 경멸이 충분히 느껴졌다.
이러다 뺨이라도 후려칠 기세라 난 대충 고개를 숙이며 빠져나왔다.
쾅!
문이 거칠게 닫혔다.
성질하고는... 지 주인이랑 똑같네. 공주한테 뺨이나 맞아라.
휴... 오늘 할 일은 대충 마무리 했으니 이제 좀 쉬어야지.
이제 일도 좀 적응되어, 난 할 일을 마치고 여유시간도 꽤 생겼다. 오늘이야말로 정원을 산책하며 귀공자를 낚을 때야!!
***
분명 황궁 정원에서 귀공자와 운명적 만남을 하고 있어야 하는데... 나 왜 이렇게 되어버린 거지?
난 지금 공주의 방에 끌려와 강제로 꿇어앉혀져 있었다.
조금 전, 잠시 쉬고 있는 내 침실에 낸시와 다른 하녀들이 찾아와 내 머리채를 붙들고 끌고 갔다.
내가, 공주의 드레스를 찢어놨다고? 그럴 리가!! 다림질을 하다가 태웠으면 태웠지 찢을 리가 없잖아! 난 세탁실 소속도 아니라 다림질만 했는데!
짝!
“이 천한 것이 감히! 내 드레스를 망가트리고 시치미를 떼려 하다니!!”
억울했다. 너무 억울했다.
내가 다림질 할 때는 분명 옷은 멀쩡했다. 바보도 아니고 저 성질 고약한 공주의 옷을 손질하는데, 몇 번이고 확인하며 조심했다.
이건 분명 낸시의 실수일 것이다. 나한테 화나서 문이라도 쾅 닫고 몸을 휙 돌렸다가, 문자락에 끼인 드레스를 찢어먹기라고 했겠지...
“공주 저하, 정말 전 아무것도...”
내가 한 게 아닌데...!
짜악!
“닥쳐라! 그럼 내가 지금 억지라도 쓰고 잇다는 게냐!?”
저 자작 딸년이 지가 실수해놓고 나한테 뒤집어씌우고 있었다. 표정을 보아하니 분명했다.
“제가 그런 게 아니라...”
짜악
입에서 피맛이 났다. 얼굴이 얼얼하고 머리가 울릴 정도로 공주의 손은 매웠다.
난 변명하기를 그만두었다. 말하던 도중에 혀를 깨물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입만 열면 때려대는데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어떻게 물어낼 거야! 네 봉급 따위로는 평생을 갚아도 모자라!!”
나는 낸시를 원망스럽게 노려보았다. 아무리 변명해봤자 소용없을 게 뻔했다. 낸시가 이미 자기가 받았을 때부터 찢어져있었다고 하면, 공주가 누구의 말을 믿겠는가.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공주 저하.”
“어떻게 할 거냐고!!“
“......”
아 진짜 어쩌라고...
“죄송합니다. 저하, 부디 한 번만 용서 해 주세요.”
마음과 다르게 나는 비굴하게 빌었다.
“오늘 내로 새것처럼 고쳐놓고 다시 세탁해 오도록!! 조금이라도 미흡한 구석이 있으면 네년을 용서하지 않겠다!! 그 쓸모없는 손가락을 다 분질러 주겠다!”
눈앞이 깜깜해졌다. 난 바느질이라고는 전혀 할 줄을 모르는데...
“누구라도 이 계집을 돕는 년이 있으면 경을 칠 것이야! 알겠는가!”
방 안에 있던 하녀들은 모두 움찔해서 공주에게 조아렸다.
***
대답할 틈도 없이 나는 드레스와 함께 쫓겨났다.
아오 진짜 이 또라이 같은 공주....!
설마 진짜 손가락을 부러뜨리기야 하겠냐마는... 아니지, 여긴 인권 따위 없는 미친 세상이지! 나 같은 힘없는 하녀 하나 조져놓는 거야 일도 아닐 거다.
난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대로 정말 공주한테 해꼬지라도 당하면... 신분상승이고 뭐고 끝이었다.
이렇게 의료시설이 떨어지는 곳에서 천한 신분이 제대로 치료나 받을 수 있겠는가... 어쩌면 평생 손이 기형이 되어버릴 지도 모른다.
그럼 하녀일도 못 할 테고, 길거리에 쫓겨나면... 여기저기 구르며 함부로 대해지다 비참하게 죽겠지... 으악... 절대 안 돼!
뭐부터 해야 하지? 난 다급한 마음으로 드레스를 내려다보았다.
아, 일단 빨아야겠네.
공주가 성질을 내며 찻잔을 집어던졌는지 드레스에는 갈색 얼룩이 가득했다. 이대로 꿰맨다고 들쑤셨다간 온 사방에 찻물이 번질 기세였다.
아끼는 드레스라더니 개뿔... 그런 옷에 찻물을 집어 던지냐...
에휴... 지금 그런 거 따져서 무슨 소용이야. 바느질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일단 세탁부터 해야지. 아무도 도와주지 말라했으니 세탁부에 맡길 수도 없었다.
근데 빨래터가 어딘지도 모르는데... 일단 세탁부에 가서 물어봐야겠다.
세탁부의 일은 허드렛일 중에서도 꽤 힘든 축에 속했기에, 나와 비슷한 최하급 계층인 사생아들로 채워져 있었다.
그래도 저기에 안 떨어진 것만 해도 어디야... 가장 피해야 할 일들이 오물처리, 부엌잡일, 굴뚝청소, 세탁 등이었다. 그나마 세탁이 저 중에는 제일 나았지만, 어쨌든 저 곳은 지옥이었다.
“저기, 빨래터는 어디야?”
세탁실에 온 난, 이름 모를 리테인 출신 하녀 한 명을 붙잡고 물었다.
“그라첸은 운하의 도시잖아. 황궁 곳곳에 운하가 있는데 뭘 물어봐?”
하녀는 바쁜지 날 쳐다보지도 않고 대충 대답해주었다.
아... 그렇구나.
“고마워.”
마음이 급한 난 아무생각 없이 운하로 나갔다.
***
“와... 멋있다... 여기가 그 유명한 황궁대운하인가?”
별궁에만 처박혀 살아서 이곳까지 나와 보는 건 처음이었다.
아쉽지만 감상하고 있을 시간 따윈 없다. 오늘 내로 어떻게든 이걸 복구해 놔야 했으니까.
열심히 문지르고 비비고 두드리고 난 진짜 최선을 다해 빨래를 했다. 혹시라도 옷감이 상할 까봐, 내 몸보다도 조심조심 아끼면서...
그런데 그때,
“하하하하하!”
갑자기 어디선가 폭소가 들렸다.
“.....??”
뒤를 돌아보니 동화책에서 막 튀어나온 것처럼 잘생긴 남자가 배꼽을 잡고 웃고 있었다.
뭐지 이 남자...? 얼굴이 너무 잘생겨서 난 잠시 멍 했다.
와... 왕자님이 있다면 이렇게 생겼겠지...?
찰랑이는 흑청색 머리카락에... 눈동자 색은 석양 때문에 잘 알 수가 없었지만 웃는 눈매가 아주 예술이었다.
난 이 사람이 누굴까 잽싸게 가늠해 보았다. 일단 눈앞의 남자는 날 보고 머릿속으로 ‘얘 뭐지?’ 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는 넌 누군데? 잘생겼다고 꼭 왕자님은 아니지만 혹시...? 잠깐 그라츠 황족들 특징이 뭐였더라...
황태자는 감히 내 타깃이 아니었기에 인상착의를 알아 두지 않았다. 하지만 황가의 상징이 은발에 바다색 눈동자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쳇, 쳇, 왕자님, 아니 황태자이길 기대한 건 너무 꿈이 컸나... 아쉽게도 전혀 아닌 것 같았다. 무엇보다 복장이...
이 세계에서 신분을 나타내는 지표는 얼굴이 아니라 복장이었다.
일단 옷이 너무 평범했다. 시종이라도 갖춰 입는 겉옷이 있을 텐데 다 어디다 내버리고 온 건지, 안쪽에 받쳐 입는 평범한 흰 셔츠와 거칠어 보이는 검은 바지를 입고 있었다.
심지어 옷이 평범하다 못해 엉망진창으로 지저분했다. 어디서 구르다 온 건지 온통 흙투성이였다.
젠장, 쓸데없이 잘 생겨서 괜히 사람 기대하게 만들어... 땡땡이치는 시종인가?
“푸하하하! 여기서 빨래를 하는 사람은 처음 봤어!! 넌 누구야?”
“.........보면 몰라요? 하녀잖아요.”
대화가 시작되자 집중은 더더욱 파샥 깨졌다.
“아, 아 그 복장은 이번에 리테인에서 왔다는 공주일행인가?”
리테인에서 온 하녀들은 황궁 하녀들과 복색이 약간 달랐다. 정확히 말하면 옷은 다 똑같은데, 타이의 색과 모양이 달랐다.
“네. 그러는 댁은 누구에요?”
얜 뭔데 찍찍 반말이야. 지금 내가 리테인 출신이라고 같은 시중인 끼리도 발아래로 보는 거야?
그러면서도 난 다시 집중해서 이남자의 생각을 읽어보았다.
-딱 보면 모르나? 아, 리테인에서 와서 그런가?
그래 너 딱 봐도 시종 같다!
어휴 내 팔자. 하긴 같은 리테인 하녀들 사이에서도 아랫것 취급받으니, 제국출신 시종 눈에야 오죽하겠어... 그것도 빨래나 하고 있으니 딱 봐도 신분 낮아 보이겠지...
“응? 난 뭐 아무것도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마. 그냥 지나가다가 신기해서 와 봤어.”
“뭐가 그렇게 신기한데요?”
“그야 여긴 빨래하는 곳이 아니니까.”
“네? 왜요?”
“풉, 정말 몰라서 물어? 황궁대운하는 산책로지 빨래터가 아냐. 황족들 혹은 입궁을 허가받은 일부 귀족들이 아니면, 시중인들은 함부로 돌아다닐 수도 없어. 그런데 빨래라니...”
“헉...!”
완전히 실수였다. 궁궐을 데이트코스 정도 취급하던 전생의 기억 때문에 조금도 의아함을 못 느끼고 이런 짓을 해 버렸다.
응? 그런데 내가 그런 기억이 있었나? 잊고 있었지만 머릿속 어딘가에 남아있었나 보다.
아까 그 세탁부의 하녀가 날 엿 먹인 거야! 비슷한 처지라 그런 짓을 할 줄은 생각도 못했는데... 친딸무리에 줄을 선 애였나 보다.
뿌드득
내 이빨 가는 소리가 밖에서도 들렸는지, 시종은 한 번 더 폭소했다.
“속았나 보구나? 아무튼 들키기 전에 얼른 돌아가는 게 좋을 거야.”
그 말에 나는 주섬주섬 옷을 챙겨들고 일어났다. 막 돌아가려는데 문득 드는 생각이 있었다.
잠깐, 함부로 출입할 수 없다했는데... 그럼 이 사람은 뭐지? 혹시...!?
“알려줘서 고마워요. 그런데 그쪽이야말로 여기 있어서는 안 되는 거 아니에요? 시중인들은 함부로 돌아다닐 수 없다면서요.”
나는 최대한 태연한 표정으로 이 자의 정체를 캐물으려 했다.
으앗, 기대기대! 어떤 대답이 나올까? 만약 조금이라도 당황하는 기색이 보이면...